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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취미 생활/한문서예

世與靑山何者是 春光無處不開花 (제홍주 천장암 : 題洪州天藏庵)

by 까마귀마을 2023. 3. 18.

 

世與靑山何者是(세여청산하자시)  세속과 청산 어느 것이 옳은가
春光無處不開花(춘광무처불개화)  봄볕들지 않는 곳에도 꽃피지 않는 곳 없구나(봄빛에 피지 아니한 꽃이 어디 있으랴)
傍人若問惺牛事(방인약문성우사)  만약 누가 성우(惺牛)의 일 묻는다면
石女心中劫外歌(석여심중겁외가)  석녀(石女)의 마음속에 영원한 노래라 하리라.
                         ------ 경허선사----
 
* 자료에 따라서는 위 선시에서 ‘春光’ 이 ‘春城’ 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음.
 

註.

傍人(방인) : 당사가 아닌 사람

惺牛(성우) : 경허스님 본인 (선사의 법명(法名)으로 호(號)인 ‘鏡虛’ 와 함께 붙여 ‘鏡虛惺牛(경허성우)’ 라 칭하기도 했다)

石女(석녀) : 속세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기(不器)의 여자’ 를 말하지만 선가(禪家)에서는 ‘도를 깨쳤으나 그 도를 말로 전할 수 없으니 벙어리 계집, 말 못하는 돌계집’ 이라 부른 것이다.
劫外(겹외) : 깨달음.
 

 제홍주 천장암(題洪州天藏庵)이란 제목으로 경허집에 실려있는  이 詩는 경허스님이 동학사에서 오도한뒤 천장암(天藏庵)에서 소위 보임(保任)공부를 마친뒤 읊은 것으로 자신의 경지를 가장 간약(簡約)하게 표현하고 있다.

 

세상과 청산이, 속세와 절집이 무엇이 다른가?
부처와 중생이, 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가, 
聖과 俗이 무엇이 옳고 그른가?
처처가 법당이요, 부처님은 처처에 계시지 않은곳이 없건만....
정토와 예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이, 우리 인생이 고달프다 하지만  청산(靑山)즉 聖도 俗의 세상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마음 먹기에 따라 우리가 사는 세상, 고달픈 중생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바로 극락정토이다.
다만 세상은 일반인의 삶이며 俗의 공간이고, 청산은 세속의 삶과는 거리를 둔 은둔의 공간이며 聖의 공간으로 생각할 뿐이다.
봄볕 있는곳 어디에나 꽃이 피지않는 곳이 없는데....
봄볕은 꽃과 풀, 처처를 가리지 않고 세상 어디에나 골고루 햇볕을 제공해 주건만  다만 분별심이 부족한 인간들만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며 왈가왈부 시시비비를 따질 뿐이다.
 

최인호 이야기

나는 정말 스님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 도반이던 무법스님 에게서 승복을 빌려 입고 밤 깊도록 압구정동의 번화가를 걸어 보기도 했다. 밀짚 모자를 쓰고 먹물 입힌 승복을 입고 나는 탐욕과 쾌락이 번쩍이고 있는 환락의 거리를 걷기도 했다. 아무도 내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법정스님이 어떤 수필에 썼던가. 처음으로 출가를 결심하고 효봉스님으로 부터 허락을 받은 뒤 승복을 입고 거리로 처음 나설 때 가슴속에서부터 환희심이 솟구쳐 올랐다던가.
승복을 입고 걷는 내 마음에도 알 수 없는 이상한 환희심이 흘러넘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출가를 하기 위해 아내를 떠나 가정을 버리고 아이들과 헤어질 그런 용기는 없었다. 우리의 인생이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지만 사내의 몸을 받은 대장부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중노릇 한번은 해 볼만하다는 절실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니는 차마 머리를 삭발하고 내 있던 자리를 벌떡 일어나 박차고 가출할 용기는 없었다. 내 그런 마음에 한가닥 희망을 준 것은 어느 날 무법스님이 큰 선물을 가져온 뒤부터였다. 무법스님이 수백 년 묵은 소나무 등걸을 구해다가 그 위에 수덕사의 방장 스님인 원담스님의 선필을 새겨온 것이었다.
해인당(海印堂)
나는 오래 전 부터 그 깊은 뜻은 잘 모르지만 해인삼매란 불교 용어를 좋아하고 있었다. 직역하면 바다 위에 뜻을 새긴다는 해인이라는 말의 의미가 너무 좋아서 언젠가 무심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새로 짓는 집의 이름을 해인당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말을 귀 기울여 들은 무법스님이 나무 등걸에 해인당 이라는 옥호를 새겨 직접 우리 집까지 날라다 주었다. 나는 이 현판을 우리집 이층 바깥벽에 내어 걸어 두고 있다.
이 현판뿐만 아니라 무법스님은 내게 액자까지 하나 선물해 주었다. 역시 원담스님이 써 준 글씨인데 경허스님의 선시 가운데 한구절을 인용하여 써 준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여청산하자시(世與靑山何者是) 춘광무처불개화 (春光無處不開花)"
이 구절은 경허스님이 확철대오 하였던 천장암에서 읊은 노래인데 그 노래를 본 순간 내 마음은 불을 지핀 듯 밝아졌다.
"세상과 청산은 어느 것이 옳은가. 봄볕이 있는 곳에 꽃피지 않는 곳이 없구나."
경허스님의 이 선시를 본 순간 내가 비록 머리를 깎고 청산으로 갈 수는 없지만 이 세상 모든 것에 청정한 도량(道場)임을깨달았다.
내가 찾아갈 곳이 청산이냐? 세상이냐? 어느 것이 옳을까? 하며 시비를 거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비록 내가 세속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봄볕을 비추는 곳을 찾아가고 있다면 그 곳이 어디든 꽃이 필 것이 아니겠는가 내 몸이 비록 청산을 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마음껏 봄볕을 향한다면 그 곳에는 반드시 꽃이 피어날 것이 아니겠는가.
아직도 눈올 감으면 내 마음엔 그때 그 무렵 내가 순례하였던 그 청산들과 그 산속에 숨어 있던 사찰들과 암자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르고 있다.
요즘도 눈을 뜨면 나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고 싶다. 

조그만 암자 속으로 들어가 온전한 내 모습과 싸우며 죽기를 각오하고 생사를 초탈하고 윤회에서 벗어나고 싶다. 티뱃의 고승이었던 밀라레빠가 노래했던 것처럼 모든 욕망버리고 눈 덮인 히말라야의 설산으로 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수도하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그런 은수자(隱修子)가 되고 싶다. 

世與靑山何者是  春光無處不開花

이 말이 좋다. 나의 좌우명이다.

속세다 청산이다, 친구냐 적이냐, 여당이냐 야당이냐, 네가 옳나 내가 옳나

우리는 시비를 따지고 들지만 봄볕만 있다면 어디든 어김없이 꽃이 피는 것.

내 마음속에서 분별심을 버리고 봄볕을 찾아야 한다는 거다.

근데 병을 걸린 뒤 암이 내게는 봄볕이라는 것을 알았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나는 지금까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본 적이 없다.

병원은 재수없고 불운한 사람들이나 가는,

나하고는 상관없는 격리된 특별한 장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어영부영하다가 들쑥날쑥하다가 허겁지겁 죽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암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고 최인호(작가)

 
 

경허선사(鏡虛禪師) (1849∼1912)
원효스님이 신라불교의 새벽을 열었다면 경허스님은 서산대사 이래로 근대불교에 서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대선사(大禪師)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의 기진맥진 쓰러졌던 조선불교의 끝자락에서 다시 화톳불을 켜신 분입니다. '제2의 원효', '길 위의 큰 스님'이라고도 부릅니다.

스님의 성은 송씨. 속명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鏡虛). 전주출신. 아버지는 두옥(斗玉)이다.

어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였다. 계허(桂虛)스님의 밑에서 물긷고 나무하는 일로 5년을 보냈습니다. 14세때 절에 머문 거사로부터 문맹을 거두었고, 그 뒤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강백(萬化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유학과 노장 등 제자백가를 모두 섭렵하였다. 그리고, 23세에 동학사에서 강백이 되어 전국에서 스님의 강론을 듣고자 학승들이 구름처럼 모였들었습니다.

1879년에 옛스승인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향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가까운 인가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마을에 돌림병이 유행하여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 큰 나무 밑에 낮아 밤새도록 죽음이 위협에 시달리다가 이제까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였음을 깨닫고 새로운 발심(發心)을 하였습니다. 이튿날,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조실방(祖室房)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시작하였습니다. 창문 밑으로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을 뚫어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판자를 놓아 졸음이 오면 송곳에 다치게 장치하여 잠을 자지않고 정진하였습니다.


석달째 되던 날, 제자 원규(元奎)가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이처사(李處士)로부터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라는 말을 듣고 의심이 생겨 그 뜻을 물어왔습니다. 그 말을 듣자 모든 의심이 풀리면서 오도(悟道)하였다. 

경허스님 오도송

忽聞人語無鼻孔 (홀문인어무비공) 홀연히 사람의 말이 들리니 콧구멍이 없다 하네
頓覺三千是我家 (돈각삼천시아가) 몰록 깨치니 삼천세계가 이(모두) 나의 집이라
六月燕巖山下路 (유월연암산하로) 유월달 바위제비는 산아래 길에 나르고
野人無事太平歌 (야인무사태평가) 들 사람 일이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그뒤 서산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깨달은 뒤에 수행인 보임(保任)을 하였습니다.

그때에도 얼굴에 탈을 만들어 쓰고, 송곳을 턱 밑에 받쳐놓고 오후수행(悟後修行)의 좌선을 계속하였습니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공부(保任工夫)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습니다.

그 당시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파계승이요 괴이하게 여겨질 정도의 일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였고, 여인을 희롱한 뒤 몰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는 등 윤리의 틀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행적들을 남겼습니다.

'원효의 파계, 진묵의 곡차'이래 최대의 파격적 만행으로 숱한 무애행(無碍行)으로 범부들을 교화한 이적(異積)에 대해 훝날 그의 제자 한암스님은 뭍스님들에게 '화상의 법화(法化)는 배우데, 화상의 행리(行履)는 배우는 것은 불가하리니...'라고 경책하였습니다. 이러한 한암스님의 경책은 경허스님의 이행(異行)처럼 서투르게 깨달아 무애행(無碍行)이라는 탈을 쓴 이행(異行)을 하지말라는 것입니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선(禪)의 생활화·일상화를 모색하였습니다. 산중에서 은거하는 독각선(獨覺禪)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선의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스님은 법상(法床)에서 행한 설법뿐만 아니라 대화나 문답을 통해서도 언제나 선을 선양하였고, 문자의 표현이나 특이한 행동까지도 선으로 겨냥된 방편이요, 작용이었습니다. 그의 이와같은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선풍은 새로이 일어났고, 그의 문하에 한암, 만공, 수월, 혜월 등 수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었고, 전국적으로 새로운 선원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오늘날 불교계의 선승(禪僧)들 중 대부분은 그의 문풍(門風)을 계승하는 문손(門 孫)이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는 근대불교사에서 큰 공헌을 남긴 중흥조입니다. 승려들이 선을 사기(私記)의 형식으로 기술하거나 구두로만 일러 오던 시대에 선을 생활화하고 실천화한 선의 혁명가였으며, 불조(佛祖)의 경지를 현실에서 보여준 선의 대성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근대 선의 물결이 그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진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의 마조(馬祖)로 평가됩니다.

만년에 천장암에서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으며, 박난주(朴蘭州) 라고 개명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 일 새벽에 '마음달 외로이 둥그니 빛이 만상을 삼켰구나.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은 무엇인가.'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셨습니다. 세속나이 64세, 법랍 56세였습니다.

경허스님 임종계

心月孤圓(심월고원) 마음의 달 홀로 둥굴어

光呑萬像(광탄만상) 그 빛 만가지 형상을 삼켰구나

光境俱亡(광경구망) 빛과 경계 다 잊었거늘

復是何物(부시하물) 다시 이 무슨 물건인고?

저서에는 제자들이 역은 <경허집>과 <선문촬요>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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