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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취미 생활/한문서예

秋夜雨中(추야우중) 가을밤 비는 내리고

by 까마귀마을 2023. 1. 3.

 

秋夜雨中(추야우중)  가을밤 비는 내리고

 

추풍유고음(秋風唯苦吟) 가을 밤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니

세로소지음(世路少知音) 세상에는 알아 주는이 없네

창외삼경우(窓外三更雨) 창 밖에는 밤 깊도록 비가 내리는데

등전만리심(燈前萬里心) 등불 앞의 내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 崔致遠 ---

秋風 : 가을바람.

苦吟 : 괴로이 시를 지음.

少    : 적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없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

知音 : 소리를 알아 듣는다. 자기를 알아주는 친구를 가르키는 말. 중국의 백아는 거문고를 잘탓지만 그 소리를 알아주는 이는 친구 종자기 밖에 없었다. 나중에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는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

萬里心 : 심리적으로 멀리 떨어짐, 세상으로 부터 단절된 마음.

 

신라 말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오언절구로 된 한시이다. 비가 오는 가을밤에 자신을 알아 줄 지기(知己)가 없는 외로움을 노래한 詩이다.

「추야우중」은 「제가야산(題伽倻山)」·「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와 더불어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최치원의 시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라 하였고, 허균(許筠) 역시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가장 빼어난 시라고 하였다. 최치원의 120여 편에 달하는 시 가운데 秋夜雨中이 심상의 전개나 구조적인 긴밀성이 가장 완벽한 작품으로 꼽히며 세간에 널리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다. 

시상은, 

제1구  秋風唯苦吟에 집약되어 있고, 그 고독의 궁극적 원인소(原因素)는 제2구의 少知音 즉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다이다. (제2구의 세로'(世路)가 동문선에는 '거세'(擧世)로 씌어 있다.)  

제3구의  三更雨는 곧 시인의 고독한 눈물이요,

제4구의  萬里心은 세상과 어그러져 이리저리 떠돌고 있는 시인의 방황하는 심사이다.

특히 제3 · 4구는 외곽과 내곽, 시간과 공간, 청각과 시각이 절묘한 대비를 이루며 시인의 걷잡을 수 없는 고독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는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향수를 달래며 지은 것으로 보기도 하나, 귀국 후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여 제 뜻을 펼치지 못하는 괴로운 심경을 토로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중국에서 마음껏 문재를 떨치고 귀국한 최치원이  헌강왕이 죽은 뒤에는 태산군(太山君)·태수 등 외직으로 전전하고, 진성왕에게 당시 국정을 바로잡을 개혁안을 담은 시무책을 올렸으나 실행을 보지 못하고 결국 은거에 들어갔던 사정을 감안할 때 제 역량과 포부를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당대 현실과의 부조화가 시인으로 하여금 이 시를 짓게 만든 동기가 되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며 빈공과에 급제하고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지만 외국인이기 때문에 재능을 발휘하는데는 한계가 있었고 소외감, 고독감을 피할수 없었다. 이 때 심정을 잘 표현한 작품이 촉규화, 추야우중이다.

85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는 동안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 재주는 더욱 빛을 발하였으며  29세 나이로 신라에 귀국하여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 부시랑 지서서감사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기울어가는 신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문집인 개원필경을 임금에게 올리는등 내정개혁을 촉구하는 글을짓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신분은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 되는데 머물었고 그의 제안대로 개혁을 펼치려 하였으나 당시 중앙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한계가, 고국에 돌아와서는 6두품 이라는 신분의  한계와 당시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에 부딪혀 많은 비난과 냉대를 받을뿐 자신의 뜻을 실현 시킬수는 없었다. 

이후 최치원은 은둔을 결심하고 경주의 남산∙ 강주∙ 합천의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동래의 해운대 등에 발자취를 남기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머물며 열정적으로 저술활동에 몰두하며 제가야산 독서당이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남긴 마지막 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따르면 908년까지 생존했던 듯 하다.그 뒤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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