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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취미 생활/한문서예

春望(춘망) (봄을 바라보다)

by 까마귀마을 2022. 12. 17.

 

 

春望(춘망)  (봄을 바라보다)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나라는 파괴 되었어도 산과 내는 그대로 있고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성에 봄이 찾아오니 풀과 나무가 무성하다

感時花濺淚 (감시화천루)  시국을 탓할건가 꽃을 보아도 눈물이 흐르고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도  마음이 놀라네

 

烽火蓮三月 (봉화연삼월)  봉화불은 석 달 동안 이어지고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집에서 오는 편지 만금에 해당되네

白頭搔更短 (백두소경단)  흰머리 긁으면 다시 짧아지니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비녀를 꽂지도 못할듯 하네

                          ---- 두보(杜甫)---              

 

라가 망하고 도성은 파괴 되었어도 산과 강은 옛모습 그대로고
성 안에는 봄이 왔지만 황폐해진 거리에는 풀과 나무만 무성하다.(1-2행 전란으로 인한 폐허)
시절을 애상히 여기니 꽃까지 눈물을 흘리게 하고
(처자와)이별하였음을 슬퍼하니 새조차 마음을 놀라게 한다.(3-4행 전란으로 인한 상심)
전쟁이 석 달을 이어지니
집의 소식은 만금보다 값지도다.(5-6행 가족에 대한 그리움)
흰머리를 긁으니 또 짧아져서
다해도 비녀를 이기지 못할 것 같구나. (7-8행 쇠약한 육신에 대한 탄식)

 

"나라는 부셔졌어도 산하는 여전하고 성 안에 봄이 오니 초목이 무성하다."

당(唐)대 시성(詩聖)으로 불린 두보(杜甫 712~770)의 '춘망'(春望)이라는 시의 첫 귀절이다. 고등학교 한문 교과서에 실릴 만큼 유명한 작품으로 안록산의 난으로 수도 장안이 함락되자 억류돼 있으면서 어지러운 나라와 흩어진 가족을 걱정하며 지은 시다. 우국(憂國)의 심정이 잘 나타나서인지 자주 인용된다. 

두보(杜甫)는 당나라 현종(玄宗, 재위 712~756) 원년인 712년에 호북성(湖北省) 서북부의 양양(襄陽)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少陵)으로 애국시인으로 불리었으며, 대표적 시로는북정(北征). 병차행(兵車行)등이 있고 저서로는 두공부집(杜工部集)이 있다.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34년(755) 11월 황제 주변의 간신배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청군측(淸君側) 왕의 주변을 깨끗이 함)으로 안록산이 난을 일으켰다 안록산은 동북방(東北方)의 절도사(節度使)로서 18만(十八萬)이 넘는 병력으로 낙양을 점령하고 대연황제(大燕皇帝)를 칭하며 이듬해 7월 수도 장안을 공격했다

현종은 제위를 태자 이형(李亨)에게 양위하고 장안을 버리고 촉(蜀, 사천)으로 피신했다. 이형이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이이가 바로 숙종(肅宗)이다.

 

두보는 당시 43세의 늦은 나이로 주조참군(胄曹參軍)이란 미관말직에 올라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을 꾸려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난을 피해 장안에서 탈주하여 여기저기 피난을 다니던 중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숙종을 배알하기 위해 가다가 반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벼슬이 높지 않았고 남달리 겉늙어 보이는 외모 때문에 허약한 노인으로 여겨져 별 고충을 겪지 않고 장안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머물 수가 있었다.

두보는 장안에 머물면서 전란으로 쑥밭이 되어 버린 황량한 장안 거리 풍경을 직접 목격했다. 한때 아시아 각국은 물론 멀리 페르시아, 사라센 등지에서 온 외교 사절과 상인들로 북적대던 화려하고 웅장했던 수도 장안이 폐허로 변해 버린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며 읊은 시가 바로 "춘망"이다.

 

두보가 지은 ‘국파산하재’란 어구는 인간사회와 권력의 무상함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고 있다. 국가와 왕조의 흥망성쇠는 끝없이 지속되지만 산천은 그대로 변함이 없고, 나라와 사람은 가고 오지만 자연은 언제나 그대로 존속한다는 인생무상의 이 말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널리 쓰여지고 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말(高麗末) 성리학자(性理學者)였던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는 고려의 멸망을 슬퍼하며 지은 시조다.
세월이 가고 변해버린 세상을 한탄한 ‘천년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지 천년도 수유(須臾: 매우 짧은 시간))로다’라는 글이나, 나라를 빼앗긴 감희를 읊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구, 그리고 멸망한 왕조의 사라진 후손들을 애도한 ‘봄풀은 매년 푸르게 자라는데 왕손은 한 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구나[春草年年綠 王孫歸不歸, 춘초연년록 왕손귀불귀]’ 같은 한시 등도 모두 이러한 정황과 심경을 담고 있다. 세상에 영원 한것은 없다. 권력도, 인생도 언제가는 끝이 있으나 우리가 나고 살은 山河는 겨울이 가고 봄은 어김없이 오며 대대로 이어지리라....

두보는 이 시를 짓고 조금 있다가 장안을 탈출하여 섬서성(陝西省) 위하(渭河) 유역의 봉상(鳳翔)지방에 가 있는 숙종의 행궁(行宮)으로 찾아갔다. 이 때, 그렇게 원하던 벼슬길에 처음 오르니 좌습유(左拾遺)라는 간관(諫官)의 자리였다. 그리고 59세였던 770년에 내양(來陽)이라는 곳에서 술에 취하여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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