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우리 전통은 죽은 이에게 삼베를 안 입혔어 완전히 예법에 어긋나 왜냐면 거친 삼베는 흉복(凶服)에 쓰였기 때문에 죄인에게 입히는 옷이야, 그래서 죄인이나 고인의 가족들이 삼베옷을 입었어 부모를 여윈 죄인 이라는 의미로.
하지만 죽은이에게 삼베옷을 입히지 않았어 예법대로라면 돌아가신 분을 죄인 취급 하는것이나 마찬가지 이니까,
삼베옷은 아주 가난한 이들이 어쩔수 없이 입히는게 아닌 이상 절대 사용하지 않았어.
전통수의는 습의(襲衣)와 염의(殮衣)로 나뉘어,
습의는 망자의 평상복이야, 보통 세상을 떠날때 입은 옷을 그대로 사용했어, 염의는 습의 위를 덮거나 감싸는 여러벌의 옷인데 상류층은 고급스럽고 호화로워 고인이 가지고 있든 가장 귀한 옷, 결혼할때 입은 옷, 임금이 하사한 옷, 귀인에게 받은 옷, 관복등 망자가 생전에 가지고 있던 가장 귀한 옷을 염의로 삼았어.
그래서 무덤을 발굴조사 할때 옛날 복식이 출토되면 요즘 수의인 삼베옷이 아니라 망자가 입던 일상복이나 고급 복식이 출토돼, 이렇게 전통이랑 한참 동떨어진 삼베수의를 사용하게 된건 일제 강점기야 삼베수의 말고도 완장, 국화장식,
영정사진, 리본, 근조화환, 이런것도 전부 일제의 잔재야.
1934년 조선 총독부는 의례준칙을 발표했어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고 잘 성공했어.
이때 장례 예법도 바꿔 버리고 수의도 가장 싼 포목인 삼베와 무명만 쓰게 만들었어.
원래 팔에 완장을 차지도, 가슴에 리본을 달지도,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로 장식하지도, 영정사진을 사용하지도, 근조화환을 세우지도 않았어.
장례 날짜도 예법과 전혀 다르게 지정 되었고 장례방식도 상복도 일제 입맛대로 제정했어, 전통 상여 행렬을 억제하기 위해 자동차 사용을 허가했고, 상여소리를 하지않고, 엄숙히 치르도록 했어,
상 제례 의식을 약화시켜 효를 중시하는 전통이나 공동체 의식이 생기는 걸 막으려 했어.
원래는 꽃은 상여에 종이꽃을 단게 전부고 영좌 뒤에는 그림이나 글씨없이 흰 종이나 천을 바른 병풍인 소병(素屛)을 세웠어, 유족을 위로하고, 슬픔을 역으로 표현하고, 산역에 필요한 인력을 모으기 위해 일부러 장례를 시끌벅적하게 치렀어.
종이꽃으로 장식한 상여를 이끌고, 상여소리를 내며, 행렬이 이어졌고, 밤을 새우며 선소리, 달구질소리, 상여래, 빈상여놀이, 등 다양한 놀이판을 벌렸어.
망자를 조상신으로 승화 시키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다같이 이겨 낸다는 의미나 의식도 있었는데 그걸 다 없애고 그저 시신을 처리하는 절차만 남겼어 그것도 우리 예법에 어긋나는 형태로, 가족묘를 없애고 공동묘지를 만든것도 이 시기야.
그래서 옛날 상여보면 되게 화려해 이건 지금도 시골에 그나마 근근이 남아있어.
일제는 전통문화를 아예 무시해가며 장례문화와 용어 예법까지 자기들 입맛대로 바꿨고 그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어,
옛날 농촌에서 상이나면 마을사람들이 서로 협동하지 않으면 장례를 치를수 없었기에 생겨난 전통 장례절차를 오늘날도 지켜야 됨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삼베수의만은 평소입던 깨끗한 옷이나 우리의 한복으로 수의로 하여야 해, 국화장식도 다른 꽃으로 장식하는것을 생각해 봐야해, 우리의 마지막 가는길을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꽃인 국화장식으로 한다는건 우리나라의 국권을 뺏고 우리문화를 말살한 일제의 잔재를 계속 이어나가는 거니까.
그래서 이런 일제의 잔재를 아는 어른신들은 절대 자기수의를 삼베로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새로 고운 한복을 맞추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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