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원의 유래와 슬픈 역사 ◈
이태원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효종(1619~1659)때 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원래 이태원은 서울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원(院)이 였어요
서쪽의 弘濟院 (홍제원 : 조선시대 국영여관으로 주로 중국으로 오고가는 사신들을 위해 설치됨). 동쪽의 普濟院(보제원 : 조선시대 무의탁 병자나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주던 구휼기관)). 남쪽의 李泰院 (이태원)과 仁德院(인덕원 : 지방에 파견할 관리들이 머물은 국영숙소)은 서울 부근의 중요한 첫번째 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태원이란 지명 이름은 조선시대때 이곳에 있었던 이태원(梨泰院)이란 역원(驛院)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원(院)이란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을 말하며 흔히 역(驛)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역의 등급, 형태, 위치, 기능 등에 따라서 다양한 역의 분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공통적인 개념은 지친 말을 바꿔 탄다는 것이지요
역은 조선시대에는 비슷한 역할을 했던 원(院)과 합쳐 역원(驛院)이라고 불렀고 중국에서 역을 주로 부르는 표현인 참(站)과 합쳐 역참(驛站)이라 부르고 일본에서도 역참이라고 불렀으며 현재의 도카이도 본선, 도카이도 신간센 이름의 유래가 된 도카이도 53역참이 유명합니다.
옛날 이태원의 터는 지금의 용산고 정문 앞에 있었으며 배나무가 많아서 이태원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태원(梨泰院)이란 이름은 은 배 이(梨)자와 클 태(泰)자를 써서 이태원(梨泰院)이라 이라 부르게 된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태원의 이름은 한자만 3번이나 바뀌었다고 합니다.
조선 초에는 '오얏나무 李'를 써서 '李泰院' . 임진왜란 이후에 '異胎院' . 효종 이후에는 '梨泰院'으로 글자와 의미가 변합니다.
이태원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슬픈 이 땅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조선의 슬픈 역사하면 역시나 조선 선조(宣祖)와 인조(仁祖)를 빼놓을수 없습니다.
선조(宣祖)때 일어난 임진왜란은 조선의 전 국토와 조선의 수많은 민초들이 왜놈에게 굴욕적으로 유린당한 치욕의 역사입니다. 선조는 한양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파천 하였고 고니시 유키나카(소서행장)와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부대는 경쟁적으로 진격하여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남대문으로 유키나카 부대는 동대문으로 입성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들이 처음 통과한 문이라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조선총독부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조선고적 1.2호로 지정했어요 결국 이 문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되었지요 아무 의미가 없는 서대문(돈의문)은 헐어 버렸고요.
한양에 들어 온 '가등청정'은 이태원에 주둔 했습니다.
주둔중에 '가등청정의 부대'는 여자들을 겁탈하기 시작했는데 대분분의 여자들은 피난을 가버린 상황이라 그 대상은 피난을 가지 못한 여자와 이태원 황학골에 있는 '운정사'의 비구니들이 주 대상이었어요
천주교 신자이자 반전론자인 상인 출신의 소서행장과 불교 신자이자 주전론자인 장수 출신의 가등청정은 일본에서부터 라이벌이었는데 오히려 불교신자인 가등청정은 여승들을 겁탈하고 운정사까지 불질러 버렸지요 (경주 불국사를 불질러 버린 장본인도 가등청정 입니다)
문제는 이 비구니들과 여인들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게 되는데 절이 불에 타버린 상태에서 비구니들의 아이들과 왜놈에게 겁탈당한 부녀자들이 애를 낳고 기를 보육원을 지어 정착케 하였는데 당시 왜병들의 피가 많이 섞인 곳이라하여 이태원(異胎圓)이라 불렀어요
‘이타인(異他人)’이 어원인 이태원(異胎圓)은 다를 이(異), 태반 태(胎)자를 써서 이태원(異胎圓)이라 부른 것은 다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는 뜻이지요 그후,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여자와 왜란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선조는 이에 이들과 그 자식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나 귀화한 일본인들을 한 곳에 몰아서 일종의 '이방인 공동체 지역'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이태원 입니다 (출처 : 임하필기(林下筆記). 동국여지비고)
그런데 여기에 청나라에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하며 항복을 한 인조(仁祖)까지 가세하게 되는데 병자호란때 끌려갔던 여인과 그 자식들까지 상당수가 결국은 이곳으로 흘러오지요 일종의 환향녀(還鄕女)와 그 자식들이지요
이후,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지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곳을 배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이름의 이태원(梨泰院)이라 고쳐 부르게 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에 이곳이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이곳에 머문 이후 이태원은 군사지역으로서 본격적인 정체성을 나타내기 시작하지요
이때부터 이태원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는데 조선시대부터 용산 일대는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어요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부대는 1882∼1884년 이태원에 주둔했고 이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1910∼1945년까지 주둔하기 시작했어요 이때부터 근대식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에 주둔했는데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태원 상권은 사실상 미군이 주도했어요,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겨났으며 1960년대 말까지 미군 대상 매춘업소가 남산3호 터널 입구부터 이태원 입구까지 해방촌과 삼각지 파출소 뒷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됐어요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거듭나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고 한편으로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 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과 아파트는 물론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합니다.
그러자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이 이태원 지역에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쇼핑지구가 형성돼 88올림픽 당시 이태원 상가 점포는 1800개에 이를 정도로 쇼핑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올림픽때는 하루 평균 6000명의 외국인이 약 3억달러를 썼다고 하지요 그러던 것이 2000년도에 들어 지금의 이태원은 하얏트 호텔에서 용산구청까지 긴 내리막길을 거치는데 풍경이 다채롭지요 한국 최고 부잣집이 즐비하게 나타나기도 하고 내려갈수록 집이 작아지다가 원룸 서민 동네로 변합니다.
부자와 자취생, 백인과 흑인, 기독교인과 이슬람인이 같은 공간에서 살게 되었으며 산책하는 반려견조차 천태만상 각양각색이라 합니다.
이태원은 일제가 남산에 도로를 내고 일본인 거주지를 만들면서 주택가가 됐어요, 지금 하얏트에서 회나무로로 이어지는 부촌 지역이지요 개발되지 않은 산기슭엔 해방 후 서민들이 몰려들었어요 경리단길 일대가 그곳이지요
용산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조성된 외국인 유흥가가 이태원로 번화가의 시작이지요 이런 다양한 역사성이 이태원의 다양성을 만들었어요 유래가 밝건 어둡건 다양성은 한국의 어떤 동네도 흉내 낼수 없는 이태원만이 가질수 있는 강점이 되었습니다.
이태원은 젊은 자영업 도전자가 가장 좋아하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나이지리아 토속음식점까지 잘만 만들면 손님이 모이는데 이태원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있기 때문이며 국적 불명의 창작 요리도 여기선 통한다고 합니다.
30㎝가 넘는 빅사이즈 신발, 댄스복 등 별별 가게가 다 있어요 게이바를 해도 이태원 이라야 성공할 수 있지요 이렇다 보니 다양한 사람이 전국에서 몰려 들어요 번화가의 입지 조건이 없는 경리단길이 일약 명소가 된 것도 이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태원엔 사람을 끌어 당기는 자력이 있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태원은 언제나 슬픈 역사가 상존해 왔어요 이태원의 시련은 한두번이 아닙니다. 1980년대 이태원은 오늘날 강남과 비슷했어요 서울에서 가장 잘나가던 디스코텍, 한국에 피자 시대를 연 피자헛 1호점이 이태원에서 시작 됐었고요 그러나 이 전성기는 ‘에이즈 파동’으로 순식간에 끝났어요 외국인 기피증이 번진 것이지요 그리고 코로나가 처음 강타한 유흥가도 이곳이니까요. 코로나 초기시 이태원 클럽에서 확진자가 대량 발생하면서 전염병 확산의 주범으로 몰렸으며 3년만에 코로나 역병이 물러가고 새로운 일상을 되찾은 이태원은 한껏 부풀어 있었지만 그러나 또 한번의 시련이 닥쳤습니다.
핼로원 데이를 맞아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156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압사하는 비극적인 참사가 일어났어요. 누구의 잘못을 떠나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지금의 이태원은 인적드문 황량한 거리에 분위기가 무겁다고 합니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주무대로 유명한 언덕길도 썰렁 하다 하네요 대부분 주점이 문을 닫았으며 뜯겨나간 핼러윈 장식물들 만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어 당시의 아픔을 말해 주고 있다합니다. 언젠가 다시 예전의 활기찬 모습을 찾겠지만 이태원은 정말 기구한 운명의 거리인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사는 거대한 도시에 예기치 못한 사고나 위험은 어느곳이고 어느때고 있는 법, 그러나 일어날수 있는 사고나 위험을 지혜를 모아 안전한 도시를 만들어 가는것 또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며 우리의 할일인가 봅니다.
희생당한 분들의 삼가 명복을 빌며 부상자도 하루빨리 완쾌되기를 빕니다. ( 글 : 춘향골에서 옮겨와 일부수정)
'잡다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몰랐던 일제잔재 (2) | 2022.12.03 |
---|---|
빈곤 포르노 (0) | 2022.11.15 |
전원주택 살이 8개월차가 본 전원주택의 아쉬운 점 (0) | 2022.10.24 |
일상에서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용어 이지만 그 뜻이 다른 용어 (0) | 2022.08.24 |
청와대 (지하벙커) - 국가위기관리센터 (0) | 2022.08.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