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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送人(송인: 정지상)

by 까마귀마을 2022. 9. 17.
                      送人(송인)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 (별루년년첨록파)

                    -- 鄭知常 --

 

                님을 보내고

비 개인 강 긴 언덕에는 풀빛이 푸른데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그 어느 때라야  다 마를 것인가,

해마다 푸른 물결에 이별의 눈물 더하고 있으니.

                      ---  정지상---

 

   註

* 送人(송인) : 사람을 떠나 보냄

* 雨歇(우헐) : 비가 그치다

* 長堤(장제) : 긴 언덕, 둑

* 草色多(초색다) : 풀빛이 짙다. 풀빛이 선명함’의 뜻으로 여기서 ‘多’는 ‘짙다, 푸르다, 선명하다’로 풀이됨

* 送君(송군) : 친구를 보냄

* 南浦(남포) : 대동강 하구의 진남포. 이별의 장소

* 動悲歌(동비가) : 슬픈 이별의 노래가 울리다

* 何時盡(하시진) : 어느 때 다하리(마르리)

* 別淚(별루) : 이별의 눈물

* 添綠波(첨록파) : 푸른 물결에 보태다

인간의 영원한 테제 중 하나인 사랑과 이별에 대한 문제는, 예전부터 詩를 통해 잘 표현되어왔습니다. 우리 선조들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한글보다 한자로 쓰여진 까닭에 한글세대인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별’을 노래한 우리나라의 무수한 한시 가운데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는 작품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詩는 오래전 우리 세대 때는 물론, 지금도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돼 있어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작품이라 할 것입니다.

 

고금 이래로, 우리나라 1.000년 동안 한시 역사상 ‘이별시’ 중에서 이 보다 나은 작품이 없다는 천하절창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별의 노래입니다. 이  詩는, 대동강 가에서 임과 이별하는 슬픔을 노래한 한시로 된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작품이며. 계절은 아마 5월쯤으로 여겨집니다. 고려 인종(재위:1122~1146) 때인 1130년 전후에 서경(평양) 출신 정지상이 쓴 것으로, 고려의 이인로(1152-1220) 조선의 서포 김만중 (1637~1692) 등 저명한 문인들이 앞다투어 찬사를 보내고 서평을 붙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詩는 송별의 슬픔을, 비 온후 더 푸르른 풀빛이라는 서정적인 문장과 이별의 눈물로 더 깊어지는 강물이라는 절묘한 시상으로 조화시켜 짧은 7언절구에 압축하였고  해마다 강물을 바라보면서 이별의 슬픔을 노래할 사람이 있어서 강물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뛰어난 시어로 마감하여 몇 번을 읽어도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이 詩는 한시를 짓는 소객(騷客) 가운데 평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정지상이 지은 이 詩는 대동강의 부벽루(浮碧樓) 정자에 걸려 있는데, 이 부벽루에는 고려, 조선 시대의 숱한 시인 묵객들이 여기에 올라 대동강의 아름다움에 취해 詩를 읊고 시를 지어 정자에 걸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는 반드시 평양에 들렸고, 평양에서 꼭 찾는  명소가 부벽루 였는데 거기에 걸려있는 정지상이 지은 이 시를 보면서 모두들 신품(神品)이라 극찬하였다고  전하며  부착된 다른 詩를 다 떼어내고 이 詩만을 남겨두었다고 할 만큼  선조들이 이 시에 자부심을 가졌던 작품으로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유명한 시입니다.

정지상의 詩 "送人"은 봄날 남포에서 이별을 노래한 7언 절구의 시로 유명하지만, 같은 제목의 가을을 배경으로 한 5언 율시 또 다른 詩 "送人"(송인)도 있어 옮겨 봅니다.

 

 送人 (송인)  
庭前一葉落 (정전 일엽낙)   뜰 앞에는 낙엽 하나 떨어지고

床下百蟲悲 (상하 백충비)   평상 아래 온갖 벌레 슬피 우는데

忽忽不可止 (홀홀 부가지)   그대는 홀홀히 머물지 않고

悠悠何所之 (유유 하소지)   유유히 어디로 가셨는지요.

片心山盡處 (편심 산진처)   한 조각 마음은 산자락을 좇고

孤夢月明時 (고몽 월명시)   달 밝은 밤이면 외로운 꿈을 꾸지요

南浦春波綠 (남포 춘파록)   남포에 봄 물결 푸르러지면

君休負後期 (군휴 부후기)   임이여 다시 온다는 약속 저버리지 마오.

 

마지막 두 구절을 보면  두 편의 시가 연작이라는 것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봄에 남포에서 임과 이별할 때 내년 봄에는 돌아오겠다는 약속이 있었지만 가을이 되자  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떠난 임이 약속한 대로 내년 봄 남포의 물결이 푸르르 지면 돌아오기를 간절히 담고 있다.

 

 

정지상의 생애

정지상(?∼1135)은 서경 출신으로 초명은 지원(之元)이고 호는 남호(南湖)이다. 고려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문장가로, 그의 작품들은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 받지만, 현재 전하는 그의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다.

정지상은 『고려사』에 열전이 실리지 않아, 그의 생애 전반에 관한 사항은 제대로 알기 어렵다. 다만 인종 (仁宗)이 그의 어머니에게 물건을 내려주자, 이에 감사함을 담은 「사사물모씨표(謝賜物母氏表)」를 통해 몇 가지 사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으며, 친척들이 모두 흩어질 정도로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던 듯하다.

어려서 공부는 ‘학상(學祥)’에서 했다. 학상은 국자감을 말하는 것으로 짐작되지만, 당시가 일반 사학이 한창 번성하던 때였으므로, 사학으로 볼 여지도 있다. 이규보(李奎報)의 『백운소설(白雲小說))』에는 산사(山寺)에서 공부를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학상과 산사에서 공부를 한 정지상은 1112년(예종 7)에 처음 이름인 정지원으로 과거에 합격했다. 그것도 장원급제였다. 당시 과거시험을 관장했던 이는 오연총 (吳延寵)과 임언(林彦)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과거시험 관장했던 이들을 좌주, 합격한 사람들은 문생이라고 하여, 이들은 부모와 자식, 혹은 스승과 제자처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예종(睿宗)대에 과거를 통해 관직생활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정지상이 본격적인 활동을 보인 시기는 인종대였다. 예종대에는 지방에서 관리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존재가 보이는 것은 인종 5년인 1127년 이었다. 그는 그 때 좌정언으로 척준경(拓俊京)을 탄핵하는 데에 앞장섰던 것이다.

척준경은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한 공을 믿고 함부로 처신하였는데, 인종은 그런 그를 꺼려하였다. 이를 안 정지상이 탄핵에 나서 암타도(嵒墮島)로 유배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같은 해 5월에는 금나라가 송나라에게 패배하여, 송나라의 군사가 금나라의 국경에 깊숙이 들어갔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정지상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송과 연합을 맺어 금 공격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 보고는 오류인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정지상의 대외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지상은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 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와 관련해서 1134년(인종 11)에 직문하성 이중(李仲)과 시어사 문공유(文公裕) 등이 “묘청과 백수한은 모두 요망스러운 사람으로 그 말이 괴상하고 허탄하여 믿을 수 없는데도 근신인 김안 (金安)·정지상·이중부(李仲孚)와 내시 유개(庾開)가 그의 심복이 되어 누차 서로 천거하여 그를 가리켜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또 대신도 따라서 같이 믿기에 주상께서 의심치 않으시지만, 올바르고 정직한 인사들은 모두 원수같이 미워하니, 원컨대, 속히 멀리 배척하소서.” 라고 한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정지상이 묘청과 백수한을 따랐다는 걸 잘 보여준다.

1134년(인종 12) 12월에 정지상은 묘청과 함께 우정언 황주첨(黃周瞻)을 통해, 인종에게 제(帝)를 칭할 것과 연호 제정을 청하기도 했다. 이는 묘청이 서경에서 난을 일으키면서 칭제건원을 요청한 것과 그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묘청과의 밀접한 관계는 그가 죽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도 그러한 미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1135년(인종13)에 묘청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일에 연루되어 살해되고 만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기록을 보면

김부식(金富軾)이 여러 재상과 상의하기를, ‘서경의 반역에 정지상· 김안· 백수한등이 가담하고 있으니, 이 사람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서경을 평정시킬 수 없다’

하니, 여러 재상들이 그렇게 여기고, 정지상 등 3명을 불러 그들이 이르자 은밀히 김정순에게 말하여 무사로 하여금 3명을 끌어내어 궁문 밖에서 목을 벤 뒤에 비로소 위에 아뢰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부식은 평소 정지상과 같이 문인으로서 명성이 비슷하였는데, 문자 관계로 불평이 쌓여, 이에 이르러 정지상이 내응한다고 핑계로 죽인 것이다’ 하였다.

정지상이 서경(평양)출신이고, 서경을 평정키 위해서는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이유로 정지상을 살해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임금의 허가를 받지 않은 김부식의 단독 결정이었다.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인 실제 이유가 그가 반역에 참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자 관계로 인한 불만이었다고 전해 지기도 하는데 이는 김부식이 정지상의 시 짓는 재주를 부러워 했다고 한다.       (정지상의 생애 : 솔밭에송담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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