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연이 있는 한시

慶州贈泰天上人(경주증태천상인)

by 까마귀마을 2022. 9. 13.

慶州贈泰天上人(경주증태천상인)

我如流水無歸去  ( 아여유수무귀거 )              
爾似浮雲任往還  ( 이사부운임왕환 )
旅館相逢春欲暮  ( 여관상봉춘욕모 )
刺桐花落滿庭班  ( 자동화락만정반 )

                 -南九萬(남구만)-


 경주에서 태천 상인에게 보냄

이내 몸 물 같아서 가면 다시 못 오는데
그대는 뜬 구름인양 마음대로 오락가락
봄 저무는 무렵 여관에서 서로 만나니 
엄나무 지는 꽃잎 뜰에 가득 아롱지네...

(주)
上人(상인) : 지혜와 덕이 높은 중.
爾(이) ; 너, 그대.
刺桐 (자동) : 엄나무
班 (반) : 펴다.

이 내 몸은 흘러가는 물이라 가면 다시는 못 오지만 그대는 뜬구름이라 오고 싶으면 언제든 다시 올수 있다는 이 구절이 좋아서 항시 마음에 담아두고 음미하곤 합니다. 어느듯 인생길은 저물어 가는  황혼, 흘러가는 물처럼 다시 돌아갈수 없는 우리의 인생 우리의 젊음, 덧없이 지나간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기에 잘 어울리는 말인것 같습니다.이백도 장진주라는 시 에서 황하의 물이 바다로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올수 없다고 한탄 했듯이 이내몸 흘러가는 물이니 다시는 돌아 오지 못하리니....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 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위 시조는 위의 한시를 지은 남구만이 지었다 한다
약천(藥泉) 남구만이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의 풍류를 즐기며 쓴 작품이다. 주제는 농가의 부지런한 생활로 밝아오는 아침과 하늘 높이 날며 지저귀는 종달새를 통해보이는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다. 농촌의 아침 정경을 여유있게 표현해 운치와 멋을 살린 대표적인 권농가(勸農歌) 중의 하나로서,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가르침과 부지런히 일하는 건강한 모습이 작품 전반에 잘 나타나 있다.
이와 다른 해석으로는 '동창'을 동쪽에 뜨는 해, 즉 숙종 임금을 말하는 것으로 보고, '노고 지리'는 당시 조정대신, '우지진다'는 마치 새들이 짹짹거리며 야단스럽게 우는 듯한 중신들의 모습, '소'는 백성, '아이'는 목민관, '아니 일었느냐'는 난세에 복지부동하고 있는 관료들의 자세, '언제 갈려 하나니'는 경세치국(經世治國)에 대한 염려와 경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동해시 망상동의 약천사에 남구만의 시비가 있다. 강릉 유배 길에 동해시 약천동에 들렸는데 물맛과 경치가 좋아 호를 약천으로 정하고 여기에 집을 짓고 살다가 1년 만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南九萬(남구만)
1629(인조 7)~1711(숙종 37).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미재(美齋).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이었으며, 문장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남구만이란 이름은 "장자(莊者)"의 첫번째 문구에서 따 왔다고 전해진다 즉, 대붕일비남구만리 (大鵬一飛南九萬里)... 큰 새는 한번 날면 남쪽으로 구만리를 날아간다)
개국공신 재(在)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지방 현령이었던 일성(一星)이다. 
1656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정언· 이조정랑 ·집의· 응교· 사인· 승지· 대사간· 이조참의· 대사성 등을 거쳐서 1668년 안변부사·전라도관찰사를, 1674년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숙종 초에 대사성· 형조판서를 거쳐 1679년(숙종 5)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같은 해 남인인 윤휴 ·허견 등을 탄핵하다가 남해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 부제학· 대사간 등을 지냈다. 병조판서가 되어 무창(茂昌)과 자성(慈城) 2군을 설치했으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자 소론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684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169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01년 희빈장씨를 가볍게 처벌하자고 주장했으나 숙종이 희빈장씨를 사사(賜死)하기로 결정하자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 갔다. 그뒤 유배· 파직 등 파란을 겪다가 다시 등용되었으나 1707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저서로 〈약천집〉·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註)가 전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