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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신약성경의 형성과정

by 까마귀마을 2022. 9. 17.

 

우리가 현재 읽고 있는 신약성경은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 졌을까.
과연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으며 한자의 왜곡도 삭제도 추가삽입도 없고 내용은 일점 일획의 오류가 없을까?
신약성경 27권중 제일 먼저 쓰인 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서신으로 알고있다, 기록시기는 주후 50년쯤 이었다. 그러니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거의 20여년이 지난 시기다. 이후 66년 디모데서 까지 13 편(13편의 서신 기록 연대는 아래에 따로 첨부)의 서신을 본인이 전도하고 세운 교회에 보내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13편중 7편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은 실제 바울의 저술로 보고 나머지 6편은 바울이 직접 기록한 서신이 아니고 바울 사후(死後)에 누군가에 의해 이름이 도용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현재 잔존하는 서신의 기록물들은 모두가 진품은 아니고 모사본이다. 신약의 바울서신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거의가 내용이 무척길다, 고증에 의하면 고대의 서신은 대부분 매우 짧았으며 바울의 서신역시 짧은 글이었지만 훗날 여러 편지가 합쳐지고 또 많은 구절들이 추가 삽입되면서 복음서 처럼 길어진 이유이다 (고린도 후서는 최소 6편의 서신이 합쳐졌고 고린도 전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카 전서, 빌레몬서등은 여기 열거 하기엔 너무 많은 구절들이 변개와 삽입이 있었다고 논의되고 있다 ) 당시 바울이 서신을 보낼때 이 기록물이 본인이 세운 교회의 정경이 되리라고 전혀 생각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약 성경을 보면 마태복음이 맨 앞장에 배치되어 있어 대부분의 신도들은 마태 복음이 가장 먼저 쓰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신약성경의 합본순서는 쓰여진 연대순이 아니고 구약이 배치된 구성을 따라 합본 되었다. 바울 서신은 서신내용이 긴것 부터 짧은 순으로 합본 되었다. 복음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른바 4대 복음서의 집필 년도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주후 70년 이후에 마가복음, 80년- 85년경에 마태복음, 90년 이후에 누가복음이 쓰여졌고 요한복음은 마가복음이 나오고 30여년이 지나 주후 100여년 이후부터 200년 사이에 쓰여졌다는게 성경학자들의 정설이다.
요한복음서를 제외한 마가, 마태,누가, 3복음서를 공관(共觀)복음서라 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비슷한 단어와, 비슷한 사건 배열 순서 및 비슷한 주석(註釋)을 공유 하고 있다. 따라서 세 문서를 함께 엮어서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공관복음"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공관 즉 함께 읽는다는 뜻이며 먼저 쓰인 마가 복음을 토대로하여 마태복음, 누가복음이 집필 되었다. 허나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예수의 부활사건이 마가복음에 추가 삽입되기도 하였다. 초기 시대에는 저자가 없는 익명의 저작물이었고 복음서라고 불리워 지지도 않았는데 이는 4복음서 모두가 각자의 저자를 내세우는 별도의 공동체들이 작성한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초기 각 공동체는 예수에 대한 해석이나 의미를 공동체별로 서로 달리했고 그들 공동체에서 집필한 종교서도 교회가 성장하면서 교회의 변화와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서로 다르게 집필되었으며 대체적으로 유대인 공동체는 마태복음을, 마르시온 주의자들은 누가복음을, 영지주의자들은 요한복음을 성서로 받아드렸다. 이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복음서중 4복음서가 성서로 채택 된것이다.
(4복음서에 수록된 예수님 어록은 예수님의 어록만 따로 모아놓은 또 다른 복음서나 문서가 있어 이를 토대로 기록되었다는 일부 신학자의 가설이 있었는데 최근 발굴된 도마복음서라고 성경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도마복음서는 4복음서 보다 먼저 쓰였진것으로 추정되며 순수하게 예수의 어록이 제자와 문답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어록들이 놀랍게도 도마복음서에 다 들어 있으나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부활, 승천, 재림의 기록은 물론 동정녀 출생등은 없는 것으로 알고있다.)

왜 복음서가 먼저 기록 되지 않았을까.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종교이다. 당연히 예수의 생애나 행적및 가르침이 제자에 의해 먼저 기록됨이 마땅하다.
허나 기독교의 정경이된 신약성서의 기록은 예수의 제자가 아닌, 예수를 한번도 본적도 없는, 예수의 가르침을 한번도 받은적이 없는 전혀 엉뚱한 바울에 의해 먼저 기록되었다.
왜 일까?
복음서를 보면 그때 예수님이 살았던 1세기 전후에는 유대지역에 메시아 도래와 종말론이 만연 했음을 쉽게 알수있다.
바벨론 유수이후 유대인 사회는 이방사상인 조로아스트교의 교리인 이신론(선과악)이 일부 유대인 사회에 퍼저 나가면서 종말론, 심판, 메시아 도래를 추종하는 종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예수탄생 이전인 BC 2세기 무렵부터 유대교의 한종파인 에세네(히브리어로 거룩이란 뜻이며 신약성경에 바리세파, 사두개파는 언급이 있지만 에세네파에  대한 기록은  없다)파는 에루살렘 성전제의를 거부하고 광야에서 금욕과 공동생활을 하며 메시아 도래를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삶을 이어 갔음을 볼때 메시아 도래와 종말론은 예수탄생과는 상관이 없었으며 이미 오래전 부터 일부 유대인들의 신앙이었고 생활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에세네파는 그들의 창시자를 이스라엘의 구세주, 정의의 교사, 이사야의 고뇌에 찬 종,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으며 인간의 죄를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마지막날 부활하여 세상을 심판하고 세상을 구원한다고 믿었다. ) bc 4세기 경에는 그리스 알렉산드의 동방원정으로 이 지역 팔레스타인도 급격한 헬라화를 겪게되며 유대인의 전통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바벨론유슈이후 유대에 유입된 조르아스트교의 이신론과 헬라화는 기독교 탄생의 토양이되고 씨앗이되어 그 속에서 메시아 도래 즉 예수의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다.

가장 먼저 쓰였다는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사역 첫마디도 " 때가 찼고 천국이 가까와으니 내말을 믿고 회개하라" 그러나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이 먼저 한말이다.

당시 유대 지역은 극심한 혼란기 였고 혼돈스러웠다.
왕정의 가혹한 세금및 성전의 종교세 착취로 인한 민중의 고통속에  bc 63년에는 로마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대는 로마의 속국인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66년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일어난 작은 종교분쟁은 결국 유대 독립전쟁으로 확대되고 결말은 그들 정신적 보루인 예루살렘 성전이 예수의 예언대로 돌하나 남지 않고 파괴되고 허물어지는 좌절과 슬픔을 겪어야 했다.이후 마사다 요새에서 최후 까지 로마군에 저항하다 천여명이 집단 자결한  열심당원들의 극단적인 항쟁,  2. 3차 유대전쟁등 135년 까지 이어진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한 무장항쟁및 종교분쟁은 때론 전면적인 전쟁으로 크고작은 분쟁으로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자유케하고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하여줄 강력한 정치적 메시아의 출현을 고대했고 자칭 메시아라는 사람도 여럿있었고 그를 따르고 무장 투쟁에 함께한 수만, 수십만명의 유대인이 살해되고 쫒겨나고 노예로 잡혀가고, 십자가 형을 받아 거리에서 죽임을 당한 처절한 시대였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주후 30년 경에도 예수가 사역을 한 갈릴리 뿐만 아니라 유대 전지역은 물론 예루살렘 까지도 무장항쟁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으로 사실상 끝이난 1차 유대독립전쟁 까지 수십년 동안 유대지역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극심한 혼란기를 겪었고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 시기는 예수님은 물론 제자들이 사역을 하며 생애를 보낸 시기이기도 하다. 허나 복음서나 행전에는 이런 시대적 배경의 기록은 전혀없고 대체로 평화스러움을 느낄수있다.
복음서와 행전의 저자들이 참혹하고 혼란스러운 당시 사회적 배경을 몰라라하고 전혀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왜 인지는 알수없으나 오로지 예수의 사역이 전인류의 구속에 있어 서술이 필요 없었다고 하기는 설득력이 없다 복음서의 기록자체가 유대인이 그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 추측으로는 당시 지배국인 로마정부와  기독교가 이방화 되면서 로마인이 대거 유입 되자 의도적으로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려는 이유가 아닌가 여겨진다)
당시 절망적이고 급박하며 혼돈한 시기에 민중들에게 메시아 신앙이 퍼지고 메시아의 기다림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 이라 생각되며 종말이 가까왔다는 예수의 가르침도 오래전 부터 형성되어 이어져온 메시아 신앙의 한 부분이지 않았나 여겨진다. 유대 전지역이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으로 수만명이 죽임을 당하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절망적인 혼란시기라 필연적으로 종말론이 더 부각될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복음서및 행전을 보면 말세가 가까왔고 천국 즉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예언하며 물세례로 죄를 회개한 세례 요한 ( 요한은 예수와 달리 기록이 남아있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당시 유대인에게 구원이란 모세가 정한 600여 가지의 율법인데 요단강에 머리만 담구면 구원이 있다는 요한의 물세례는 수백년간 조상 대대로 이어온 율법제도를 송두리채 무너뜨리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수 많은 유대 민중들이 요한의 물세례를 받았다, (유대인에게 구원이란 지금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죽어서 천당가는 구원이 아니다,  유대인은 내세를 믿지 않았다.)당시 지배국인 로마와 유대왕국 그리고 성전에서 부과한 세금의 합이 무려 70%에 이르렀다고 한다, 남은 30%중 다음해 파종에 쓸 20%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그 들의 소득은 남은 10%였다고 하니 그 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피폐하였는가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의 물세례는 기존제도의 불신, 기득권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의 표출 이었을 것이다. 요한의 세례를 받은 예수역시 기존 제도및 기득권에  저항한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종교및 정치적 사상을 지녔으며 그 당시 지배적이었던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가치를 전복하며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였다.예수 사역의 중심이었던 천국운동 역시 에세네 파처럼 묵시적 종말론에 근거한 종말론적 사상이 사역의 중심이었고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 구축과 염원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지만 범인류적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에 국한된 운동이었다.)을  비롯하여 유세하는 현자나 방랑교사가 에수님 이외에도 많았음을 알수있다. 그들이 전하는 천국, 천국이 가까왔다는 메세지는 당시 현세에 분노하며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는 많은 유대 민중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도 그 들중 한사람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정말 계시된 신의 아들이고 신이었을까?
여자의 자궁에서 열달을 채우고 태어났으며 우리처럼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생업으로 즉 먹고 살기위해 목수라는 직업도 있었으며 희노애락을 표출하며 30여년간 우리와 동일한 삶을 산 인간 예수가 어쩌다 신이 되었을까? 그가 신이 된건 그가 죽고 나서 부터다.(사도행전 2장 36절)
그가 죽고난후 대체 어떤 표적과 징후가 있었기에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그가 다시 재림할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났을까?
정말 복음서의 기록돼로 육신적으로 살아나 산채로 승천했을까? 아니면 죽음직전에 구조 되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어떤 환영을 봤을까?
나는 한때 열심의 신자로 또 기독교를 알기위해 수없이 반복하여 성경전체를 읽었고 기독교와 관련된 수도없는 많은 서적을 탐독했다. 그러나 읽을때마다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의문이 가는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비범한 예언자이며 신의 아들이기를 기대했지만 예수는 반대파들에게 무능하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절망하며 흩어지는게 당연하지만 공동체를 이루며 재림을 기다렸다, 특히 예수가 죽은 몇년후 유대교의 산 헤드린에서는 예수의 추종자들을 검거하여 죽이는 가혹한 탄압이 있었는데도 공동체는 유지되고 더 확산 되었다는 사실은 참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물론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육신적 부활과 승천을 믿으면 너무나 간단한 일이지만.....

‘예수’는 원래 이름이 아닌 직함이나 칭호를 가리키는 말로 ‘야웨가 구원하신다’에서 유래한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졌다.
그래서 당시 거의 모든 유태인 저항단체들은 자신들의 우두머리에게 다른 어떤 칭호보다 이 별명를 붙였다고 한다.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이며 이를 축약하여 '예슈아'라 불렀다, 역사에 기록된 예수는 수도없이 많으며 예수와 같은시대를 살며 기록이 남아있는 예수도 8-9명이 (자세한 내용은 저의 블로그 "예수시대 역사에 기록된 예수들" 참조) 있으며 그외에도 예수라는 이름의 유대인 랍비도 수십명이 있었다 한다.

예수님도 곧 말세가 올것이라고 외쳤음은 성경을 읽어 보면 알수있다.
예수님은 한세대가 끝나기전 종말이 온다고 말하였으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예수의 제자들은 거의가 글을 몰랐으니 기록하고 싶어도 기록 할수도 없었다(기독교의  시작은 행위의 종교이지 경전 종교가 아니었다) 예수님이 죽자 제자와 추종자들은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며 종말 즉 예수재림에 대비 하였음은 성경에 기록 되어있다.

서신이 쓰여진 배경은 이방지역에 세워진 바울의 교회는 시작부터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주 갈등요인은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문화에 살아온 헬라파 유대인과의 불화합, 그리고 이방인의 구원 방법과 교리의 해석이나 교인들의 음행. 분당등에 관한 것이나 특히 구약의 율법중에서 이방인도 할례는 하여야 하는지 음식은 어디까지 가려 먹어야 하는지 등으로 교인들 간 다툼이 많았음을 사도행전을 보면 알수있다.( 바울과 베드로간에도 논쟁이 됨)
바울이 교회를 세워 놓고 다른 지역으로 전도를 떠나고 난후 기존 교회에서 서로 당을 지어 나는 누구파니 갈라지고 교리나 율법, 구원의 순서등으로 논쟁과 다툼이 일어나자 이를 바로잡는 방법으로 서신을 보내었다.
서신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유전이나 율법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닌 바울이었지만 기존 유대교의 율법이나 예루살렘 사도들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독창적인 종교적 사상, 십자가에 의한 대속과 부활을 담았고 특히 유대인의 행위와 율법에 의한 구원론과는 전혀 다른 오로지 믿음에 의한 구원론과 (초기 교회에서는 바울의 행위와 율법이 무시된 구원론은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초기 사도들의 공동체는 유대교와 다름없이 율법과 행위가 중시 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구원이 선한 행위에 있다면 믿음으로의 구원론은  조로아아스터교의 교리였다. 유대의 율법을 이어온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이단의 우두머리로 전락하게 되는데 이는 바울 사후 1세기 후반부터 바울 신학에 의한 믿음이 기독교 중심 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에 널리 퍼져 있고 전해 내려오는 종교적인 관습에 관한것이나 묵시적인 유전및 도덕, 종말적 당시 시대상황등을 기록 하였다. 교주인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적, 전기의 업급이 전혀 없이 바울자신이 확립한 신학적인 요소와 교인이 지켜야할, 가져야할 생활이나 믿음의 규범과 자신이 세운 교회의 관리에 초점을 맞춘것이 서신의 주 내용이다, 종교의 뿌리가 되는 교주의 가르침이란 기본 강령이 없이 믿음이나 신앙의 생활규범이 먼저 있다는것은 순서가 뒤바낀 것이 아닐까.? 바울은 예수를 잘 알지 못한것일까? 아니면 예수의 가르침과 삶적 실존을 고의적으로 외면한 것일까? 바울에게 예수는 어떤 의미 였을까?

서신의 내용을 보면 율법, 구원에 관한것이나 교리등이 복음서와 상충한 곳이 많고 특히 예수님이 설파한 산상수훈등 주옥같은 가르침이나 어록에 철저히 침묵하고 있으며 예수님이 행한 이적과 행적등이 전혀 인용하거나 기록되지 않음은 예수의 가르침, 예수님의 행적등 예수 실체에 대해 아는게 전혀 없어서 였던지  육의 예수는 간곳이 없고 영의 예수만 그려지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당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가치를 부정한 예수의 사상, 갈릴리 지평에서 살아 역사한 예수 즉 동정녀 에게서 태어나고, 소경을 눈뜨게 하고, 나병을 치유하고, 죽은자를 살리고, 빵 몇조각으로 5천명을 먹이고, 수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한 예수는 사라져 버리고 바울 자신의 신학적 사상인 십자가의 대속과 신화와 다름이 없는 부활한 예수 즉 영의 예수만 철저히 담고있다. 당시 예수가 살았던 1세기 전후는 미신이 횡행(橫行)하고 귀신을 쫒아내고 병을 고치는 풍토는 사회전반에 널려 있었다고 하는데 왜 바울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기적과 이적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바울은 예수가 가르쳤다는 기독교계의 세계적인 기도문 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다.
바울과 예수는 동시대에 살았고 예수의 탄생시 유아 살해와 기존질서에 반한 혁신적인 예수의 가르침 그리고 유월절(逾越節) 예수가 행한 성전 부정(否定) 사건은 당시 유대사회의 근간을 뒤 흔든 매우 충격적이고 중대한 사건이었는데 이를 바울이 몰랐다면 예수의 역사적 실체에 여러가지 억측을 자아내는 요인이 될수있다. 만일 알았다면 바울은 사역 처음부터 제자들의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예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독창적인 종교를 세워가려고 한게 아닌가 생각된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파들을 박해하고 핍박하던 바울은 예수의 계시를 받고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의 추종자가 된다, 예수를 전도하고 예수사역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우선 예수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으며 그의 가르침은 무엇인지 알아야 되고 알려고 하는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이다, 허나 바울은 예수를 알기 위해서 예수의 제자들, 예수 공동체를 찾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않고 바로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가 3년간 은둔하며 수행을 했다, (이 무렵 사막에서 공동생활을하는 에세나파와 교류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함) 헬라 문화권에서 태어나서 자라 헬라신화에 익숙한 바울에게는 스승으로서의 예수, 역사속의 예수나 육신의 예수보다는 죽었다 부활한 신화적이고 영적인 예수가 받아 드리기가 쉬웠고 그가 세워야할 교회에 그가 주창할 신학에 필요 했던것 같다. 
바울과 달리 예수님과 제자들은 새로운 교회의 세움 보다는 부패하고 타락한 유대교의 혁신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사역했음을 성경곳곳에서 볼수있다. 이는 복음서 집필 2 - 30년 전에 이미 바울의 서신에 의한 율법이 아닌 믿음의 구원론과 부활에 근거한 바울의 신학이 형성 되어 있었고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에 대한 구원사역이 이미 시작 되었으며 소 아시아 터키등 곳곳에 다수의 교회를 세우고 교세가 확장되고 교회에는 이방인이 넘쳐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첫 복음서 집필자인 마가(마가 공동체)는 바울 신학의 바탕인 예수의 부활마저 확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으며 이후 기록된 마태 누가 공동체의 복음서도 기독교가 유대주의를 벗어나 보편적인 교회의 출발점이 된 이방인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는 바울의 신학및 바울이 주장하는 구원의 대상 교리등이 초기교회 유대인 공동체와는 여러모양으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당시 성전이 파괴되어 좌절하고 절망과 실의에 빠진 유대인에게 희망이 된 복음서 집필을 이방인이나 다른민족 즉 전인류의 구원에 의미를 두는 기독교의 교리가 타당한 것인지, 오로지 유대인을 위해 기록된 마가, 마태, 누가 복음서 속의 예수를 믿고 유대인이 아닌 이방 민족이 구원을 받는 다는게 과연 맞는 것인지? 참으로 궁금한 일이다. 바울은 첫 복음서인 마가의 복음이 나오기전 죽었다 바울의 이방인 전도는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한 마가, 마태, 누가 복음서와는 여러방면에서 상충된다. 이방인 구원사역은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잘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이 왜곡 되었다 하여도(아니면 복음서가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한것인지 알수 없지만) 만일 위대한 사상가이며 실천가인 바울이 없었다면 예수의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초라하게 남아 있거나 아니면 지금의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종교가 되었을 거란 내 생각이다.
(여기서 성경을 처음 읽을때 든 의문 하나는 예수가 말하는 아버지. 한글성경의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신을 가르키는가? 구약의 야훼인가? 아니면 보편적 신인 하늘, 하느님인가? 예수는 야훼의 독생자 인가? 아니면 보편적 신인 하느님의 아들인가? 만일 신약의 하나님이 구약의 야훼라면 이방인인 우리가 야훼의 은총으로 구원에 이른다고???...참으로 난해하다)

그럼 복음서는 왜 서신이 쓰이고 수십년이 지나고 나서 기록 하였을까?
곧 종말이 온다고 믿고있던 교회는 수십년이 지나도 예수재림 즉 종말이 도래하지 아니하자 급박한 종말론적 기대가 점점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교회의 유지와 영속을 바라는 추종자들에 의해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한 간단한 서신및 기록물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 하였다.이는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 둘 사망함으로 예수님의 행적이나 교훈이 사라진다는 것과 사도도 제자도 아님에도 사도를 자처한 바울의 서신이 수집되고 교회에서 낭독되며 권위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자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말씀도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을 것이라 여겨지며 그들 삶의 근원이자 존재이유인 예루살렘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힘없이 무너져도 어떤응징도 징벌도 내리지않는 야훼에 절망하고 낙담하는 이스라엘인 들에게 내가 믿는 예수가 땅에서가 아닌 하늘나라의 영화와 권세를 지닌 우리의 구세주라는 희망과 용기를 주려 함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복음서를 썼다고 여겨지는 마가는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마태.누가, 요한도 예수님의 직계제자는 아니라는게 정설이다.초기에는 네 복음서 모두 익명 이었으며 마가, 마태, 누가, 요한, 복음서란 이름을 얻기까지는 100여년의 세월이 지나고 난 이후이며 복음이라는 단어는 신학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것이 아니었고 기독교인이 만들어낸 용어도 아니다, 오래전 부터 세간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던 용어다.
직계제자가 아닌 복음서 집필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충실히 전 할수 있었을까.
그리고 당시 복음서등은 지금처럼 교회에서 권위를 갖인 경이라기 보다 그 시대의 낭독하는 즉 읽어주는 문학 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지금의 소설, 즉 예수의 전기(傳記)문학이며   공연용 대본 같은 것으로 이해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고 지금 처럼 정경화된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세간에 회자된 일종의 유행서 같은 것이라 여겨진다. 이는 세간에 복음서가 처음 나왔을때는 복음서의 내용이 역사적인 사실이냐, 실제 일어난 사건이냐, 진실로 주고받은 어록이냐 라는 여부를 가리는 논쟁이 있지도 않았고 가려야 하는 의미도 없었다는 뜻이다.

인간의 감성이나 예술성하고는 전혀 무관한 이런 종교서가 시중에서 유행서가 되었다는 것은 종교가 우선시 되어있는 이지역 사람들의 특성과 로마의 식민지 하에서 무장독립 투쟁으로 이웃들이 수만명이 죽어가고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져 절망속에 있는 유대인에게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이고 희망의 메세지 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일반 신도들이 쉽게 구입하여 볼수 있었다는게 아니고 군중이 모인 예배나 집회시 목소리가 크고 좋은 사람이 여기 저기 옮겨다니며 양피지 두루마리를 펴서 여러차례에 걸쳐 낭독 했을것이다. (지금의 개역 성경에 읽는자는 깨달이지니 라고 쓰인 말은 오늘날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당시 성경 필사자가 두루마리를 읽는 사람을 위해 특별히 액션을 취하거나 강조하거나 하기위해 쓴 말이다) 옛날 우리네 장터에서 소리꾼이 군중들에게 심청전이나 춘향전을 판소리로 들려 주던 광경을 상상하면 될것이다. 당시 이 지역은 문맹율이 너무 높아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 5%정도 였다하니 당시 쓰여진 종교 기록물들은 처음부터 낭독하는, 즉 들려주기용으로 기록되었음을 알수있다. 이때 만일 군중의 심금을 울리고 감동을 더하기 위해 신비롭고 흥미있는 내용을 추가할수도 있었듯이 같은 내용에 실증을 느낀 군중들의 흥미를 위해 복음서도 세월이가며 내용을 수정하고 추가하였으며 아예별도의 증보판인 마태, 누가등의 새로운 복음서등이 각 공동체에서 집필 되었고 교세가 확장되고 헬라문화의 신화에 익숙한 이방인 신도가 늘어나자 예수를 신으로 격상한 요한복음서등이 저술 되었다.
마가, 마태, 누가의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쓰여졌다면 요한복음서를 저술하거나 편집한 수명의 저자들은 이방사상인 그리스--로마의 헬라 문화권에서 유입된 이방인들을 설득하고 쉽게 다가갈수 있도록 예수를 탄생이전 부터 신으로 만들었고, 내용중 많은 부분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격화와 그리스도화를 위해 임의로 창작하여 저술하였다, 사실 공관 복음서에는 예수의 신격화가 노골화 되어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본격화 된다, 즉 예수가 죽고나서 수십년이 지나  예수의 전설만 남은 상황에서 예수의 언행록 내용자체보다는 해석이 중심이 되는 신화적 역사가 전개된 것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행적이나 언행을 기록한 문헌이라기 보다는 신격화와 그리스도화를 위한 신학서로 보는게 맞다.
성서의 출발은 위에서 서술 한바와 같이 시각적 문헌이 아니고 청각적 문헌으로 시작된 것이다. 시각적 문헌은 읽는 사람들이 어느정도 소양과 지식을 갖추어야 되지만 청각적 문헌은 듣는 사람들의 지식이나 소양과는 무관하며 경우에 따라 과장과 재미와 듣는 사람의 감동을 최우선 하는것이 일반적이다.
서신이 쓰여지고복음서가 나왔어도 초기에는 예배에 그저 참고용 이었으며 교회에서의 예배는 수세기 까지 구약이 사용된것을 보면 이는 서신이나 복음서가 처음에는교회나 예배에서 성경으로서의 역활은 하지 못했고 경으로 인정받지 못하였음이 이를 증명하는게 아닌가 생각한다.(당시 성경 이라함은 셉투아진트 헬라어로 된 70인역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임)

여기서 꼭 알아야 할것은 예수님 당시 어떤 언어를 사용했을까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그 이전에도 주변의 강국인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등 이민족에 의해 여러차례 침공을 받아 나라자체가 멸망하기도, 때론 식민지로, 그리고 기원전 6세기 경에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왕족과 상류층및 귀족들   모두가 포로로 잡혀갔다, 이후 바벨론은 페르시아에 멸망하게되고 페르시아 고레스 왕 시대에야 인질에서 풀려나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가게된다(구약 이사야서에는 자기들을 인질에서  풀어주고 성전까지 재건토록 도와준 페르시아 고레스 왕을 야훼의 목자,  기름부은자, 즉 메시아로 기록함). 당시 페르시아의 공용어는 아람어 였고 포로로 잡혀있는 이 기간에 아람어를 근간으로 하는 히브리어 문자가 만들어 졌으며 바벨론 유치이후 구술로 전해 오던 모세5경, 율법서등이 편찬 되기 시작하였다. 70여년간의 포로 생활로 인해 유대인들의 사회. 문화. 정치. 종교등은 바벨론및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었고 이에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와 포로로 잡혀와 노예와 다름없던 바벨론 유수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않을려는 다짐으로 구약이 기록 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 당시 로마제국의 언어는 헬라어 즉 그리스어(서방지역은 라틴어)가 주 공용어 였다,이스라엘 지식층은 헬라어를 사용하였지만 이스라엘 서민층들은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예수님이 사역을 한 갈릴리는 지금은 사어(死語)가 된 아람어가 주민의 주 언어 였던것 같다.(성경에서 나사렛 예수라 하지만 예수시대에 나사렛이란 이름의 마을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않다. 유대의 역사학자이자 갈릴리 지역을 관할하며 이지역의 지형을 상세하게 기술한 요세프스의 저서에도, 복음서보다 먼저 쓰여진 바울의 서신 어디에도 나사렛이란 이름의 마을은 나오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나사렛이란 지명이 알려지기 시작한것은 3세기 전후이나 여러 고증에 의하면 나사렛은 교파이거나 정파(政派)의 하나인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구약에 선지자에 의해 예언 되었다는 마태및 누가복음서의 나사렛 예수라는 기록은 구약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은 허위이다. 기독교 교세가 확산되고 신도가 늘어나자 기독교 교부들은 복음서 이외에는 어디에도 기록이 거의 없는 희미한 예수의 실존을 역사적 예수로 만들기 위한 작업들이 실로 다방면으로 방대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 졌다고 성서학자들은 주장하고있는데 이것 역시 한부분이라 여겨진다.)
예수님도 설교를 아람어를 사용했음을 알수 있는것은 지금의 성경 곳곳에 아람어가 남아있음을 볼때 알수있다.
그당시는 인쇄술도 없었고 종이도 발명 되기 이전이다.그때의 기록은 양 피지 즉 양이나 소의 가죽에 먹물로 쓰였고 그 전에는 이집트 나일강에서 자라는 다년초인 갈대 종류인 '파피루스' 줄기에 기록했다, 그래서 성경을 '바이블'이라 한다 ,그리고 양피지는 굉장히 고가였고 구하기가 싶지 않았다. 그러니 제자들 대다수가 하층민에  글까지 몰랐으니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려고 했었도 할수 없었을 것이고  기록할 이유도 없었다.
예수님이 군중에게 역설한 아람어 말씀은 그냥 갈릴리 허공에 흩어졌다고 보면 된다.
왜냐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고 수십년이 지나 예수님이 사용한 아람어가 아닌 헬라어로 그 행적과 말씀들을 기록한다면 그것도 그 말씀을 직접듣고 숙식을 같이한 제자가 아니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설사 직접생활을 같이한 제자이며 스승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기록한다 해도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사 오십년이나 지난 행적이나 가르침을 세세히 기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하다.
즉, 마가, 마태, 누가, 요한 복음서 라는 기록물은 저자들이 자기들이 직접 보고 들은바를 쓴것이 아니며 목격자로 쓴것은 더욱 아니다, 그전 목격자들로 부터 전해 들은 말들을 다시 전해듣고 쓴것이다 이는 예수의 오리지널한 가르침이나 역사적 전기나 행적이 아닐뿐 아니라 예수가 사역한 갈릴리 지역도 세세히 잘 알지 못하는 헬라문화에 영향을 받은 헬라화 된 유대인 복음사가들에 의해 편집되고 재구성 된, 예수의 실체를 후세에 알리거나 남길 목적으로 쓴 역사적 문헌이나 기록물이 아니고 한마디로 추종자들의 믿음의 기록, 믿음을 위한 기록이며 믿는자의 철두철미한 신앙고백이다. 허나 이마저도 원본은 제대로 존재해보지도 못하고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필요에 의해 변개되고 첨삭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겠다.

복음서를 집필한 저자들은 제자들을 통해 공동체등에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가르침, 교회에 떠도는 단편적인 예수님의 행적과 설교내용, 이미 기록된 서신이나 예수의 짧은 가르침이 기록된 문서,구약에 기록된 선지자의 예언, 세간에 전해지는 스승적인 교훈이나 구약의 잠언 시편등의 교훈적인 구절과 지중해 연안 여러나라와 민족에게 널리 퍼져있던 성인의 탄생과 부활신화, 그리스등 지중해 연안에 옛부터 전해내려온 윤회사상, 당시 시대적으로 갈망하는 이신론인 이원론적(선과악, 천사와 악마, 천국과 지옥은 원래 유대이즘, 유대사상이 아니고  기원전   5-6세기(일부학자들은 기원전 16세기)경에 페르시아에서  창시된 조로아스트교의 교리이며 당시 근동및 지중해 연안에 조로아스타의 이신론의 이원론적인 교리가 널리 퍼져 있었고 유대사회에도 바벨론 유수이후  조로아스트교의 이신론인 이원론적 교리가  일부종파에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후 조로아스트교는 오늘의 모든 서양 종교 즉 유대교, 기독교, 이스람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이고 종말론적인 구원설 등을 담았고 당시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과 본인의 종교적인 사상도 크게 작용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흥미로운 점은 복음서에 기록 되어 있는 오병이어, 물위를 걷는 기적, 돌아온 탕자, 우물가의 여인, 과부의 헌금, 씨뿌림의 비유, 건강한자 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다등 너무 많은 비유와 교훈적인 이야기가 불경에도 있다는것)

또한 예수님 제자들은 거의가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며 언어는 히브리어 보다는 아람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당시 집필된 모든 기독교 성서는 구약과는 달리 헬라어 즉 그리스어로 집필되었음을 볼때 사도 이름으로 저술된 복음서, 서신, 행간 예언서등 종교서는 모두 그이름이 도용 되었거나 차용 되었고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베드로서등)
복음서가 나오자 많은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주고 파장이 컸음을 알수있다,그이유는 오랜시간에 걸쳐 수 많은 복음서와 여러권의 행간, 예언서 종교서등이 저술 되었음으로 알수있다.(복음서중 먼저 기록되었다는 마가의 복음서도 먼저 저술된 다른 복음서나 종교서들의 영향을 받아 저술되지는 않았는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사도행전은 주후 60-130년 사이 누가복음 저자가 지은것으로 여겨지며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알수있는 기록물로 초기에는 정경화된 사도행전 이외에도 외경으로 버려진 여러권의 행전등이 있었다. 4복음이 따로 수집됨에 따라 외롭게 독립되었다가, 마침내 예수의 생애와 서신이 기록되던 사이에 연결을 이어주는 성서로 채택되었다.
묵시록(默示錄)은 처음에 널리 알려졌으나 2세기 후반 경에 이르러서는 인기를 많이 잃게 되었다. 특히, 로마에 적대적인 감정을 나타낸 요한계시록은 주후 81년 --96년 사이에 기록 되었으며 이 기록물이 정경으로 채택되어 견고한 위치를 얻기까지 200년 이상이나 싸움을 겪어야 했다. 실상 그 싸움은 그 후까지 계속되었고, 현대 교회에서도 그 책을 정경에 완전히 넣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야고보서는 저자가 해외거주 유대인에게 보낸 편지로 기록연대는 바울의 서신과는 달리 믿음보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으로 보아 초기 유대계 기독교 시기인 주후 60년 전후에 쓰여졌다는 견해도 있지만 기록형태가 예루살렘 유대인 관점이 아닌 교양있는 헬라어투로 쓰여졌다는 점등으로 주후 85년--90년 사이에 쓰여졌다고 주장하는 성경학자들도 있다.
저자는 주의 동생 야고보인지 아니면 헬라화된 해외거주 유대인 인지 아니면 야고보의 이름이 도용된 것인지 정확히 알수는 없다고 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것이다"가 야고보서의 핵심근간이다. 초기에는 사도적 저작권 등으로 위경으로 간주되었지만 점진적으로 신약성경 정경으로 받아 들여졌으며 마틴 루터는 자신의 신학적 의견에 배치된다고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에 비유하며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외 히브리서는 주후 50-150년 사이에 익명의 저자에 의해 지어졌으며 서방교회에서 정경채택을 반대한 문서이다, 오랫동안 바울의 서신으로 분류되었지만 오늘날 성서 학자들은 부정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위경과 외경이란,
위경 : 실제 인물이 아닌 허구인물의 거짓이름으로 기록된 성서또는 문서라는 의미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2-3서. 유다서. 요한게시록으로 이들 7권을 논쟁의 책이라 하였다.
외경 : "감추어진" 이란 헬라어에서 유래 하였으며 숨겨진 성서 또는 책이란 뜻이며 아포(원정)와 크립테인(숨거나 숨기기 위해)이라는 두 단어에서 유래했다. 라틴어 아포크리푸스는 단순히 "비밀"이라는 뜻이다.
복음외경으로  : 도마복음. 니고데모복음. 바들로메복음. 베드로복음. 마리아복음. 야고보원복음. 빌립복음. 요셉복음. 맛디아복음. 나사렛복음. 히브리복음. 애굽인복음등  50여권.
행전외경으로 : 바울행전. 요한행전. 안드레행전. 도마행전. 베드로행전. 바나바행전. 빌립행전. 빌라도행전. 야고보행전. 테글라행전. 다대오행전등.
서신외경으로  : 사도서신. 고린도3서. 라아니게아서. 그리스도와 압갈서신. 바울과 세네카서신등.
묵시록외경으로 : 베드로묵시록. 바울묵시록. 야고보묵시록. 도마묵시록. 스데반계시록  등이 있었다)

지금도 교회가 여러파로 분열 되어 있지만 (대략 30,000 개이상 , 국내 370여개)초기 교회도 지금 못지 않게 수많은파로 갈라져 있었다, 그중 예수를 훌륭한 스승으로 여기고 복음서의 기록을 신비와 비유로 여기며 깨우침과 앎으로 신성에 이를수 있으며 예수의 기독교도 세상의 한 종교로 여기는 영지주의자와 (영지주위는 예수이전 유대교에서도 존재하였으며 조로아스트교의 영향을 받은 종말론, 최후의 심판, 부활신앙, 메시아론 등이 훗날 예수(메시아)의 출현과 기독교가 잉태하고 형성하여지는 토양이 되었다)하느님의 아들로 신격화 하고 예수의 출생및 부활등 복음서의 기록내용을 사실 그대로 믿는 문자주의자와의 교리논쟁과 교권다툼은 생명을 걸정도로 심각 했고 교파간 성경도 서로 달랐다.(초기 기독교는 영지주의자들의 신앙이었는데 교회가 세속화 되면서 문자주의 신앙이 생겨났다.)
한쪽에서 교권을 쥐면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하는 교권 싸움은 대략 4세기 까지 오랜기간 계속 되었다.
그러나 이 논쟁과 분쟁은 4세기초 313년 로마의 콘스타니우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타니우스를 가톨릭에서는 성인의 반열에 올려 놓았지만 그는 임종 직전까지 미트라교를 신봉했고 자신을 태양신의 사자라 칭했다)
얼마후 380년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제국의 국교(문자주의의 승리)로 정해지면서 서서히 종료 되었다.(국교로 정해 졌다지만 초기에는 로마의 다신교와 같이 기독교도 차별받던 종교에서 다른 종교와 같이 인정한 정도)허나 당시 교회가 둘로 갈라질 정도로 첨예하게 대립된 예수의 신성(神性)에 관한 교리 논쟁은 신앙이 아닌 세속권력인  로마 황제에 의해 소집된 주교들의 (주교 : 성경에서는 감독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주교란 가톨릭의 성직은 니케아 공의회후 로마 황제가 임명하여 생겨났다 공의회 이전에는 주교란 직은 없었다)수차례의 종교회의를 거쳐 투표로 지난 300년간 이어온 윤회 사상적 교리는 삭제하고 예수에게 신성을 부여하고 하느님의 아들로 하는 삼위일체 교리와 마리아를 신성한 존재로 여기는 교리등이 채택 되었다, 수백년 동안 로마인의 주 종교였던 제국의 수많은 신전과 신전속의 수많은 신상들은  이교라 배척되고 우상이라며 파괴되고  훼손되었으며  일부는 교회로 바뀌기도 하였다. 또 기독교중에서도 채택된 교파가 아닌 다른교파 즉 그노시스라는 영직주의자들은  이단이라는 명분아래 철저히 배척되고 탄압을 받았고 그들이 추종한 복음서, 행간, 예언서등 수많은 종교서등은 불에 태워졌다. 특히 기독교 초기(예수이후 3세기 초까지)에 번성하며 꽃을 피운 영지주의 문서들, 종교서들은 모두 파기되고 소각되어 영지주의의 가르침과 의식을 비판했던 정통파 기독교 교부들의 기록을 통해 목록만 알려졌을뿐 내용이 거의 알려진것이 없었으나  최근 발굴로 복음서에 없는 예수의 가르침과 초기 기독교를 이해할수 있는 영지주의 성서나 문헌들이 엄청나게 많았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허나 교회에서 신약성서가 최초로 정경화 된곳은 당시 주류 교파인 카톨릭이 아니고 영지주의파로 이단시 되어 파문된 마르시온(마르시온은 주후 100년경 소아시아의 작은 도시인 시노페 주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에페소에서 수학하고 로마로 이주후 로마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이며 그가 독자적으로 세운 교회에서 부터다, 파문된 뒤에도 그는 재력(조선업의 거부였음)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성서의 선택,여 사제가 세워지는등 남여평등의 혁신적인 제도개혁으로(1차 종교 개혁이라 하기도함) 많은 대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가 세운교회는 로마, 이탈리아,이집트,아라비아,시리아, 소아시아, 페르시아등 전세계에 세워졌고 주류 카톨릭보다 교세가 더 확장되기도 하였으며 비등한 교세가 5세기 까지 유지되었다.
반 유대주의자인 마르시온은 구약의 질투하고 증오하며 폭력적인 야훼가 예수의 사랑의 하느님이며 아버지가 될수없다며 유대주의 적인 구약은 폐기하고 복음서중에는 누가복음 하나와 바울의 서신등 11권을 정경으로 채택하였다 (책택된 누가복음서, 서신중 구약에 관련된 부분은 모두 개편하거나 수정함)
마르시온은 영지주의 자로 가톨릭에서 파문당한 신앙의 이단아(異端兒) 였을지 모르지만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죽기전 그의 막대한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마가복음 10장 21-23절)
작금의 우리나라 목회자들은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들이 입만열면 뱉아대는구원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꼭 새겨야 할 대목이다.
교회에서 처음으로 신약성서의 목록이 정해진건 대개 2세기 후반 무렵으로 알려저 있지만 또 다른 문헌에 의하면 27권의 성서목록이 기독교 교부들에게서 처음 거론된 시기는 4세기 초라는 기록도있다. 그렇다면 27권이 성서목록으로 정해진 시기는 서신이나 복음서가 기록되고 최소한 2-300여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다. 이는 성서로 정해진 27권도 기독교 초기에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쓰여진 수백권의 종교서중 하나라는 사실이고 200여년간은 교회에서 신학적으로 필요나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변방의 종교에서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예수신앙의 종교서가 수백권이나 저작되었는데도 왜 수백년이나 지나서 정경화가 이루어졌는지 잘 알수는 없지만 아마도 당시 쓰여진 수 많은 종교서는 당시 성경인 구약의 권위를 넘어서지 못한것이라 생각된다. 
그후 카톨릭에서도 마르시온 교회의 대항용으로 신약성서의 정경화를 서두르게 되고 4세기 말경에는 27권의 신약성경이 정경화 된다.(정경화 되고 난후에도 복음서의 일부 구절이 수정되기도 하였다)  정경화의 기준은 무엇 이었을까? 사도적 저작성일까? 먼저 쓰인 순서일까?  내용이 긴 순서일까? 그러나  절대적 기준은 없었다. 당시 교회가 필요로 하는 신학성, 당시 교회에서 많이 낭독되는 종교서등이 기준이 되었을거라 여겨진다. 27권의 목록중 야고보서, 히브리서, 요한 2-3서, 베드로서등은 사도적 저작권 등으로 오래동안 정경에서 빠져 있었으며 사도적 논쟁으로 정경 목록이 여러번 바뀌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신약성서 27권중 유일하게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이 수록된 4복음서의 저작자는 사도일까?? (현재도 27권이 아닌 22경을 정경으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는 교파도 있다.)

허나 오늘날 우리가 읽고있는 27권의 통일된 정경은 16세기 후반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에야 사실상 동일본으로 확정 되었다.(기독교는 경전이 있고 교회가 탄생한것이 아니고 교회가 탄생하고 경전이 생겨났다, 이는 정경이 교회를 성립 시킨것이 아니고 교회가 정경을 성립 시켰다는 의미이다 즉 초기 교회는 정경이 없는 교회였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생성하는 과정을 보면 먼저 1. 추종하는 집단이 생겨나고 2. 교회가 만들어지고 3. 다양한 형태의 신앙, 교리가 형성되었다가 4. 정경이 만들어지고 5. 제도화 되는 과정을 거친다, 기독교 역시 이 과정을 거쳐 탄생한것이다 )

특히 로마군인의 주종교이며 로마제국의 수호신으로 로마제국 전체에 널리 퍼져있던 이교인 미트라교(미트라는 태양신의 아들로서 기원은 고대 아리아인이 믿던 종교인데 bc 3세기경에 페르시아에서 성행하다가 bc 2세기경에 로마제국에 전파되었으며 오늘까지 로마제국 전 곳곳에서 미트라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으며 3세기 경에는 로마에 수백개의 미트라에움이 있었고 기독교가 공인 되기 4세기 까지 서로 공존하였다)의 신전과 예배소등은 철저히 파괴 되었으며 재산은 교회가 몰수하고 그 터전위에 교회가 세워지거나 일부는 교회로 바뀌었다. 미트라교는 조로아스트교의 교리를 흡수하고 이집트의 오시리스. 그리스의 디오니소스등을 융합한 종교로 미트라( 페르시아어로 계약을 뜻함)는
1 . 12월 25일 처녀에게서 태어났으며 태어날때 3명의 목자가 지켜보았다.
2 . 그는 위대한 방랑교사였다.
3 . 그에게는 12제자가 있었다.
4 . 기적을 행하였다
5 . 태양신의 아들로서 성 삼위를 형성했다.
6 . 그는 무덤에 묻혔으며 3일후에 다시 일어나 하늘에 올랐다가 종말의 날에 지상에 내려와 죽은자를 깨웠서 심판하고 세상의 악을 일소한다.
7 . 그가 일어난날(부활) 미트라교도들은 축제를 벌렸는데 그날은 지중해 연안의 여러나라 민족의 춘분 축제였으며 후일 기독교의 부활절이 되었다.
8 . 그는 선한 목자로 불리웠다.
9 . 그는 길이요. 진리요. 빛이요. 구세주 또는 메시아로 불리웠다.
10. 미트라를 기리는 날인 일요일은 미트라의 태양 숭배일 이었으며 주의 날이라 불렀다.
11. 미트라교는 새로운 입문자들에게는 빵과 포도주로 성체의식을 행했다.
위에서 보듯 미트라는 예수와 거의 똑 같은 행전을 가진 이교도 신인이다. 오늘날 카톨릭의 직제나 복식(현재 카톨릭의 옷), 십자가, 묵주등 성구, 동지축제(성탄절), 예배, 일요일의 안식일(초기 기독교의 안식일은 토요일 이었지만 2세기초 로마교구에서 일요일로(동방교회 제외) 변경 이후 콘스타니우스가 4세기초 일요일 휴업령을 내리면서 일요일이 안식일로 확립됨), 춘분축제( 부활절)등은 기독교의 로마의 국교 공인이후 대부분 미트라교 및 이교도의  의례를 그대로 이어 받은 것으로 알고있다.그 외에도 힌두교의 키리슈나. 디오니소스, 이집트의  오시리스, 아도니스,등 많은 신의 아들들이 12월 25일 동정녀에게서 태어나 이적을 행하고 12제자를 두었으며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 승천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것은 초대교회 부터  현재까지 오늘 형태의  믿음과 전통을 이 천년간 이어 왔는가 하는 물음이다. 결론은  절대 그렇지 않다이다.
오늘 형태의 기독교가 예수와 그 제자에 의해 세워졌다고 알고있거나 믿는 사람이 많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바울 이전의 교회 즉 사도들의 교회는 종말론적인 절박함과 율법주의적인 유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오늘의 교회모습과는 전혀 다른 예수재림을 기다리며 예수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부한자든 가난한자든 재산을 공동 소유한 원시 공산주의식 공동체 였으며 다르게 표현하자면 예수의 종말적 천국운동에 동참한 유대인만의 공동체였다. 예수를 신으로 숭배하고 조직을 갖춘 제도화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라 생각한다면 큰 오해이다.
기독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에서 추종자들에 의해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였다며 탈 유대화 하며 시작되었지만 유대교 전통, 유대주의에서  메시아는 죽은자들을 천당에 보내는 존재가 아니다. 유대교에서 떨어저 나온 기독교는 이후 예수 해석을 다르게 하는 에비온주의,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등 수도 없이  많은 파로 갈라지는 분열이 있었고 육의 예수를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바울에  의해 예수는 부활하고 신이되어 제도화된 교회의 신으로 숭배받게 된다,
기독교의 시작이 된 사도들의 교회는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후 거의 붕괴 되었으며 자금과 조직을 앞세워 세력이 확대된 바울 교회에  대부분 흡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1세기 후반에는 초대교회를 형성했든 유대주의는 퇴색되고 바울 신학인 믿음에 의한 구원론이 교회의 중심교리가 된다. 그럼에도 유대주의적 색채가 짙은 마태복음및 마가,누가 복음서들이 주후 70년에서  90년 사이에 저술 된것을 볼때 바울 신학에 동조하지 않은 유대적인 율법주의 전통을 고수한 유대인 공동체가 성전 파괴후에도 오랜기간 건재 하였음을 알수있다.
근동지방 사막의 아주 조그만 부족국가의 지엽적이고 편협적이고 지극히 배타적인 유대교와 별반 다름이 없던 제자들의 공동체는 행위나 율법이 아닌 이방인이든 누구든 아무나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며 남성중심으로 한 남성 우월주의적이며 교회조직을 갖춘 바울의 종교로, 하나의 나라, 하나의 신, 하나의 황제를 표방하며 분열된 제국을 통합하고 정권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국의 국교로 공인되고 로마인들의 종교였던 미트라교와 이방종교의  의례및 제도등을 차용하며 제국의 보편화 된 종교로 탈바꿈 된것이다.(어찌보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로마 황제 콘스타니우스가 만든 종교라 해도 변명할 소지가 없는것이 아닌가?)
허나 기독교가 국교로 선포된지 100년도 못가서 로마는 망하고 만다.(로마의 멸망은 야만족의 칩입이 주원인 이지만 기독교가 국교화 되면서 제국이 부양할 비생산자의 하나인 기독교 성직자가 대폭적으로 늘어난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일본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적고 있다)
그들 제국의 부흥을 위해 선택하고 재 탄생시킨 이 종교가 인류의 보편적인 진보와 문명을 외면하고 비 문명적이며 비 인간적이며 야만적인 폭력으로 천여년 동안 세상을 암흑천지로 만들지는 몰랐을거다. 왜냐고 1세기에 일부 과학자들은 지구의 둘레를 거의 알수 있었지만 4세기에는 지구가 둥굴다는 주장만 해도 죽임을 당했다 한다.
수많은 신들을  믿던 로마인들은 이교도로 낙인되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  받았으며, 초기 기독교에서 번성한 영지주의자들은 처절한 교리 싸움에서 패배하자
이단이라 배척되었고 영지주의적인 성서들을 소지하기만 하여도 로마법에 의해 재산을 몰수 하는등 엄벌에 처해지자  당시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지키고자 그들이 추앙한 성서들의 폐기를 피해 사막의 동굴등에 숨겨 놓은것이 최근 발굴로  드러나고 있다. 발굴된 영지주의 성서중에는 지금의 성경이 아닌 도마. 빌립복음등 바울, 야고보의 게시록등 수십 수백종류의 엄청난량의 종교서가 발굴됨을 볼때 초기 교회 시대에는 다양한 종파들의 수많은 종교서가 있었음을 알수있다.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된 이후에는 예수의 신성을 반대한 아리우스파들도 철저히 배척되었다.기독교는 탄압받던 종교에서 탄압하는 종교로 바뀐 것이다.

그후 성경은 많은 첨삭이 있고 고쳐져서 오늘로 전해졌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고쳐지거나 더해진 부분이 천 곳이 더 된다고 주장한다 ,처음 기록된 성서의 정본이 없다보니 복사본에서 복사본으로 옮겨지고 필사 하는 과정에서 첨삭되거나 변조된다 해도 어느것이 맞고 틀림을 증명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사본( 성서 형태로 발견된 사본은 시나이 사본이며 1844년 시나이 수도원에서 발견됨, 이 시나이 사본도 최소한으로 7명의 저자가 있었고 수정된 곳이 무려 16.000군데나 된다고 함)도 4 - 5 세기 이후의 것이고 4세기 이전의 모사본은 몇몇 파피루스 파편조각을 제외하면 발견된것이 없다고 한다, 발견된 파편 조각이나 문서가 4세기 이전것이 거의 없는 이유는 4세기초 303년 당시 로마 황제인 디오클레타인 칙령에 의해 로마내 기독교와 관련된 모든 종교서들을 회수하여 파기하거나 소각 하였기 때문이며. 이후 10여년 뒤 콘스타니우스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후 다시 편집 기록되었으며 이후 수차례 수정을 거쳐 오늘에 이러렀으니 초기에 기록된 것과는 3 - 4 백년의 공백이 있을뿐 아니라 수많은 첨삭과 수정을 감안할때 처음 기록의 복음서 내용이 그대로 쓰여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
현재 헬라어로 기록된 것만 5800종이(다른언어까지 합치면 25.000종) 넘는 파편조각과 문서 사본들이 발견되었다 한다.(사본이라지만 같은 내용은 하나도 없다한다) 하나 예를 들자면 오래된 마가복음 사본은 16장 8절에서 끝나고 있다, 9절부터 20절 까지는 후대에 첨가된구절로 예수의 부활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외에도 요한복음 21장 전부. 7장 53절에서 8장 11절까지, 마태복음 16장 2-3절 로마서 16장등 여기 다 열거 할수 없을정도로 수많은 부분이 후대 변개되거나 추가 삽입되었다. 기독교 최고의 교리인 예수의 동정녀 출생도, 부활도 최초복음서인 마가복음에는 없었고 기독교인의 최대 사명인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구절도 후대 추가 삽입기록이다. 카톨릭 성경 주석에는 고본에는 없음 이라고 적혀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없음"이라 되어있는 절은 삭제한 절이고 (괄호)나 [꺽쇠]가 쳐진 부분은 오래된 고본에는 없는 구절이거나 이구절을 성경에 수록해야 하는지등 원문의 진정성이 심각하게 의문을 나타내는 표시라는 문헌을 읽은 적이 있는것 같다.

참고로 초기의 성경은 일부 서신을 제외하곤 특정한 저자가 없는 익명의 작품이거나 사도의 이름으로  차용 또는 도용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으며 모든 내용은 당시 유대인이 사용하던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아닌 그리스어 대문자로 쓰였고, 지금처럼 장과 절의 구분이 없고 뛰어쓰기 없이 연속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뛰어쓰기는 9세기 이후 소문자본 복사본 부터이며 장과 절은 12세기에 장이 생겨나고 16세기에 절이 생겨났다.
4세기 말경 신,구약성경은 라틴어로 번역 되었고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까지 라틴어로 된 성경은 라틴어 이외에 다른 어떤 언어로도 번역 하는것을 철저히 금기시 하였으며(영어로 번역을 시도한 영국의 한 성직자는 종교재판에서 화형에 처해 지기도 하였다) 성경의 해석은 오로지 교황에게만 있었고 교회에서의 모든 제례는 최근까지도 오직 라틴어로만 행해졌다.
다른 언어로 번역된 성경이 인쇄 되어 일반 교인들에게 보급된 시기는 16세기 마틴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였으며 2-3백년 전부터 일반신도들이 지금처럼 쉽게 접할수 있었다고 한다. 인쇄술이 발명되고 일반신도 들에게 보급 되기 이전 중세시대에는 성경은 일반인이 보는것을 엄격하게 금기시 했기 때문에 일부 성직자가 아니면  볼수도 없었고 고가(高價)여서 상위층의 일부 부자가 아닌 일반 민중들은 아예 볼수도 구할수도 없었다.

이렇게 성경의 사본마다 다 다르고 틀림은 필사(옮겨씀) 과정에서 실수로 또는 고의로 더 해지거나 고쳐 지기도 하였고 또필사하는 사람에 따라 자신의 교리나 신앙의 취향및 당시 사회적 갈등요인의 봉합 및 필사자의 주관과 생각을 수정삽입 하거나 가필하여 추가하였고 때로는 별도의 목록으로 첨부하는것이 당시는 아주 일반적이었고 때로는 권장 되기도 하였으며  누가 언제  어디에서 이 복사본들을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500년간 그리스어(헬라어), 라틴어, 곱트어, 아람어, 시리아어등으로 쓰여진 수천 수만종의 필사본에 들어있는 변개된 단어가 신약성서 전체 낱말보다 더 많다고 한다. 그리고 새로운 내용의 종교서등이 집필되고 쏟아져나와도 내용을 문제 삼거나 제재하는 집단이나 단체가 초기교회 시대에는 없었고 또 할 이유도 없었다(당시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여러형태의 종교서를 쉽게 집필할수 있었다. 쉽게 말해 당시 종교서적 집필은 요즘의 돗떼기 시장 비슷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위에서 언급 하였지만 초기에는 그저 시중에 떠도는 문학, 종교소설, 또는 연극용 대본 같은것이었다. 또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었으니 요즘의 대중화된 인쇄물 처럼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거나 보기에는 제한적 이었으며 저자도 없었고 권위를 갖인 교회의 경도 아니었으며 누구의 복음서란 말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진본이니 사본이니 진의를 가릴 필요자체가 없었고 어느것이 맞고 틀리니의 논쟁이 될 하등의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오랜기간 계속 변천 진화 되어 왔을을 뿐아니라 교회의 영속이나 교파의 이해와 교권을 강화하기 수단이나 사회 갈등 요인의 봉합이나 통치자의 필요에 의해 고의적으로 고쳐지기도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근대에 들어 와서는 자국어(自國語)로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또 한번의 오류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교회에서 많이 읽고있는 한글 개역성경은 1769년에 인쇄된 킹제임스성경과 비교 했을때도  3만 6천 군데가 변개되어 있고 신약에서만 2만 2천 단어가 삭제되어 있다. 성경은 총 1,189장이므로 대략적으로 계산을 해보면 한글 킹제임스성경과 한글 개역성경은 매 장마다 평균적으로 서른 군데 이상씩 다르며, 신약이 총 260장이니 모든 장에서 한글 개역성경이 한글 킹제임스성경보다 약 85단어씩 적은 셈이다. 킹 제임스 성경에는 외경이 나열되어 있었으나 1885년에 지워졌다).

그럼 신약성서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한번 그려보면
1단계 구전.
예수의 육성음인 아람어 말씀은 예수 사후 이내 사라졌으나 교회 내에서 구두로 전달되던 시대가 최소한 한 세대인  30년 이상 임을 감안할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왜곡과 첨삭이 일어났다.
2단계 번역. 
교회내 떠 돌아 다니거나 구전으로 전해오던 예수의 아람어 말씀은 3-40년이 지나 아람어가 아닌 헬라어(그리스어)로 최초의  문서로 기록되기 시작된다. 즉 번역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번역에는 번역자의 주관이나 오역과 첨삭이 따르기 마련이다.
3단계 필사. 
이 헬라어로 쓰여진 단편적인 가르침이나 사도들의  짧은 서신들이 집대성 되어 한권의 책 즉 성서형태로 탄생하지만 처음부터 기준이 되는 원본은 없었다. 사본에서 사본으로 이어진 필사본  뿐이었다.  필사본들은 하나도 동일한 것이 없었으며, 필사의 과정에서 필사하는 사람의 신앙 교리를  첨삭하거나 수정함으로 또 한번의 의도적인 변개가 일어났다.
"같은 대목을 고친 두 명의 수정자들은 각기 정반대의 뜻으로 돌려 놓은 경우도 있다. 이건 그가 소속되어 있는 교파의 독단적 교리 즉, 도그마 해석에 따라서 생긴 의도적 수정이다. 어쨌든 산발적인 교정에 의해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텍스트에 혼란이 일게 되었던 것이다."(쮜리히의 로버트케일 박사)
4단계 취사 선택.
1~3단계를 거쳐 만들어진 5,000종이 넘는 헬라어 사본들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예수가 말한 바와 가까운가 하는 것을 본문비평(  문학이나 역사 등의 기초적 연구에서, 한 내용에 관하여 여러 가지 연구서가 있는 경우 서로 다른 부분을 비판하고 연구하여 정본(正本)을 정하는 일)을 통해서 취사선택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또한번의 첨삭과 오류가 발생한다.
5단계 번역.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비평판 헬라어(그리스어) 성서를 대본으로 하여 라틴어. 영어등  번역하는 과정에서, 또한 근대에 와서는 자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또한번의  오역과 오류가 일어났다.
6단계 기타 변개나 첨삭.
고판본은 모두 액센트와 쉼표의 표기조차도 없는 글자의 나열이었다. 후대에 장과 절의 구분시 많은 오류가 발생하였고, 수도없이 많은 위경과 외경을 정경으로 분류하는 과정(예수 사후 200년 이상 지난 후에야 현재의 27서 형태를 갖춤)과 복음서의 정경화 과정  등에서도  많은 변개와 첨삭이 일어났을 것으로 본다. 이 토록 수 많은 첨삭이나 개정을 알게된 마호멧은 코란을 다른 언어로 번역도 못하게 했다고 알고있다, 이제 성경이 어떻게 어떤 경로로 통해 지금 우리손에 쥐어졌는지 알수있을것이다.
 

그런즉 성경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성령에 감화되어 쓰여진 것도, 계시에 의한것도, 창의적인 것도 아니며 무오하며 일점 일획도 고쳐지지 않았다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철저한 인간의 책이며 서로 다른 장소와, 다른시기, 서로 다른 사람에 의해 기록 되었으며  세속의 필요성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적 산물일뿐이다.

신앙생활은 어떤 말이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는 올바른 중심과 성경이 쓰일 당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 성경이 진화하고 변천해 온 과정과 성경전체의 올바른 이해가 없고 목사나 성직자가 들려주는 일부의 구절을 성경의 전체 의미인양 알고 현혹 되면 성경에 쓰여진 그 수많은 문구의 문자  한자,  한자가 다 숭배해야 할 대상이 될수 있으며, 신앙의 본질을 벗어난 기복을 쫒는 무속이나 미신으로 변질될수도 있다. 나아가서는 자주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유아적(幼兒的)이고 맹신적인 신앙이 될수 있을뿐 아니라 내 종교, 내신앙, 나만 옳다는 아집은 예수님이 설파한 최고의 계율인 이웃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회를 분열시키고 가정을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성 마져 훼손 할수도 있다. 신앙생활은 먼저 내마음에 평화가 있고, 가정에 행복을 가져오는 밑거름이 되어야 하며 이웃과 사회를 따뜻하게 하고 정화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오늘날 다양성과 자유, 민주, 이성과 과학의 황금 시대에 2천년전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수정되고 삭제되고 더해진 ,당시에는 소설과 다를바 없던 몇편의 서간이 이 시대 절대 선이라는 믿음, 주의에 의해 소중한 재물을 바치고, 시간을 낭비하고, 기복에 메여 종노릇 하고, 가족간 불화 하고, 이웃과 갈등하고, 민족과 나라간 테러를 , 전쟁을 하는 것이 과연 우리 인간의 행복과 진보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성경. 기독교와 관련된 도서들. 인터넷에서 수집한 자료등을  참고하여 작성  하였음. 최종 수정 : 24. 9. 27.)

 "  진실은 의심할수 없는것을 감히 의심 함으로써만 밝혀 질수 있다 " :  예수는 신화다에서 

 

*바울 서신 13편 기록연대

데살로니카 전서 : 주후 50년 -- 52년사이

고린도전서         : 주후 52년-- 55년사이

고린도후서         : 주후 55년 -- 56년사이

갈라디아서        :  주후 55년

로마서                : 주후 55년 -- 56년사이

빌립보서            : 주후 55년 -- 60년사이

빌레모서            : 주후 55년 -- 61년사이

바울 사망           :  주후 68년

골로세서           :  주후 70년 -- 80년 사이

에베소서           :  주후 80년 -- 90년사이

데살로니카후서 : 주후 90년

디모데서           : 주후 100년

디도서              : 주후 100년

디도서후서       : 주후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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