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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믿을 놈이 독생자 밖에 없어"

by 까마귀마을 2022. 8. 18.

전광훈이 광복절 기념으로 서울 한 복판에서 세과시를 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뉴스에 등장했다. 그런데 그 뉴스를 보고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을 놈이 독생자 밖에’ 없단다. 그리고 그 독생자가 바로 전도사로 일하는 전광훈의 아들이란다.

 

원래 기독교에서 ‘독생자’는 고유명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기독교 신앙 고백의 모든 출발이 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τόν Υιόν του Θεού τόν μονογενή, ‘신의 외아들’, 곧 독생자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정의되었고, 이후 이는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에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독생자의 아버지는 당연히 기독교의 신이다.

 

이 논리라면 이제 전광훈이 신이고 그 아들이 예수와 맞먹는 존재가 된다는 것인데, 이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심각한 죽을죄에 해당하는 독성죄에 해당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전광훈은 이미 ‘하나님도 까불면 죽어’라는 발언으로 유명세를 탄 인물이다. 그러니 그의 과거 발언과 연계해 보면 자신의 아들을 독생자로 부를 만도 하겠다. 자신이 신도 죽일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런 어마어마한 말을 전광훈이 쏟아내도 한국 기독교의 그 누구도 그를 감히 공격하지 못한다. 이유가 뭘까? 과연 그가 신도 까불면 죽일 수 있는 권능을 지닌 것이라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그런 언행이 충분이 수용되는 매우 ‘관용적인’ 사회가 된 것일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천하의 전광훈도 결국은 지극히 유교적인 자식 사랑의 프레임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에서 교회만이 아니라 정치계, 경제계는 물론 학계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지극히 유교문화적인 가부장제도의 흔적이다. 그래서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서양에서 수입된 기독교 계도 예외가 아닌 일이 되었다.

 

사실 개신교의 교회 세습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내로라하는 이른바 정통 교회에서도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기 위하여 온갖 비난을 무시하고 심지어 불법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아 온 것이 바로 한국의 개신교 성직자들 아닌가? 그러니 전광훈이 특별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까불면 죽는다’고 당당히 말하고 자기 아들을 ‘독생자’라고 지칭하여 스스로를 신의 경지에 올려놓아도 그 신자들은 ‘아멘’만 외치고 있는 사실이 놀랍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 정도 발언쯤은, 그리고 교회의 부자세습쯤은 이미 관용적이 행태가 되었으니 말이다. 지독히 부패한 사회에 잘 적응한 예가 아닐 수 없다.

 

서양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성직자가 교회를 자기 아들에게 세습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물론 중세에 일부 타락한 성직자들이 nepotism( 네포티즘 : 친족, 인연, 지연등 연고자를 중용하는 개념)에 빠진 적은 있었지만 교회의 부자 상속은 구조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근본적으로 교회는 신의 것이지 인간의 사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변방 국가인 한국 사회에서는 교회의 부자 상속이 공공연한 관행이 되었다. 기독교가 지독히 유교적인 가부장제도에 물든 한국 사회에 매우 잘 적응한 덕분이다.

 

많은 뜻있는 신학자들이 이러한 해괴한 관행에 대하여 문제 제기를 하고 그런 ‘타락한’ 성직자들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문자 그대로 세례 요한이 하던 광야의 외침에 불과했다. 마치 재벌이 기업을 온갖 편법을 동원하여 자식에게 물려주듯이 개신교 목사들은 신법을 어기면서까지 아들에게 교회와 교회에 속하는 재산을 물려주려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어쩌다가 한국 교회가 이 모양이 되었을까?

 

하늘나라를 위하여 무소유와 자선을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다고 밤낮 고백하는 자들이 왜 그리 교회 건물과 재산에 집착하는가? 당연히 그들이 믿는 것이 기독교의 신과 예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명칭은 하나님과 예수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만든 신일뿐이다.

 

사실 그 신은 바로 미국 Redeemer Presbyterian Church(리디머 장로 교회)의 담임목사인 Timothy Keller(팀 켈러)의 저서 < 내가 만든 신>(Counterfeit Gods)에 나오는 욕망, 집착, 돈, 성공이다. 이것이 한국 국민, 신자의 정신을 지배하는 집단의식 아닌가? 신자만이 아니라 성직자조차도 신에게 비는 것이 결국 이러한 자신이 만든 가짜 신들인 것이다. 신에게 자신의 ego(에고 : 인식과 행위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 를 내려놓고 욕심 없는 청정하고 여여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법이 절대로 없다, 그저 SKY에 입학하여 고관대작이 되는 성공을 거두어 떼돈을 벌며 강남의 펜트하우에 살면서 주지육림과 골프, 해외여행을 즐기는 것도 모자라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고가의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플렉스 하게 해 달라는 기도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이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함께 가고,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내주고, 누가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기꺼이 내밀며 원수조차 네 목숨을 바쳐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당부에는 ‘개 사과’나 줘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고도 자신의 신과 예수를 믿는다는 뻔뻔한 소리를 한다. 실제로는 자기가 만든 신을 믿는 주제에 말이다.

 

결국 전광훈과 같은 목사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이 그런 성직자가 활개 치는 토양이 되어준 것일 뿐이다. 마치 극우 유튜버들이 그들에게 성금을 보내는 ‘국민’들을 토양 삼아 독버섯처럼 피어나듯이 부자세습을 당당히 하는 목사들을 향해 ‘아멘, 할렐루야’를 힘차게 외치는 신자들이 있기에 전광훈이 1분도 안 되어 교회 재산을 자신과 아들이 ‘합법적’으로 사유화할 수 있는 것이다.

 

래서 전광훈은 아예 그런 신자들로 구성된 팬덤을 바탕으로 법원의 판결에도 ‘개 사과’를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법원에서 147억 원으로 합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도 결사적으로 교회를 방어한 신자들의 눈물겨운 ‘항전’ 덕분에 전광훈은 500억 원의 보상금과 더불어 새로 지을 교회 토지도 무상으로 받아낼 수 있었다.

 

사실 이런 전광훈에게 무조건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는 모습은 정치판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나라 일본에 팔아넘겨도 끝까지 지지하겠다는 그 팬덤이 한국 사회의 정치판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성이 마비되고 패거리주의에 중독되어 서로를 향하여 원수나 되는 듯이 오로지 감정 배설의 언행에만 몰두하는 자들이 넘치는 것이 바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반만년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단일 민족이라는 생각에는 예의 그 ‘개 사과’를 던지면서 말이다. 이토록 갈가리 찢어진 사회를 세상 어디에서 또 찾아볼 수 있을까?

 

정치계의 지역주의와 이데올로기적 대립도 모자라 종교계마저도 우리 교회, 우리 목사로 사분오열된 사회에서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한 국민과 신자를 토양으로 한 정치계와 종교계에서는 분열과 탐욕만이 득세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분열과 탐욕을 이용하여 대중의 감정 배설을 잘 유도할 줄 아는 자들이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로 활개 칠 수 있을 뿐이다. 땅이 정결한데 독초가 자랄 수는 없는 법인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누가 돌을 들어 전광훈을 칠 수 있겠는가? 전광훈도 윤석열과 김건희와 마찬 가지로 이 사회의 타락과 혼란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니 말이다. 정치계와 더불어 종교계마저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나라에서 예수가 말한 참다운 기독교 정신을 붙들고 버텨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기도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지극히 부패한 물에서 피어오르는 연꽃이 될 방법이 과연 있을까? 이 밤에도 한국의 하늘 아래 어느 구석에서는 예수가 눈물 흘리며 애통해하는 것 같다. 이런 ‘개 사과’ 같은 상황에서도​ 무조건 사랑밖에 할 수 없으니 참으로 불쌍한 예수다.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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