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山有路勤爲徑(서산유로근위경)
學海無涯苦作舟(학해무애고작주)
책으로 된 산에는 많은 길이 있으나 오르는데는 부지런함이 지름길이오
배움의 바다는 끝이 없으니 온힘을 다해 배를 저어 나가야야 한다.
(책을 쌓아 놓은 산에 오를 수 있는 지름길은 근면함 밖에 없고,
끝이 없는 학문의 바다로 나가려면 힘이 들어도 배를 만들어 타고 가야 한다)
--당송 8대가 한유(韓愈 768~824)의 권학문 (增廣賢文에 실려있음)--
*增廣賢文(증광현문)
[명심보감(明心寶鑑)], [채근담(菜根譚)]과 함께 동양의 3대 격언집으로 꼽히는 책이다.
중국 고전 속 격언이나 중국에서 예전부터 내려오는 속담 등을 모아 묶은 책으로 명나라 때부터 자녀들을 계몽하는데 사용되었고, 중국에서 필독서로 읽혀 왔다.
증광현문(增廣賢文)은 유학경림(幼學瓊林)과 함께 몽학교재로서 쌍벽을 이루었다 증광현문(增廣賢文)은 명심보감(明心寶鑑), 채근담(菜根譚)과 함께 중국 3대 처세 격언서라 하며 명심보감은 중국 명나라 초에 범립본(范立本)이 쓴 것이고, 채근담菜根譚은 중국 명나라 때 홍자성(洪自誠, 洪應明) 이 쓴 것인데, 명심보감(明心寶鑑)은 중국에서는 사라져 일반인은 잘 모른 채 증광현문(增廣賢文)을 최고의 속담집, 격언집, 금언집, 잠언집, 수양서, 교양서, 처세서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한유(韓愈)
중국 당(唐)을 대표하는 문장가 · 정치가 · 사상가이다.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자(字)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이며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등주(鄧主) 하내군(河內郡) 남양(南陽, 지금의 하남 성 맹주 시) 출신이나, 그 자신은 창려(昌黎, 하북 성河北省) 출신으로 자처했다.
한유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를 잃었다. 3세에 아버지를, 14세에 형 한회(韓會)를 잃고 형수 정씨에 의해 길러졌다. 7세 때부터 독서를 시작한 한유는 13세에 문장에 재능을 보였다. 정원(貞元) 2년(786년)부터 장안에서 과거에 응시했으나, 세 번이나 낙방하고서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다시 이부시(吏部試)에 응시하였을 때에도 다시 세 번이나 낙방한 그는 정원 11년(795년) 세 번이나 재상에게 글을 올리고서야 가까스로 천거된다.
정원(貞元덕종 )12년(796년) 변주(?州) 선무군(宣武軍)에서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 동진(董晉)을 따라 부임하여 관찰추관(觀察推官)을 맡아으며 동진이 죽은 뒤에는 무령절도사(武寧節度使) 장건봉(張建封) 휘하로 옮겨 절도추관(節度推官)이 되었다가, 장건봉이 죽은 뒤 낙읍(洛邑)으로 옮겨 살았다.
정원 17년(801년)에 국자감(國子監)의 사문박사(四門博士)가 되고, 19년(803년)에는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한유는 《어사대상론천한인기장(御史臺上論天旱人饑狀)》을 지어 당시의 경조윤(京兆尹) 이실(李實)의 폭정을 규탄하지만, 거꾸로 자신이 연주(連州) 양산현(陽山縣) 현령으로 좌천되고, 이때 그가 지은 글이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이다.
원화(元和 헌종)6년(811년)에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어 「진학해(進學解)」를 지었다. 원화 10년(815년)에는 배도를 따라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오원제(吳元濟) 토벌에 공을 세워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으며, 이때 『평회서비(平淮西碑)』의 글을 짓는다.
원화 14년(819년) 정월,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했던 헌종 황제는 당시 30년에 한 번 열리며 공양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여 신앙을 모으고 있던 봉상(鳳翔, 지금의 섬서 성陝西省) 법문사(法門寺)의 불사리가 헌종(憲宗)를 장안의 궁중으로 들여 공양하고자 하였다. 반불주의자인 그는 이듬해 「불골을 논하는 표(諫迎佛骨表)」를 헌종에게 올려 과거 양 무제(梁武帝)의 고사를 언급하며 "부처는 믿을 것이 못된다(佛不足信)"고 간언했고, 헌종은 대노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려 했지만 재상 배도와 최군(崔群)의 간언으로 사형을 면한 채 조주자사(潮州刺史, 조주는 지금의 광동 성)로 좌천당했다.
이듬해 헌종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다시 중앙으로 소환되어 국자제주(國子祭酒=대학 학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병부시랑(兵部侍郞), 이부시랑(吏部侍郞), 경조윤 겸 어사대부(御史大夫)의 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부시랑으로 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한이부(韓吏部)」로 불렀다고 한다. 57세에 병으로 죽었다.
사후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되었다. 송의 원풍(元?) 연간에 창려백(昌黎伯)으로 추증되었다.
한유의 문집으로는 《한창려집(韓昌黎集)》40권과 《외집(外集)》10권이 전하고 있다.
문장가로서의 최대 업적은 산문 문체의 개혁이다. 한유는 6조(六朝) 이래의 문단의 주류였던 대구(對句)와 음조(音調)를 중하게 여기는 병려체(騈儷體)에 대하여 수사주의에 치중해 있다며 비판하고, 한대(漢代) 이전의 자유스러운 형식을 표본으로 하는 고문(古文)을 주장하였다(고문부흥운동). 한유의 고문 운동을 지지했던 류종원(柳宗元)은 이후 한유와 함께 「한유(韓柳)」로 병칭되었다.
고문 부흥운동은 그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유교(儒敎)의 부흥과도 표리를 이루는 것이었다. 「원인(原人)」, 「원도(原道)」, 「원성(原性)」 등의 작품은 그러한 고문 부흥운동의 관점에서 쓴 것이다. 한유가 주장했던 배불론(排佛論)도 육조 시대부터 수당 시기에 이르기까지 주류를 이루던 숭불 경향을 배제하고 고대 중국의 유교가 가진 지위를 회복하자는 유교 부흥의 자세에서 나온 것으로, 그의 경향은 사후 수제자 이고(李?)가 물려받았다.
이성적이고 감정을 억제하는 경향은 송대 이후의 지식인이 추종하는 바가 되었던 것 같다. 그가 주창한 고문은 중화민국 시대에 이르러 일상 용어와 일치하는 ‘백화문’이 쓰이기 시작할 때까지 중국 문장의 본보기가 되었다. 사상가로서는 유교 중심주의를 강조하여, 불교도교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당시 불교 승려의 특권에 반대하고 봉건적인 일상윤·사회질서를 중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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