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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擧世皆濁 ( 거세개탁 )

by 까마귀마을 2022. 8. 6.

■ 거세개탁(擧世皆濁)

온 세상이 모두 흐리다. 즉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바르지 않다는 뜻이다. 또한 온 세상이 혼탁한 가운데서는 홀로 맑게 깨어있기가 쉽지 않고, 설령 깨어있다 해도 세상과 화합하기 힘들다는 것을 뜻을 말한다.

거세개탁(擧世皆濁)의 출전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굴원열전(屈原列傳)에 실려 있는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이다. 굴원은 초(楚)나라 충신으로, 그를 시기하는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벼슬에서 쫓겨난다.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거세개탁 아독청 중인개취 아독성 시이견방)

   ‘세상이 모두 탁한데 나 혼자 맑고, 모든 사람들이 취했는데 나 혼자 깨어있어 밀려났다'

 

어부사(漁父辭) - 굴원(屈原) -

屈原旣放(굴원기방) : 굴원이 쫓겨나
游於江潭(유어강담) : 강호에서 노닐며
行吟澤畔(행음택반) : 못가에서 시를 읊조리고 다니는데
顔色樵悴(안색초췌) : 안색은 초췌하고
形容枯槁(형용고고) : 모습은 수척해 보였다.
漁父見而問之曰子非三閭大夫與(어부견이문지왈자비삼려대부여) : 어부가 그를 보고 묻기를,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何故至於斯(하고지어사) :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르셨습니까”하니
屈原曰擧世皆濁(굴원왈거세개탁) : 굴원이 말하기를, “세상이 다 혼탁한데
我獨淸(아독청) : 나 홀로 깨끗하고
衆人皆醉(중인개취) :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我獨醒(아독성) : 나 홀로 깨어 있었습니다
是以見放(시이견방) : 이런 까닭에 추방을 당했다.”고 하니
漁父曰聖人(어부왈성인) : 어부가 말하기를, “성인은
不凝滯於物(불응체어물) : 세상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而能與世推移(이능여세추이) : 세상을 따라 변하여 갈 수 있어야 합니다.
世人皆濁(세인개탁) : 세상 사람들이 모두 탁하면
何不淈其泥而揚其波(하불굴기니이양기파) : 왜 진흙탕을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衆人皆醉(중인개취) :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다면
何不飽其糟而歠其醨(하불포기조이철기리) : 어째서 술지게미를 먹고 박주를 마시지 않으십니까?(박주 : 맛이 없는 술)
何故深思高擧(하고심사고거) :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처신하여
自今放爲(자금방위) : 스스로 쫓겨남을 당하게 하십니까?”하니
屈原曰吾聞之(굴원왈오문지) : 굴원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新沐者(신목자) :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必彈冠(필탄관) : 반드시 관을 털어서 쓰고,
新浴者(신욕자) : 새로 목욕한 사람은
必振衣(필진의)라: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安能以身之察察(안능이신지찰찰) : 어찌 결백한 몸으로
受物之汶汶者乎(수물지문문자호) :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寧赴湘流(녕부상류) : 차라리 상강에 가서
葬於江魚之腹中(장어강어지복중) : 물고기 뱃속에 장사 지낼지언정
安能以皓皓之白(안능이호호지백) : 어찌 결백한 몸으로서
而蒙世俗之塵埃乎(이몽세속지진애호) :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소?”하니
漁父(어부) : 어부는
莞爾而笑(완이이소) : 빙그레 웃고,
鼓枻而去(고설이거) :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 부르면서 떠나갔다.
乃歌曰滄浪之水淸兮(내가왈창랑지수청혜) : 곧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면(창랑 : 은자가 사는 강변)
可以濯吾纓(가이탁오영) : 내 갓끈을 씻고,
滄浪之水濁兮(창랑지수탁혜) : 창랑의 물이 흐리면
可以濯吾足(가이탁오족) : 내 발을 씻으리라.”하고
遂去不復與言(수거불복여언) : 마침내 떠나가 다시 함께 이야기 하지 못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오래된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중국 고대 굴원의 ‘어부사’는 삶의 올바른 태도에 대한 상반된 관점을 시사하고 있다. 세상과 화합하여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삶의 방식과 개인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의 부조화에서 오는 고통을 감수하는 삶의 방식이 극단적으로 대립된다. 전자는 중국 민중들에게 체화된 노자의 도가 사상과 관련이 깊고, 후자는 소수의 사회 지도계층이 견지해온, 정의를 목숨보다 중시하는 맹자의 유가 사상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양극단에 치우친 삶의 방식은 현대 사회에서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전자의 사회환경 조화주의는 세상에 대한 환멸에 부딪히는 순간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고, 후자의 개인적 고결주의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회의가 일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이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은 개인적 이익이 절대 가치로 승격한 현대 사회에서 부조리한 사회와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자칫 시류에 영합하는 포퓰리즘과 보신을 위한 기회주의로 전락할 유혹을 배제하기 어렵고, 사회 발전을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비판적 사고가 함몰될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뒤는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개인이 선택한 정치적 신념이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한갓 독선과 독단의 도그마(교조)에 빠질 수도 있다. 게다가 앞은 사회환경이 언제나 개인의 복지를 위해 운영되지 않는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안고 있고, 뒤는 개인의 신념이 국민 다수가 동의하는 일반의지와 거리가 먼, 절대적 선이 아닐 수 있다.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면 집단이나 조직에서 배척당하는 왕따를 당할 수 있고, 개인의 고결함을 견지하지 못하면 자존감을 상실하고 개인의 존엄성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은 양극단의 삶의 태도에서 벗어난 중도(中道)를 찾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양자의 대립을 지양하는 변증법적 합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붉은 먼지가 자욱한 세상과 더불어 살듯, 독야청청(獨也靑靑)의 바름과 굿굿함을 잃어버리지 말고 다수의 동의를 바탕으로 한 일반의지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 또한 하나의 삶의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김한길 오륙도 신문 칼럼 일부 옮겨옴) 

 

 

 

굴원(屈原)은 굴(屈)은 성이고, 원(原)은 자이다. 본명은 평(平)이다. 

전국시대 양쯔강 중부 유역의 큰 나라였던 초나라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났고 회왕시기  좌도, 삼려대부(三閭大夫)라는 중책을 맡는등 활동하다 경양왕(頃襄王) 시기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굴원은 혼란했던 전국 시기의 상황에 불우한 자기의 처지를 글로 표현하였는데 이런 그의 작품이 후대에 초사(楚辭)로 불리며 인정받게 되었다.

진나라의 소양왕(昭襄王)이 음모를 꾸며 초나라 회왕을 초청했다. 이때 초나라의 대부 굴원은 회왕이 가는 것을 말렸지만 회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고 소양왕은 회왕을 함양에 가두고 초나라에 땅을 바치라고 요구하였다. 초나라 대신들은 그 요구를 거절하면서 태자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경양왕(頃襄王)이다.

회왕이 그 후 1년 뒤 초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병들어 죽자 초나라 사람들은 격분하였고 이에 굴원은 경양왕에게 인재를 등용하고 군사력을 키워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재상의 지위에 있던 자란(子蘭)이 굴원을 반대하면서 심지어 경양왕 앞에서 굴원을 헐뜯기 일수였다.

경양왕은 자란의 말만 듣고는 굴원을 파직시키고 유배 보냈다. 유배를 간 굴원은 멱라강(汨羅江)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신세를 한탄하면서 시를 지었다. 기원전 292년 강남으로 유배된 굴원은 강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 동정호(洞庭湖)에 도착했다. 굴원의 대표적인 작품 〈어부사(漁父詞)〉는 이때 남겨진 것이다   굴원은 이 시에서 세상이 혼탁한데 홀로 깨끗한 자신을 빗대며 '거세개탁 아독청(擧世皆濁 我獨淸)'이라 읊었다. 

어부가 건넨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탁하면 발을 씻으라'는 시를 뒤로 한 채 기원전 278년 5월 5일, 단오날 돌을 가슴에 안고 멱라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세상의 기운은 청탁이 혼재되어 있기 마련인데 혼탁함이 너무 심하면 맑은 기운의 소유자는 견디기 힘들어 술과 시를 찾기 마련인가 보다.

 

초나라 문학을 대표하는 시가집 楚辭 (초사)의 대표 작가는 굴원이다.  (楚辭는 초나라 민요풍의 노래를 모은 시집)  그는 북방 문학의 효시인 《시경》의 4자구를 3자구로 바꾸었으며, 혜(兮), 사(些) 같은 조사를 이용하여 2개의 3자구를 연결시켜 7언구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시가의 내용이 더 풍부해졌고, 후대의 동방삭(東方朔), 이백(李白), 두보(杜甫) 등 많은 시인들이 영향을 받았다. 굴원은 〈이소〉, 〈천문(天問)〉〈구가(九歌)〉〈구장(九章)〉〈어부사〉〈귤송(橘頌)〉〈회사(懷沙)〉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이소(離騷)(근심을 만나다)는 장편시 이며 분노와 실망 그리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자전적 성격을 띤 〈이소〉는 굴원의 출생과 집안 내력을 밝히는 데서 시작한다. 그다음으로 굴원은 자신의 의지와 품행에는 한 치의 거짓됨이 없고 세상은 이미 소인배들의 것이라 그 혼탁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면서, 이러한 세상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책임이 막중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자신의 진심을 호소하기 위해 신을 찾아 하늘의 문으로 향하지만, 하늘의 문은 열리지 않고 땅의 신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회의에 빠진 그는 주술사 무성(巫成)과 영분(靈氛)을 찾아 점을 치고, 영분은 그에게 자연의 이치를 연구하여 인간의 진리를 찾으라고 조언한다. 이에 그는 인간의 진리를 찾기 위해 방랑길에 오른다. 방랑길에서 그는 우연히 자신의 고향을 지나치게 된다. 그런데 말을 끄는 마부도, 말도, 초나라를 떠나려 하지 않자 그는 그제야 자신이 초나라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이소〉는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은 굴원이 죽음을 택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중국 ‘사부(辭賦, 산문에 가까운 운문)’의 원조로 그에게 중국 최초의 시인이라는 호칭을 얻게 하였다. 또한 문학성이 뛰어나고 나라에 대한 절절한 충심이 잘 표현되어 있어 후대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굴원의 이소를 《시경》의 국풍(國風, 민요 부분)은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나 그 품위가 낮지 않으며, 소아(小雅, 정사 부분)는 세상의 불공평을 원망하면서도 그 도가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이소는 이 둘을 모두 가졌다.”라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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