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三問(성삼문)
조선 세조 때 단종의 복귀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 중 한 사람으로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 자는 근보, 눌옹, 호는 매죽헌이며 외가인 홍주(洪州) 노은골에서 출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 이름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세종 17년(143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식년시에 응시해 하위지와 함께 급제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등과 함께 이를 도왔고, 신숙주와 함께 명나라와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을 배우고 제도를 연구하는 등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하고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김질이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후에 성승(성삼문의 아버지), 하위지 등과 함께 능지처형을 당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찾아옵니다. 다만 언제, 어떻게 그것과 대면하는가가 사람마다 다를 뿐입니다. 어쩌면 그중에 가장 힘든 대면이, 번연히 죽을 줄 알면서도 제 발로 그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겠지요. 그런데도 550여 년 전에 한 치의 망설임이나 흔들림 없이 그 속으로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음 세대를 살았던 남효온은 그들을 「육신전」이라는 글로 기록했고, 후대의 우리들은 ‘사육신’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들 맨 앞에 성삼문이 서 있습니다.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회수일욕사(回首日欲斜)
황천무일점(黃天無一店)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형장의 북소리는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려 하네
황천 가는 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
오늘밤은 뉘 집에서 묵어 갈까나
세간에 성삼문의 절명시로 알려진 시입니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겁니다. 제가 아는 한, 죽음을 대하는 가장 의연한 자세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볼 겁니다. 저 또한 이생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가끔 상상합니다. 인간이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없는 유일한 게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다 보니 상상의 영역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저의 경우 그 상상의 끝은 늘 ‘어떻게 죽을 것인가’ 입니다. ‘언제’ 죽을지는 장담할 수 없으니, 그나마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서라도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성삼문처럼 시 한 수 읊으며 덤덤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자신은 없습니다.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은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고 했습니다.
(人固有一死, 死有重於泰山, 或輕於鴻毛 用之所趨異也 인고유일사, 사유중어태산, 혹경어홍모 용지소추이야)사마천은 새털보다 가벼운 죽음을 거부하고 궁형을 당하면서도 살아남아 태산보다 무거운 『사기』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성삼문은 죽음 그 자체를 의연히 받아들임으로써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성삼문은 단종의 복위를 꿈꾸다 실패하여 처형당한 사육신 중 한 명입니다.
1456년 6월, 조선의 하늘은 파랗게 맑기만 한데 그 땅과 강물은 핏빛으로 물들어갔습니다. 그달은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지 꼭 1년째 되는 달입니다. 1455년 윤6월 11일,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었습니다. 노골적으로 왕위를 탐하는 무소불위의 숙부를 둔 힘없고 어린 임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요.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날의 일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세조실록」의 첫 번째 기사입니다. 당시 상황에선 엄연히 단종이 임금이고 세조는 대군 중 한 명일 뿐인데도, 세조 사후에 작성된 실록이다 보니 단종은 노산군으로, 수양대군은 세조로 기록했습니다.
“(노산군이) 또 명하여 재촉하니 동부승지 성삼문이 상서사(尙瑞司)로 나아가서 대보를 내다가 전균으로 하여금 경회루 아래로 받들고 가서 바치게 하였다. 노산군이 경회루 아래로 나와서 세조를 부르니, 세조가 달려 들어가고 승지와 사관이 그 뒤를 따랐다. 노산군이 일어나니, 세조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하였다. 노산군이 손으로 대보를 잡아 세조에게 전해 주니, 세조가 더 사양하지 못하고 이를 받고는 오히려 엎드려 있으니, 노산군이 명하여 부축해 나가게 하였다.”
그달은 윤달이었습니다.
‘공달’ 혹은 ‘덤달’이라고 부르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공짜로 보태진 달입니다. 그래서 흔히 걸릴 것도 없고 탈도 없는 달이라고 해서 결혼이나 이사, 이장 등 집안의 중대사를 윤달에 처리하곤 했지요. 어쩌면 단종은 이러한 윤달의 풍속, 그 ‘뒤탈 없음’을 믿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미 이태 전(1453)에 자신의 수족을 역적으로 몰아 모두 죽이고, 영의정뿐 아니라 이조와 병조 판서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 칼끝을 자신에게 겨누며 옥죄어오던 숙부였습니다. 칼날이 아니더라도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르는 고통의 나날 속에서 어린 임금이 의지할 데는 없었습니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었고, 그토록 총명하시던 아버지마저 왕위를 오래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지요. 할아버지인 세종이 자신을 안은 채 “이 아이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던 집현전 학사들은 아직 자신의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중 일부는 이미 수양대군 편에 붙어버렸지요.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윤달에는 송장을 거꾸로 세워도 탈이 없다”고 하니, 이때 왕위를 넘겨주면 자신에게 아무런 뒤탈이 없을 거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어린 단종에게는 선택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예방승지로서 직무상 어쩔 수 없이 선위의 자리에 대보(大寶)를 들고 가던 성삼문은 대보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왕이 국정을 다스릴 때 사용하는 모든 도장을 옥새라 부르는데, 대보는 그중 가장 중요한 도장입니다. 주로 왕위를 물려줄 때 상징적으로 전해주는 게 바로 이 대보죠. 중국에 문서를 보낼 때도 이 대보를 찍었습니다. 또 다른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은 선위식이 거행된 경회루 못에 빠져죽으려 하였으나 성삼문이 후일을 도모하자며 말렸습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성삼문과 박팽년을 중심으로 한 집현전 학사 출신들은 단종의 복위를 위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죠. 또한 권자신, 윤영손 등 단종의 처가 사람들과도 긴밀히 의논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조의 일정을 면밀히 체크했습니다. 당시 성삼문은 좌부승지로서 세조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알 수 있는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마침내 기회가 왔습니다.
1456년 6월 1일, 세조가 창덕궁에서 연회를 베풀기로 한 것이죠. 당시 조선은 국왕이 바뀌면 명나라의 황제에게 책봉을 청하는 주문사를 파견했습니다. 이때는 신숙주가 주문사가 되어 북경으로 갔습니다. 그 결과 명은 세조의 책봉을 승인하는 사신을 조선에 보냈고, 연회는 명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환송하는 자리였습니다. 단종 복위 세력들은 이날을 디데이로 잡았습니다. 더구나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뿐 아니라 함께 복위를 도모했던 유응부와 박쟁이 임금을 호위하는 별운검이 된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하늘이 돕는 절호의 기회였죠. 이들은 “연회가 시작된 후 곧바로 거사를 일으켜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오른팔들(한명회, 권람, 정인지 등)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는 건 손바닥 뒤집는 일과 같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이들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한명회가 세조에게 별운검을 두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기 때문이죠. 자신의 ‘장량(한고조 유방의 책사)’이라며 신임하는 한명회의 말을 흘러들을 세조가 아니었습니다. 세조는 자리가 좁다는 이유를 들어 별운검을 폐지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성삼문은 별운검을 없앨 수 없다고 간하였으나, 세조는 신숙주에게 연회장 상황을 한번 살펴보게 한 다음 결국 별운검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한명회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어려웠을 겁니다.
당시는 김종서 등을 제거한 계유정난(1453)이 일어난 지 삼 년도 채 안 된 데다,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지 불과 일 년밖에 안 된 때였습니다. 때론 성공하기도 하고 때론 실패하기도 했지만, 동서고금의 거의 모든 역사에서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늘 있었습니다. 한명회가 이를 모를 리 없겠죠. 그러니 눈에 불을 켜고 레이더를 가동시키고 있던 한명회에게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이 포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더구나 당시 유배 중이던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과 집현전 학사 출신 및 그 주변 인물들은 요주의 사찰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성삼문은 옥새를 전해 주며 대성통곡을 했을 뿐 아니라, 그전에도 이미 전과가 있었습니다. 계유정난 후 책봉된 공신 명단에 성삼문도 포함되었습니다. 거사 당일에 집현전에서 숙직한 공이 있다는 이유였죠.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자신의 거사를 합리화하기 위해 최고의 두뇌 집단이자 유학자인 집현전 학사들이 필요했습니다. 단지 들러리용이라기보다는 당대 젊은 인재들의 지지를 받고 싶은 마음이 작용했을 겁니다. 그런데 성삼문은 세조의 그런 맘도 몰라주고 “자신은 공이 없다”며 공신록에서 빼줄 것을 요청합니다. 당시 공신록에 이름이 올랐던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축하연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성삼문만은 끝까지 잔치를 하지 않았죠.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 또한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강탈하자, 집으로 달려가 통곡한 후 벼슬을 내놓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세조가 벼슬을 내려도 병을 핑계로 마다했던 겁니다. 그러던 사람이 세조가 여는 연회의 별운검을 아무 망설임도 없이 맡으니 한명회의 눈에 자연스럽게 비칠 리가 없었을 겁니다.
유응부를 비롯한 무신들은 별운검과 상관없이 계획한 거사를 실행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삼문과 박팽년은 “세자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뒷날을 도모하자며 이들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뒷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완벽한 기회를 엿보던 그들의 결정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우리 삶에서 ‘완벽함’이란 결과론적일 때가 많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계획한 거사를 성공시키면, 그 거사는 ‘완벽한’ 상황을 선택한 ‘완벽하게’ 계획된 것으로 평가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어떤 일의 ‘결과’라는 것은 인간이 미리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행위는 ‘완벽한 선택’이 아니라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선택’의 연속일 뿐입니다. 결국 단종 복위 세력들은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봐왔듯이, 한번 세상에 발설되었다가 어긋난 음모는 미래를 기약하며 다시 주워 담아 추스를 수 없는 법입니다. 비밀이란 놈은 인내심도 그리 강하지 않을뿐더러 그 유효기간 또한 그리 길지 않기 때문이죠. 희망에 찬 거사가 칼 한 번 뽑아보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가면, 그 무리 속 누군가의 불안감은 증폭되기 마련입니다. 이번엔 김질이라는 인물이 그랬습니다. 거사 실패 후 불안해진 그는 그날로 장인이자 의정부 우찬성인 정창손에게 쪼르르 달려가 거사 계획을 밀고하고 맙니다. 정창손은 그길로 사위의 손을 잡고 궁궐로 향했지요. 그리고 운명의 날인 6월 2일이 되었습니다.
그날 「세조실록」의 첫 번째 기사는 간략했습니다.
기사에는 단 두 글자만 적혀 있습니다. ‘주회(晝晦)’, 즉 ‘낮이 어두웠다’는 것입니다. 일체 어떤 설명도 붙어 있지 않습니다. 요즘 식으로 무슨 일기예보를 적어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단 두 글자가 웅변하는 그날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록이다 보니 세조와 그 정권의 입장에서의 ‘어두움’이겠지만, 기실 사육신을 포함한 복위 운동 가담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날 김질과 정창손은 “비밀히 아뢸 것이 있다”며 경복궁 사정전으로 나아가 성삼문 등의 거사에 관해 세조에게 털어놨습니다. 성삼문이 했다고 하는 말 중에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그러나 죽어야 마땅하다”라는 말은 김질이 이날 했던 밀고 내용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조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세조는 급히 승지들을 불렀습니다. 그중에는 좌부승지인 성삼문도 있었죠. 결국 그 길로 성삼문에 대한 취조가 시작됩니다. 김질과의 대질 끝에 성삼문의 입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육신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의 이름이 나왔고, 그리고 다시 유응부와 박쟁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성삼문은 회피할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습니다. 언급된 모든 사람이 붙잡혀왔습니다.
국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조는 박팽년에게 다가갔습니다. 한차례 곤장 세례 후 공모한 사람을 묻자, 박팽년은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이개, 김문기, 성승, 박쟁, 유응부, 권자신, 송석동, 윤영손, 이휘와 내 아비였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세조가 다시 추궁하니, “아비까지도 숨기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대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박팽년의 이 말을 성삼문의 말로 착각하곤 합니다. 사실 그럴 만도 합니다. 단종 복위 운동이나 사육신의 이야기가 거론될 때면 늘 성삼문과 함께 그의 아버지인 성승의 이름이 맨 앞에 자리하곤 했습니다. 부자의 이름이 함께 오르내리는 건 거의 이 둘 뿐이니, 앞말을 성삼문이 했던 말로 착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박팽년의 아버지로,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지낸 박중림 또한 단종 복위 운동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었습니다. 당대의 뛰어난 학자이자 성삼문과 하위지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내놓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으며, 거사를 준비할 때부터 가담했던 인물입니다. 국문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세조는 6월 6일 집현전을 없애버렸습니다.
6월 7일에는 결국 단종이 연루됩니다.
국문을 받던 성삼문과 권자신은 상왕(단종)도 역모 사실을 알고 있으며, 거사 당일에도 권자신이 창덕궁에 나아가니 상왕이 대도자(大刀子)를 내려주었다고 했습니다. 권자신은 단종의 외삼촌입니다. 같은 날,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이미 옥중에서 죽은 박팽년, 그리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은 유성원과 허조(이개의 매부로, 세종 대 문신 허조와는 동명이인입니다)의 시체가 거열된 후 전국 팔도에 나눠 전시되었습니다.
6월 8일, 백관들이 빙 둘러선 가운데 군기감 앞길에서 성삼문, 성승, 박중림, 이개 등 단종 복위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능지처참을 당한 후 3일 동안 저자에 효수되었습니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은 이들 중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과 무인인 유응부를 일컬어 ‘사육신(死六臣)’이라는 이름으로 그 충절과 의리를 기억합니다. 나라에서 버림받은 후 큰 돌덩이를 안고 스스로 멱라의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초나라 굴원처럼, 그들은 그렇게 주막 하나 없는 곳으로 갔습니다.
앞에 소개한 절명시의 작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그 시가 성삼문의 작품으로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후기 이긍익이 저술한 『연려실기술』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한참 앞선 16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어숙권이 쓴 『패관잡기』에는 “성삼문의 작품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근거로 성삼문보다 앞 세대인 중국 명나라 초기의 인물 손궤가 지은 시를 제시했습니다. 손궤 또한 처형당한 인물로, 시를 지은 상황과 내용이 아주 비슷합니다. 손궤의 시는 이렇습니다.
타고성정급(鼉鼓聲正急)
서산일우사(西山日又斜)
황천무객점(黃天無客店)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북소리 급해지고
서산의 해 또한 기우네
황천에는 객점도 없다는데
오늘밤은 뉘 집에서 묵어갈까나
시의 뒷부분만 보면 ‘객점(客店)’이 ‘일점(一店)’으로 바뀌었을 뿐 두 시가 동일합니다.
성삼문의 문집인 『성근보집』에도 이 절명시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추측이 가능하겠죠. 사육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누군가가 손궤의 시를 차용하여 사육신의 대표적 인물인 성삼문이 죽기 전에 읊은 시라며 그 충절을 퍼뜨렸을 수 있습니다. 한번 퍼지기 시작한 이야기는 세월 속에서 여러 가지 버전으로 구전되다가 이긍익이 그중 하나를 듣고 『연려실기술』에 포함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성삼문의 입에서 나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명나라를 여러 차례 다녀오고, 명의 학자들과 교류가 많았던 성삼문은 손궤의 시를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쩌면 사형장으로 가면서 성삼문은 고개를 돌려 서산으로 기우는 해를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머릿속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손궤의 시가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죽음을 눈앞에 둔 자신의 심정을 그만큼 잘 대변해주는 시도 없었겠죠. 그래서 그 시에 빗대어 이승에서의 마지막 회한을 토해내지 않았을까요.
사실 논란의 여지없이 성삼문의 절명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는 따로 있습니다.
성삼문은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 어린 딸 효옥이 수레를 따라오면서 울자,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내자식은 다 죽을 것이고,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라며 달래고는, 집안의 종이 울면서 술을 올리자 몸을 굽혀 마신 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앞선 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시입니다.
이 몸이 죽어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죽음을 앞두고도 꺾이지 않는 절의가 듣는 이의 마음을 절로 숙연하게 합니다.
이 시는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역의 성삼문 각비에도 적혀 있습니다. 봉래산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여름의 금강산을 부르는 별칭으로 사용되기도 하나, 원래는 방장산, 영주산과 함께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삼신산 중 하나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중국의 동쪽 바다인 발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산으로, 그곳에는 신선이 살고 불사약과 불로초가 있다고 합니다.
진시황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곳이지요. 또한 새와 짐승이 모두 희고, 궁궐은 황금과 백은으로 지어졌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성삼문은 38살의 젊은 나이에 그렇게 전설 속으로 떠났습니다. 어쩌면 그곳에서 낙락장송이 되어 하얀 새들과 놀며 현세에서 이루지 못한 불사의 꿈을 이루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 한봉희 (출간작가) 일부보완
성삼문은 대역죄인으로 처형을 당했으나 그의 충절을 기리는 움직임은 사림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김종직·홍섬·이이 등이 그의 충절을 논했으며,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 秋江集〉에서 그를 비롯하여 단종 복위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명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육신전〉). 이후 이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다.
마침내 1691년(숙종 17)에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성삼문 등 사육신의 처형 후 그들의 의기와 순절에 깊이 감복한 한 의사(義士)가 시신을 거두어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었다 하는데, 현재 노량진 사육신 묘역이 그곳이다.
또 처형 직후 전국을 돌면서 사육신의 시신을 전시할 때,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에 있다. 장릉(莊陵 : 단종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강원도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서울특별시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충청남도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매죽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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