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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예수시대 혼돈의 유대땅

by 까마귀마을 2021. 12. 22.

혼돈의 유대땅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가 생존했다는 시기의 이스라엘은 비록 로마의 지배를 받고는 있었지 만 평화로운 듯 보인다. 이러한 복음서속의 묘사는 과연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되는가?

기원을 전후로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무장봉기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혼돈의 시기였다. 당시 식민통치를 했던 로마와 로마의 괴뢰정권에 대해반기를 든 유대인들의 무장투쟁은 예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서 그가 사망한 후에도 100여년 동안 끝나지 않고 계속 되었다.

 

당시 유대역사를 대략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BC 141년에는 하스모니아(Hasmoneans) 왕가가 통치 했으나, BC 63년에는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 당하고 유다는 정복되었다. 비슷한 시기인 BC 67~63년에는 하스모니아 왕가의 내분이 일어난다.
BC49년에는  로마의  폼페이우스의  군대에게 팔레스타인 전체가  함락 되었으며 예루살렘의 스룹 바벨 성전은 파손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관습을 보존하는 것이 허용 되었지만, 최종적인 권위는 로마법에 따라 수행되었으며 로마군대에 의해 통제되는 식민지 정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의 영토는 너무나 광대 하였으며 로마는 자신의 사건들로 골치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를 통치할 괴뢰정부를 세우게 된다. 괴뢰정부의 첫번째 왕은 BC 63년에  팔레스타인의 왕좌를 차지한 에돔인 이두매   지역사람  안티파터 (Antipater )였다. 그가 BC 37년에 죽자 그의 아들 헤롯대왕(Herodes)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는 BC 4년까지 통치했다.

이즈음, 유대인들의 무장투쟁은 끊임없이 계속 되었는데, 로마나 유대 지배계급은 이 독립운동의 주체들을 '강도'(lestai)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강도들은 단순히 폭도들을 의미 하는것이 아니라 유대인 매국노에 항거하려는 목적이 주된 것이었다. 이들을 지칭했던 또 다른 용어는 '열심당'(Zealots)이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8권 8절에 의하면 유대인의 무장투쟁은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서 잿더미로 변할 때 까지 계속 되었다고 한다. 특히, 예수가 어린시절을 보내며 선교 활동의 중심지라고 말할수 있는 갈릴리는 유대인들의 무장 독립투쟁의 거점이기도 했다.

BC 47년 히스기야(Ezekias)가 일으킨 무장투쟁, BC 40~37년경에 일어난 안티고누스(Antigonus)의 무장투쟁에 이어서, BC 4년경 헤롯 대왕의 임종을 앞두고 일어난 성전 대학살이라고 불리는 왕자들의 권력투쟁, 히스기야의 아들 유다가 갈릴리 세포리스 근교의 무리들을 규합해서 궁궐을 습격하고 병기고를 약탈한 무장투쟁이 연이어서 터진다.

헤롯대왕이 사망한후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로마로 승인을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유대에서는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으며 자칭 왕이라는 자들이 여러명 등장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전역이 무장 혁명단체로 들끓게 되는데, 헤롯의 노예였던 시몬이는 자가 무리들을 규합해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하고 다니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에 아뜨롱게스라는 사람도 스스로 왕을 자칭하고 다녔다.

반란이 들끊게 되자 BC 4년 로마의 바루스(Varus)는 세포리스를 공격했고, 주민을 노예로 사로잡고 도시를 불태웠다. 바루스는 그의 다른 군대 일부를 떼어 지방으로 파견해서 유대 반란자들을 색출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사건으로 2000여 명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무장투쟁은 끊이질 않았으며, AD 6년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구레뇨가 호구조사를 하자 가말라(Gamala)에서 골란 출신 유다(Judah)가 바리새인 째독(Zaddok)과 함께 무장투쟁을 일으켰다.

헤롯대왕에게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의 통치권을 물려받은 아들 아켈라오의 통치 역시 혼란과 피바람으로 얼룩졌다. 이혼녀와 결혼한 아켈라오에 대해 많은 유대인들이 반발을 했는데, 아켈라오는 두번에 걸쳐서 대제사장을 해임시키고 그의 군대는 유월절에 3천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10여년에 걸친 그의 통치기간중 결국 유대인들의 반발이 끊이질 않자, AD 6년 로마는 아켈라오를 고울 지방으로 유배 시킨뒤 코포니우스 출신의 총독을 임명하게 된다.

한편, 갈릴리 유다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의 기록은 알 수 없지만 그의 아들들이 대를 이어 줄기찬 투쟁을 벌였다. 그의 아들 둘이 십자가형에 처형 되었고, 또 다른 아들인 엘르아살(Eleazar)은 AD 68년 유대혁명이 시작되자 스스로 메시아라고 자칭하면서 자객(sicarii)들을 이끌고 마사다 전투를 이끌었다고 한다.

헤롯대왕이 사망한 BC 4년 무렵에 예수가 태어났다는것을 고려한다면 그의 어린시절과 이스라엘의 정치적 혼돈은 결코 무관할수가 없다. 복음서 속에는 예수의 청년시절이 등장하지 않는데, 30세 무렵에 예수가 다시 사역을 시작한 그 때에도 갈릴리 뿐만 아니라 유대 전역, 심지어 예루살렘에서도 무장투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예를들어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의하면 빌라도가 예루살렘으로 황제의상을 몰래 갖고 들어오자 시골에서 농민들이 몰려 왔으며, 빌라도가 성전세를 수로관 건립에 유용하자 격분한 민중들이 빌라도를 포위했고 그는 무자비한 강제 진압을 감행했다.

그외에도 헤롯 안디바가 본부인을 내쫓고 형제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재혼을  하자 유대인들이 크게 반발을 했으며, 자기 딸이 강제 이혼 당한 것에 분노한 아레스터 왕은 AD 36년에 베뢰아를 침공하여 전투가 벌어진다.

예수는 이때쯤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고 하는데 유대인들의 무장투쟁은 끊임없이 일어나 이스라엘은 망국의 운명으로 내달리게 된다. 유대인 사이에서도 맞서는 파벌들이 생겼으며, 대제사장이 잇달아 바뀌면서 성전은 싸움과 살인으로 얼룩졌다. 벨릭스, 베스도, 알비누스, 플로루스 등 총독들의 학정은 갈수록 그 악랄함을 더했다.

AD 44년 무렵 메시아를 자칭하는 테우다스(Theudas)는 가정과 재산을 포기하자고 주장하며 사막에서 무리들을 모아 요단 강변으로 몰려가 서쪽 예루살렘을 진군하려고 했지만, 로마 총독 쿠스피우스 파두스는 기병대로 테우다스의 목을 베고 그의 부하들을 살육 한다.

AD 50년 유월절 행사가 진행되던 중 순례자들과 로마 병사의 사소한 충돌로 인해 로마의 보병군단이 진군해 들어가 2만 명이 학살 되었다.

52년에는 20년 간 산에서 투쟁경력을 쌓은 엘리자 벤 데이나이오스(Eleazaur ben Deinaios)가 혁명을 일으켰으나, 총독 쿠마누스가 관련자들을 체포하여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러나 혁명이 전국적으로 확산 되어가자 새로운 총독 펠릭스가 완전히 진압하고 엘리자를 체포하여 로마로 압송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펠릭스가 십자가 형으로 처형한강도(무장 독립군)들의 수효는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펠릭스에 이어 부임한 총독 페스투스(Festus )는 닥치는 대로 유대인의 무장 투쟁단들을 살해     했으나 로마군은 몇 차례 걸쳐 무장 독립군에 패배하게 된다. 그러자 네로 황제는 로마의 최고명장 베스파시안(Vespasian)을 파견했고 6만 5천의 최신예 무기를 갖춘 로마군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베스파시안은 네로가 죽자 아들 티투스에게 과업을 승계해 AD 70년 예루살렘 함락시키고 성전을 불태웠다.

AD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최후의 항전 이후에도 유대인의 무장독립군은 메시아 신앙으로 저항을 계속한다.

AD 132년에 바르 코흐바(Bar Kochva: 별의 아들)가 20만 군대를 조직하여 유대 독립국가를 수립했다. '시몬, 이스라엘의 왕자'라고 새겨진 화폐까지 유통 시킬 정도로 그 규모가 대단 했으며, 당시 유대인들은 코흐바를 메시아로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국가는 3년 천하를 이루었다.

로마는 1개 군단이 전멸을 당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서야 코흐바의 독립운동을 진압할수 있었다. 증오심에 사로잡힌 로마군은 1천여 마을을 초토화 시켰으며 50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 이후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는 로마의 지도에서 아예 유대라는 땅을 지도에서 지워 버리게 된다. 예루살렘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u Capitolina)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바뀌면서 유대인의 접근이 금지 되었다.

예수의 일대기를 담은 복음서들, 그리고 예수가 죽은후의 일을 기록한 사도행전 같은 신약성서를 읽는다면, 예수와 그의 사도들의 생애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처참하고 격렬했던 혼란과 혼돈의 시기임에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역사적 맥락을 알수있는 기록이 전혀 없음을 쉽게 알수있을 것이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당시 유대인들은 괴뢰정권인 헤롯일가와 로마의 세금징수에 대해 반발심 같은 것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당시 유대사회는 비교적 평화로운 듯이 보인다.

복음서와 사도행전같은 신약성경의 독자들은 예수 이전에도, 예수 당대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지역에서 해방 무장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사실은 더더욱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복음서에서는 이러한 당시의 긴박한 상황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다!

 

필자가 한가지 감을 잡은것이 있다면 복음서는 헬라화된 유대인들에 의해 헬라어로 기록되었고, 초대교회는 로마화된 유대인들에게 크게 유행했다는 점을 놓치면 안된다는 점이다.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마침내  국교로  삼은  사람도 유대인들이 100년에 이르도록 적대시한 로마군의 황제 였다는 점을 간과 해서는 안될것이다.

​유대역사를 파악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인물인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에게는 매국노와 다를바 없었다.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에서 무장 독립투쟁을 일으키는 동족들을 모두 강도와 폭도로 지칭했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와  사도행전등 신약을 기록한 헬라화된 유대인들은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에게는 강도와 폭도로 지목된 유대인들의 무장 독립투쟁을 기록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부담스러웠을 것이니 아예 언급을 하지 않았는것으로 여겨진다.(옮겨온 글 보완)

예수시대의 팔레스타인

1세기의 팔레스타인은 대단히 어수선한 곳이었다. 얼마동안 성지는 왕조적인 투쟁들, 피비린내나는 싸움, 그리고 때로는 전면적인 전쟁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B.C 2세기에는 마카베 형제들에 관한 두권의 외경서들에 의해 기록되어 있듯이 다소 통일된 유대 왕국이 잠시 동안 수립되었다. 하지만 B.C 63년이 되자 그 땅은 다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었으며 정복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예수의 출생 50여년 전에 팔레스타인은 폼페이우스의 군대에게 함락되었으며 로마의 법률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로마는 너무나 광대하였으며 로마 자신의 사건들로 골치를 앓고 잇엇기 때문에 직접적인 통치에 필요한 행정적인 조직체를 설치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로마는 로마의 보호를 받아 통치할 일련의 분봉왕들을 세웠다. 이 분봉왕 계열은 유대인이 아니라 아라비아인이었던 헤롯 집안이었다. 그 계열의 첫번째 인물은 B.C 63년에 팔레스타인의 왕좌를 차지한 안티파터(Antipater)였다. 그가 B.C 37년에 죽자 그의 아들 헤롯대왕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는 B.C 4년까지 통치하였다. 우리는 무력으로 유지되는 꼭두각시 정권에 의해 통치된 피정복 국가와 피정복 백성을 상상하게 된다. 그 나라의 백성은 그들 자신의 종교와 관습을 보존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최종적인 권위는 로마였다. 이러한 권위는 로마법에 따라 수행되었으며 로마군대에 의해 강화되었다. 얼마후 영국에서도 그랬었다.--즉 영국의 식민지 정책과도 비슷하다.

A.D 6년에는 그 상황이 더 급박하게 되었다. 이 해에 그 나라는 행정적으로 두 개의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즉 유대와 갈릴리로 분할되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정신적 세속적 중심지였던 유대는 직접적인 로마법에 종속되게 되었으며 가이사랴에 근거를 둔 로마의 총독에 의해 다스려졌다. 로마 정권은 야만적이고 독재적이었다. 로마가 유대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을때 2천명 이상의 저항자들이 즉석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약탈되고 더럽혀졌다.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었다. 고문이 빈번하게 사용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A.D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의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도 호전되지는 않았다. 그에 대한 성서적인 묘사와는 반대로 현존하는 기록들은 빌라도가 잔인하고 부패한 인간으로 전임자의 학대를 계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강화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서들에 로마에 대한 비판이 없으며 로마의 멍에의 짐에 대해서 조차도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이다. 적어도 언뜻 보기에는 그렇다 실제로 복음서 설명들은 유대의 거주자들이 평온하였으며 그들의 운명에 만족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실제에 있어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만족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은 전혀 평온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 성지에 있던 유대인들은 대개 여러 분파들로 나뉘어질 수 있었으며 더 작은 분파들로 세분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사두개인들이 있었다.그들은 적지만 부유한 지주계급으로 로마인들에게 협조한 반역자들이었는데 이것이 동족들의 분노를 샀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에 많은 개혁을 도입하였으며 복음서들에 있는 묘사와는 달리 소극적이긴 하였지만 로마에 강하게 저항하였던 진보적인 무리이다.

엣세네파는 엄격하고 신비주의적 경향을 띤 종파. 이 종파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거나 추정되는 것보다 훨씬 더 널리 퍼져 있었고 영향력도 컸다.

보다 작은 분파들 가운데는 그 정확한 특징이 오래 전에 역사에서 사라져 정의하기가 곤란한 많은 분파들이 있다. 하지만 나실인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수세기 전의 삼손도 그중의 하나였으며 예수 시대에도 여전히 그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적용되었던 것처럼 보이는 나사렛파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도 유익하다. 실제로 원 희랍어 신약성서는 예수를 나사렛파 예수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영어로 번역될 때 나사렛 예수라고 잘못 번역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나사렛 예수는 독특한 분파적인 용어이며 나사렛이란 지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수많은 다른 그룹들 또는 분파들도 역시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우리의 탐구에 특히 적절함이 입증되었다. 로마가 유대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 A.D 6년에 갈릴리의 유파라고 알려진 한 바리새파 랍비가 바리새파와 엣세네파 모두로 구성되어 있는 대단히 군사적인 혁명 단체를 창설하였다. 이 파의 추종자들은 열성당원(zealot)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열성당원들은 종파는 아니었다. 그들은 수많은 종파들로부터 온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운동이었다. 예수의 선교 무렵에는 열성당원들이 성지의 사건들에서 점점 더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아마도 예수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배경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 오랜 후에도 열성당원의 활동은 줄지 않고 계속되었다. A.D 44년 경에는 이 활동이 대단히 강화되었었기 때문에 모종의 무력 충돌이 이미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A.D 66년에 드디어 무력 충돌이 발생하여 전 유대는 로마에 대한 조직적인 혁명에 가담하였다. 그것은 필사적이고 끈질긴 투쟁이긴 했지만 결국에는 아무 이익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가이사랴에서만도 2만명의 유대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되었다. 4년만에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였으며 성전을 샅샅이 뒤져 약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리의 유대 직계후손에 의해 통솔된 마사다 산의 요새는 그후 3년 동안 함락되지 않고 계속 보존되었다.

유대에서 혁명의 여파로 대량의 유대인들이 성지에서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약 60년 후인 A.D 132년의 또 다른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드디어 13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모든 유대인들을 유대에서 축출하라는 법을 제정하였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사실상 로마의 도시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u Capitolina)로 개칭되었다.

예수의 생애는 대개 140여년 동안 계속된 폭풍 기간중 첫 35년에 해당된다. 그 폭풍은 예수가 죽을때도 끝나지 않고 100년 동안 더 계속되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은 심리학적 문화적 부산물들을 생산하였는데 여기에는 불가피하게 압제자에 대한 계속적인 반항이 수반되게 되었다. 이 부산물들중의 하나는 그 백성을 폭군의 멍에에서 구출해 낼 메시아에 대한 대망이었다. 이 메시아란 용어가 특별히 예수에게만 적용되어지게 된 것은 오로지 역사적 의미론적 사건 때문이었다.

예수의 동시대인들에게는 어떤 메시아도 신적인 인물로 간주된적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신적 메시아에 관한 바로 그 사상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색한 것이었을 것이다. 메시아에 대한 희랍어는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스이다. 히브리어에서이건 희랍어에서이건 메시아란 용어는 단순히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였으며 일반적으로 왕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따라서 다윗은 구약성서에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아주 명백하게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가 되었다. 그리고 다윗 가의 그후의 모든 왕들은 바로 그 명칭으로 알려졌다. 로마가 유대를 점령한 기간 동안에조차도 로마에 의해 임명된 대제사장은 제사장적 메시아 또는제사장적 그리스도로서 알려졌다.

하지만 열성당원들 및 로마를 적대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꼭두각시 제사장은 말할 것도 없이 거짓 메시아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란 참 에시아는 대단히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참 메시아는 합법적인 상실된 왕  즉 자기 백성을 로마 제국에서 구출해 낼 다윗가의 알려지지 않은 후손을 의미하였다. 예수의 생존시에는 그러한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극에 달하여 병적인 상태에까지 도달하였다. 그리고 이런 기대가 예수의 죽음 후에까지도 계속되었다. 실제로 A.D 66년의 폭동은 주로 메시어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열성당의 선동에 의하여 촉발되었다.

그렇다면 메시아란 용어는 결코 신적인 것을 의미하는 용어는 아니었다. 엄격하게 말해 그것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의미하는데 불과했다. 그런데 그 용어가 대중의 정신 가운데서 자유케하는 자이기도 하면서 기름부음 받은 왕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시말해 그것은 특별히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는 용어, 즉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후대의 사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용어였다. 예수에게 적용되어졌던 것은 이와같이 세속적인 정치적 용어였다. 그는 메시아 예수라고 일컬어졌으며 희랍어로 번역될 때는 예수 그리스도(Jesus the Christ)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후에 이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라고 축약되었으며 순전히 기능적 명칭이었던 것이 고유명사로 왜곡되었다(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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