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望詞 ( 춘망사 ) 봄날의 소망
花開不同賞(화개부동상)....꽃이 피어도 함께 즐길이 없고
花落不同悲(화락부동비)....꽃이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欲問相思處(욕문상사처)....묻노니. 그대는 어디 계신고
花開花落時(화개화락시)....꽃피고 꽃질때에......
攬結草同心(람결초동심)....풀을따서 한 마음으로 맺어.
將以遺知音(장이유지음)....내마음 아시는 님에게 보내려하네.
春愁正斷絶(춘수정단절)....봄시름 그렇게 끊어버렸건만.
春鳥復哀吟(춘조복애음)....봄 새가 다시 슬피 우네.......
風花日將老(풍화일장로)....꽃잎은 바람에 시들어가고.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만날 날은 아득히 멀어져가네.
不結同心人(불결동심인)....마음과 마음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헛되이 풀잎만 맺었는고......
那堪花滿枝(나감화만지)....어찌 견디리 꽃 가득한 나무.
煩作兩相思(번작양상사)....괴로워라 사모하는 마음이여.
玉箸垂朝鏡(옥저수조경)....눈물이 주르르 아침 거울에 떨어지네.
春風知不知(춘풍지불지)....봄 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 설도 (薛濤) --
"춘망사" 이 시는 당나라 때 기생 설도가 지은시로 총 4수의 5언절구로 된 시이다.
이 시는 당시 많은 문인들과 고류한 일화가 가슴아프게 서려 있다.
끝까지 사랑했던 원진과 사랑을 이루지 못한 설도는 외로히 혼자 생을 마감한다.
설도의 사랑은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러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설도는 평생 450여편 시를 썼으나 지금까지 전해오는건 95수에 불과하다한다.
원진에게만 100여수를 건내주었다니 그들의 절절했던 사랑이 눈에 보이는듯하다
우리에게 동심초로 알려진 가곡은 이 시의 세번째수
風花日將老 (바람에 꽃은 떨어지려 하는데 )
佳期猶渺渺 (님 만날 기약은 아득하기만 )
不結同心人 (한 마음이건만 맺지 못하고 )
空結同心草 (부질없이 편지만 접어보누나 )
세번째 수는 사랑이 맺어지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사가 절절히 묻어나고 있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구절에 ‘結同心’이라는 말이 거듭 나타난다.
‘同心結’이란 사전적인 뜻은 띠를 두르는 매듭이나 풀을 말한다. 사랑하는 사이에 정표의 의미로 화초나 물건으로 만든 여러 가지 매듭이나 장식물을 총칭하기도 하지만, 대개 연서戀書, 곧 연애편지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불리워지고 있는 동심초란 가곡은 이 시의 세번째 수를 김소월의 스승인 안서 김억( 1896년 평안북도, 일본 게이오의숙 영문과 유학, "폐허"와 "창조"의 동인으로 활동, 일제 강점기시 친일시 발표, 반민족 행위자 수록)이 1934년 아름다운 우리말로 번역한 시에다 12년후인 1946년 작곡가 김성태( 1910년 서울, 서울 대학교 음대학장, "즐거운 우리집" "못잊어" "산유화"등 작곡)가 곡을 붙인 노래가 동심초이며 현재까지 많은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불리워지고 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노래말이 번역이라기보다 가히 창작이라 할만큼 아름답고 멋있는것 같다. 마지막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로 해서 ‘동심초’가 풀이름인 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앞서 이야기한 대로 연애편지 즉 연서를 의미한다. 밑의 노래시는 김성태가 지은 2절이다.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날은 뜬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이 시는 김억이 살았던 같은 시대에 일본에서도 佐藤春夫(사또 하루오; 1892~1964)에 의해 번역되기도 했다.
마음 흩뜨리며 날리는 꽃잎에
탄식으로 기나긴 나의 소매여
정을 다 바친 그대 가고 없어
헛되이 뜯는구나 슬픔의 풀잎
한시 중에는 정말 절창인 노래들이 수없이 많다. 다만, 한문에 밝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접하기도 그것을 감상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제 시인들과 한학자들이 손을 잡고 한시를 어두운 골방에서 불러내어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빚어 낸다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 될것같다. 위의 동심초 처럼....(옮겨온글 일부인용)
설도(薛濤) 당나라 여류시인이다. 자는 홍도(洪度)이고 출생에 대한 설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77ㅇ년 당의 장안에서 태어났음이 유력하며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촉(蜀) 땅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하층 관리였는데, 촉 땅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청상과부에다 집안마저 가난한 탓에 설도는 악적(樂籍)에 들어 악기(樂妓)가 되었다
그러나 설도는 선천적으로 음률에 능통하여 시가를 잘 지었고, 당시 유명한 사대부들과 즐겨 교류하였다.
그 당시 천서절도사(川西節度使) 위고라는 사람이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황제에게 주청하여 그녀를 교서랑(校書郞 벼슬이름)에 제수하려고 하였으나 호군(護軍)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로 사람들은 그녀를 '설교서(薛校書)' 혹은 '여교서(女校書)'라고 불렀다.
그녀는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는데 위고(韋皐)·원진(元稹)·백거이(白居易)·두목(杜牧) 등의 당대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창화(唱和)를 나누었다.
만일 설도가 젊은날에 위고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무리 재능이 있고 시재가 뛰어났어도 시골의 한기생으로 시나 지으며 일생을 보내었을지도 모른다.
그후 위고가 죽고난후 젊은시인 원진과 가까이 지냈다.
31세인 원진은 자기보다 10세 연상인 41세인 설도와 많은 연정의 시를 주고받았다. 원진(779~831)은 허난성(河南省 하남성) 허내(河內, 지금의 하남성 뤄양)출신으로 793년 과거에 급제한 후 감찰어사(監察御使)로 벼슬을하다가 직간으로 환관의 미움을 사서 감릉사조참군(江陵士曹參軍)으로 좌천되었다. 그 후 승진하여 822년에는 제상에 이르게 된다.
원진이 감찰어사로 지방 순시중에 쓰촨지역에 와서 설도를 만나 3달간 설도와 깊은 정을 나누었지만 아내가 있던 원진은 설도와 몇달을 함께한후 떠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한다.
그후 설도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서 원진을 그리워하며 사랑의 감정이 절절히 묻어나는 많은 명시들을 남겼다.
설도는 만년에 시성 두보의 초당으로 유명한 성도의 서교 완화계(浣花溪) 일명 백화담(白花潭) 근처 만리교 근방에서 은거하였는데 그 근처는 양질의 종이가 생산되는 곳이였서 설도는 삼홍색의 종이를 만들어 그 종이를 이용하여 당시 각계명사들과 시를 증답(贈答)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설도전 (薛濤箋)'이라고 불렀다.이것이 풍류인들 사이에 평판이 높아, 이런 식의 종이를 ‘설도전(薛濤箋)’ 또는 ‘완화전(浣花箋)’이라 하여 크게 유행하였다.
만당(晩唐)의 이상은(李商隱)의 시에도 “완화의 전지(箋紙), 도화의 색”이란 구절로 표현되어 있다.
늙어서는 청두 서쪽 浣花溪(완화계, 냇가)에 살다가 다시 壁鷄坊(벽계방)으로 옯겨 吟詩樓(음시루, 정자)를 짓고 시를 읊으며 지내다가 832년 64세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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