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혼(夢魂)
近來安否問如何 (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 (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 (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 (문전석로반성사)
----李玉峰-----
紗窓 (사창) : 비단 커텐이 처진 창
요즈음 안부를 묻자니 어찌 지내시는지요?
달빛어린 창가에서 이 몸의 한은 깊어갑니다
만약 꿈속에서 넑이 오간 흔적이 있다면
그대 문앞의 돌길은 절반이나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
(이 시의 제목이 自述(자술 : 스스로 진술하다)로 된 본도 있으며 3. 4구는 西道 소리로 대표되는 "수심가" 에 채택되어 사람들에 회자 되고 있다, 수심가 가사를 아래 따로 올립니다.)
위의 시 몽혼은 한문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그 작품성과 창작성을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옥봉보다 먼저 지어진 윤헌의 詩 題贈淸州人( 제증청주인) " 청주의 애인에게" 란 시와 시상의 흐름이 비슷하며 3구는 똑 같은 구절로 되어있고 4절도 너무 비슷하여 이옥봉이 윤헌의 시를 모방하지 않았나 하는 주장이 있다. 그럼 윤헌의 시 題贈淸州人을 올려봅니다.
청주의 애인에게 [제증청주인(題贈淸州人)]
만남과 헤어짐은 본디 들쑥날쑥한 것, 人間離合固無齊(인간이합고난제)
눈물을 참으면서 손 놓은 것 후회로다. 忍淚當時愴解携(인루당시창해휴)
꿈 속 넋 걸어갈 때 발자취가 남는다면, 若使夢魂行有迹(약사몽혼행유적)
청주성 북쪽이 모두 길이 되고 말았겠지. 西原城北摠成蹊(서원성북총성혜)
국간(菊磵) 윤현(尹鉉: 1514-1578)이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淸州에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헤어졌다. 훗날 그녀를 그리워하며 위의 시를 지어 그녀에게 주었다. 이수광의 ‘지봉류설(芝峯類說)’에 수록된 이야기인데, 윤현의 문집인 ‘국간집(菊磵集)’에도 이 시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보다시피 두 작품 사이에는 글자상의 차이가 매우 많다. 그러나 시상의 흐름이 아주 비슷하다. 특히 작품의 눈에 해당되는 3구가 완전히 같을 뿐만 아니라 4구도 역시 상상력의 방향이 동일하다. 따라서 이 두 편의 한시를 두 사람이 각각 창작한 독립적인 작품이라 보기는 어렵다. 만약 그렇다면 어느 것이 선행 작품일까? 결론부터 먼저 말한다면 윤현의 작품이 먼저다. 이 뿐만이 아니다. 필자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이옥봉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40편의 한시 가운데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17편이 이옥봉의 작품이 아니거나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이제 이옥봉의 한시에 대한 연구는 17편을 일단 제외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당황스런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이종문, 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이옥봉(李玉峰)은 조선 선조 때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서녀로 태어났다.
이봉은 전주 이씨로 왕손이었다.옥봉은 그의 호이고 이름은 원(媛)이었다.일찍 출가했으나 남편이 죽어 젊은 과부로 외롭게 살아가면서 시를 즐겼다.그의 시가 승지벼슬을 지낸 조원(趙瑗)에게 알려지게 되어 조원은 그의 시를 좋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옥봉이 조원을 만나게 되었다.옥봉은 조원을 사랑하게 되었으나 재혼이란 꿈도 꿀 수 없었던 시절인데다 더욱 그녀는 왕손이니 더 그러했다.
그러나 옥봉은 스스로 조원의 부실(副室)이 될 것을 자청했다.꼿꼿한 선비인 조원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이 사실을 안 조원의 장인이 조원에게 권하여 옥봉을 첩으로 맞이했다.
조원은 이옥봉을 받아들이며 당시 시명(詩名)을 날리던 이옥봉에게 다시는 시를 짓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다. 얼마 후 조원이 강원도 삼척부사가 되어 옥봉이 동행하게 된다. 한 번은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관가에 잡혀갔다는 하소연을 듣고, 파주목사에게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다.그 시를 본 파주목사가 산지기를 풀어주었다.
이옥봉이 지어 파주목사에게 보낸시
洗面盆爲鏡 (세면분위경 ) 琉頭水作油 (유두수작유)
妾身非織女 (첩신비직녀 ) 郞豈是牽牛 (랑기시견우 )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머리 빗을땐 물을 기름으로 쓰지요
첩의 신세가 직녀 아닐진대
낭군께서 어이 견우가 되리이까
(거울도 기름도 없이 가난하게 살지만 아내가 직녀가 아닌데 남펀이 소를 끄는 사내 즉 견우 이겠냐는 거죠)
이 사실을 안 조원이 부녀자가 공사에 관여한다고 옥봉을 쫓아냈다.옥봉은 뚝섬 근처에 방을 얻어 지내면서 조원의 마음을 돌려 보려 애썼으나 허사였다.
그후 옥봉은 임진왜란중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조원 역시 두아들을 왜병에게 잃었고 이후 역모에 연루되어 국문을 받고 풀려 났으나 이듬해 병사 하였다 한다.
소설 홍길동의 저자 허균이 명나라 사신에게 허난설현과 옥봉의 시를 넘기면서 명나라 문집 "조선시선" "열조시선"에 이들의 시가 실리게 됨.
그 후 조선 인조 때 조원의 아들이 승지로 있을 때 중국에 가서, 중국의 원로대신으로부터 중국 해안에서 이옥봉의 시신을 찾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옥봉은 종이로 몸을 여러 겹으로 감고 물위에 떠 있었는데,종이를 벗겨 보니 안에 감긴 종이에는 시가 빽빽히 적혀 있었다고 하며,<이옥봉 시집>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종이에는 '조선국 조원의 소실'이라 적혀 있었다고 한다. 아래 주소는 저의 블로그에 실려있는 이옥봉의 자세한 삶과 그녀가 지은 시에 대한 글입니다.
옥봉(玉峯) 이숙원의 삶과 시(詩)의 세계 (tistory.com)
수심가
근래안부(近來安否)가 문여하(問如何)요 월도사창(月到紗窓)에 첩한다(妾恨多)인데
생각을 하니 임의 화용(花容)이 그리워 나 어이 할까요
약사몽혼(若使夢魂)으로 행유적(行有跡)이면 문전석로(門前石路)가 반성사(半成砂)*로구나
생각을 하니 임의 화용(花容)이 그리워 나 어이 할까요
강산불변재봉춘(江山不變再逢春)이요 임은 일거(一去)에 무소식이로구나
생각을 하니 세월 가는 것 서러워 나 어이 할까요
인생일장(人生一場)은 춘몽(春夢)이 되고 세상공명(世上功名) 꿈밖이로구나
차마 진정코 세월이 가는 것 서러워 나 어이 할까요
추야공산(秋夜空山) 다 저문 날에 모란 황국이 다 피었구나
생각을 하니 세월 가는 것 덩달아 나 어이 할까요
일락서산(日落西山) 해 떨어지고 월출동령(月出東嶺)에 달 솟아 온다
생각을 하니 세월 가는 것 아연(啞然)하여 나 어이 할까요
친구가 본판은 남이련만은 어이 그다지도 유정(有情)탄 말이오
보면 반갑고 아니 보며는 그리워 아 어쩌잔 말이오
계변양류(溪邊楊柳)는 사사록(絲絲綠)이요 무릉도화(武陵桃花)는 점점홍(點點紅)이로구나
생각 사사로 이미롭지 못하여 나 어이 할까요
난사(亂事)로 난사로다 난사 중에도 겹난사로구나
어느 때나 좋은 시절을 만나여 잘 살아 볼까요
청포(靑袍)로 일상만리선(一上萬里船)하니 동정여천(洞庭如天)이 파시추(波始秋)로구나
생각 사사로 마음 뜻대로 못 하여 어이 사드란 말이오
산천의 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의 청춘은 늙어만 가누나
생각을 하니 세월 가는 것 서러워 나 어이 할까요
아 자귀야 우지를 마라 울 량이면 너 혼자 울 거지
여관한등(旅館寒燈) 잠들은 날까지 왜 깨운단 말이오
무심(無心)한 기차야 소리 말고 가거라 아니 나던 임 생각 저절로 나누나
청춘홍안(靑春紅顔)을 애연(哀然)타 말고 마음대로 노잔다
*서도 즉 평안도의 대표적인 민요로 인생의 허무함과 사랑하는 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수심가는 수 많은 이형(異形)이 존재한다.그 사설을 살펴보면 이옥봉의 시 몽혼을 비롯한 여러 다른 기존의 시나 노래에서 차용한 흔적들이보이고 한문 문투의 상투적인 표현들이 혼합되어 나타나므로 한 개인의 창작이라기 보다 평양지방을 중심으로 오랜세월 구전되면서 창자에 따라 즉흥적으로 변형되고 증편이 거듭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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