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021년) 8월 29일은 경술국치 111년이 되는 해이다.
1905년 일제 강압에 의한 을사보호 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5년후인 1910. 8. 29. 한일합병 조약이 강제 체결 되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지 519년만이다. 조선이 망하고 나라의 국권이 강탈 됨을 애통해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매천 황현 선생을 기억 해본다.
시인이며 비평가이고 우국지사였던 황현, 본관은 장수, 자는 운경, 호는 매천(梅泉)이다. 1855년(철종 6) 전라도 광양 서석촌에서 황시묵과 풍천 노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몰락한 가문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조부 황직에 이르러 남원에서 가산을 크게 일으켜 세웠다.
조부는 광양으로 이주하여 1천여 권의 책을 구비하고 후손 교육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11세가 되는 해에 구례로 유학하여 천사 왕석보의 문하에서 배웠다.
황현은 평생 벼슬하지 않았지만, 28세 때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한 적이 있다. 보거과는 뛰어난 인재를 추천받아 시험을 치르는 별시다.
초시에서 1등으로 뽑혔지만, 시험관은 그가 한미한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에 두었다.
34세에 성균관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나 역시 과거장의 문란을 목격하고는 더 이상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의 공식 이력은 여기까지였다.
한양과 절연하고 구례 만수동으로 이사하여 1890년 '넉넉하지는 않지만 편안하다'는 의미의 구안실(苟安室)이라는 초가집과 삿갓모양의 일립정(一笠정)을 지었다,
선비의 절의를 상징하는 매화나무를 심고, 조그만 샘을 만든 것에 연유하어 매천(梅泉)이라 자호했다 한다. 이곳에서 3천여 권의 책 더미에 묻혀 독서와 저술에 전념, <매천야록>과 <동비기략> <오하기문>등의 저술을 남겼다.
간전면 만수동 상전마을에 구안실과 일립정의 옛 터가 남아있다. 그가 글을 썼던 구안실은 대밭으로 변해 세월의 무상함만 느낄수 있다.
<매천야록>은 1865년~1910년까지 47년 동안 우리나라 주요 사건을 비평을 곁들여 기록한 전 7권의 기록이며 살아있는 역사서이다.
매천의 학문과 예리한 비평정신이 애국심과 함께 잘 드러나 있다. <오하기문>은 구례에 칩거하면서 보고 듣고 읽은 것들을 모아 비평하면서 기술한 원고본이다.
또 동학농민혁명운동에 대해 기록한 <동비기략>이 있다는데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매천의 문집으로는 지우 창강 김택영이 중국에서 지원금을 모아 간행한 <매천집>이 있다.
1902년 향촌의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자금을 모아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세웠다.
1910년 망국의 소식이 전해지자 9월10일 아래의 절명시 4수를 남기고 그의 나이 56세에 구례 대월헌에서 자결했다.
매천은 나는 나라에서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이 "무릇 선비를 기른 지 500년,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느냐"
는 유서를 남기고 일국의 지식인으로서 순국을 결행하는 고결한 선비의 정신세계를 보여주었다.
1962년 매천사가 건립되었고,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매천사에는 당시 최고의 초상화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가 있다.
황현이 자결한 이듬해 그의 사진을 보고 추사(追寫)한 것이다.
실제 인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뛰어난 사실적 묘사를 보여준다.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되었다.(아래 그림 참조)
매천은 학(學), 의(義), 절(節)을 겸비한 한말의 대표적 선비였다.
學은 중국에서 간행된 <매천집>이나 <매천속집>이 이를 잘 증명하고, 옳고 그름을 명석하게 판별하여 지킬 것은 지키고 버려야 할 것들은 버렸으며, 둘 사이에서 타협하지 않았다.
매천은 망국에 순절함으로써 나라는 사라지더라도 선비로서 지켜야 할 義를 영원히 지켜냈다.
자결은 節의의 극치이다.
유학자이자 항일의병장 유인석(1842~1915)은 지식인(선비)이 국가의 파국에 맞서 대처하는 세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그것을 ‘처변삼사(處變三事)’라 한다.
처변삼사는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물리치는 것(거의소청·擧義掃淸)과,
은둔·망명해서 유교의 도를 지키는 것(거지수구·去之守舊),
그리고 목숨을 끊어 지조를 지키는 것(자정수지·自靖遂志)라고 했다.
매천은 세가지 중 ‘자정수지’ 즉 ‘자결순국’을 택했다. 책을 읽은 지식인으로서 망국의 책임을 짊어진 것이다.
또 무명 선비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무슨 거창한 충성을 거론하지 않았다. 다만 유학을 공부한 선비의 최고 가치인 ‘인(仁)’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고 했다.
아래 올린 그의 절명시가 이를 증명한다.
구한말 나라가 흔들리고, 기울고, 급기야 조선 500년의 사직이 끝을 향해 치닫던 시절, 이 땅의 귀족계급, 선비와 사대부, 관료라는 이름으로 온갖 특혜와 부귀를 누렸던 이른바 유교 지배계급들은 다 어디로 숨어 사라져버렸는가?
그 치욕의 역사 위에서 우리가 애절하게 손꼽아 기억하고 옷깃을 여미며 묵념 추모하는 순국선열 몇 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후세가 떳떳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우리의 자존에 관한 일이었으며,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발하는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으니, 그 맨 위에 매천 황현 선생이 있음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
절명시(絶命詩)1
亂離袞到白頭年 幾合捐生却末然 (난리곤도백두년 기합연생각말연)
今日眞成無可奈 輝輝風燭照蒼天 (금일진성무가내 휘휘풍촉조창천 )
난리를 겪다 보니 백두년(白頭年)이 되었구나.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도다.
절명시(絶命詩)2
妖氣掩翳帝星移 九闕沉沉晝漏遲 (요기엄예제성이 구궐침침주루지)
詔勅從今無復有 琳琅一紙淚千絲 (조칙종금무복유 림랑일지루천사)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제성(帝星)이 옮겨지니
구궐(九闕)은 침침하여 주루(晝漏)가 더디구나.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조칙에 얽히는구나.
절명시(絶命詩)3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조수애명해악빈 근화세계이심륜)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추등엄권회천고 난작인간식자인)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절명시(絶命詩)4
曾無支厦半椽功 只是成仁不是忠 (증무지하반연공 지시성인불시충)
止竟僅能追尹殺 當時愧不躡陳東 (지경근능추윤살 당시괴불섭진동)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단지 인(仁)을 이룰 뿐이요, 충(忠)은 아닌 것이로다.
겨우 능히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당시의 진동(陣東)을 밟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 어구 풀이
백두년(白頭年) : 머리가 세어진 나이
창천(蒼天) : 푸른 하늘. 창공
제성(帝星) : 별자리 이름(제왕의 상징)
구궐(九闕) : 구중궁궐(문이 겹겹이 달린 깊은 대궐)
침침(沈沈)하여 : 고즈넉하고 음침하여
주루(晝漏) : 낮 시간
조칙(詔勅) : 조서(어명을 적은 문서)
얽히는구나 : 적시는구나
근화(槿花) : 무궁화. 여기서 '槿花世界(근화세계)'란 우리 나라를 일컬음
침륜(沈淪) : 침몰. 몰락
식자인(識字人) : 글 아는 사람
인간 세상에 ~ 어렵기만 하구나 : 이런 세상에서 지식인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다.(직접 한일 투쟁에 나가지 못함을 한탄)
윤곡 : 중국 송나라 진사로, 몽골 침입 때 가족이 모두 죽음.
진동 : 중국 송나라 선비로,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상소를 하고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억울하게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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