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가는 전봉준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안도현-----
전봉준은 몇몇 부하만 데리고 태인에 있는 김개남을 만나려고 했지만, 순창군 피로리에서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한신현(韓信賢)이 이끌고 온 마을 장정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황급히 주막을 빠져나갔지만 담을 넘다가 장정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고꾸라지는 바람에 붙잡히고 말았다. 전봉준은 며칠 동안 순창 관아에 붙잡혀 있다가 12월 7일 일본군에게 신병이 인계되어 나주로 압송된 뒤 한양으로 가서 재판을 받았다. 사형 선고를 받아 3월 30일 동지인 손화중(1861~1895), 최경선(1859~1895)[36], 성두환(1845~1895), 김덕명(1845.10.29~1895.4.23)과 함께 1895년 3월 29일(음력) 사형을 선고받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30일 새벽 2시 한양 무악재 아래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쳤다.
전봉준을 관아에 밀고했던 한신현은 금천군수에 제수되었으며, 상금은 한신현 1천냥, 김영철 300냥, 정창욱 200냥, 마을사람 9명 200냥 그리고 200냥은 피로리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진달래 교회. 게시글 참조)
"나에게 한발의 총알이 있다면 왜놈보다 나라와 민주주의를 배신한 매국노 변절자를 백번 천번 먼저 처단 할것이다"
---김구선생----
*안도현
1961년 12월 15일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읍 황지리 소망실마을 523번지에서 아버지 안오성(1934 ~ 1981)과 어머니 임홍교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첫 돌이 지난 후 안동시 풍산읍으로 이주하여 안동 풍산초등학교를 다녔다. 6학년 때 대구아양초등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와 대건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등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경상북도 대구시(現 대구광역시)에서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졸업했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2003년 문예창작학 석사 학위, 2010년 12월 문예창작학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으로 등단.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
1985년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이리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활동하며 중학교 국어과목을 가르쳤으나 학교 측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정회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임되었다.
1994년 전라북도 장수군에 있는 고등학교의 국어교사로 복직하여 고교 국어과목을 가르쳤으나 1997년에 자진으로 퇴임하고 전업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6년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
1998년 소월 시 문학상.
2000년 원광문학상.
2002년 노작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04년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작가활동을 병행했다.
2013년 7월, 박근혜가 대통령 재임시는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고 발표하지도 않겠다며 절필을 선언했다. 단 산문이나 신문 칼럼은 계속 썼다. 절필 이유로는 대선이 끝난 직후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는데, 이는 야당을 지지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 이런 환경에서는 시를 쓸 수 없다고 밝혔다.
2017년 4월 말,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가결 소식과 함께 절필을 그만두고 시를 발표했다.
2019년 2월,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떠나 대학원 시절 몸 담았던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전임 부교수로 임용되었다.
2019년, 조국 사태와 관련해 조국을 지지한 대표적 인물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2019년 10월 7일, 안도현은 황석영, 공지영 작가 등과 함께 조국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이와 함께 조국이 검찰 개혁을 완수할 것을 촉구하는 2019 작가 선언을 발표했다.
2019년 10월 19일, 조국이 장관직을 사퇴하자 안도현은 트위터를 통해 칼과 풀잎의 싸움이었다. 풀잎이 버티자 칼은 풀잎을 난도질했고, 풀잎은 결국 스스로 목을 꺾었다. 슬픈 일이지만 슬퍼할 필요는 없다. 칼이 풀잎을 이긴 게 아니다. 라며 조국 지지를 계속 표명했다.
2020년 초,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아내인 정경심 교수가 강남에 빌딩을 사는 것이 목적이라고 동생에게 보낸 문자가 공개되어 비난을 받자 안도현은 강남에 건물을 소유한 건물주로서 편하게 살고 싶은데, 이런 꿈을 꾸는 것조차 허용될 수 없는 거냐며 정경심 교수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진중권 전 교수는 이에 대해 연탄재를 밟지 말라는 시를 쓴 안도현 시인이 이제는 연탄재를 본 적도 없을 강남 사모님을 위해 노래한다며 자신의 칼럼에서 비판했다.
2020년 초에 전주를 떠나 고향인 예천군으로 이동했다. 2020년 2월 안도현 교수 송별회에 송하진 전라북도지사가 깜짝 방문하는 등 그를 기억하는 전북인들이 많이 참석했다. 같은 해 12월 17일 검찰 권력 해체를 촉구하는 작가 성명을 공동 발표한 권여선, 김용택, 박민규, 장석남, 하성란, 함민복, 현기영 등 작가 654명에 이름을 올렸다. 공동성명에서 공수처의 조속한 설치, 윤석열 검찰총장의 사퇴 등을 요구했다.
2025년 3월 건강상의 이유로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직을 내려놓았다.(나무위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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