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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믿음의 지평을 넓혀가는 15가지 신앙고백

by 까마귀마을 2025. 12. 16.

  글 : 박철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예수살기 대표. 전국목회자 정의 평화협의회 전 상임의장. 탈핵 부산시민연대 전 상임대표

 

이 글은 나의 신앙을 설명하려고 쓴 게 아니다. 오히려 내가 어떤 신앙의 길을 걷고자 하는지, 어떤 가치들에 기대어 살아가려 하는지 스스로에게 확인하는 고백에 가깝다. 신학은 언제나 시대의 질문에 응답하는 작업이며, 신앙은 구호나 전통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신앙은 분리의 언어가 아니라 연결의 언어여야 한다고 배웠다. 교회 간의 장벽, 종교 간의 오해, 이웃에 대한 편견, 사회를 갈라놓는 이데올로기—이 모든 것들은 신앙이 가야 할 길이 아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특정한 경계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으며,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빛과 숨을 품고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신념들로 삶을 정리해 보았다. 아래 열 다섯 가지 신앙고백은 선언문이 아니다. 다만 내가 신앙인으로서, 목회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사랑과 평화, 존엄과 자유를 향해 서고자 하는 작은 다짐들이다. 신앙은 교회 안에서만 자라지 않는다. 신앙은 언제나 세상 한가운데, 사랑해야 할 이웃들 사이에서 자란다. 이 글 전체가 그 믿음의 확장선이 되기를 바란다.

 

1. 가톨릭은 이단이 아니다. 개신교의 뿌리이며 정교회와 더불어 우리의 형님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가 오늘 읽는 성경, 고백하는 신앙, 드리는 예배는 오랜 공동체의 시간과 눈물, 성찰과 실천이 한데 겹쳐져 축적된 유산이다. 초대교회의 다양성은 서기 4세기 이후 로마제국과 더불어 제도화되면서 여러 전통의 가지를 뻗었다. 그 중 서방교회의 흐름이 가톨릭으로, 동방교회의 흐름이 정교회로 발전했다. 개신교는 그중 서방의 큰 줄기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격변을 거쳐 분리되어 나온 '후손'이다. 다시 말해 개신교는 가톨릭의 '옆집'이 아니라 '자식'이며, 정교회와 더불어 형님 격의 전통 앞에서 배움을 이어가야 할 길을 걷는다.

그럼에도 한국 개신교의 일부는 가톨릭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정교회를 '낯선 종교' 정도로 취급한다. 이는 역사적 무지이자 영적 오만에 가깝다. 가톨릭의 전례에는 천 년 넘는 영성이 흐르고, 정교회의 성화(聖畫)와 신비주의 전통에는 인간의 언어가 포착할 수 없는 하느님의 넓이가 담겨 있다. 개신교가 강조하는 말씀 중심의 영성, 평신도 중심의 개혁 정신 또한 소중하지만, 그 장점은 타 전통을 배척할 때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할 때 오히려 깊어진다. 나는 가톨릭과 정교회를 '타 종교'로 보지 않는다. 같은 하느님을 신뢰하며, 다만 서로 다른 방에서 살아온 신앙의 형제들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신앙의 문을 조금 더 넓게 열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경로 또한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2. WCC와 KNCC는 이단이 아니다. 교회 일치의 길이며, 그리스도인이 향해야 할 방향성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단순한 조직이 아니다. 교회의 분열이 반복된 지난 세기 동안, 갈라진 신앙의 강 줄기를 다시 이어보려는 몸부림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하나로 세우려는 시대적 응답이다. 예수는 결코 '교단'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서로 다른 민족과 언어, 사상 속에서도 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초대했다. "그들이 하나 되게 하소서"라는 예수의 기도는 교회의 본질을 단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

한국 개신교의 일부는 WCC를 '혼합주의'라 정죄하고, KNCC를 '좌편향'이라 몰아붙인다. 이는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공포의 신학이며, 자기 확신을 우상화한 태도다. WCC는 신학의 혼합이 아니라, 세계 인류의 고통 앞에서 교회가 함께 행동하자는 실천을 강조한다. 전쟁, 기후 위기, 난민 문제, 인권 침해 등 복음이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서 교회가 각자도생을 선택한다면 복음의 정신에 대한 배신이다. 나는 일치운동을 지지한다. 교회는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하느님을 찾는 이들의 영적 연대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손을 맞잡는 일은 곧 예수의 기도를 이 땅에서 완성해 가는 길이다.

 

3. 동성애와 성소수자는 우리의 형제자매이다. 그들의 축제를 지지한다.

성소수자를 향한 편견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구조적 폭력이다. 교회의 언어가 이 폭력에 동조할 때, 복음은 사랑의 이름을 잃는다.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이들(세리, 창기, 병자, 이방인)과 먼저 식탁을 나누었다. 식탁은 그 시대 가장 깊은 환대의 상징이었다. 그 식탁의 논리를 오늘에 적용한다면 성소수자를 향한 환대는 복음적 실천이다. 성소수자들이 매년 펼치는 프라이드 축제는 방종이 아니라 생존 선언이다. '나는 존재해도 된다'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행진이며, 오랜 침묵과 억압의 시간을 찢어내는 희망의 현장이다. 교회가 이들을 정죄하는 것은 신앙의 이름으로 이웃을 버리는 일이며, 예수의 길과는 전혀 다른 흐름이다. 나는 성소수자들의 축제를 지지한다. 그들의 인권이 보장될 때 우리의 인권도 더욱 안전해진다. 사랑은 배제의 기준이 아니라 환대의 문을 여는 열쇠이며, 신앙은 그 열쇠를 잃는 순간 길을 잃는다.

 

4. 술과 담배는 신앙의 본질과 무관하다.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태도는 유치하다.

한국 교회 안에는 신앙을 외형적 규범으로 평가하려는 얕은 도덕주의가 여전히 남아 있다. 술을 한 잔 마신다거나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신앙이 떨어지지 않으며, 금욕한다 해서 경건이 깊어지지도 않는다. 예수는 잔칫집의 포도주를 나누었고, 인생의 기쁨과 슬픔의 자리에 편견 없이 참여했다. 신앙은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다. 술을 끊어도 타인을 판단하면 그것이 더 큰 죄이며, 담배를 피워도 남을 존중할 줄 알면 그것은 삶의 성숙이다. 도덕주의는 사람을 쉽게 나누고, 자기 의로움을 강화한다. 반면 복음은 사랑을 기준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연민과 공감으로 관계를 회복한다. 나는 신앙을 외형적 잣대로 평가하는 태도를 거부한다. 신앙은 삶의 깊이에서 드러나며,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힘이 도덕적 포장보다 훨씬 거대하다.

 

5.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조상을 존중하는 예의다.

한국 문화에서 제사는 조상을 신으로 섬기는 행위가 아니라 기억과 감사의 의례다. 동양의 전통은 가족 공동체의 시간성을 중시하며, 제사는 그 연결성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일부 교회는 서구 기독교가 낯설어했던 고대 제사 문화를 기계적으로 가져와 한국적 제례를 우상숭배로 규정했다. 이는 문화적 오해이자 신학적 오류다. 성경의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했고, 인간의 뿌리를 소중히 여기라고 가르쳤다. 제사에서 드리는 밥 한 그릇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 아니라 조상에 대한 감사의 상징이며, 공동체의 역사를 기리는 마음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조상과 경쟁하지 않으며, 조상은 그분이 허락하신 우리의 뿌리다. 나는 제사가 신앙에 위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상에 대한 감사와 기억은 인간의 겸손을 배우는 신앙의 연장선에 있다.

 

6. 종북·좌파라는 프레임은 허구이며, 평화 통일은 신앙의 문제다.

'종북'이라는 단어는 한국 정치가 만들어낸 가장 불순한 프레임 중 하나다. 이 말은 누군가를 침묵시키고, 평화를 말하는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평화는 이념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 문제다. 기독교는 화해의 종교다. 예수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했다. 남과 북의 긴장은 단순한 군사적 갈등을 넘어 민족의 상처다. 전쟁을 치르고 분단을 겪으며 수많은 눈물이 이 땅에 쌓였다. 그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정치가 아니라 영적 과제이며, 신앙인의 진정한 소명이다. 나는 평화를 말하는 사람을 '종북'이라 부르는 언어를 거부한다. 평화 통일은 하느님 나라의 비전이며, 복음이 요구하는 시대적 책임이다.

 

7. 자유주의 신학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신학은 시대의 거울이며, 누구나 자유롭다.

일부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위협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이단'이 아니라 시대를 해석하려는 시도 중 하나일 뿐이다. 신학은 언제나 시대의 질문을 통과하며 발전해 왔다. 초기 교회의 신학도, 중세의 신학도, 종교개혁의 신학도 모두 그 시대의 철학과 사회 현실과 깊은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됐다. 살아 있는 하느님을 고정된 문장으로 가두기는 불가능하다. 신학이란 하느님을 오해하지 않기 위한 끝없는 대화의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언어와 사유는 필수적이다. 나는 특정 신학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대신 현실을 신학화하고, 삶의 경험 속에서 하느님을 다시 사유하는 길을 선택한다. 신앙은 공포가 아니라 자유의 공간이다. 자유롭게 질문하고, 자유롭게 탐구하며, 자유롭게 응답하는 그 과정이야말로 신앙을 살아 있게 한다.

 

8. 하느님은 이 땅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신다.

하느님은 언제나 높은 권력의 자리보다, 낮고 어두운 골짜기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억압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숨결,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노동의 손바닥, 차별과 배제의 상처를 견디는 얼굴들 속에 하느님의 마음이 머문다. 하느님이 머무는 자리는 안전한 성전의 깊은 방이 아니라, 세상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이들이 기대어 울 수 있는 작은 공간이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특별한 지식을 쌓거나 거창한 의식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마음을 낮추고 귀를 기울여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면 된다. 그들의 삶에 담긴 침묵과 눈물, 희망과 절망을 함께 견뎌내는 자리에 하느님은 이미 와 계신다. 그곳에서 우리는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게 되고, 약자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려는 우리의 작은 결심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하느님을 향한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연대하려는 마음을 품고 고통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 순간, 하느님은 우리 곁에서 천천히 걸음을 맞추어 주신다.

 

9. 모든 종교에는 구원으로 향하는 나름의 길이 있다. 이웃 종교를 존중한다.

인류는 역사의 모든 시대, 모든 문화, 모든 언어 속에서 신성(聖性)을 향한 몸부림을 이어왔다. 불교의 자비, 힌두의 카르마와 다르마, 이슬람의 순종, 유교의 인(仁), 도교의 무위(無爲) 등은 모두 인간이 신적 실재를 향해 나아가는 다양한 경로다. 나는 기독교가 구원의 풍성함을 담고 있다고 믿지만, 그렇다고 다른 종교가 하느님과 무관하다고 믿지 않는다. 하느님은 바람과 같아서 하나의 종교만을 통과하지 않으며, 다양한 길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흔든다. 이웃 종교를 존중하는 일은 신학적 양보가 아니라 하느님의 광대함을 인정하는 행위다. 신앙의 겸손은 타 종교의 진실함을 볼 수 있는 눈에서 시작된다.

 

10. 거룩과 속됨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일상이 곧 하느님의 현존 자리다.

교회는 때때로 '거룩'과 '속됨'을 지나치게 구분해왔다. 그러나 나는 일상의 모든 공간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발견한다. 시장의 소란스러운 흥정, 교통신호 앞에서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 늦은 밤 홀로 식사하는 노인의 떨리는 손… 그 모든 순간이 하느님의 부드러운 숨결이 스며드는 자리다. 거룩은 특정한 예식이나 성소에서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하루의 밥을 준비하는 손길, 아이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 아침의 바람을 맞으며 버스에서 고단한 하루를 준비하는 순간…그곳에서 하느님은 더 자주, 더 가까이 우리에게 속삭이신다. 나는 일상을 수도원의 시간처럼 살고자 한다. 하루의 반복이 아니라 하루의 신비로 살아가는 태도, 이것이 내가 말하는 세속 안의 수도성(修道性)이다.

 

11. 핵무기와 핵발전소를 비롯한 죽음의 체제를 반대한다.

핵무기와 핵발전소는 현대 문명이 생명보다 효율을 앞세우며 만들어낸 가장 위험한 체제다. 핵무기는 인간이 만든 가장 악마적인 파괴 도구이며, 핵 발전소는 단 한 번의 사고로 돌이킬 수 없는 생태적·인간적 재앙을 초래한다. 신앙은 생명을 선택하는 길이다. 예수의 복음은 폭력이 아니라 평화를 지향하고,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약속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기술과 체제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복음의 배신이다. 나는 일체의 핵을 거부한다. 이는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신앙적 선언이며, 생명 앞 에서의 최소한의 양심이다.

 

12. 예수의 운동은 교회 운동이 아니라 하느님나라 운동이다. 나는 그 실천에 중심을 둔다.

오늘의 교회는 종종 '성장'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힌다. 더 큰 건물, 더 많은 예산, 더 많은 교인이 곧 '성공'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예수의 운동은 종교조직 확장이 아니라 하느님나라 확장이었다.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했고,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고, 병든 자를 치유했다. 그의 관심은 제도적 안정이 아니라 인간의 회복이었다. 교회는 그 운동을 이어가는 제자 공동체이며, 결코 성장 중심의 기업이 아니어야 한다. 나는 교회의 규모가 아니라 교회의 삶을 본다. 하느님나라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는 실천—정의, 평화, 생명, 사랑—그것이 내가 서려는 자리이다.

 

 13. 강자독식의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효율을 신처럼 떠받들며 인간을 '경제적 가치'로만 평가한다. 그 안에서 가난한 자는 실패자로 낙인찍히고, 부자는 구조적 혜택을 전제로 더 부자가 된다. 이 시대의 불평등은 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며, 그 구조는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나라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예수는 가난한 이웃을 향해 먼저 다가갔고, 힘 있는 이들의 탐욕을 책망했다. 교회가 신자유주의 앞에서 침묵할 때, 교회는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셈이다. 나는 사람보다 돈이 앞서는 사회를 반대한다. 인간의 존엄이 경제 논리에 앞선다는 선언은 신앙의 핵심이며, 이는 정치가 아닌 복음의 문제다.

 

14. 인간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를 비롯한 모든 이데올로기를 배척한다.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자신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성, 합리성, 욕망, 혹은 특정 시대의 사상과 가치가 절대화되는 순간 폭력은 시작된다. 신앙은 이데올로기를 절대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을 더 넓고 깊은 신비의 자리로 이끌며, 세계를 더 다양하게 바라보게 한다. 인간의 사유는 언제나 한계를 가지며, 하느님의 넓이는 인간의 이성으로 가둘 수 없다. 나는 교리나 사상보다 생명과 관계를 중심에 둔다. 신앙은 틀을 맞추는 작업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운동이며, 세상을 치유하는 힘이다.

 

15. 남은 생은 열심히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 그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긴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붙들고 싶은 단어는 단 하나, '사랑'이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로 기억되지 않는다. 얼마나 사랑했는가, 그리고 그 사랑이 누구의 마음에 온기를 남겼는가로 남는다. 나는 큰 업적이나 찬란한 명예보다, 어느 날 문득 떠올랐을 때 마음을 부드럽게 적시는 따뜻한 표정 하나, 흔들리는 사람의 등을 조용히 받쳐 준 손길 하나가 더 소중하다고 믿는다. 그 작은 순간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인생을 지탱한다. 사랑은 거창한 언어나 영웅적인 결단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매일의 사소한 선택들—용서할지 말지 망설이는 그 순간, 상대의 사정을 먼저 헤아리는 태도, 한 걸음 물러나기 위한 기다림, 불완전함을 껴안으려는 이해—이런 순간마다 조금씩 몸을 드러낸다. 어쩌면 사랑은 찬란함이 아니라 인내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조용한 선택들을 삶의 중심에 두고 싶다. 누군가의 아픔을 가볍게 만들 수 있다면, 그의 하루가 조금 덜 고단해진다면, 그것 만으로도 한 생애는 충분히 빛날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음 앞에서 남겨질 문장이 하나뿐이라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사랑하다가 떠났습니다." 그 문장 속에는 내가 살아온 시간의 방향과 희망과 기도가 모두 담겨 있다. 더 큰 의미도, 더 화려한 말도 필요 없다. 사랑하다 떠났다는 사실 하나면, 내 삶은 이미 충분히 완성된 것이다.

 

에필로그 ─ 다시 길 위에 서기 위하여

돌아보면, 신앙의 길은 언제나 완성보다 '과정'에 가까웠다. 나는 수많은 질문과 의심, 깨달음과 후회를 넘나들며 이 자리까지 왔다. 확신이 흔들릴 때도 있었고, 익숙한 믿음의 언어가 더 이상 나를 설득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순간이 나를 조금씩 더 넓은 세계로 이끌었다. 신학은 나를 가두지 않았고, 신앙은 나를 좁히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시선, 그리고 새로운 책임을 요구했다. 지금의 나는 어느 한 지점에 도착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전보다 더 깊이 경청하려 하고, 더 조심스럽게 말하려 하고, 더 넓게 품으려는 마음이 생겼음을 안다. 신앙이란 결국 '정답을 쥔 사람'이 아니라 '들어야 할 소리를 듣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갈라지고 사람들의 말이 단호해질수록, 나는 더욱 부드럽고 유연한 믿음을 선택하고 싶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걸어갈 것이다. 삶의 어둡고 빛나는 장면 속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발견하려 하고, 일상의 평범한 순간들 안에서 다시 배우려 할 것이다. 이 길은 화려하지 않고, 때로는 고단하지만, 분명히 가치 있는 길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길의 끝에 닿게 된다면, 그 순간 나는 내 삶이 얼마나 정답에 가까웠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진실하게 걸어 왔는지를 돌아보고 싶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다시, 오늘의 자리에서 조용히 길을 이어 걷는다.(민들레에서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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