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킹 목사는 말했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었다고."
침묵은 단순한 방관이 아니다. 때로는 공모와 다름없다. 우리의 침묵은 악의 씨앗을 키우고, 그 결과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재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독일 나치 정권의 사례는 이를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당시 독일 국민들은 "나 하나쯤은 상관없겠지"라는 생각으로 권력의 폭주를 방관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들, 그다음은 사회 민주 당원들, 이어 노동조합원들과 유대인들. 결국 침묵의 대상은 모두를 향했다.
독일은 고도로 발전한 기독교 문명 국가였다.
독일 음악과 미술은 깊고 넓었다.
문학과 철학은 서양 문명의 꽃이었다.
과학 기술은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루터를 탄생시킨 독일 기독교 신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19세기 초 피히테가 주창해 발전시킨 독일의 근대 교육 시스템은 당시 서양식 교육의 본보기였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독일인은 또 어떠한가.
그런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중 학살한 유대인의 수는 6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것은 인류가 그때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역사상 최대이자 최악의 학살극이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더 있다. 그 가공할 학살이 고도로 효율적이고 합법적인 공적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 찬란한 문명 국가에서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 가공할 학살의 책임은 소수의 나치 정권에게만 있을까? 무거운 침묵 속에서 알게 모르게 이에 가담하고 동조하며 방관한 이들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을까?
때로는 침묵은 금이 아니라 참극을 불러올 뿐이다. 다른 이는 물론 나 자신에게 조차 말이다. 침묵이 악을 돕는 순간, 침묵은 진실과 정의의 빛을 가리며 그 힘을 잃게 만드는 최대의 적이 될수있다. 옳지 않은 일에 저항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침묵할 때, 그 침묵은 우리를 넘어 다음 세대까지 무거운 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묻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와 정의를 지키는 첫걸음이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그의 시를 통해 이를 처절히 증언하고 있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사회 민주 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 민주 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시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할 교훈을 담고 있다. 처음부터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침묵의 공범이 되고 만다. 나치 정권의 역사는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지금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현재의 문제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권력이 국민을 하찮게 여기고, 체계적으로 통제를 시도하며 반대를 억압하려는 모습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법과 상식을 벗어난 부당한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현실은 우리가 처한 시대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나라면 그 지시를 받았다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일하는 모든 개인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자신만의 기준을 가져야 한다. 법은 단순한 규율이 아니라 상식과 정의를 위한 도구이다. 우리가 침묵 대신 행동할 수 있는 첫걸음은 법과 상식을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할 힘을 갖는 것이다.
세상 어느 나라, 어떤 사회든, 어떤 시대이든. 나쁜(악) 놈, 착(선)한 놈이 있다.
착한놈만 사는 세상은 악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고 나쁜놈만 사는 세상은 선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악한놈, 선한놈이 혼재하여 사니 공동체를 위한 법과 규율을 만들어 지키는 것이다. 이 법과 규율을 지키지 않는 행위는 곧 우리 공동체를 허무는 것이다. 공동체의 법과 규율을 지키지 않는 놈들이 다 악은 아닐지라도 이에 침묵하고 방관한다면 이 사회의 혼란은 일상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곧 80이 되는 늙은이가 드리는 말이다.
고집이 세고 어리석은 사람들아,
자신이 저지르고 벌려놓은 일이 얼마나 많은이들,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은 젊은 이들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었는지 정녕 모른다는 말인가?
나이만 먹었다고 어른이라고 할수있나?
그냥 세상 오래산 노친네 일뿐.
그간 살아온 값진 경험과 경륜이 부끄럽지 않게, 양심에 손을 얹고 떳떳한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가야 되지 않겠는가?
아차 하면 나라에 혼란이 가중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우성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침묵이 때로는 악이 되고 죄가 된다 해도,
노친네들 이여 차라리 그냥 침묵 해라.
(일부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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