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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直義方(경직의방)

by 까마귀마을 2025. 1. 4.

敬直義方(경직의방)
공경 함으로서 마음을 올바르게 하고 의로움으로서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

 

敬以直內 義以方外 (경이직내 의이방외 : 공경함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로움으로 밖을 방정하게 한다)를 줄인 말이다.
이 구절의 출처는 주역(周易) 문언전(文言傳)에 군자는 敬(경)으로 자신을 곧게 하며, 義(의)로서 세상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다.

 

直其正也(직기정야) 곧다는 것은 바르다는 말이다.
方其義也(방기의야) 바르다는 것은 옳다는 말이다.
君子敬以直內 (군자경이직내) 군자는 공경으로 안을 곧게 하고
義而方外(의이방외) 옳은 것으로 밖을 바르게 한다.
敬義立而德不孤 (경의립이덕불고) 공경하는 것과 옳은 것이 확립되면 덕은 외롭 지 않다.
直方大不習(직방대불습) 곧고 바르고 크다는 것을 익히지 않아도
无不利(무불이)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則不疑其所行也(즉불의기소행야) 그 행하는 바를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直(직)은 정직을 뜻하고,

方(방)은 의롭다는 뜻이다. 곧음과 올바름이 결합하여 정직이란 말이 생겼다.

直은 내면적 가치이며 方은 외면적 가치이다. 내면적 가치, 외면적 가치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면 절름발이 가치에 불과하다.

군자는 이 두 가지를 다 갗추어야 된다.

군자는 공경의 태도로 안으로는 내면성을 곧게 하고 : 敬以直內(경이직내)

밖으로는 의로운 가치를 실천하여 방정하게 드러내어야 한다 : 義以方外(의이방외)

군자는 안팎으로 공경과 의리를 곧고 방정하게 실천하면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외롭지 않다 : 敬義立而德不孤(경의립이덕불고)

비록 화려한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진정 마음 속으로 따르는 사람이 많아진다.

군자는 홀로 고독을 즐기지 않는다.

고결한 덕성이 뒷받침된 군자에게는 이웃이 생기게 마련이다. 공경과 의리를 갖춘 군자에게는 추종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외롭지 않다는 뜻이다.

정직의 반대말은 거짓이다. 정직은 양심의 부름을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소중한 지팡이다. 호머(Homer)의 오딧세이(Odyssey)에 “하늘은 정직한 자를 지킨다(Heaven protects the just)”는 말이 있다. 정직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싹튼다. 그래서 공자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 정직이다. 정직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요행으로 화를 면할 따름이다”라고 했다.

세상이 어수선하다.

공경을 모르고 정직하지 않으며 의롭지 않으니 천박하고 거만하며 비겁하고 추하다.

敬直義方(경직의방) 그 어느때보다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우리 사회가 새겨야 할 교훈이다.

 

그리고 주자(朱子)근사록(近思錄)에는
君子主敬以直其內 守義而方其外 敬立而內直 義形而方外(군자주경이직기내 수의이방기외 경립이내직 의형이방외)
군자는 주경(主敬)으로 그 마음을 바르게 하며 수의(守義)로 그 밖을 방정하게 한다. 경(敬)이 서면 마음이 바르게 되고 의(義)가 나타나면 밖이 방정(方正)하게 된다.

敬直義方(경직의방)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차고 다녔다는 칼에 새긴 글이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조선의 성리학에서 敬義(경의)의 수양론을 전면에 내세운 이가 바로 남명 조식 선생이다.
제자 정인홍(鄭仁弘)이 쓴 행장에 따르면, 남명 조식은 은 敬義(경의) 두 글자를 제자들에게 학문을 지도하던 산천재(山天齋)의 창문 좌우의 벽에 크게 써 붙이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집에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아서, 옛날부터 변함 없이 환하게 빛난다. 성현의 모든 말씀은 요컨대 모두 이 두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귀양지 강진에서 두 아들에게 평생 지녀야 할 삶의 자세로 敬直義方(경직의방)을 하피첩(노을 빛(붉은) 치마로 만든 소책자)에 써서 보냈다.

1810년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온 지 10년째. 고향을 떠나올 때 19살, 16살이던 장남 학연(丁學淵 1783~1859)과 둘째 학유(丁學游 1786~1855)가 어느덧 28살과 25살의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유배생활 중 다산이 가장 염려한 것은, 혹시라도 두 아들이 폐족(廢族)이라는 굴레를 쓰고 엇나가지 않을까 하는 것. 다산은 늘 노심초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걱정한 다산은 3년 전 아내가 보내온 빛바랜 치막자락을 잘라 두 아들에게 서릿발 같은 훈계와 교훈이 담긴 4권의 서첩을 만들어 고향으로 보냈다.

1첩에는 가족공동체와 결속하여 소양을 기르고 2첩에는 자아를 확립하고 몸과 마음을 닦아 근검하게 살며 3첩에는 학문과 처세술을 익혀 훗날에 대비하라는 가르침을 적었다.
맨 먼저 큼지막하게 쓴 경직의방(敬直義方) 네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있다. 글자 옆에 붉은 동그라미 표시까지 해두었다. "공경으로 마음을 바로잡고 의로써 행동을 반듯하게 하라"는 아버지의 추상같은 훈계에 두 아들은 서늘함마저 느꼈을 것이다.

근검(勤儉)이라는 두 글자도 눈에 띈다. '나는 벼슬이 없어 물려줄 전답이 없다. 그러나 근면과 검소는 비옥한 토지보다 나아서, 한평생 쓰고도 남는다. 그러니 근검 이 두 글자를 부디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당부한다.
세상 어디에 이보다 값진 가르침과 사랑이 있을까. 유배 간 아버지가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행서와 행초서 전서와 예서 등 다양한 서체로 쓴 하피첩을 받아 든 두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아버지 다산의 간절함과 진심은 두 아들에게 통했다.
죄인 자식들이라 정상적인 출세길은 막혀 있었지만, 장남 학연은 아버지의 강진 제자들과 남종 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 등과 교유하며 삼창관집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둘째 학유는 한 해 동안 농가에서 힘써야 할 일을 월별로 정리한 국한문 운문체의 가사 농가월령가를 지었다. 다산이 그토록 걱정한 폐족 신세는 면했다.

*폐지 줍는 할머니 손수레에서 발견된 하피첩
다산의 가족 사랑이 담긴 하피첩은 다산의 삶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여정을 겪는다. 시집간 딸에게 그려준 매화병제도(梅花倂題圖)는 사위 윤창모의 집안을 거쳐 고려대학교 박물관으로 들어갔고, 하피첩은 후손들에 의해 다산의 생가인 경기도 남양주의 여유당(與猶堂)에 보관되어 대대로 가보로 전해졌다.
그러던 중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25년 을축년에 대홍수가 발생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에 자리한 여유당에도 물이 쓰나미처럼 차올랐다. 다산의 4대손은 죽음을 무릅쓰고 다락방으로 올라가 하피첩과 서책이 들어 있는 궤짝을 짊어지고 겨우 피신했다. 밤새 내린 비에 여유당은 결국 통째로 쓸려갔다.
가까스로 을축년 대홍수 위기를 면한 하피첩은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이번엔 6·25 전쟁이다. 여유당 옆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던 4대손이 작고한 뒤 하피첩은 5대손에게 넘겨졌다.
5대손은 경제적 이유로 1930년대 초 마재마을을 떠나 서울로 상경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던 중에 6·25가 터졌다. 인민군들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5대손은 하피첩 보따리를 소중하게 챙겨 수원역으로 나갔다.
수원역은 피란 인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기다리던 기차는 오지 않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던 중 붐비는 인파들 사이에서 하피첩을 잃어버렸다. 5대손은 "내가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 하피첩을 잃어버렸다. 하늘에 가서도 조상님을 뵐 면목이 없구나"라고 여러 번 자책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피첩은 기록에는 존재하지만 실물로는 볼 수 없는 전설의 유물이 되었다.
6.25 전쟁 중 잃어버린 4권의 하피첩 중에서 3권이 2004년 수원의 공사장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발견되었다.

1첩과 2첩은 표지가 미색, 3첩은 푸른색이다. 2004년 수원의 한 인테리어 공사장에 폐지를 줍는 할머니가 손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공사 중에 뜯어낸 벽지와 폐지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할머니가 폐지를 줍고 있는데, 인테리어업체 현장 소장 이모씨의 눈에 할머니의 손수레 바닥에 깔려있는 세 권의 고문서가 눈에 들어왔단다. 내용은 잘 모르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책이라 생각한 이씨는 할머니에게 "폐지를 내어 줄 테니 고문서를 달라"라고 했고, 그렇게 세 권의 서첩을 손에 넣었다. 4권의 하피첩 중 3권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2006년 고문서의 내용이 궁금했던 인테리어 업체 소장 이씨는 고미술품을 감정하고 평가하는 KBS 교양프로그램 진품명품의 문을 두드렸다. 먼저 사진으로 살펴본 김영복 고서화 전문 감정위원은 눈을 의심했다고 한다.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전설의 하피첩이었기 때문(이는 당시 진품명품을 진행했던 왕종근 아나운서가 방송에 나와 후일담으로 이야기한 바 있다).김영복 감정위원은 감정가로 1억 원을 제시했다. 진품명품 현장에서 정가 1억원을 매겨졌던 이 보물은 2015년 서울 옥션 경매에서 7억 5천만원에 국립민속 박물관에 팔렸으며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보물의  진위 확인은 다산이 하피첩을 만들고 남겨둔 아내의 치맛자락으로 시집간 딸에게 그려준 매조도가 고려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었기에 확인이 가능했다. 매조도의 천과 하피첩의 비단 천을 정밀 분석한 결과 천의 재질과 낡은 정도 등이 정확히 일치했다. 그렇게 200여 년 만에 하피첩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2005년부터 진품명품에 출연하며 고서화를 감정했던 김영복 위원은 서첩을 보는 순간 "가슴이 벌벌 떨렸다"며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유물은 다산의 하피첩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감정가 15만 원을 예상했던 의뢰인 이씨 또한, 집에 돌아가는 길에 손이 떨려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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