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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취미 생활/한글서예

한용운의 사랑

by 까마귀마을 2024. 11. 26.

 

 

사랑


봄 물보다 깊으리라
갈 산보다 높으리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만 말하리

   --한용운--

 

사랑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님은 너무도 쉽게 정의하고 있다.

크게 비약하지 않으면서 우리 주변에서 언제나 쉽게 볼수있는 자연을 예를 들며 쉽게 짚어주고 있다.

봄 물보다 깊고 갈 산보다 높고 달보다 빛나고 돌보다 굳은 것이 사랑이라고, 

그래서 누가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대로 말하겠다고, 

먼저 사랑은 봄 물보다 깊은 것이라고 한다. 

봄 물은 만물을 자라게 하는 생명의 물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깊은 것이 사랑이라고 작가는 읊고 있다.

그리고 갈 산보다 높다고 한다. 

갈 산은 만물을 살찌우고, 포용하고 모든 것을 내어준 겸손의 산이 가을 산이다.

한용운 시조시인은 승려로 산과 더불어 살았기에 그 가을의 산이 한없이 더 높았던 것이다.

그 갈 산보다 높은 것이 사랑이며 달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고 돌보다 더 굳건히 지킬 줄 아는 것이 사랑이라 설파하고 있다. 

더욱이 이런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만 말할 것이라며 모든 이들과 함께 공유하고 소통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간과하거나 빼놓지 말아야 할점은 사랑은 돌보다 굳건하고 변함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역사상 인간의 삶에 대한 최장기 연구 프로젝트인 ‘하버드대 성인발달 연구’의 4번째 책임자인 버트 월딩어 하버드대 의대 교수에 따르면 ‘행복을 정하는 결정적 요인은 부도 명예도 학벌도 아니었다.’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과의 따뜻한 관계’에 있다고  ‘따뜻한 관계’가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월딩어 교수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이 "인생 최고의 투자"라고 하였다.

 
한용운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에서 부농인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창성 방씨(昌成 方氏)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18세 때인 1896년(또는 1897년) 고향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간 불교 서적을 읽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출가의 원인 역시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의 부친 한응준은 일찍이 충훈부(忠勳府)[5]의 종5품 도사(都事)를 지내다가 1894년(고종 31) 12월 5일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 이승우(李勝宇)의 참모관(參謀官)에 제수되어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도중 전사하였다. 이로 보아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영제(永濟) 스님에 의하여 수계(受戒)를 하니 득도 때의 계명(戒名)은 봉완(奉玩)으로 이때 출가하여 얻은 법명이 바로 용운(龍雲)이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 학교로 운영 중이던 우당 이회영 등의 신흥무관학교를 방문, 격려하였다. 뒤이어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해 불교 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1912년 양산 통도사에서 팔만대장경을 열람하고 1914년 부산 범어사에서 불교대전(佛敎大典)을 간행하고 대승불교의 반야 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선언하고 자진 체포되었다.

3년을 복역한 뒤 출소해 민족 의식 계몽에 대한 준비를 한 후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 문학에 앞장서고 불교계 항일 단체 ‘만당‘에 당수로 추대되는 등 각종 민족 운동 및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어려운 불교를 대중에게 쉽게 알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팔만대장경의 핵심 부분만 뽑아내어 불교대전을 간행하였으며 유심 이라는 불교 잡지를 발간하여 글로써 민족 의식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1944년, 광복을 불과 1년 남기고 향년 65세에 뇌졸중으로 입적했다. 숨진 뒤에도 체온이 내려가지 않고 혈색도 양호했기에 사람들은 한용운이 다시 눈을 뜨지 않을까 기다렸다가 사흘이 지나자 화장했다고 하며 화장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나무위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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