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詩 花石亭(화석정)
林亭秋已晩(임정추이만) 숲 속 정자에 가을은 저물었고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시인의 품은 뜻은 그지 없어라.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 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아래 붉어라.
山吐孤輪月(산토고윤월) 산은 홀로 둥근 달을 토해 내고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었어라.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 저무는 구름 속에 울음소리 끊어지네.
----율곡 이이----
註
騷客(소객) : 시인이나 묵객, 곧 풍류를 즐기는 사람, 여기서는 작자 자신을 가리킴.
無窮(무궁) : 끝이 없어라 (窮 :다하다. 끝)
鴻(홍) : 기러기
숲속의 정자에 가을 이미 저무는데
시객의 생각은 끝이 없어라.
저 멀리 물빛은 하늘에 이어저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잎은 햇빛 받아 붉구나.
산위로 둥근달이 떠오르고
강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먹음었네.
변방에서 날아오는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석양의 구름속에 울음소리 끊어지네.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토고윤월 강함만리풍)
서예 작품 문구로 자주 쓰이는 구절이다. 화석정이라는 시는 몰라도 이 구절은 눈에 익다.
의의 시 화석정은 율곡 이이 선생이 지은시로 8세에 지었다 하여 팔세부시라고도 한다.
깊어가는 어느 가을날 임진강변 화석에서 바라본 주변 가을 풍취가 시인의 감흥으로 잘 나타나고 있다.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13세에 진사시에 수석 합격하는 등 구도장원공(九度状元公 : 과거 시험에서 장원만 9번)의 별칭이 있을 정도로 천재였으며 격몽요걸, 성학집요, 시무육조(십만양병설)을 지었으며 49세로 졸 하였다.
화석정이 있는 파주시 파평면 율곡 3리는 율곡 이이가 살았던 곳이다. 율곡리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자리 잡은 조선시대 정자로, 정자에 서면 바로 밑을 흐르는 임진강을 굽어볼 수 있고, 서울의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이 아득하게 보인다.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강 건너로 장단평야가 넓게 펼쳐져 많은 이들이 관광 장소로 찾는 곳이다. 세종 25년(1443) 율곡 이이의 5대 조부인 강평공 이명신이 세운 것을 성종 9년(1478)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이 보수하고 몽암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정자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의 별장인 평천장의 기문 중에 보이는 화석(花石)을 따서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후 이이가 다시 중수하여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시와 학문을 논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 황홍헌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또한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이이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한밤중에 강을 건널 때 이 정자를 태워 불을 밝혔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그 후 80여 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에 이이의 증손인 이후지·이후방이 복원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단청작업을 하고 주위도 정화하였다. 건물의 정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이이가 8세 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 있다.(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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