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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閑山島夜吟 (한산도야음)

by 까마귀마을 2024. 3. 29.

해마다 이 맘때,

벗꽃이 만개 할때면 36만그루의 벗꽃이 있는 진해에서 군항제가 열린다.

진해 군항제는 1952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추모제를 거행하던 것이 유래이며 1963년부터 군항제라는 이름으로 행사가 개최되고있다.

열흘정도 계속되는 군항제의 주요 행사에는 이충무공 추모대제가 들어있다. 한국 민족의 역사는 이웃 민족의 침략에 항쟁한 고난의 역사다. 그러나 매양 그 고난을 헤치고 이겨낸 극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극복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의 힘이 움직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 힘이 바로 민족을 죽음 속에서도 건져낼 수 있는 민족정기요 이 정기의 가장 대표적인 발양자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벗꽃이 만발한 이즈음 우리민족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남긴 시와 명언들을 알아볼까 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지은 한시

 

       閑山島夜吟 (한산도야음)  한산도에서 밤에 읊다

水國秋光暮(수국추광모) 물나라 가을 빛이 어느듯 저물에라

驚寒雁陳高(경한안진고) 높이 뜬 기러기떼 추위에 놀랐고나
憂心輾轉夜(우심전전야) 근심에 잠 못 이뤄 이리저리 뒤척일 때
殘月照弓刀(잔월조궁도) 지새는 저 달빛이 활과 칼을 비취여라.

 

     閑山島歌(한산도가)  한산도에서 부르는 노래

閑山島月明夜上戍樓(한산도월명야상수루)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撫大刀深愁時(무대도심수시)  큰 칼을 어루만지며 깊은 근심을 할 때

何處 一聲羌笛更添愁(하처일성강적경첨수)  어디서 한가락 강적(羌笛)소리가 더욱 근심을 더하네.

 

       陳中吟(진중음) 진중에서 읊다

天步西門遠(천보서문원) 임금의 행차는 서쪽에서 멀어지고,

君儲北地危(군저북지위) 자는 북쪽 땅에서 위태롭다.

孤臣憂國日(고신우국일) 외로운 신하는 나라를 걱정할 때이고

壯士樹勳時(장사수훈시) 사나이는 공훈을 세워야 할 시기로다.

誓海魚龍動(서해어룡동) 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도 감동하고

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 에 맹세하니 초목도 알아준다.

讐夷如盡滅(수이여진멸) 수를 모두 멸할 수 있다면

雖死不爲辭(수사불위사) 록 죽음일지라도 사양하지 않겠노라.

 

贈別宣水使居怡(증별선수사거이) 선수사(충청수사 선거이)를 보내며

북거동근고 (北去同勤苦) 북에서 서로 만나 고생을 함께 하고

남래공사생 (南來共死生) 남으로 내려와서 생사를 같이 했네

일배금야월 (一杯今夜月) 오늘 밤 달빛 아래 술 한 잔 잡읍시다

명일별리정 (明日別離情) 밝은 날 떠나간 후 그리움 어이하리.

 

 

이순신 장군이 남긴 명언

若無湖南 是無國家也(약무호남 시무국가야) : 만약 호남이 없어진다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금신전선상유십이, 출사력거전 즉유가위야) : 지금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운다면, 아직 이길 수 있사옵니다.

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 망령되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 : 전투가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 죽고자 하면 살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三尺誓天山河動色  (삼척서천산하동색) :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一揮掃蕩血染山河  (일휘소탕혈염산하) :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

적을 가벼이 여기면 반드시 패하는 것이 원칙이다.
정상에 오르면 박수를 받으며 내려갈 일을 생각하라.
정상에 올랐을 때보다 정상에서 내려갈 때 더 주의해야 한다.
땅이 단단히 얼어붙어도 때가 되면 싹이 오른다.
느리더라도 힘주어 뻗은 걸음이 발자국도 깊다..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1000명의 적을 떨게 할 수 있다.
나를 죽이지 못할 고통은 나를 더욱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파도 너머 깊은 바다를 응시하며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랐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 장교였다.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이순신 장군의 생애

이순신 장군은 1545년(인종 1년)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거사였던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의 셋째아들이다.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德水). 그의 가문은 6대조부터 사대부의 전통을 이어왔지만 조부 이백록이 조광조가 이끄는 사림파의 별과에 천거 받았다가 기묘사화의 후폭풍으로 벼슬길이 끊어졌다.어린 시절 이순신은 서울에 살면서 세 살 터울의 서애 유성룡과 어울렸다. 유성룡 징비록에서 그가 매우 영특하고 활달해서 아이들과 함께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즐겨했는데, 자라면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으며 글씨도 잘 썼다고 회고했다. 장차 뛰어난 무인으로서의 자질이 어렸을 때부터 발휘되었던 것이다. 조카 이분이 남긴 행록에는 ‘어려서 놀 때면 늘 전쟁놀이를 하는데 아이들이 반드시 공을 장수로 떠받들었다. 처음에는 두 형을 따라 유학을 배웠는데 재주가 있어 성공할 만했으나 매양 붓을 던지고 군인이 되고 싶어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빈한한 살림 때문이었는지 이순신의 가족은 외가인 충청남도 아산으로 거처를 옮긴다. 현재 지명으로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다. 그때부터 이순신은 반가의 자제들이 그랬듯이 과거공부에 전념했다. 하지만 가문에 덧씌워진 굴레 때문에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자질에 어울리는 무과에 응시할 뜻을 품게 된다.1565년(명종 20년), 20세의 이순신은 상주 방씨(尙州方氏)와 혼인하여 훗날 이회, 이울, 이면 등 아들 셋과 딸 하나를 얻는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572년(선조 5년) 8월,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지만 시험 도중 낙마로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여 낙방하고 말았다. 첫 번째의 참담한 실패 이후 절치부심한 그는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2월, 드디어 31세의 늦은 나이로 식년무과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그때부터 무관 이순신의 파란만장한 관직 생활이 시작된다.

 

특히 1592년으로부터 7년동안 싸운 저 유명한 임진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종사는 위태롭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을 적에 쓰러지는 국가 민족의 운명을 한 손으로 바로잡아 일으켰으니 창생의 생명을 살리고 역사의 명맥을 잇게 한 크신 공로야말로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만대에 겨레의 제사를 받으리라.
비록 육신의 몸은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의 피를 흘렸을지라도 꽃다운 혼은 저 태양이 되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아계실 것이니 과연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요 또 빛과 힘과 자랑이 아니겠느냐. 아! 님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


임진왜란
1592년 4월 14일 제1선단 6만 병력이 부산에 상륙, 부산성을 부수고 봄놀이 가듯 올라 가다가 충주전투에서 신립장군의 참패로 인한 파죽지세로 한양에 도달하는 5월 2일동안 싸움에 지기만 하는 상태에서 이순신은 좌수영 함대를 이끌고 원균의 우수영과 합쳐서 5월 7일 옥포만에서 해전의 경험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적함 26척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전멸이라 함은 한 척도 남김없이 완파시켰다는 승전이다. 다음날 적진포 전투에서 11척을 격파하고 승전한다.
옥포만의 전투는 임진년에 벌어진 여러 해전의 전형적인 모델을 이룬다.
한번의 출전에서 여러 포구를 돌며 적을 소탕하는 방법인데, 적의 포진에 관해서 사전에 충분한 정보가 없이 연안을 광범위 하게 수색해서 적을 찾아내 소탕하는 싸움 방식. 이 수색 섬멸전은 임진년의 여러 전투에 적용되었던 이순신 함대의 기본 전술이 된다. 적의 기지에 상륙하지 않고 육군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상륙전은 위험을 감내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치고 빠지는 전술을 사용한다.
29일은 돌격장 이언양이 개발한 기상천외한 거북선을 처음으로 투입하여 전쟁을 치른다. 29일 동진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를 차례로 돌며 적의 함대 70여척을 부순다. 이 출정은 무관선배인 원균의 정보제공에 의한 성과다.
7월6일에는 역사에 남는 한산도 대첩에서 학익진을 펼쳐 승전한다.
견내량과 안골포 깊숙이 포진한 적의 함대에 소수의 함대를 보내서 유인하게 하고 한산도 앞바다에서 방향을 바꿔 학익진을 펼쳐 적선 47척을 격침하고 10여척을 나포하는 성과를 올린 전법인데, 무수한 반복 훈련의 결과로 장군의 의지대로 함선이 움직이지 못하면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는 전술인 것이다.
안골포에서는 내항 깊숙이 들어가 적이 나오지 않자 종렬진으로 내항 깊이 찔러 들어가 여러 번의 파상 공격으로 적선 42척을 부순다.
한산대첩의 승리는 전쟁 전체의 국면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적들은 남해안 제해권을 상실하고, 바다를 통한 보급이 끊겼고 퇴로가 막혔다. 적의 서해 우회를 좌절 시킴으로써 조선은 전라, 충청, 황해를 지키고 반격의 교두보를 확보했으며, 서해를 통한 지휘계통이 확립되었다.
8월 27일 웅천에 도착. 경상 해안 쪽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9월1일 새벽 물운대에 도착. 부산 동래 해역을 수색. 부산포에 정박중인 적선 500여척을 발견. 장사진으로 돌격해 들어가 6차례 전투로 150여 척을 격침시킨다.
임진년이 저물고 계사년이 된다.
한산도로 수영을 옮기고 장기 대치전에 돌입한다. 전쟁은 욱하는 성질에 화가 나서 달려드는 싸움이 아니다. 전쟁계획서를 세우면 동원되어야 하는 군대도 문제지만, 절대적인 것이 군수물자다. 철저한 BOM에 의한 상세 내역서가 뒤따르지 않는 전쟁은 이미 패배를 준비하는 것이다. 미군의 BOM 내역서를 보면 식량과 탄환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여성의 생리대와 손톱깎이 몇 개가 필요한 품목인지가 작성되어있다. 이길 수 밖에 없는 전쟁. 그 시작은 철저한 준비에 있는 것이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이라는 책을 보면 청나라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한 준비로서 영국과 프랑스에 전함을 주문하고 군수물자 생산 계획을 세우고 심지어는 군용으로 쓰일 말의 생산을 어느 나라에서 수입할 것인지에 대한 검토와 군비를 위한 채권 발행에 대한 내용까지 나온다.
그런데 이순신의 수군은 참혹한 식량난을 겪는다.
수군 중에서 병들고 부상 입은 자와 노인을 귀향조치하고 질병으로 육백여 명이 죽고 병사는 보충되지 않고 흉년과 왜적의 노략질로 마을은 불타고 백성은 난민이 되어 흩어지고,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널린 정도의 참혹상을 겪으면서 서해로 가는 길목인 한산도에서 목진지를 틀어 막고 세월을 보낸다.
적들은 소문만 들어도 무섭고 무시무시한 이순신 장군이라는 이름만 들려도 기가 죽고 도망칠 궁리가 먼저 앞서는 상태로 남해안 부산을 부근으로 하는 진지를 쌓고 토굴을 파고들어가 몇 년을 버틴다.

 

전쟁이 없는 5년의 한산도 시절과 사헌부의 이간질로 시작된 숙청이다. 대기하면서 보낸 세월을 선조는 질타한다. 1597년 정유년이 되자 적장 가토의 머리를 가져 오라는 선조의 명을 어겼다는 죄명을 걸어 서울로 압송 고문을 하다 혐의를 입증하지 못한다. 선조는 이미 불타버린 종묘와 사직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몇몇 선왕들의 왕능을 파헤치고 유골과 유물을 약탈하거나 시체를 태워서 어지럽게 해놓은 상황에 대한 보복의 차원에서 적장 가토의 머리를 올려놓고 술을 따르면서 죄를 빌고자 했으리라.

중죄인의 죄를 다룰 때에는 압슬형이라고 해서 다리를 묶고 큰 돌을 얹어 놓아서 무릎 뼈가 탈골 되고 다리를 쓰지 못하게 고문을 하는 게 보통인데, 장수로서의 훗날을 도모하려 했음인지 큰 고문은 하지 않아서 출옥해서 백의 종군으로 남해까지 내려가는데, 말을 타거나 걸어서 간다. 가는 길에 모친 상을 당하고 슬픔을 가누지 못하지만, 초상을 치르러 가지는 못한다.
선조와 병조판서는 권율을 중개로 해서 이순신의 후임이던 삼도수군 통제사 원균을 부추겨서 전쟁으로 내몰아 원균의 함대는 7월 16일 칠전량 해전에서 조선전함 3백척이상이 깨지고 삼도 수군이 전멸하는 패전을 한다. 5년을 버티던 이순신 의 한산도 통제영을 궤멸시킨 것이다.
다시 3도수군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남아있는 전선 12척과 120명의 군사를 수습한날 남원은 조선관민 사천과 명군 삼천이 전멸되고 함락된다. 그래서 만들어진 만인의총. 칠천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9월16일 울둘목이라 불리는 진도 앞바다에서 명랑해전을 벌여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이용한 전략 전술과 해저에 쇠사슬을 엮어서 썰물 때 배가 도망가지 못하게 쇠줄을 당겨 적들의 배가 서로 부딪혀서 깨지는 전법을 구사한다. 양반가에서 거둬온 두꺼운 솜이불 100여채를 물에 적셔 배의 난간에 걸쳐서 조총의 탄환이 뚫지 못하게 하는 전법과 장기전에 대비한 수분 보충의 지혜로 박을 실어 전투에 임해서 330여척의 함대를 13척으로 맞아 적선 33척이 깨지고 나머지는 도망가기 바쁜 전세를 뒤집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정유재란의 국면 전환과 서해 통로를 봉쇄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
해가 바뀌어 1598년 무술년. 이순신의 나이 쉰넷.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철군을 주문하고 급사로 죽는다. 명군 진린과 일본군과의 철군 협상이 이뤄지는 마당. 왜장은 퇴로를 열어주면 전리품으로 수급 이천을 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러자 진린은 전쟁을 하지 않고 이기는 방법도 병법의 하나라면서 이순신을 설득하려 하지만, 이순신은 죽인 적들의 머리를 모두 가져 가라는 협상으로 전투에 임한다.
이순신은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명예를 걸고 노량해전에서 적선 200여척이 격침되고 50여척이 도주하는 가운데,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옮겨온 글)

          


                                                        한산도 제승당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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