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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與隋將于仲文詩(여수장우중문시)

by 까마귀마을 2024. 3. 17.

與隋將于仲文詩(여수장우중문시)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오묘한 계산은 땅의 이치를 꿰뚫었도다.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그대 전쟁에 이겨 이미 공이 높으니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을지문덕----

 

註.

神策(신책) : 신기하고 기묘한 책략

究天文(구천문) : 천문을 궁구함. 하늘의 운수를 꿰뚫어 앎

妙算(묘산) : 기묘한 헤아림과 꾀

窮地理(궁지리) : 지리를 통달함

功旣高(공기고) : 공이 이미 높음

知足(지족) : 만족함을 앎

願云止(원운지) : 그친다고 말하기를 원함.

 

與隋將于仲文詩(여수장우중문시)는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이 지은 시로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 라는 뜻이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되어 있으며 제목은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 또는 ‘유수장우중문(遺隋將于仲文)’이라고도 한다. 이 시는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五言(오언) 고시(古詩)로 구법(句法)이 기고(奇古 : 시를 짓는 수법이 기이하고 예스러워 고아하다)하고 굳센 기상이 있어 고금에 뛰어난 명작으로 꼽힌다.

전구(前句)에서의 우중문에 대한 칭찬이, 결구(結句)에서 결국 칭찬이 아님이 드러나고 있다. 직접적인 힐난이나 핀잔보다는 더욱 신랄한 조롱의 뜻을 담고 있다. 특히 결구는 '돌아가는 것이 피차에 희생을 내지 않게 하는 상책일 것이니 싸워 상하기 전에 어서 돌아가라 '는 힐난의 뜻을 담은 말이다. 이 시에서 우중문에 대한 칭찬은 실상은 핀잔이요, 조롱이다.

 

이 시가 쓰여진 배경은 서기 612년 고구려 영양왕 23년 수나라 양제가 우문중(于仲文)과 우문술(于文述)을 앞세워  200만(전투군대 113만, 보급대 등을 모두 합하면 300만이라는 기록도 있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여 압록강에서 대치하고 있을때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將軍)은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적진(敵陣)에 항복(降伏)하겠다고 들어가 적정(敵情)을 살피기 위하여 거짓으로 항복(降伏)하고 적군(敵軍)의 허실(虛實)을 정탐(偵探)한 뒤에 적진(敵)을 탈출(脫出)한 뒤에 하루 칠전 칠패(七戰七敗) 하는 지는 척 철수 작전으로 수군(隋軍)을 유인작전(誘引作戰)으로 평양성(平壤城) 30리 밖까지 유인(誘引)해서 우문중에게 보낸 편지 시가 위의 시(詩)다.

 

사실,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모두 4차례에 걸친 대 전쟁이었다. 동원된 군사는 수양제 때만 300만이었다. 동원된 군사로 보면 전세계 1차, 2차 대전 이전을 통털어 인류역사에서 가장 큰 전쟁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칭기즈칸의 정복 전쟁, 십자군 전쟁, 백년전쟁, 고구려 당나라 전쟁까지 통털어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군사적 동원에서만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전쟁의 승패도 역사적이다. 당시 수나라 병력은 전투부대만 113만(총 300만)으로 고구려를 완전히 쓸어버리려고 동원한 대군이었다.

산동반도에서 요동으로 진격하려던 배가 출전하는 시간만 몇달이 걸렸고, 군대 대열만 90리에 뻗쳤다고 한다. 그리고 침략군 중 별동대 30만명은 평양성을 향해 진격하던 우중문과 우문술 등이 거느린 대군이었다. 을지문덕 장군은 겨울이 오기전에 전쟁을 끝내려는 삼십만 별동대의 속셈을 알고, 쫓아오는 길목마다 백성을 피신시키고 음식을 없애고 우물을 메워버리며 수나라 병사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거기에 수나라의 장수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隋軍)의 평양 공격이 패배함으로써 완전히 힘이 빠지게 된 수나라 군대에 조롱석인 이 유명한 시를 보내서 물러가도록 유도했으며 철수하는 수나라 군대의 뒤를 쫓아가 살수, 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러 뒷덜미를 공격하고, 대오가 무너진 틈을 타 총공격을 퍼부어 완전히 궤멸시켜 버렸으니 이 전쟁을 역사는 살수대첩이라 기록하고있다.

수양제는 중국의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많은 물자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이점만을 믿었으나, 거리가 멀어 군량(軍糧) 공급이 곤란할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또 고구려의 장병(將兵)이 모두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강병(强兵)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모든 요새가 험고(險固)하여 쉽사리 공취(攻取)할 수 없음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에 수나라 군대가 얼마나 정신없이 도망을 쳤는지에 대해선 사료에 나오고 있다.

청천강에서 부터 압록강까지 450리 길을 하루밤에 달아났다고 하며, 또 살아서 압록강을 건넌 자가 모두 2700명에 불과했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기록이 아니라, 수나라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의 기록에 있다고 한다. 어찌보면 중국 역사상 최악의 굴욕적 전쟁이었던 셈이다. 결국 수양제도 군사를 돌려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후에 재 침공을 했지만, 무모한 고구려 원정 실패와 자국 내 무리한 대운하 건설로 인해 빚어진 반란으로 수나라는 멸망하고 서기 618년에 새로운 나라 당나라가 세워졌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을지문덕전 (乙支文德傳)에서

땅의 넓이는 그 십분지(十分之一)에도 미치지 못하고, 인구는 그 백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고구려가 저 수나라를 대적하였으니, 그 기개는 비록 장하나 그 방도는 심히 위태로웠다. 그 당시에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들려 한다는 국외자(局外者)들의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을 텐데도, 을지공(乙支公)은 홀로 의연히 그러한 비판을 못 들은 척하고 적국에 대항하였으니, 과연 무엇을 믿고 그러하였던가? 

말하자면, 오직 독립정신(獨立精神) 단 한 가지였다”면서 을지문덕을 자주의식(自主意識)의 상징적 인물로 표현하였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후세 사람들이 만약 그의 머리털 하나만큼만 닮더라도 그 나라의 독립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한두 마디의 말만 잘 거두어 간직하더라도 그 나라의 역사를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니, 을지문덕이란 사람은 우리 대동국(大東國) 4,000년 역사에서 유일한 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 세계 각국에도 그 짝이 드물도다라고 칭송하면서,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국체(國體)를 보존할 수 없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사대모화사상(事大慕華思想)에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신채호에게 있어 을지문덕이란 역사 인물은 민족자존(民族自存)과 독립정신(獨立精神)의 표상이었고,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합리화하려고 내세운 한국인들의 타율적(他律的) 종속성(從屬性) 이론을 논파하는데 롤, 모델이 되었던것이다. 이렇게 역사에 훌륭한 장군이 고구려 장수로 나라를 지켰는데도 오늘날 대한민국은 나라에 전쟁이 나도 자주국방(自主國防)의 전시작전권도(戰時作戰權)도 없는 사대의식(事大意識)으로 쪼그라든 못난 민족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이여! 깨어나라. 언제까지 서로 물고 뜯고 분열만 일삼고 남의 눈치만 보는 못난 민족으로 살 것인가? 중원대륙을 한 손 안에 넣고 통치했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다물(多勿) 정신을 본을 받으시라.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되새겨 본다.

"우리는 평화롭게 살기 위해 전쟁을 치릅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 말고는, 어떤 전쟁이라도 멀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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