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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子의 四端

by 까마귀마을 2023. 9. 21.
孟子의 인간 본성 4단(四端)
 

공자가 죽은 후 약 100년 뒤에 태어난 맹자는 전국시대의 유가 사상가로 4단(四端)을 핵심사상으로 제시했다.

() 실마리라는 뜻이니, 우리가 어떤 사건을 해결하는 단서(端緖)를 찾는다고 할 때의 단서와 같은 뜻, 즉 우리말의 실마리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맹자가 주창한 인간의 도덕적 본성은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선을 향한 4가지 단서를 마음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4단이라 일컷는 그 네가지 단서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다.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말한다. 맹자의 이 사단론은 성선설(性善說)에 바탕을 둔 정치 이론에서 부터 출발하며 동아시아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럼 四端의 본문을 통하여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四端이란

인(仁)의 실마리인 측은해 하는 마음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의 실마리인 부끄러워하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서 우러나는 사양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에서 우러나는 옳고 그르다를 분별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를 말한다.

 

惻隱之心 仁之端也 (측은지심 인지단야) 측은해 하는 마음이 仁, 어짊의 시작이 되며

羞惡之心 義之端也 (수오지심 의지단야) 부끄러워 하는 마음은 義의 시작이 된다

辭讓之心 禮之端也 (사양지심 예지단야) 사양하는 마음은 禮의 시작이고

是非之心 智之端也 (시비지심 지지단야)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智, 지혜의 시작이다.

 

이는 인간이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덕으로

첫째,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면 누구나 구하려고 뛰어가는 마음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둘째, 의로우며 사람으로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아는 마음이 수오지심(羞惡之心)이다.

셋째, 겸손하여 사양하거나 양보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사양지심(辭讓之心)이다.

넷째, 삶을 살아가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것이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맹자는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근본적 특징을, 남의 불행을 차마 그대로 보아 넘기지 못하는 마음, 즉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라고 보았다.

그는 누군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본다면 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곧바로 달려가서 그 아이를 구하려 할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에게는 남의 불행을 차마 그대로 보아 넘기지 못하는 마음 즉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다고 하였다.

 남의 어려움을 보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기초가 되고,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위를 보고 자신을 되돌아 보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의(義)의 기초가 되며,

타인에게 양보하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기초가 되고,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기초가 된다.

 

이 사단을 갖추지 못하면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맹자의 철학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과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여기며 그 어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특히, 이런 사람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라 주변에 피해만 끼쳐 공동체를 해치는 의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맹자는 인의(仁義)를 저버린 자를 잔적(殘賊 : 한패의 도둑들 중에 잡히지 않고 남은 도둑)자로서 하찮은 사람이라 했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사람과 사람을 편가르고 남(국민)의 불행이나 아픔을 나 몰라라 여기며 그 어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 한 인간이 떠오르네요.

 

율곡의 칠정()

인간 본성 사물 접하면서 표현되는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망() 일곱 가지 자연적 감정 가리킨다.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학자들 간의 성리학을 주제로 한 논쟁이 제법 있었습니다. 특히 퇴계 이황과 기대승이 펼친 이른바 사단칠정 논쟁, 이것은 ‘인간의 선한 감정을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그럼 사단칠정이란 무엇인가. 사단칠정은 성리학의 철학적 개념 가운데 하나로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의 사단과 인간의 자연적 감정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을 뜻합니다. 이황은 그러면서 ‘사단은 항상 선한 것이요, 칠정은 선과 악이 섞여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반해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은 둘로 분리되어 작용하는 감정이 아니라, 칠정 가운데 선한 것 부분이 사단‘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철학에 관한 문제로 딱히 정답이 정해져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500여 년전 선조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무려 13년간 120여 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며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조선 성리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훗날 율곡 이이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럼 이 둘의 논쟁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1558년 가을날에 한양 서소문 근처에 있던 이황의 집에 당시 신인이던 기대승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기대승은 19세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흘리며 두문불출하기도 하였으나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며 학문에 정진해 나갔습니다. 그런 그가 이황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다면서도 그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당시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당돌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었습니다. 이황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는 과거에 막 급제한 선비였고 이황은 성균관 대사성의 위치에 있었는데 군대로 따지면 이제 막 소위로 임관한 장교와 사관학교 총장 간에 유례없는 토론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이황과 기대승의 나이차는 스물 여섯, 서른 두 살 먹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선비의 도발은 이황에게 가소로운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황은 이런 기대승을 내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듣도록 합니다. 그렇다고 기대승이 아예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당시 그는 주자의 성리학책을 발췌하여 『주자문록』이라는 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떠오르는 신예 학자였던 기대승이 제 발로 이황의 집에 찾아와 준 것에 대해 이황은 내심 반가웠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이황의 고향은 안동, 기대승의 고향은 전라도 광주이고 한 사람이 벼슬을 하면 다른 한 사람은 낙향해 있는 경우가 있어 둘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편지의 내용에는 사단칠정에 관한 것만이 있던 것은 아닙니다. 정치에 대한 의견과 각자의 가정 이야기와 고민 등 개인적이고 나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성리학을 주제로 한 사단칠정논쟁입니다.

 

사단칠정논쟁을 포괄하고 있는 성리학은 어떤 학문일까. 성리학에서는 우주와 자연의 이치를 ‘이(理)’와 ‘기(氣)’로 나누어 보고 있습니다. 理는 만물의 원리이고 氣는그런 원리가 구체적으로 형태를 갖추어 드러나는 걸 말합니다. 理가 추상적인 개념이라면 氣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황은 ‘이’와 ‘기’라는 개념에 사단과 칠정을 각각 대응시켰고 둘을 구분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이황은 사단이 이에서 비롯된 순수하게 선한 마음이라면, 칠정은 기에서 나온 선과 악이 섞여 있는 일반적인 감정으로 보았습니다. 그럼 기대승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사단이나 칠정이나 모두 똑같은 인간의 감정이므로 본질적인 차이가 없고 어느 감정에나 이와 기가 함께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사화를 거치면서 사림파의 선비들이 크게 위축되어 있는 가운데 이들의 편지 내용은 큰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편지를 베껴서 서로 돌려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의구심이 드는 것은 그들이 한 논쟁이 왜 그렇게 화제가 된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사단칠정이라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싶지만 당시 조선은 성리학 사회였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또한 이전에 사화로 인해 많은 사림의 선비들이 희생당했고 그에 따라 인간의 심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비들이 자기 수양을 해야 그런 희생들이 없었을 것으로 보고 당대 학자들은 여기에 대한 해답을 성리학에서 찾으려 한 것입니다. 결국 이 둘의 논쟁은 서로의 의견을 조금씩 귀담아듣고 보충해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가령 기대승의 편지를 받은 퇴계 선생은 그의 비판을 수용하여 자신의 사단칠정론을 다시 정리했는데 사단은 이(理)가 드러날 때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날 때 이(理)가 타는 것입니다.”라 하여 이와 기를 사단과 칠정의 경우 모두에 동일하게 적용하면서도, 사단은 이(理)가 중심이 되어 실현되고 칠정은 기(氣)가 중심이 되어 드러난다는 타협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타협안도 또다른 불씨가 되어 이황의 사단칠정론을 옹호하는 성혼과 이것과 다른 견해를 보인 이이가 논쟁하였고 그로 인해 이이는 퇴계 선생의 주장에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의 반론을 제기하면서 조선의 성리학은 더욱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퇴계선생은 성리학을 집대성하며 『성학십도』라는 책을 집필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알게 해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선조가 임금이 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기대승에게 이황이 어떤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이에 기대승은 이황은 자기 고집만 내세우지 않고 젊은 사람말도 잘 듣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기대승의 칭찬에 자신같이 부족한 선비를 인재로 쓰려 한다면 어쩔 것이냐며 다소 투정을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이황이 관직을 내놓고 낙향할 때에도 그가 추천한 사람이 바로 기대승이라고 합니다. 특히 이황은 영남지방을 근거지로 많은 제자를 두었음에도 그들을 제껴두고 호남사람인 기대승을 추천한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황이 1469년 선조의 부름을 받고 면담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가 마련한 것은 고봉 기대승이 이황을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황은 면담담자리에서 고봉을 ‘통유’, 즉 해박한 학자라고 지칭하며 추천하였습니다.

그러던 그의 나이 44세 때가 되었을 때 퇴계가 죽었습니다. 이에 고봉 기대승은 무척 슬퍼하며 통곡하며 그의 묘앞에 묘갈명을 써서 바치기도 했습니다. 사실 퇴계는 유언으로 기대승에게 묘비명을 쓰도록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합니다. 퇴계가 죽게 되었을 때 분명 기대승이 묘비명을 쓸 것이고 없는 말을 지어내어 과장해서 쓰고 이것이 후대에 웃음거리가 될까봐 염려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퇴계 이황과 이이 율곡은 지폐에도 그 얼굴이 그려질 만큼 상당히 유명한 인물인데 반해 고봉 기대승에 대한 것은 알려진 바가 적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퇴계와의 논쟁을 통해 그가 알려졌지만 결국 그와의 관계로 인해 그가 지워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대승은 성리학의 거물을 상대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묻혔다는 것입니다. 결국 퇴계 이황을 통해 고봉이 조명되었지만 퇴계라는 인물이 그를 가릴 정도로 너무 컸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기대승은 율곡에게 배척당했으니 결국 동인과 서인 어느 쪽에서도 기대승에 대해 크게 계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당시 문인들의 문집에서 고봉과 관련한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고봉이 길러낸 제자들이 의병으로 나아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흔적을 알리는 데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당시 기대승이 이황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의 존재를 알렸으나 만약 퇴계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가 역사속에서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출처 :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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