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語別(무어별) 말없이 이별하다
十五越溪女(십오월계녀) 십오세 아리따운 아가씨
羞人無語別(수인무어별) 남 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이별하였네
歸來掩重門(귀래엄중문) 돌아와 문을 겹겹이 닫아 걸고
泣向梨花月(읍향이화월) 배꽃처럼 하얀 달을 바라보며 울었네.
------ 임제(林悌)----
註
越溪女(월계녀) : 아름다운 미인. 중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꼽히는 서시(西施)는 중국 월(越) 나라 악야계(若耶溪) 출생이다. 또한 미인을 지칭하는 말로 월녀오희(越女吳姬)가있다. 월 나라와 오 나라는 대대로 미녀들을 많이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羞人(수인) : 남 부끄러워함.
無語別(무어별) : 말 없이 이별하다.
掩(엄) : 닫다
重門(중문) : 겹문, 덧문.
泣(읍) :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없이 울다.
梨花月(이화월) : 배꽃처럼 하얀 달. 배꽃 위에 걸린 달. 하얀 배꽃을 비추는 달.
이 詩는 임과 헤어진 여인의 원망을 노래한 오언절구(五言絶句)의 한시(漢詩)로 시제(詩題)는 '말 못하고 헤어지다'라는 뜻이다. 한국 한시 중에서 서정성으로는 고려 정지상의 送人(송인)과 함께 투톱으로 꼽히는 명시이다. 규원(閨怨 : 규수의 원망)이라는 부제로도 전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명문장가인 백호(白湖) 임제가 16세때 지은 한시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도 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헤어지고 돌아와서는 규방 빗장을 잠그고 하얀 배꽃 사이로 달을 보고 소리내어 울수도 없었서 혼자 눈물 지으며 남몰래 애태우는 열다섯 처녀의 안타까운 연정(戀情)이 한 폭의 그림인 양 잘 묘사되어있다. 특히 결구(結句)에서 하얀 배꽃의 애상적(哀傷的)인 분위기와 그 사이로 애련(哀憐)히 걸려있는 달의 안배(按配)는 주인공의 심정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 뛰어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여성적인 섬세한 감각으로 이별을 당한 여인의 슬픔을 효과적으로 포착해 내고 있다. 사랑하는 임과 헤어지면서도 남이 부끄러워 이별의 말 한 마디 못하고 홀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이 작품에서 배꽃처럼 흰 달(梨花月)은 이 작품의 배경 구실을 하면서 동시에 임의 모습을 더욱 생각나게 하는, 그래서 작중 화자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하는 작품 내적 기능을 하는 소재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유분방한 낭만주의적 경향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남녀유별이 엄격하고 권위와 법도가 중시되던 봉건주의적 시대의 남녀의 사랑이란 절실한 마음속에서만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남녀간의 연정이 잘 표현된 시이다.
임제는 조선 중기의 시인 겸 문신이다. 송순(宋純)ㆍ정철(鄭澈) 등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류남아요, 재사(才士)였다. 그는 시풍이 호방하고 명쾌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수성지(愁城誌)>라는 뛰어난 소설을 썼을 뿐 아니라, 시조 작가로도 탁월한 재주를 보였고, 한시(漢詩)의 창작에도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 그는 면앙정 송순의 회방연(回傍宴,급제한지 60년 되는 잔치)에 송강과 함께 송순의 가마를 멜 정도의 당대의 멋쟁이었다. 싸움이 싫어 속유들과 벗하지 않고, 법도 밖의 사람이라 하여 선비들은 그와 사귀기를 꺼려했다. 권력이나 벼슬에 매력을 느끼지 않은 위인이었다. 패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호남아였고 또한 시국을 강개하는 지사적 인물이기도 했다.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임을 싫어해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으며 관리들이 서로를 비방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명산을 찾아다니며 이리저리 유람하다 1587년 39세로 세상을 떴다.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시풍은 호방하고 명쾌했다. 황진이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와,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한 시조 '한우가'(寒雨歌) 등은 유명하다.
북천이 맑다커늘 …
북천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위 시조는 백호, 임제가 평양의 기녀 한우(寒雨)와 마주앉아 지은 ‘한우가(寒雨歌)라는 제명의 시조이다.
한우라는 평양 기녀는 재색에다 시문에도 능하고 거문고와 가야금에도 뛰어났다. 노래 또한 절창이었다.
둘은 술자리에 마주 앉았다.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임제는 눈을 감고 나직한 목소리로 시조 한 수를 읊었다
"북쪽 하늘이 맑아서 우산 없이 길을 나섰다.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가 내렸다. 찬비를 흠뻑 맞았다. 나를 맞아주지 않는다면 찬 이불 속에서 혼자 잘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찬비’는 ‘한우(寒雨)’를, ‘맞았다’는 ‘만났다’의 은유이며 기녀인 한우를 만났다는 말이다. ‘얼어잘까 하노라’는 ‘몸을 녹여 자고 싶다’는 역설이다. 오늘은 한우를 만났으니 자고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황촉불은 말없이 타고 창 밖의 오동잎은 하나 둘 지고 있었다. 밤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이 문풍지를 짧게 찢었다. 긴 침묵이 흘렀다. 한우는 가득 부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가야금에 얹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더운 열기로 임제의 얼굴을 한참 쏘아보았다. ‘둥기둥’ 가야금 첫줄이 울렸다.
어이 얼어자리 무슨 일 얼어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잘까 하노라
성난 파도였다가 조용한 물살이었다가, 폭풍우였다가 적막 이었다가 가락은 이내 허공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하늘에서 방금 내려온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눈부신 선녀였다. 임제는 짐짓 내색하나 하지 않고 태산처럼 앉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노랫소리가 멎었다. 한우는 숨을 몰아쉬며 뜯고 있던 가야금을 내려놓았다.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멈췄던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말없이 녹던 황촉불이 막 춤을 추기 시작했다. 멀리서 다듬이 소리가 야음을 타고 길게도, 짧게도 들려왔다.
무엇 때문에 얼어 주무시렵니까? 무슨 일로 얼어 주무시렵니까? 원앙침 베개, 비취금 이불 다 있는데도 왜 혼자 주무시려고 하십니까? 오늘은 찬비를 맞으셨으니 저와 함께 따뜻하게 주무시고 가십시오. 한우는 은근하게 그리고 속되지 않게 자신의 메시지를 청아한 목소리에 실어보냈다. 베개, 이불, 잠이라는 말은 했어도 야하거나 속되지 않았다. 비꼬는 것 같기도 하면서 뒤틀리지도 않았다. 살뜰한 인정이 노래 가득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쯤에서 무정한 사람인들 녹지 않을 이가 어디 있으랴.
‘해동가요’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하고 있다.
임제는 자를 자순 호는 백호라 하며 금성인이다. 선조 때에 과거에 급제, 벼슬은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타며 노래를 잘 부른 호방한 선비였다. 이름난 기녀 한우를 보고 이 노래를 불렀다. 그 날 밤 한우와 동침하였다.
임제의 멋도 멋이려니와 한우의 멋 또한 임제를 능가하고 있다. 풍류로 따진다면 난형 난제요, 용호상박이다.
화답시로 마음을 주고 받았으니 진정한 멋은 이런 것이 아닐까. 사랑하고 싶은 이에게 격이 있는 시, 추파 한 번 보내봄이 어떨까. 풍류에도 사랑에도 격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그는 벼슬에 있으면서 숱한 일화를 남겼는데,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黃眞伊)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시조 한 수를 지었다, 그러나 황진이를 애도하며 지은 이 시조로 인해 조정의 벼슬 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는 대관들의 탄핵으로 결국 부임도 하기전에 파직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때 지은 시조가
"청초 우거진 골"에 라는 아래 시조이다. 이후 임제는 명산대첩을 유람하며 시와 술을 즐기며 살았다. 부친상을 당한후 상심 때문인지 얼마후 임종을 맞게 된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눈을 감았다 한다.
청초 우거진 골에...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林悌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 · 풍강(楓江) · 소치(嘯癡) · 벽산(碧山) · 겸재(謙齋),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조부는 승지를 지낸 임붕(林鵬), 부친은 평안도병마절도사 임진(林晋)이며, 우의정 허목(許穆)이 외손자이다.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을 사사하였다. 교속(敎束)에 얽매이기보다는 창루(娼樓)와 주사(酒肆)를 배회하면서 살았다. 22세 되던 어느 겨울날 호서(湖西)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우연히 지은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로부터 3년간 학업에 정진하였는데 『중용(中庸)』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23세에 모친을 여의었으며, 이에 글공부에 뜻을 두어 몇 번 과거에도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1576년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 ·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알성시(謁聖試) 을과 1위로 급제한 뒤 흥양현감 · 서도병마사 · 북도병마사 ·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당시 선비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서로 다투는 것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명산을 유람하였다. 사람들은 임제를 두고 기인이라 하였고 또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하여 글은 취하되 사람은 사귀기를 꺼렸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39세로 운명하기 전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뒤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호협한 성격과 불편부당(不偏不黨)을 고집하는 사람으로, 문장이 호탕하고, 시와 글씨 · 거문고 · 가곡에 두루 뛰어나 풍류시인으로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저서로는 『임백호집(林白湖集)』, 『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을 남겼으며,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이 있는데 임제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초서에 능하였다. 호방한 필치로 막힘이 없이 써내려간 풍모를 통해 구속을 싫어하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던 기개와 곧은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남도일보의 역사 이야기
조선 최고의 풍류문장가 백호(白湖) 임제(林悌) , 靑草 우거진 榮山 변에 자는 듯 누운 듯…
사람과 자연 사랑했던 호남이 낳은 조선 최고의 문장가, 차가운 지성과 뜨거운 가슴으로 시대 풍미했던 낭만문객,
백호선생의 묘
선생의 묘소는 나주~목포 간 구 도로에서 조금 비켜난 가운리의 신걸산 동편 야산에 있다. 앞으로는 영산강의 물줄기가 유유자적 흐르고 있다. 구진포로 향하는 길 쪽에는 기름진 들판이 자리하고 있다. 영산강 너머로는 동강과 왕곡 쪽의 야산이 펼쳐져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전남 나주 다시에 있는 백호 선생의 묘소에 오른 것은 8월의 마지막 날 오후였다. 유난히도 무더운 여름, 그날 역시 세상은 뜨거웠다. 봄 끝부터 작열하기 시작하던 태양은 여름의 끝자락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는 듯했다. 땅에서 이글 올라오는 불볕이 목과 등을 후줄근하게 젖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 열기가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여름은 여름다워야 하니까…
백호 임제 초상화
백호 선생은 작가가 8월의 끄트머리에서 만난 그 여름의 열기처럼, 이글 타오르는 태양처럼, 그렇게 뜨겁게 짧은 인생을 사신 분이다. 그래서일까? 죽어서도 선생은 당신을 만나러 오는 이들이 심상한 발걸음으로는 오지 못하게 했다. “나를 만나려면 심장이 뜨거워야 해, 그러려면 몸부터 달궈져야 해…” 그렇게 속삭이는 듯싶다.
선생의 묘소는 나주~목포 간 구 도로에서 조금 비켜난 가운리의 신걸산 동편 야산에 있다. 차를 길가에 세운 뒤 잡풀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소로를 100여 미터 걸어가니 ‘백호 선생 묘소 입로’라는 비석이 나온다. 그 비석 뒤로 수백 개의 계단이 야산 정상 쪽으로 이어져있다. 무더운 데다 가파른 계단까지 오르니 온몸이 금방 땀으로 뒤범벅이다.
그렇게 5분여 계단을 오르니 문득 평지가 나온다. 30여 평 정도 되는 백호 선생의 묘소는 참으로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는 영산강의 물줄기가 유유자적 흐르고 있다. 구진포로 향하는 길 쪽에는 기름진 들판이 자리하고 있다. 영산강 너머로는 동강과 왕곡 쪽의 야산이 펼쳐져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후손들의 배려겠지만 선생이 잠들어 있는 곳은 선생의 명성에 부끄럽지 않는 곳이다. 선생의 자유로운 영혼을 닮은 듯,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은 거침이 없다. 하늘은 아득하게 멀다. 물길은 서해바다를 거쳐 오대양으로 흐르고 있다. 지금이라도 선생이 벌떡 일어나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하며 일필휘지할 것 같다.
선생은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사대(事大)를 거부했다. 조선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지 않고 중국의 변방 정도로 여겼던 유약함을 꾸짖었다. 그런 나라에서 살아온 부끄러운 우리인데, 죽는다 해서 무에 그 죽음이 슬플 것이 있느냐고 일갈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는 곡도 하지 말라 일렀다. 선생의 묘소에서 바라본 하늘에는 그런 호연지기가 막힘없이 펼쳐져 있다.
또한 선생이 묻힌 곳의 앞 풍경은 영산의 풍경이다. 영산강 물길은 서해바다를 거쳐 넓은 저세상으로 향하니 거칠 것이 없다. 선생은 유년시절에 접했던 넓고도 정갈했던 곡성 섬진강변의 백사장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호(號)도 섬진강 백사장이라는 뜻을 지닌 백호(白湖)로 지었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자연의 담대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가 담겨있다.
그뿐인가? 그는 사람을 사랑했다. 신분과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 사랑을 꿈꾸고 시도했다. 선생은 차가운 지성을 지닌 선비인 동시에 뜨거운 가슴을 품은 남자였다. 부임길에 저 세상 사람이 된 황진이 묘소에 들려 술 한 잔을 권할 줄 아는 멋진 남자였다. 그런 백호를 조선사대부는 불온하게 여겼다. 사대부의 체통을 깎는다며 백호를 내쳤다.
그러나 조선사회는 남성들이 마음껏 성을 즐기던 사회였다. 후실을 들이고 관기들을 불러들여 욕정을 풀었다. 조선사대부의 위선은 깊었다. 마음껏 색(色)을 밝히면서도 겉으로는 여자 가까이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억지 주장했다. 그러나 백호는 그러지 않았다.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고 흠모하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백호는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었다.
80년대 우리사회는 내밀한 성의 욕구를 사회적 담론으로 끌어냈다는 이유만으로 마광수 교수를 ‘외설작가’로 낙인찍었다. 그리고 문단에서 추방했다. 그 뒤 많은 유명작가들이 ‘성’을 상품으로 삼아 호의호식했다. 그보다 더한 외설을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팔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 교수의 쓸쓸한 죽음을 끝내 외면했다. 조화 한 송이도 바치지 않은 편협함으로 자신들은 마교수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찬가지로 조선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고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백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선생은 그런 위선을 혐오했다. 관복을 훌훌 벗은 그는 벗들과 산천을 오가며 주옥같은 글을 쓰며 남은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사람 냄새가 난다. 사랑을 할 줄 아는 남자의 매력이 넘쳐난다. 470여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백호 선생은 참으로 멋진 남자였다.
■백호 임제의 삶
임제 선생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이다.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벽산(碧山)·소치(嘯癡)·겸재(謙齋)다. 백호 선생(1549~1587)은 오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한 가선대부(嘉善大夫) 임진(林晉) 장군의 장자로 태어났다. 초년에는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며 지냈다.
22세에 대곡 성운(成運) 선생을 만나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29세에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벼슬이 예조정랑까지 오르지만 평안도사를 제수 받아 임지로 가는 길에 송도에 들러 죽은 황진이 무덤 앞에서 추모제를 지낸 것이 탈이 나 벼슬을 그만두게 됐다.
이후 산천을 주유(舟遊)하며 많은 글을 남겼다. 그의 문학세계는 담대하고 쾌활했다. 의협심이 강했으며 표리부동한 권력층의 위선을 냉정하게 비판했다. 자주정신도 높았다. 선생이 30세에 임종하면서 지은 ‘물곡사(勿哭辭)’는 중국에 사대하는 조선의 비굴한 모습을 한탄한 내용이다. 사대에 대한 비판과 함께 자주정신을 지녀야 한다는 선생의 당부가 담겨 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문장력을 발휘했다. 선생이 남긴 무어별(無語別)은 16살 때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선생은 6살부터 10년 동안 곡성 옥과에서 자랐다. 외가살이를 끝내고 고향 회진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아마도 그때 동네규수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듯싶다. 무어별은 소녀와의 안타까운 이별을 노래한 것이다.
無語別(무어별) 애만 태우고 말도 못하네
十五越溪女(십오월계녀) 열다섯 살의 고운 아가씨
羞人無語別(수인무어별) 애만 태우고 말도 못하고 보내네
歸來淹重門(귀래엄중문) 뒤돌아서 간신히 문을 닫은 뒤에야
泣向梨花月(읍향이화월) 배꽃 사이 달 보며 눈물 흘리네
무어별은 선생의 천재성이 드러난 시다. 사모하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막상 말도 못하고 보내야 하는 아리따운 15살 소녀의 수줍은 마음이 절묘하게 묘사돼 있다. 아마도 이 소녀는 선생의 첫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본가로 돌아가는 자신을 붙잡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소녀의 모습을 그리는 동시에 또한 자신의 아픈 마음을 함께 그렸다.
스승이었던 대곡 성운 선생은 임제의 격정과 자유분방함을 일찍이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임제에게 중용(中庸)을 천 번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고 말했다. 임제가 중용의 가르침을 통해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임제는 그런 스승의 뜻을 헤아렸다. 그래서 암자에서 중용을 880번 읽었다. 그런 다음 의마부를 지어 스승에게 올리고 속리산을 떠난다.
意馬賦 (의마부)
道不遠人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건만
人遠道 사람이 도를 멀리 하네
山不離俗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俗離山 속세는 산을 멀리 하네
1577년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자 제주목사로 부임 중인 부친을 만나러 제주도로 건너가 3개월 동안을 머물렀다. 이때 제주도의 풍속과 지리 등을 적은 <남면소승(南溟小乘)>을 묶어냈다.
선생의 성격은 쾌활하고 호방했다. 선이 굵었다. 선생은 35세 때 평안도사직을 받아 평양으로 가는 부임길에 송도에 들러 황진이 무덤을 찾았다. 황진이는 송도삼절(서경덕 박연폭포 황진이)로 일컬어진 인물이었다. 황진이는 그의 나이 사십에 병에 걸려 죽었다. 그녀는 자신을 쓸쓸한 산기슭에 묻지 말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에 묻어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녀는 송도(松都) 대로변에 묻혔다. 죽어서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여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호방한 백호 선생은 황진이가 비록 기생이었지만 그의 글 솜씨를 높이 평가했다. 만약 황진이가 살아있었더라면 밤새워 글을 지어 주고받으면서 운우의 정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그의 발길을 황진이의 묘로 인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황진이 묘에 도착하자 큰 절을 한 뒤 추모시 한수를 지어 바쳤다.
靑草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紅顔을 어디 두고 白骨만 묻혔느냐
盞 잡아 勸할 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정대신들이 들고 일어섰다. 어떻게 부임길 관리가 기생에게 큰 절을 할 수 있느냐며 그를 비토했다. 결국 선생은 평안도 도사의 임기를 마치고 고흥현감으로 부임한 직후 파직됐다. 선생의 나이 36세 때의 일이었다. 문재(文才)에 대한 흠모를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며 난도질한 사대부들의 비열함 때문에 선생은 그의 뜻을 채 펼치지 못하고 낙향하게 된다.
선생은 이후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시와 술을 즐기며 살았다. 공리공론을 일삼는 조정대신들과 탐욕에 물든 관리들을 혐오했다. 파당을 지어 싸우느라 나라를 도탄에 빠지게 하는 대신들의 무책임과 헛된 공명심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런 비분강개는 선생을 실의에 빠지게 했다.
선생은 39세 때인 1587년 6월 부친의 상을 당한다. 부친을 잃은 슬픔이 겹쳐져서인지 선생은 불과 2개월 뒤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선생은 조선이 중국에 얽매여 정치나 사상, 제도, 문학 모든 것이 중국의 영향에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조선이 중국의 허수아비처럼 존재하는 것에 대해 통탄했다. 그래서 선생은 죽음을 앞두고 그의 심경을 담은 ‘물곡사(勿哭辭)’를 유언으로 남겼다.
“사해제국에서 황제를 칭해보지 않는 나라라곤 없는데 우리만은 한 번도 그래보지 못했으니 이런 소국에서 태어났다가 가는데 무엇이 그리 아깝다는 것이냐. 울지 마라”
■백호의 문학세계
백호는 700여 편의 시와 한문소설 ‘원생몽유록’ ‘수성지’ ‘화사’ 등의 작품을 남겼다. 선생은 조선이 배출해낸 걸출한 풍류시인이었다. 또한 사상가였으며, 사회비평가였다. 그가 남긴 글은 인문지리에서부터 한문소설에까지 다양하다. 전국산천을 유람하며 방랑의 서정을 담은 서정시(敍情詩)가 제일 많다.
시 경향은 요즈음 기준으로 표현하자면, 낭만적이다. 봉건주의의 틀에서 벗어나(파격) 새로운 가치와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본능이 작품 곳곳에서 엿보인다. 후천적이라기보다는 선천적인 반골형 기질이다. 절과 승려에 관한 시, 기생과의 사랑을 읊은 시가 많은 것도 특색이다. 선생은 기풍이 호방하고 재기가 넘쳤다. 전국을 누비다 보니 여러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선생의 작품 중 수성지·원생몽유록·화사 등의 산문 3편은 심각한 사회적 주제를 담고 있는 우언(寓言)작품이다. 선생은 또 서옥설과 같은 걸작소설을 남겼다. <원생몽유록>은 꿈속에 등장하는 인물 원자허를 통해 단종과 사육신을 기리면서 수양대군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화사>는 이익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사람들의 경박함을 변함없이 피고 지는 꽃과 대조시킨 작품이다. <수성지>는 조정의 처사에 대한 불평과 현실을 개탄하는 선생의 울적한 심정을 의인화한 가전체 소설이다. 우화소설(寓話小說)이라고 할 수 있다.
<서옥설>은 84가지 동식물을 의인화하고 재판받는 쥐를 등장시켜 권력 다툼으로 여념이 없는 조정과 양반계층을 풍자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살아가는 백성들의 고단한 삶이 담겨 있다. 한 마리의 도둑 쥐를 주인공 삼아 뭇 동물들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가는 설정이 매우 흥미롭다.
기생 한우(寒羽)와 주고받은 형식의 <한우가(寒羽歌)>는 기생의 요염함을 탐내는 한 남자와 그 남자를 흠모해왔던 한 여성이 ‘만리장성’을 쌓기 전 서로의 의중을 떠보는 ‘연가’(戀歌)라 해도 손색이 없다.
백호는 기생 한우에게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북창이 맑다 하거늘 우장없이 길을 나서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서 잘까 하노라
기생 한우가 맞아주지 않으면 다른 데서 자겠다는 뜻이다. 백호 임제의 글과 명성을 흠모해왔던 한우의 입장에서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다른 곳에서 주무시다니, 제가 모실랍니다.” 한우는 이렇게 화답했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鴛鴦枕 翡翠衾)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 까 하노라.
선생과 한우가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을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찬비 맞은 몸을 어디에 맡길까 은근슬쩍 떠보는 선생의 눙침과 원앙금침에 잘 모시겠다는 한우의 화답에 절로 미소가 나온다.
■영모정(永慕亭)
영모정은 영산강의 풍광을 품에 안고 있는 정자다. 귀래정 임붕(林鵬 1486~1553)을 위한 정자다. 임붕은 나주임씨 15세(世)로 회진의 대종가에서 태어나 승지와 절도사, 경주부윤, 광주목사를 지낸 분이다. 학문이 깊었고 덕망이 높았다. 부친 임평이 돌아가시자 이곳(영모정 자리)에 머물며 귀래당이라 했다.
3년 후 임붕이 사망하자 아들 임복, 임진, 임몽이 또한 같은 장소에서 머물며 상을 마쳤다. 둘째 아들 임복이 1556년에 정자를 세우고 어버이를 길이 추모하며 영모정(永慕亭)이라 했다. 영모정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일 나주임씨 대종중 삭회가 열린다. 영모정 내에는 임붕 유허비와 임제 기념비, 임긍수 추모비 등이 있다.
영모정은 나주 임씨의 후손들과 문사(文士)들이 조상을 기리면서 학문을 논했던 곳이다. 영산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 절로 시심이 솟구칠만한 곳이다. 고색이 창연한 영모정과 수백 년 된 나무들이 어울려 고고하면서도 적요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백호문학관
백호문학관은 조선 중기 시인이자 문신인 백호 임제 선생의 문학사상과 뜻을 기리고자 지난 2013년 건립됐다. 33억원을 투입, 2개월간 리모델링한 뒤 지난 2017년 4월 재개관했다. 백호문학관은 3층 규모로, 수장고·집필실·문학사랑방·전시관 등이 갖춰져 있다.
상설 전시실에는 백호 선생의 생애에 대한 설명과 작품이 시기별로 나누어 전시돼 있다. 여러 자료는 물론이고 선생이 공부했던 ‘복암사 석림정사 현판(친필)’과 선생의 문집인 ‘겸재유고 복제본’ 등이 전시돼 있다. 2014년 제2종 박물관(전남-제30호)으로 등록됐다.
백호문학관은 대단히 의미가 깊은 문학관임에도 찾는 이들이 별로 없다. ‘황진이 추모사’나 ‘한우가’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으나 정작 그 시를 지은 백호 임제의 이름을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백호문학관에서 호탕한 백호의 시들을 즐겨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임씨종가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마자, 해남감무로 있던 임탁(林卓)이 벼슬을 버리고 회진현(會津縣)의 누저동(樓低洞)에 터를 잡고 은거했다. 임탁이 벼슬을 버린 것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 때문이었다.
고려 신하 중 조선개국에 반대해 깊은 산속으로 숨어버린 사람들을 세칭 ‘두문동 72현’이라 부른다. 임탁은 두문동 72현 중 한 명이었다. 임탁이 누저동에 정착한 뒤 620년 동안 후손들이 그곳에서 대대로 살고 있다.
임탁은 후손들에게 조선 조정에서 벼슬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후손들은 그 유언을 지켰다. 4대째까지 그 약속을 지키다 5대 후손에 와서야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임평(林枰)이 무과에 급제해 전라도 병마우후 자리에 오른 것이다.
임평의 아들 임붕(林鵬)은 나중에 문과에 급제, 좌승지와 광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바로 영모정을 건립한 인물이다. 임붕은 부친의 거룩한 업적을 잊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후손들은 그 뜻을 받들어 임평의 부조 묘를 건립했다. 임평의 부조 묘는 몇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임탁의 후손들은 자신들을 ‘회진 임씨’라 했다. 그런데 조선 초 지방행정구역 개편 때에 회진 현이 나주목에 합쳐져 사라지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회진 임씨’는 ‘나주 임씨’가 됐다고 전해진다. 마을 이름은 ‘회진리’이다.
회진에는 마한 때부터 강성한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제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회진토성 내에 회진현(백제시대에는 두힐헌)의 치소가 있었다. 회진은 군사·교통·행정의 중심지였다.
비록 치소가 없어졌으나 이후로 나주 임씨 문중에서는 40여명이 넘는 문과급제자가 배출됐다. 백호 임제와 창계 임영, 노촌 임상덕 등과 같은 조선을 대표하는 문사가 회촌에서 나왔다. 임영은 문장이 뛰어나고 경사에 밝은 인물이었으며 임상덕은 <동사회강>이라는 역사서를 남겼다.
17대손 임환은 임진왜란 때에 김천일 의병장의 종사관으로 종군했다.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공신 녹권을 받았다. 나주 임씨들은 항일운동에 앞장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34년 회진개혁청년회를 조직해 농촌계몽운동과 항일운동을 벌였다.
회진개혁청년회는 영모정에서 항일과 관련된 연극을 공연해 많은 이들이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다. 근현대에서도 한국의 정치·경제·군사·행정·의료계를 좌우하는 큰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회촌 마을은 호남 제일의 명촌이다. 호남 자존심의 뿌리이다.
■백호선생이 공부했던 복암사
나주 임씨들의 세장산인 신걸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368m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걸산은 풍수지리학적으로 명산으로 꼽힌다. 금성산의 지세를 마지막으로 끌어안으면서 영산강의 수려함을 앞마당에 두고 있다. 신걸 산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가슴을 확 트이게 해준다.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신걸 산의 협곡에는 비구니 스님들이 살고 있는 복암사(伏巖寺)가 있다. 복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이다. 654년에 안신선사가 보광사의 20개 암자중 하나로 창건해 복천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백호 선생은 어렸을 때 복암 사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당은 ‘석림정사’였다. 학당은 화재로 소실됐으나 현판인 석림정사는 남아있다. 백호 선생의 친필 현판으로 알려졌다. 1991년 건축불사를 해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 등이 있었으나 1997년 원인모를 불로 모두 타 버렸다. 최근에 건축불사를 다시 마무리했다.
복암사라는 대웅전 뒤쪽 야산의 바위가 마치 엎드려져 있는 형상(伏巖)이어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그 복암 오른쪽으로는 2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복암사 석탑으로 불리는데 고려시대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 층의 기단부와 이층의 탑신부가 남아있다. 높이는 260cm이다.
복암사는 나주에서 목포 가는 길의 가동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나온다. 가동삼거리 입구에서 승용차로 5분이면 도착한다. 복암사에 가까워질수록 길이 매우 가팔라 눈이나 비가 내릴 경우 중간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걷는 편이 낫다.
석림정사 현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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