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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취미 생활/한문서예

赤壁賦(적벽부)(蘇東坡)

by 까마귀마을 2022. 12. 15.

 

 

夫天地之間 [차부천지지간]           이 천지 사이에

物各有主 [물각유주]                     사물은 각기 주인이 있으니,

苟非吾之所有 [구비오지소유]       만약에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雖一毫而莫取 [수일호이막취]       비록 한 털끝도 취하지 말아야 하고

惟江上之淸風 [유강상지청풍]       오직 강가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과

與山間之明月 [여산간지명월]       산 사이의 밝은 달만은

耳得之而爲聲 [이득지이위성]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目遇之而成色 [목우지이성색]       눈으로 보면 색을 이루어,

取之無禁 [취지무금]                    취[取]해도 금하는 이가 없으며,

用之不竭 [용지불갈]                    써도 다하지 않으니,

是造物者之無盡藏也 [시조물자지무진장야]   이는 조물주의 한없는 보고요

而吾與子之所共樂 [이오여자지소공락].        나와 그대가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 (  蘇東坡의 전적벽부 중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소동파의 전적벽부 중 마지막 구절입니다.

수 많은 한시 중에서 참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임자 없는 것이, 그리고 거저 얻어지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나뭇잎 사이로 불어오는 소슬바람, 창문으로 살며시 찾아드는 은은한 달빛,

귀로 들으면 반가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면 아름다운 색깔이 되고 이는 아무리 취해도 제것이라 욕심내는 이가

없으니, 세상을 지은 조물주가 그대와 나, 우리모두 마음껏 즐기라고 쓰도 쓰도 닳지않는 우리에게 준 무한한 선물인가 

봅니다. 

 

「적벽부(赤壁賦)」는 송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소식,소동파(蘇軾, , 1036년~1101년)가 47세때인 1082년 귀양을 가서 쓴 부(賦,시와 산문의 중간)입니다. 

벗 양세창과 술잔을 기울이며 뱃놀이를 하면서  조조의 대군과 오나라의 대군이 일전을 겨룬 적벽대전을 회상하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하였습니다만 소식이 뱃놀이를 한 적벽은 삼국시대 주유가 조조의  대군을 격파한 그 적벽은 아닙니다.

호북성에는 적벽이라고 불리는 곳이 4군데가 있다 합니다. 가어현(嘉魚縣)동북쪽 장강변에 있는 적벽이 삼국시대 주유와 제갈량이 조조의 대군을 격파한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 벌어졌던 곳이고, 다른 둘은 무창현(武昌縣) 한양현(漢陽縣)에 있으며 마지막 하나는 황주의 황강현 (黃岡縣) 성 밖에 있는데 소식이 뱃놀이 하던 곳입니다.

소식은 자신이 뱃놀이 하던 황주의 황강현 성밖이  적벽대전이  벌어진 곳으로 잘못 알았으며 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합니다. 적벽부(전적벽부)를 짓고 이어 3개월 후에 적벽을 다시 방문하여 쓴 후적벽부가 있습니다. 

전적벽부가 경치에 대한 서정적인 경향이 강했다면, 후적벽부는 신선과 꿈을 언급하는 등 도가적 경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前赤壁賦 전문

壬戌之秋, 七月既望, 蘇子與客泛舟遊於赤壁之下(임술지추, 칠월기망, 소자여객범주유어적벽지하)

임술(壬戌) 가을 7월 기망(기望)에 소자(蘇子)가 손[客]과 배를 띄워 적벽(赤壁) 아래 노닐새 (蘇子 : 소동파 . 客 : 양세창)

 

清風徐來, 水波不興. 舉酒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청풍서래, 수파불흥. 거주촉객, 송명월지시, 가요조지장)

맑은 바람은 천천히 불어오고 물결은 일지 않더라. 술을 들어 손에게 권하며 명월(明月)의 시를 외고 요조(窈窕)의 장(章)을 노래하더니,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白露橫江, 水光接天(소언, 월출어동산지상, 배회어두우지간. 백로횡강, 수광접천)

이윽고 달이 동쪽 산 위에 솟아올라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 사이를 서성이더라. 흰 이슬은 강에 비끼고, 물빛은 하늘에 이었더라.

 

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浩浩乎如馮虛御風, 而不知其所止(종일위지소여, 릉만경지망연. 호호호여풍허어풍, 이부지기소지)

한 잎의 갈대 같은 배가 가는 대로 맡겨, 일만 이랑의 아득한 물결을 헤치니, 넓고도 넓게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 그칠 데를 알 수 없고,

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표표호여유세독립, 우화이등선 )

가붓가붓 나부껴 인간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치어 신선(神仙)으로 돼 오르는 것 같더라.

於是飲酒樂甚, 扣舷而歌之. 歌曰(어시음주악심, 구현이가지. 가왈 )

이에 술을 마시고 흥취가 도도해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니, 노래에 이르기를

“桂棹兮蘭槳, 擊空明兮溯流光. 渺渺兮予懷,望美人兮天一方.”(계도혜란장, 격공명혜소류광. 묘묘혜여회,망미인혜천일방.”)

"계수나무 노와 목란(木蘭) 상앗대로 속이 훤히 들이비치는 물을 쳐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오르도다. 아득한 내 생각이여, 미인(美人)을 하늘 한 가에 바라보도다."

客有吹洞簫者, 倚歌而和之. 其聲嗚嗚然, 如怨如慕, 如泣如訴;(객유취동소자, 의가이화지. 기성오오연, 여원여모, 여읍여소;)

손 중에 퉁소를 부는 이 있어 노래를 따라 화답(和答) 하니, 그 소리가 슬프고도 슬퍼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우는 듯 하소하는 듯,

餘音嫋嫋, 不絕如縷. 舞幽壑之潛蛟, 泣孤舟之嫠婦. ( 여음뇨뇨 부절여루 무유학지잠교 읍고주지리부)

여음(餘音)이 가늘게 실같이 이어져 그윽한 골짜기의 물에 잠긴 교룡(蛟龍)을 춤추이고 외로운 배의 홀어미를 울릴레라.

蘇子愀然, 正襟危坐, 而問客曰: 何爲其然也?”(소자초연, 정금위좌, 이문객왈: 하위기연야?)

소자(蘇子)가 근심스레 옷깃을 바르게 하고 곧추앉아 손에게 묻기를 "어찌 그러한가?" 하니,

 

客曰:“‘月明星稀,烏鵲南飛.’此非曹孟德之詩乎?(객왈:“‘월명성희,오작남비.’차비조맹덕지시호?)

손이 말하기를 "'달은 밝고 별은 성긴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난다.'는 것은 조맹덕(曹孟德)의 시가 아닌가?

 

西望夏口, 東望武昌, 山川相繆, 鬱乎蒼蒼, 此非孟德之困於周郎者乎?(서망하구, 동망무창, 산천상무, 울호창창, 차비맹덕지곤어주랑자호?)

서쪽으로 하구(夏口)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武昌)을 바라보니 산천(山川)이 서로 얽혀 빽빽이 푸른데, 예는 맹덕이 주랑(周郞)에게 곤욕(困辱)을 받은 데가 아니던가?

 

方其破荊州, 下江陵, 順流而東也, 舳艫千里, 旌旗蔽空,(방기파형주, 하강릉, 순류이동야, 축로천리, 정기폐공,)

바야흐로 형주(荊州)를 깨뜨리고 강릉(江陵)으로 내려갈 제, 흐름을 따라 동으로 감에 배는 천 리에 이어지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어라.

 

釃酒臨江, 橫槊賦詩, 固一世之雄也, 而今安在哉?(시주림강, 횡삭부시, 고일세지웅야, 이금안재재?)

술을 걸러 강물을 굽어보며 창을 비끼고 시를 읊으니 진실로 일세(一世)의 영웅(英雄) 이러니 지금 어디에 있는가?

況吾與子漁樵於江渚之上, 侶魚蝦而友麋鹿, (황오여자어초어강저지상, 려어하이우미록,)

하물며 나는 그대와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물고기와 새우를 짝하고 고라니와 사슴을 벗함에랴.

駕一葉之扁舟,舉匏樽以相屬. 寄蜉蝣於天地, 渺滄海之一粟. (가일엽지편주,거포준이상속. 기부유어천지, 묘창해지일속.)

한 잎의 좁은 배를 타고서 술을 들어 서로 권하며, 하루살이 삶을 천지(天地)에 부치니 아득한 넓은 바다의 한 알갱이 좁쌀알이로다.

哀吾生之須臾, 羨長 江之無窮. 挾飛仙以遨遊, (애오생지수유, 선장 강지무궁. 협비선이오유,)

우리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긴 강(江)의 끝없음을 부럽게 여기노라. 날으는(나는) 신선을 끼고 즐겁게 노닐며,

抱明月而長終. 知不可乎驟得, 託遺響於悲風.”( 포명월이장종 지부가호취득 탁유향어비풍")

밝은 달을 안고서 길이 마치는 것은 갑자기 얻지 못할 줄 알새, 끼치는 소리를 슬픈 바람에 부치노라."

蘇子曰:“客亦知夫水與月乎? 逝者如斯, 而未嘗往也;(소자왈:“객역지부수여월호? 서자여사, 이미상왕야;)

소자 말하되 "손님도 저 물과 달을 아는가? 가는 것은 이와 같으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영허자여피, 이졸막소장야.)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되 마침내 줄고 늚이 없으니,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개장자기변자이관지, 즉천지증불능이일순; 자기불변자이관지, 즉물여아개무진야,)

변하는 데서 보면 천지(天地)도 한순간일 수밖에 없으며, 변하지 않는 데서 보면 사물과 내가 다 다함이 없으니

 

而又何羨乎! (이우하선호!)

또 무엇을 부러워하리오?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차부천지지간, 물각유주, 구비오지소유, 수일호이막취.)

또, 천지 사이에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나의 소유가 아니면 한 터럭이라도 가지지 말 것이나,

惟江上之清風, 與山間之明月, 耳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유강상지청풍, 여산간지명월, 이득지이위성, 목우지이성색,)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에 뜨이면 빛을 이루어서,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子之所共適.” (취지무금, 용지부갈. 시조물자지무진장야, 이오여자지소공적.”)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조물주(造物主)의 다함이 없는 갈무리로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共適 一作: 共食) (공적 일작: 공식)

客喜而笑, 洗盞更酌. 餚核既盡, 杯盤狼籍. (객희이소, 세잔경작. 효핵기진, 배반랑적.)

손님이 기뻐하며 웃고,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드니 안주가 다하고 잔과 쟁반이 어지럽더라.

相與枕藉乎舟中, 不知東方之既白. (상여침자호주중, 부지동방지기백.)

배 안에서 서로 팔을 베고 누워 동녘 하늘이 밝아 오는 줄도 몰랐어라.

                                 

*번역을 하는 사람마다 표현이 다를 수 있으니 이후 계속 살펴보고 또 살펴 보겠습니다.

 

소동파는 필화사건에 연류되어  황주로 유배를 가게됩니다.  장강이 흐르는 황주에 살면서,  초가집(설당)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지내었습니다. 

그가 농사를 지은 동쪽의 언덕을 "동파(東坡)"  "동쪽 언덕"이라 이름 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칭 했는데, 그의 호 東坡는 여기서 유래하게 됩니다.

적벽부는 친구와 뱃놀이를 하며 지은 부 赋 형식의 산문으로  부는 쉽게 말해 운율이 살아있는 하나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소동파는 그의 고향 지역에서 온 친구이자 도가 수행자인 양세창과 더불어 밤놀이 가기를 좋아하였습니다

7월 한여름 밤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수면을 흩뜨리지도 않으면서 강 위로 천천히 불어왔다. 퉁소를 잘 부는 친구가 퉁소를 불기 시작하자, 소동파는 곡조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곡조는 기묘하고도 슬픈 곡조로서 마치 무언가 호소하는 듯, 사모하는 듯, 또 애석해 하는듯 부드럽고도 구슬펐는데, 점점 약해지더니 차츰 공중으로 사그라져 버렸습니다.

 

곡조가 어찌나 구슬프던지, 다른 배에 타고 있던 한 과부는 흐느껴 울었고, 물속의 물고기조차 마음이 흔들렸다. 음악이 끝나자, 소동파는 피리 곡조가 어찌 그리 슬픈가 하고 물었습니다.

1천여 년 전에 삼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사적인 해전이 바로 이 적벽에서 있었다. 친구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그 위대한 전사들은 어디에 가고, 오늘밤 그대와 내가 조각배에 이렇게 앉아 한잔 술을 기울이며, 마치 아무 근심 걱정도 없이 떠도는 두 유랑자처럼 행복한 순간을 즐기고 있나?

우리는 이 광활한 우주 속의 날벌레보다도 작고, 거대한 바다 속의 좁쌀 한 알만큼도 안되는 존재. 우리의 삶은 짧고 속절없으니, 나는 이 거대한 강처럼 끝없이 흐르는 영원을 사모해 마지 않네.

두 천사가 내 팔을 부추겨 주어 하늘로 날아올라 달나라 까지 올라가서, 거기서 영원토록 살고 싶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아네. 나의 이런 슬픔을 피리에 기탁한 것이네."

소동파는 친구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물과 달을 보게나! 이 물은 끊임없이 흘러가버리나, 그래도 여기에 늘 이렇게 있네. 달은 찼다가 기울지만 언제나 같은 달로 남아 있네. 만약 우주에서 일어나는 변화만을 위주로 본다면, 단 한순간도 같은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네. 그렇지만 불변의 견지에서 사물을 살펴보면, 사물과 내가 영원불멸 하다는 것을 깨달을수 있을 것이네.

 

그러니 이 강을 부러워하여 무엇 하려나? 더욱이 이 천지만물은 제각기 주인이 있으니,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탐내어 무엇할 것인가? 그러나 강위로 불어오는 이 상쾌한 산들바람과 산봉우리 위에 솟아 있는 저 밝은 달은 누구나 다 마음대로 즐길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명체들과 이런 다감한 존재들이 바로 여기 이렇게 놓여 있어 우리 눈과 마주치면 곧 색깔을 띠고, 우리 귀에 부딪치면 곧 소리를 들려주니, 우리가 무상으로 마음대로 즐길수 있도록, 조물주께서 무진장한 선물을 내려 향연을 베풀어 주신 것이 아니겠나?"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자 그 친구는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술잔을 다시 들기 시작하였다.

 

                                                                            

소동파(蘇東坡)의 생애
그는 서기 1037년 1월 8일 북송(北宋) 인종(仁宗) 때 쓰촨 성(四川省) 메이산 즉 미산(眉山) 근교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된다.
서기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蘇洵)은 두 아들 소식(蘇軾)과 소철(蘇轍)를 데리고 상경(上京)하여 이들의 詩를 당대의 대 시인이며 고관대작이었던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자 격찬을 받는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는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도 나란히 합격했지만 때 마침 모친상을 당하자 벼슬자리를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서기 1060년 상(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 즉 개봉(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나란히 합격했으며, 이어 동파는 봉상부(鳳翔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의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개봉(開封)에 남게 된 동생 소철(蘇轍)과 헤어져 홀로 임지로 떠난다.
봉상부 즉 서안(西安)은 서주(西周:기원전 11세기 경으로 지금부터 3,000년 전의 옛 주왕조를 이른다.) 이래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그는 공자묘(孔子墓)의 석고(石鼓:고대문자를 새긴 10개의 북 모양의 돌)와 개원사(開元寺) 동탑(東塔)에 남아 있는 당대 왕유(王維)와 오도현(吳道玄)의 불화(佛畵) 등을 접한 감회를 봉상팔관(鳳翔八觀)이란 책에서 자세히 풀어놓은것으로 보아 고문(古文)과 회화(繪畵)에 대단한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봉상부(鳳翔府)에서의 임기가 끝나 상경한 서기 1065년에 부인 왕씨(王氏)가 병을 얻어 죽었고. 이듬해 아버지 소순(蘇洵)마저 병으로 죽자, 동파는 아버지의 관을 고향으로 옴겨가 상(喪)을 치렀으며 3년상을 탈상(脫喪)하고 상경한다. 그 해에는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로, 참지정사(參知政事)의 고위직에 있던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한 개혁파가 득세하여 중앙정부의 물자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해 균륜법(均輪法)을 만들어 시행했고, 가난한 농촌에 저리로 자금을 빌려줘 농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청묘법(靑苗法)등 당시로써는 대단히 파격적 법률인 이른바 신법(新法)을 제정하여 시행하던 시기였다.


신법(新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소동파는 
조정의 눈총을 받아 감관고원(監官告院)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만을 담당하는 별 볼 일 없는 직책으로 발령이 나자, 화딱지가 난 그는 지방 근무를  
자청하여 절강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자사로 근무할 것을 상주(上奏) 했고, 눈에 가시로 여겼던 조정은 흔쾌히 발령을 내려 항주로 그를 내려보낸다.
바로 이때 항주의 유명한 호수인 서호(西湖)의 제방을 그의 지시로 새로 쌓았는데, 소동파가 쌓다고 하여 "소제(蘇堤)"라 이름이 붙은 제방이 지금도 소동파의 석상과 함께 명승지로 남아 지난날을 기리고 있다. 이어 그는 밀주(密州), 서주(徐州), 호주(湖州)등지를 돌며 지방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후저우 즉 호주(湖州)의 지사(知事)로 있던 서기 1079년에는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詩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었고, 개봉으로 끌려가 뼈저린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이 이른바 소동파의 "필화사건(筆禍事件)"이다.
이 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烏臺詩案)이란 책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다행히 사형(死刑)을 면한 그는 100일 간의 옥살이를 치르고 황주(黃州) 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황강 현(黃岡 縣) 단련부사(團練副使)라는 지방관으로 좌천 된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못하게 하며, 황주를 떠나면 안 되는 거주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면서 발령 낸 관직은 일종의 유배형(流配刑)에 해당되었다.


황주(黃州)에서의 생활은 매우 궁핍했다.
부인은 가난에 찌들리며 하루종일 누에고치로 실을 뽑아 옷감을 짜는 양잠일을 해야 했고, 동파는 군부대가 있던 자갈투성이의 병영터를 빌려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살아가야 했다.
이 땅을 그는 "동파(東坡)"  "동쪽 언덕"이라 이름 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칭 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의 대표적 명작으로 불리는 "적벽부(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바로 이곳에서 였다.



서기 1085년 신종(神宗)이 죽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신종의 어머니이며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황후(宣仁太皇后)가 어린 철종을 뒤에서 조정하는 섭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왕권과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것에 중점을 뒀으며 뤄양 즉 낙양(洛陽)에 운둔해 있던 사마광(司馬光)을 불러들여 왕안석(王安石) 일파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시행한 개혁법인 신법(新法)들을 모조리 폐지해 버린다.
이러자 구법(舊法)을 신봉하던 소동파(蘇東坡)도 다시 발탁되어 예부랑중(禮部郞中)을 시작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 등의 중요 요직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사마광(司馬光)의 신법 폐지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던 모역법(募役法)까지 폐지하는 등 너무 과격해지자, 소동파는 때 마침 지방관직을 마치고 상경한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그에 대한 강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었다. 몇 년 후 사마광이 죽자 당쟁이 다시 불붙었고, 섭정을 하던 선인황태후마저 사망하자 비로서 철종이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펼친 정치, 친정(親政)이 비로소 시작된다.
철종은 할머니가 섭정 당시 패지시켰던 신법들을 모조리 부활시켰으며, 구법파인 소동파는 다시 좌천되는 운명에 처해 혜주사마(惠州司馬)로 강등 된다.
철종은 소동파에 대한 탄압을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주변 정치인들의 모함까지 들끓자, 소동파를 하이난 도 즉 중국 남쪽 끄트머리 섬인 배트남 근처의 해남도(海南島)로 유배을 보낸다.


소동파는 하루 한 번 이상 세차게 소낙비가 퍼붓는 습한 기후와 풍토병에 시달렸으며, 들짐승과 다름없던 그곳의 원시부족 리족(黎族)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7년 간이나 이어간다.
그는 무지하고 몽매한 그들에게 농사짓는 법과 글자를 가르치고 문화생활의 편리성을 알려주며, 원시의 때를 벗겼던 해남도(海南島)의 진정한 선구자요 큰 스승이였다.
중국 남단 배트난 근처의 제주도 크기와 비슷한 섬 하이난도(海南島)는 
지금은 옛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개벽에 가까운 꿈의 휴양지로 탈바꿈 했다. 
그가 머물던 곳에는 소동파의 발자취가 짙게 남아 그를 존경하며 기리 유적과 공덕비들이 여럿 세워져 있다.


아무튼...
세월이 흘러 7년만에 철종이 죽고, 휘종(徽宗)이 뒤이어 즉위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라고 하는 명예직에 불과하지만 벼슬자리에 봉해져, 수도인 카이펑 즉 개봉(開封) 
으로 돌아오던 도중에 노쇄한 몸에 병을 얻어 창저우 즉 창주(常州)에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때 소동파의 나이가 66세였다.


* 당송8대가(唐宋八大家)
중국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때 고문(古文)의 대가 여덟 명을 일컷는 말로.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구양수(歐陽脩), 왕안석(王安石), 증공(曾鞏),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등 여덟 명을 가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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