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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편지(림태주)

by 까마귀마을 2022. 12. 12.

어머니의 편지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는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이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 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도량이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 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 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지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어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날은 해가나고.

맑구나 싶은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한그릇 올리고 촛불 한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강을 건널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아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어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 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 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                        -------림태주-------

 

임태주 시인은 1994년 계간 '한국문학'으로 등단.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뒤 한국을 대표하는 출판사 여러곳에서 편집자, 마켓터, 임프린트로 활약.

일반적인 등단 시인과는 달리 시집을 내지 않고 페이스 북을 운영하며 페이스북에 글을 엮어 에세이집을 출판.

2009년 출판사를 운영하며 그의 페이스북에 올린 아들에게 주는 충고가 굉장한 인기를 누렸으며 조국 전 법무장관이 자신의 페이스 북에 인용하기도 하였음.

페이스 북의 감성적인 글이 인기를 끌고 있으며 전국적인 펜클럽이 있을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음.

2014년애 펴냈던 산문집 ‘이 미친 그리움’에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추천사를 실은 계기로 조 전 장관과는 일면식이 없는 사이였지만, 그가 소셜미디어에 아들을 위해 쓴 충고글이 조회수가 무려 40만회를 넘기며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것을 계기로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음.

저서로는 "이 미친 그리움" "그 토록 붉은 사랑" "관계의 물리학"이 있으며 나이, 고향, 출생지, 학력, 결혼, 부인, 자녀 가족관계 등은 알려진 것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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