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라는 사람이 역사상 있기는 했었나? 물론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다수다!
유태인들의 영웅의 원형(原型)은 모세의 후계자로 알려진 여호수아(Joshua)다. 이 사람은 ‘눈’의 아들 예수아(Yeshua ben Nun)물고기의 예수로도 알려지고 있다. 예수란 이름은 히브리 말로는Yeshua 혹은 Yeshu로 쓰고 희랍말로는Iesous로 쓰는데 여기서 (‘Jesus’라는)영어철자가 나왔다. ‘예수’는 원래 이름이 아닌 직함이나 칭호를 가리키는 말로 ‘야웨가 구원하신다’에서 유래한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졌다고 하는 데 그래서 아마도 거의 모든 유태인 저항단체들은 자신들의 우두머리에게 다른 어떤 칭호보다 이 별명를 붙였을 것이다.
1세기의 유태 역사가인 요세프스는 적어도 19명의 예수(Yeshuas/Jesii)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 절반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시대 사람들이다. 요세프스의 ‘유대 고대사(Antiquities)’에서 언급된, 헤롯대왕의 치하로부터 유태 신전의 함락까지의 기간동아 재직하던 28명의 최고 성직자중에서 적어도4명이 예수란 이름을 가졌다. 이들을 열거하면: 필아비의 아들 예수(Jesus ben Phiabi), 쎅의 아들 예수(Jesus ben Sec),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Jesus ben Damneus) 그리고 가마리엘의 아들 예수(Jesus ben Gamaliel)들이다. 이 밖에도 바울은 자신의 경쟁자로 ‘또 다른 예수’에 대하여 설교하고 다니는 어느 마술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고린도 후서 11장 4절).
아래에 기독교의 예수와 많은 예수들 중 몇몇을 열거해 본다.
시라크의 아들 예수(Jesus ben Sirach)
이 예수는 구약의 계시록(Apocrypha )의 일부인 ‘시라크’란 책(전도서(Ecclesiasticus) 혹은 ‘시라크의 아들 예수’의 지혜서로도 알려진)의 저자로 알려져 왔다. 서기 전 180년 희랍에서 저술활동을 한 이 사람은 유태의 지혜서와 호머 스타일의 영웅들의 이야기들을 묶어서 편집하였다.
판디라의 아들 예수(Jesus ben Pandira)
이 예수는 마카비(Maccabean)왕조의 가장 무자비한 철권 통치자였던 알렉산더 요내우스(Alexander Jannaeus, 106-79BC)치하에서 활동한 기인(奇人)이다. 사려깊지 못하게도 이 예수는 종말론적 사업에 투신하여 예언을 일삼고 사람들을 동요시켜서 왕의 노여움을 샀다. 결국 이 예수는 유월절 저녁에 나무에 매달려 교수형을 당함으로서 자신의 자연수명도 살지 못한채 일찍 죽었다. 학자들은 이 예수를 엣센종파의 창립자로 추측한다.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Jesus ben Ananias)
서기 62년을 시작으로 이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재앙이 닥칠 도시” 를 주제로 닥쳐올 재양에 대한 주문을 끝없이 되뇌이는 소동을 일으
켰다. 그는 매우 애매모호한 에언을 했다:
“동쪽에서 외치는 소리, 서쪽에서 외치는 소리, 네 바람으로부터의 소리,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적하는 소리, 신랑과 신부를 대적하는 소리, 그리고 모든 사람에 대적하는 소리” (요세프스의 유대 전쟁사 6.3.)
로마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채찍형을 받은 후, 이 예수는 미친 잡범 정도로 취급되어 석방되었다. 그는 예루살렘 점령당시 로마의 투석무기 ‘카타펄트’로 던져진 돌에 맞아 죽었다.
서기 68년 갈릴리 지방을 완전히 파괴해 버린 폭동당시 이 예수는 타이베리아(Tiberias)(가난한 사람들과 어부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의 우두머리-요세프스의 ‘생애’ 12.66)의 반란군 대장이었다. 도시가 베스파시안(Vespasian)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 그는 갈릴리 바다의 연안에 있는 타리치아(Tarichea)의 북부로 도주하였다.
서기 68년, 69년 경에 당시 유대땅을 휩쓸던 내전에서 이 예수는 “평화 당”의 우두머리 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벽에 서서 성을 포위하고 있는 이두민(Idumeans, 수자(Susa)의 아들들인 제임스와 죤이 이끄는 사람들)을 질책하였다. 이런 행동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두민들이 성벽을 깨고 (성을 점령한 후) 그는 사형에 처해지고 그의 시체는 개들과 썩은 고기를 먹는 새들에게 던져졌다.
서기 69년 (예루살렘)시의 북부가 마지막으로 함락되었을 때 성직자였던 이 예수는 성전의 보물을 (점령군에게) 헌납함으로서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이 성전의 보물들 중에는 2개의 성 촛대와 순금제의 받침달린 잔, 그리고 성스러운 커텐과 최고 성직자가 입는 겉옷(장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전리품들은 베스파시안(Vespasian)과 그의 아들 타이투스(Titus)의 개선식에서 눈에 띄게 전시되었다.
그렇다면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는 없었나?
물론 있었다.
2세기 초 로마군에게 두통꺼리를 안겨준 말썽꾼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25마일 떨어진 리다(Lydda)라는 마을에서 로마군의 십자가 처형조의 손 아래에서 그의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로마군의 보복전술의 규모로 고려해 본다면- 예루살렘 포위의 절정기에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벽 앞에서 매일 500명이 넘는 포로들을 십자가 형에 처했다는 정도이다-
"이 즈음에 예수라고 하는 한 현자(a wise man)가 있었다, 만일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는 놀라운 일들(기적)을 행하는 자였으며,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의 선생이었다. 다수의 유대인들뿐만이 아니라, 헬라인들 중 많은 이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이는 그리스도였다.
우리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고소하였고,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처음에 그를 사랑하던 자들은 멈추질 않았다. 그는 삼일 째 되는 날 다시 살아서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는 하나님의 예언자들과 다른 많은 놀라운 일들이 그에 관해 선포했던 일이었다. 그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명명된 이 종족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예수를 “그리스도”로 단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이 본문은, 마치 신약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쌍을 이룰만한 고백적 진술을 담고 있는 듯하다. 혹은 예수의 십자가 밑에서 “이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는 백부장의 증언(마 27,54; 막 15,39; cf. 눅 23,47 “의인”)과 짝을 이룰만한 한 유대인의 증언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요세푸스가 기록한 위의 단락을 일컬어 “요세푸스의 증언”(Testimonum Flavianum )이라고 말하고있다.
요세푸스의 로마이름인 폴레비우스의 이름을 따서 폴레비우스의 고백이라고도 하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역사속에 실존 했다는 유력한 증거라고 오랫동안 인용하여왔다, 하지만 요세푸스는 유대민족을 배신한 반역자(로마 황제를 메시아라고 부름)이고 초대교부 오리겐은 요세푸스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요세푸스가 저술한 유대고대사의 예수 기록에 대해서는 기독교인이 아닌 요세푸스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기독교인이 아닌 요세푸스의 이러한 기독교적인 신앙 고백은 후대 기독교 교부에서 역사적인 예수를 만들기위해 요세푸스의 기록을 변형하거나 추가삽입 한것이라는 주장이 학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한편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 고대사의 예수에 대한 기록을 삭제하고 새로운 크리스천 재료로 바꿔치기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확증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는 첨삭 수정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이 구절이 첨삭 수정 되었다고 보는 이유는 유대고대사에 기록된 예수에 대한 이런 대목을 첫 두 세기, 즉 200여년간 동안, 즉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승인하기 전, 모든 이교도로부터 기독교를 방어해야만 했던 유스티누스(2세기 중반), 이레나이우스(2세기 후반), 테르툴리아누스(2세기 말), 클레멘스(2세기 말), 오리게네스(또는 오리겐, 3세기 초), 키푸리아누스(3세기 중반), 아르노비우스(3세기 후반) 같은 호교가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 저 유일한 요세푸스의 사례를 끌어들여 설명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
요세푸스만한 사회적 학문적 지위를 확보한 사람의 저작을, 그것도 이렇게 언급한 증거를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런 중립적인 기록을, 그들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재료로 쓸 수가 없었다고 해야 옳다. 그 이후에 첨삭된 것으로 봐야 한다.
오리게네스(오리겐)가 켈수스(Celsus)를 논박하기 위해 25만 단어를 쓰는데, 켈수스 논박(Contra Celsus) 제 1권 46, 67, 68장에는 켈수스가 예수는 이집트인들에게 기적, 실행, 속임수를 배웠다며 예수의 기적을 헐뜯는다. 이 때, 이 '플라비우스(요세프스)의 증언'은 어떤 그리스 신화나 다른 이야기보다 더 요긴했을 법한데 쓰지 못한다. 아니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대고대사에 기록된 예수의 기록을 4세기 초반,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가 현재 기록되어 있는 형태를 인용하는 것으로 보아서 일부 학자들은 유세비우스가 바로 이 대목을 날조한 당사자가 아닌가 제안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는 1세기쯤에 쓰였고 현재 잔존하는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는 후대에 기록된 모사품이며 대체적으로 11세기쯤 쓰인것으로 추정하고 있음)
예수라고 불리던 유대 영웅들은 문자 그대로 땅바닥을 겹겹이 덮을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증언이라는 기록을 제외하면 이 위대한 보편적 역사의 주인공이 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예수”들 중에 “나사렛 예수”가 될 만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인가?
여기서 문제는 성스러운 전기(傳記)를 뒷받침할 만한 것은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단한 이야기’는 연대의 오기와 상호모순, 그리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들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요셉과 그의 임신한 아내 마리아가 로마당국의 인구조사를 위하여 베틀레헴으로 떠났다는 그 당시는 유대땅과는 달리 베틀레헴이 있는 갈릴리 지방은 로마의 영토가 아니었고 ‘엄마’와 ‘아빠’는 그 여행을 떠날 이유가 하등 없었다는 점이다. 만일 갈릴리가 당시 로마 황제의 영토였다 해도 역사에는 어거스터스(Augustus) 황제가 (혹은 그 어떤 다른 황제도) 전국적 인구조사를 시행하라는 칙령을 내린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로마는 부동산 을 대상으로 세금을 징수했고 인구와는 관계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는 “나사렛”이라는 마을은 2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
요세푸스의 예수기록은 사실인가? 비교정밀분석!
요세푸스의 증언
기독경 이외에도 예수에 대해서 그의 행적을 증거하는 역사적 사료가 존재하는가? 그러나 이상스러운 점은 예수 생존시기에 수많은 저술가의 저술에서 예수에 대한 자료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4복음서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시에 수많은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쳤고, 예수의 오병이어 기적 때에는 모인 남자만 하더라도 5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수 만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대중의 지지를 받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서 어째서 기록이 없는 것인가? 예를 들어, 유대인 역사학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던 필로 (Philo of Alexandria. BC 20~AD 50)는, 그 당시 결코 주류를 이룰 수 없었던 미미한 종교 분파인 떼라퓻 또는 에세네파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한 바 있는데, 그의 온 저서를 통하여 예수가 언급된 곳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스투스(Justus of Tiberia), 노인 플리니(Pliny the Elder)등, 그 외 수 십명의 예수(예수와 동시에 예수와 같은 이름의 랍비 활동가는 수십명에 이른다.)와 동시대의 유대인 저술가 들이 있는데, 그들의 저술은 현대의 한 도서관을 채우기에 충분한 양 이었지만,모두 예수에 관한 언급에는 실패하고 있다. 예수가 로마의 저술가들에게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의 사후, 수세기가 지나서 기독교인들이 로마 사회의 이슈가 되면서 예수에 대해서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대표적인 그런 저술로서는 로마의 역사가 타시투스(Tacitus)의 '저서 연대기(Annals)'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해 언급을 들 수 있다.-Cornelius Tacitus - AD 64년의 로마의 대 화재 발생시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에게 책임을 돌린 사건을 기록하면서, 기독교인(Christian)이라는 단어가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 시 빌라도에게 처형 당한 크리스투스 (Christus)라는 인물에게서 비롯 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저술은 AD 112년에 기록된 것이므로, 그가 시중의 기독교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적었을 따름이다(학자들에 따라서 AD 116~117 년경에 작성된 문서라는 주장도 있음). 또한 그는 크리스투스 외에도 많은 이방 신들에 대해서 마치 그 들이 실체로 존재한 양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역시 예수의 실존성에 대한 자료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에 대해서 불충분한 자료와는 달리 주목 받고 있는 저술이 하나 있다. 바로 유대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년 ~ AD 101 년)의 저술이다-Flavius Josephus- (1) 요세푸스 증언의 실체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AD 37년에 유대 상류 가문인 마티아스 가에서 태어나 AD 68년 그의 나이 31세 때, 갈릴리 총독과 로마군에 대항하는 유대해방군의 사령관이 되었다가 그의 군대가 요타파타 전투에서 전멸되자 포로로 잡혀 로마 장군인 베스파시안(Vespasian)과 그 아들 티투스(Titus)에게 포로로 잡힌후, 친로마파가 되어 로마황제 밑에서 부귀를 누리게 된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극악한 매국노 인물이다. ①유대 전쟁사(De bello Judaicae) 그의 첫 번째 저서로는 유대 전쟁사(De bello Judaicae, 전7권)가 있으며, 여기서 그는 AD 66~73년 에 일어난 독립 투쟁사를 기록 하고 있다. 이 기록이 아주 세밀한 것은, 본인 자신이 그 전쟁의 와중에 중요 인물로 활동 했기 때문인데, 이 책 중 어디에도 예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②자서전(Vita Josephi) 두 번째로 그의 자서전(Vita Josephi)이 있는데, 그 책에서 그는 자신의 출생 배경부터 시작해서 로마에 항복하고 그들의 세력에 포섭된 자신의 합리화와 미화를 꾀하고 있으며, 반(反)유대주의를 논박하는 내용의 아피온 반론(Contra Apionem, 2권)이라는 저술도 있다. ③유대 고대사(Antiquitates Judaicae) 세 번째의 책으로 유대 고대사(Antiquitates Judaicae, 전20권)가 있는데 예수에 관한 유일한 자료가 이 책의 사본들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아담과 이브로 시작되어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 시대, 출애굽을 망라하며 독립 전쟁 직전 (AD 66년)까지의 유대인 역사를 서술 하고 있는데, 집필 연대는 요세푸스가 밝히고 있듯이 도미티안(Domitianus) 통치 제13 년, 즉 AD 93~94 년이다. 책 뒷부분에 문제가 되는 예수 인용구가 있는데 그것들을 보기로 하자. 첫 번째의 구절이다. "이 무렵 예수라고 하는 현자가 있었다. 만일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자였으며,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의 선생이었다. 다수의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헬라인들 중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구세주였다. 우리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고소하였고,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던 자들은 멈추질 않았다. 그는 3일 째 되는 날 다시 부활해서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는 하나님의 예언자들과 다른 많은 놀라운 일들이 그에 관해 선포했던 일이었다. 그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명명된 무리들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유대고대사 18 권 63~64절] 두번째 구절 (유대고대사를 통 털어 예수 인용구는 이 두 구절뿐이다). "그는 즉 구세주라 칭함 받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몇몇 다른 인물들을 산헤드린 앞에 소환한다. 그들을 정죄하여 돌에 맞아 죽게 한다."[유대 고대사 20권 200절] 위에서 언급한 두 구절은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와 얼마나 정확히 부합되는 묘사인가? 마태,누가복음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구절들은 중세부터 현대에까지 끊임없는 조작시비를 불러일으킨 부분이다. 원래에 없었던 구절이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동안 덧붙여진 것이다. 이 구절들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의 역사적 배경을 골드버그의 서술로 먼저 간단히 훑어 보자. AD 93년: 유대고대사가 로마에서 발간되다. 헬라어로 쓰여진 원본들의 권말에는 티투스 황제가 직접 서명을 해 주었고, 발간을 윤허 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이 원본들이 아니다. 원본들은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도 10 세기경의 것으로 추산 되고 있다. 220~250년경: 유명한 초기 기독교 변론자인 오리겐(Origenes : 오리게네스라고도 불림)은 헬라적 신화를 차용해서 예수신화를 만들어 냈다고 비판하는 이교도들에 대항해서 켈수스에 대한 반론 (Contra Celsus)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그는 "요세푸스는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 아주 흔한 이름이었는데, 요세푸스의 저작물들 속에서도 여러 명의 예수들이 등장한다. 하나는 선원들을 선동했던 사피아스(Sapphias)의 아들 예수, 도적단의 두목으로 체포된 예수, 7년 동안 예루살렘 주변을 돌아다니며 "슬프다, 슬프다, 예루살렘이여 슬프다!"를 외치다가 여러번에 걸쳐 두들겨 맞았지만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던 예수가 있다.(결국 이 예수는 예루살렘 함락 때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오리겐은 자기가 원하는 예수를 찾을 수 없어서 실망한 것 같다. 324년: 추기경 유세비우스가 처음으로 문제의 구절을 인용하는데, 이 내용은 현존하는 복사 본들의 내용과 거의 똑같다. 10 세기: 아랍 역사 학자이자, 아랍 기독교인이면서 추기경인 아가피우스가 두 번째 구절을 인용 한다. 그런데 그의 인용구는 유세비우스의 인용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유대인 통치에 관한 저술에서 유대인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즈음 예수라 불리는 현자가 있었다. 그의 행실은 의로웠으며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빌라도가 그를 처형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제자 직분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예수는 3일만에 부활 해 그들 앞에 나타내 보이셨다. 따라서 그는 아마도 선지자들이 예언 했던 구세주였던 것 같다" 16 세기: 1500여년 동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오다, 16 세기에 들어 와서야 조셉 스칼리거라는 인물이 18권에 등장하는 구절의 진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의 역사학적인 전체적 다른 기록어투와 달리 너무나도 기독교 색채가 짙다는 것이었다. 17 세기: 리차드 몬테규 추기경이 "그는 구원자 였다"라는 구절이 훗 날 기독교인이 복사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덧붙여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1737년: 위스튼이 요세푸스의 저술들을 번역하면서 요세푸스가 유대인 기독교인이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두 번째 구절 전체가 원래 그에 의해 쓰여졌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18 세기~ 20 세기 초반: 많은 학자들이 상기 구절이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위조되었다고 주장한다. 1929년: 대커리가 위조설을 지지하면서, 또 누가 복음과 유대 고대사에 공통 점이 많음을 지적하고 누가와 요세푸스의 상면 가능성을 주장한다. 1931년: 아이슬러가 기독교 검열 하에 많은 부분의 삭제가 있었다며 그 나름대로 재 수정 복구된 구절을 제시한다. 1941년: 마틴이 부분적인 위조를 지적하고 나머지 부분은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1954년: 폴 윈터가 위조된 곳은 세 곳뿐이며 나머지는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세 군데 위조는 "그는 구원자였다",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의 두 구절과 뒷부분의 부활과 예언에 관한 구절이었다. 이 주장은 당시 많은 공감을 샀다. 1960년: 콘젤만이 누가 복음과 사도 행전에 내포된 신앙관과 문제의 두 번째 구절간에 공통성을 발견하고, 18권의 문제 구절 전체가 기독교인에 의해 위조 됐다고 주장한다. 1963년: 펠드만이 거의 모든 부분이 정확 하다고 단정한다. 1971년: 파인스가 9~10 세기 아랍 및 시리아 본을 (상기한 아가피우스의 구절)발견하고, 이들 사본에는 "구원자" 운운의 구절과 "인간이라 부를 수...." 두 구절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들어 이것이 위조되지 않은 원본 기록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1973~1983년: 렝스토푸가 요세푸스의 저술을 집대성 재구성하여 용어 색인 체계를 만듦으로 학자들의 연구에 편리한 도구로 쓰이게 한다. 1984년: 버즈올이 렝스토푸의 색인 체계를 이용하여 두 번째 구절의 문체를 분석하면서, 요세푸스의 문체와 너무 다르므로 구절 전체가 위조라고 주장 하다. 1991년: 마이어가 폴 윈터의 설을 지지 하다. 즉 세 군데 만 위조 됐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는 현재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 하고 있다. 1995년: 골드버그가 컴퓨터를 동원하고 통계학의 개념들을 이용 하여 두 번째 구절과 누가 복음의 엠마오 노상의 이야기(예수가 부활 해서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나타난 이야기)에 신기한 공통점을 발견한다. 따라서 두 번째 구절과 "엠마오 이야기"는 이제는 잃어 버린 어느 초대 기독교 문서에 공통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다. 결론으로 그는 "구원자" , "사람일수..." 구절 두 개만 빼고는 전부 원본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거의 모든 학자들이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위조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저술중의 예수에 대한 구절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로 유대교의 제사장인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자면 성경은 신의 영감으로 된 것이므로 일정한 계시의 기간에만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세로부터 아닥사스(Artaxerxes, BC 465 ~ 424)왕 때까지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한 철저한 유대인이었다. 그의 저술에 의하면 로마의 식민 통치하에 소작 농민들은 25%의 세금과 사원에서 부과하는 22%의 헌금 등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는 동족들 앞에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신탁을 알리는 자칭 선지자들이 득시글거렸다고 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비유(譬喩)와 알레고리(寓話)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설교하며, 멀지 않아 전쟁이 일어나 메시아가 나타나서 세계를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퍼트리며 돌아다녔는데, 이 소문들을 이용하여 스스로 메시아라고 자처하며 게릴라 투쟁에 지도자로 나선 무리가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유대교를 신봉하면서, 동시에 매국노였던 요세푸스는 유대인의 무장독립투쟁을 모두 사기꾼, 강도등으로 간주했다. "파두스가 유대의 총독이던 시대에, 테우다스라는 이름의 어떤 사기꾼이 많은 수의 대중을 선동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소유물을 가지고 요단강으로 그를 따라오라고 선동했다. 그는 그가 예언자이며, 그의 명령에 따라 그 강이 갈라지고 그들을 쉽게 건너게 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고대사 20권 97절] "이집트에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와서 자기가 예언자라고 선언하고, 대다수의 대중들에게 그를 따라 예루살렘에서 5퍼얼롱(furlongs) 떨어져 있는 올리브 산으로 나가자고 선동했다. 그는 그곳에서 그의 명령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 줄 것이며, 그 때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유대고대사 20권 169~70절, 유대전쟁사 2권 261~62절] 요세푸스는 당시 갈릴리의 유다, 페레아의 시몬, 톨로마이오스, 테우다스, 등 메시아를 사칭하여 폭동을 일으켰던 자들에 대해 모두 사기꾼들로 평가했다. 그런데, 예수와 관계된 문제의 구절은 그가 예수의 신성과 기적, 부활을 인정한 것으로, 요세푸스가 마치 기독교인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정도이다. 다시 말하자면, 독실한 유대인이 기독교를 믿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만약 요세푸스가 문제의 그 구절을 직접 기록했더라면, 예수도 사기꾼처럼 묘사했을 것이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예수의 실존성을 증거한 중요한 증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유대인의 매국노라고 볼 수 있는 요세푸스가 메시아라고 주장했던 사람은 바로 로마황제였다! 유대-로마 전쟁때 패배하여 베스파시안 앞으로 끌려간 요세푸스는 그가 바로 유대인이 학수고대하는 메시아이며, 곧 로마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요행인지 몰라도 그의 예언은 적중하여 베스파시안은 69년에 로마황제로 등극한다. 황제는 예언에 대한 보답으로 요세푸스를 로마에 데려가 측근의 한 사람으로 삼았다. 그를 가르키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라는 말도 '플라비우스 왕가의 요세푸스' 라는 뜻이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이야 말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소망하여 왔던 메시아이며, 그와 티투스는 멀지 않아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아첨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고대의 신탁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베스파시안과 티투스임을 주장하며, 메시아를 사칭하여 로마에 대해 무장투쟁을 일삼는 유대동족들을 비난했다. 그런 요세푸스가 '유대 고대사'에서 갑자기 그의 정치적 처세술을 모조리 부정하고, 예수를 메시아로 칭송하는 글을 남긴셈이다. 한술 더 떠서 티투스 황제가 그의 책에 서명을 하고 발간을 허락한 셈이 되니 더욱 어이없는 일이다. 세 번째로, 요세푸스는 장황설을 늘어놓는 작가로, 그는 보다 중요성이 적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썼다. 예수에 대한 부분만큼은 선행한 구절이나 뒤따르는 구절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문제의 구절은 다른부분과 문체까지도 다르다. 즉, 문제의 구절만 빼버린다면 완벽한 그의 문체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또, 그 구절은 유대인들에게 닥친 재앙에 관한 이야기들의 모음들 가운데에서 나오는데, 그 구절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 역사가의 글에 공간을 만들기 위한 개작의 손길에 의해 나뉘어졌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네 번째로, 요세푸스의 저술인 유대 전쟁사는 안티오코스의 예루살렘 점령부터 AD70 년의 예루살렘 함락까지의 내용을 유대 고대사책에서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 빌라도가 군중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 등 다른 부분들은 거의 동일하게 서술 되었는데 유대 전쟁사에서는 유독 상기의 예수 인용구들만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다섯 번째로 유대 고대사의 사본들이 전부 기독교인들의 관리 하에 전수 되었으며, 초대 교부들과 기독교 변증가들은 왜 요세푸스의 저술을 인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대고대사는 초대 기독도들 에게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으며 그들은 열광적으로 그 책을 읽었고 소중히 여겼다. 초대 기독교도들은 예수의 실존과 그의 놀라운 기적들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받았고, 이러한 과정은 초대교부들의 저술에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렇게 좋은 증거물을 제시하지 않았다. 유대고대사가 발간된 것이 기원후 93 년경이었는데, 거의 140~250년이 흘러간 AD 324년이 되어서야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처음으로 문제의 구절이 처음 인용 되었다. 이것이 처음이다. 그렇다면 유세비우스 이전에는 이 구절을 아무도 인용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그 책은 열광적으로 읽혔고 질문은 쏟아졌는데도 말이다. "유세비우스는 신앙의 명분 아래 문서 변조를 지원하였고 요세푸스외의 여러 저술가들의 책들도 변조 시켰다" [마샬 거빈 (Marshall J. Gauvin)] 요셉 웰레스에 의하면 문제의 구절은 유세비우스의 위조작이었다고 한다. 요셉 웰레스는 많은 연구 끝에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서 변조의 행태를 캐어 낸 인물이다. 그는 문서 변조의 대표자로 유세비우스 추기경을 꼽았다. 유세비우스 자신도 그의 저서 복음적 증명(Evangelical Demonstrat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구세주에 관하여, 내가 이미 생산(조작) 해낸 이 증거들 만으로도 충분 하다. 하지만 유대인 요세푸스를 여분의 증인으로 이용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usebius/ Evamgelical Demonstration, Book III. P.124] 유세비우스 자신도 그것이 조작이었음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이성의 모든 논증들은 그 구절이 염치없는 위조임을 증거한다. 이러한 이유로 정직한 기독교 학자들은 누구나, 그것을 첨삭된 것으로써 버려왔다. Dean Milma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많은 추가적인 구절들과 함께 첨삭되었다."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을 쓰며, Dean Farra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세푸스가 현재 있는 것과 같은 구절을 전부 썼다는 것은, 제대로 된 정신의 비평가라면 절대 믿지 않는다." Chambers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세푸스의 유명한 그 구절은 일반적으로 첨삭임이 인정된다." [The Chambers Encyclopedia] 왈버튼(Warburton)주교는 그것을 "비열한 위조이며 매우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다"며 비난했다. -기독교 신학계의 의견- 요세푸스의 예수 보도의 진위 (眞僞) 문제 (박찬웅) A. 서 론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신약성서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요세푸스의 작품 「유대전쟁사」 (De bello Judaicae), 「유대고대사」(Antiquitates Judaicae), 「자서전」 (Vita Josephi), 「아피온 반박문」 (Contra Apionem),이렇게 네 개의 작품을 남겼다. 이 중 「유대전쟁사」와 「유대고대사」는 각각 일곱 권과 스무 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진 요세푸스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주후 66-70 년 사이의 유대-로마 전쟁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하고 있는 「유대전쟁사」의 기록 연대는 베스파시안 (Vespasian) 통치 말기에 완결되었으므로, 늦게 잡아도 베스파시안이 사망한 주후 79 년 이전으로 잡을 수 있다. 또한 「유대전쟁사」는 주후 75 년까지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주후 75 년에서 79 년 사이로 기록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요세푸스는 구약 성서의 창조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유대 민족의 장구한 역사를 「유대고대사」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는데, 이 집필 연대는 요세푸스가 밝히고 있듯이 도미티안 (Domitianus) 통치 제 13 년, 즉 주후 93/94 년이다 (ant 20,267). 한 권으로 된 「자서전」과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아피온 반박문(反-유대주의에 대한 논박을 내용으로 함)은 유대고대사 이후에 발간된 것으로 여겨진다. 본 연구에서는 요세푸스의 작품들을 인용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약어를 사용함을 밝혀 둔다: bell (유대전쟁사), ant (유대고대사), vita (자서전), c. ap (아피온 반박문). 이같은 중요성에 관한 마틴 헹엘(Martin Hengel)의 언급에 의하면, 요세푸스의 작품들이 보존되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신약성서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어떤 윤곽을 그리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따라서 요세푸스는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M. Hengel, “Zeloten und Sikarier. Zur Frage nach der Einheit und Vielfalt der judischen Befreiungsbewegung 6-74 nach Christus”, in: O. Betz u.a. (Hgg.), Josephus Studien. Untersuchuchungen zu Josephus, dem antiken Judentum und dem Neuen Testament. Festschrift fur O. Michel (Gottingen 1974), p. 175 참조. 이와 같은 진술을 과장된 말이라고 반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세푸스가 아니면, 우리는 유대-로마전쟁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알 길이 없을 것이며, 예를 들어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등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요세푸스의 작품들이 아니면 현재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신약성서 연구의 폭은 현저하게 좁아질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이유들에서 T. Keim, Aus dem Urchristentum I (Zurich 1978), p. 1은 요세푸스의 작품들을 가리켜 “제 5 복음서”라 일컫기도 한다. 신약성서를 다루는 연구자들은 대개 요세푸스의 기록을 신약성서의 배후 역사를 밝히기 위한 일차적인 참고서나 보충자료로 사용한다 본문비평 장치가 포함된 요세푸스의 희랍어 전집 가운데 가장 애용되는 것은, 베네딕투스 니이제(Benedictus Niese)가 편찬한 Flavii Josephi opera edidit et apparatu critico instruxit Benedictus Niese, 7 Bde. (Berlin 1885-1895; Nachdruck: Berlin1955)이다. 또한 희랍어 본문과 영어 번역을 함께 수록한 H. St. J. Thackeray, L. H. Feldman 등의 Josephus, 10 Bde., Loeb Classical Library (Cambridge 1926-1965)와 함께 「유대전쟁사」의 희랍어 본문과 독일어 번역을 담은 O. Michel und O. Bauernfield (Hgg.), Flavius Josephus. De bello Judaico; Der judische Krieg. Griechisch und Deutsch, 4 Bde. (Darmstadt 1959-1969) 역시 요세푸스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일차 자료이다. 번역서들 가운데 먼저 <독일어 번역>을 보면, 앞서 언급한 오토 미셸(O. Michel)과 바우언필드 (O. Bauernfield)의 「유대전쟁사」와 함께 H. Clementz, Des Flavius Josephus Judische Altertumer, 2 Bde. (Halle 1899); Geschichte des Judischen Krieges (Halle 1900); Kleinere Schriften (Halle 1900)은 상당히 오래 전의 번역이긴 하지만 널리 읽히는 번역서이다. 요세푸스 작품들에 대한 <영어 번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약 40 년 동안 진행된 (위에 언급된) Loeb Classical Library의 희랍어 - 영어판이라고 할 수 있다. 윌리암 휘스턴(William Whiston)의 The Genuine Works of Flavius Josephus (London 1737)은 지금까지 평균 1 년에 한 번 꼴로 재판(再版)되는 기록을 남기고 있을 정도로 널리 읽히고 있지만, 휘스턴의 영역(英譯)은 상당수의 문제점을 내포한 희랍어 본문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Haverkamp 1726), 전문적 연구자들이 이용하기에는 다소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신약성서 문서들이 당시의 세속 사건에 대한 역사적 보도를 목적한 글들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의 신앙적 문서로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또한 신약성서 기자들과 해당 독자들은 당대의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관한 공통적 이해가 이미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상세한 소개를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독자들은 신약 시대의 배경 역사를 대부분 신약성서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요세푸스의 기록은 신약 문서들의 본문에 대한 보다 깊이 있고 폭넓은 이해를 가능케 하는 가장 중요한 정보의 보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요세푸스가 제공하는 정보들은 간혹 순전한 객관적 사료로 여겨지기도 한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선입관은 요세푸스의 기록이 신약성서 연구를 위한 거의 유일한 성서외적 (聖書外的) 정보의 소재지라는 판단에서 비롯된다. 물론 요세푸스를 비롯한 거의 모든 역사가들은 자신의 작품은 매우 중립적이며 순수하고 표준적인 역사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깊은 독자들이라면 그러한 선언을 그대로 이행하는 역사가들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차리게 된다. 어떤 기록자든지 나름대로의 관점과 목적의식을 갖고 사건을 기록하며, 때로는 동일한 시대 사건들을 놓고 다른 사가들과 논쟁을 목적하기도 한다. 특히 논쟁이 주목적인 경우에는 상이한 입장에 따라서 상반된 해석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가령 요세푸스가 자서전을 집필한 목적들 중 중요한 것은, 티베리아의 유스투스 (Justus von Tiberias)와의 논쟁 상황에서 자기 개인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요세푸스의 작품을 순수한 객관적 사료라고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그의 작품 역시 “요세푸스에 의해 해석된 역사”를 보존하고 있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그가 유대고대사 제 1 권에서부터 제 13 권에 이르기까지 구약 시대의 역사를 재해석해 놓은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구약 정경과 외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역사의 사건들을 단순 나열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구약의 인물들을 헬라적 구미에 맞는 자들로 묘사해 놓기도 하고, 때로는 부가적인 대화문 들을 창작하기도 하고 과장법을 동원하여 역사를 기록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는 기존의 역사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자이며, 구약 시대 이후의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도 자신의 해석이 가미된 역사를 기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곧 요세푸스의 기록은 신약성서 연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참고자료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 그 집필 동기를 충분히 염두에 두면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B. 본론: 요세푸스의 예수 단락의 진위 (眞僞) 문제 요세푸스의 작품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기독교인들에 의해 전수되어 온 이유는, 상술한 바와 같이 초기 기독교 역사에 대한 중요한 배경 지식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교회는 일찍부터 성서의 역사성을 밝히거나 혹은 보충하기 위해 요세푸스의 기록을 자주 이용해 왔다. 예를 들어 오리겐(Origen)은 그의 기록들에서 자주 요세푸스의 작품에 나타나는 진술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그리고 정확히 인용하고 있다. 이런 점과 함께 기독교인들이 요세푸스의 기록을 잘 보존해 온 보다 구체적인 이유를 든다면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들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에서 예수 (그리스도) ant 18,63-64., 세례 요한 ant 18,116-119. 요세푸스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에 대한 서술 도중에 세례 요한을 언급한다. 요세푸스는 헤롯 안티파스와 나바태(Nabataer)의 아레타스 4 세 (Aretas IV)와의 전쟁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헤롯 안티파스는 나바태의 공주와의 정략 결혼을 통해 아레타스 4 세의 나바태 왕국과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는데, 헤로디아(Herodias)와의 비윤리적인 결혼 소식을 들은 나바태 공주는 부친인 아레타스 4 세에게로 돌아가고 만다. 이 헤로디아가 안티파스의 “친형제인 빌립의 아내”였다는 막 6,18과 마 14,3의 언급은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헤롯 가문의 친족 관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갖고 있었던 요세푸스는 ant 18,110에서 이 헤로디아가 “이복 형제 헤롯의 아내”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또 다른 헤롯”이 누구인지는 소상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요세푸스의 보도에 비추어 볼 때 마가 기자와 마태 기자의 보도는 정확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오직 누가 기자만이 이런 부정확한 진술과 차이점을 보인다. 즉 눅 3,19은 헤로디아의 정체를 “자기 [= 안티파스] 형제의 아내”라고 보도한다. 아무튼 이러한 이중 결혼을 통해 안티파스와 나바태 왕국 사이에 맺어졌던 잠시 동안의 우호 관계는 깨지고, 이 계기를 통해 아레타스 4 세는 가말라 (Gamala) 지역의 영토권을 문제 삼아 전쟁을 일으켰다 (주후 36 년). 안티파스는 이 전쟁에서 대패하였고, 유대인들은 이 전쟁에서 패배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세례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여겼고, 요세푸스 역시 이러한 여론에 공감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이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Chanwoong Park, Johannes der Taufer und Jesus von Nazareth: Eine sozio-redaktionelle Untersuchung zu ihrem Bild bei Josephus und Lukas, Dissertation (Ruprecht-Karls-Universitat Heidelberg 1997), pp. 64-66을 보라. 또한 J. Gnilka, “Das Matyrium Johannes des Taufers (Mk 6,17-29)", in: P. Hoffmann (Hg.), Orientierung an Jesus: Zur Theologie des Synoptiker fur Josef Schmid (Freiburg 1973), pp. 78-93, 특히 pp. 89f.; J. P. Meier, A Marginal Jew: Rethinking the Historical Jesus, II, Anchor Bible Reference Library (New York u.a. 1995), p. 227, n. 243 등을 참조하라. 주의 형제 야고보 ant 20,200.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증언”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요세푸스에 나타나는 기독교적 인물들에 관한 보도들이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증언”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요세푸스의 작품을 보존하고 전수했던 과거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권 외부의 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도 역시 기독교 운동의 핵심적 인물들의 존재와 그들의 고상함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이러한 단정은 다소 주관적이고 성급한 기독교 신앙적 감정이입 작용의 결과이다. 이 인물들에 관한 요세푸스 본문에 대한 비평적 연구들은 이러한 기독교 교회의 요세푸스 이해에 부분적으로만 동의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의 경우, 신약성서와는 달리 요세푸스의 보도는 예수와 세례 요한의 관계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다. 세례 요한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세례 요한이 예수보다도 더 칭송되고 있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 단락은 예수 단락보다도 거의 두 배나 길게 보도되어 있고, 예수 보도에는 긍정적으로 해석하기에는 다소 모호한 구절들을 포함되어 있는 반면에 세례 요한은 시종일관 높게 평가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을 증언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주의 형제 야고보의 경우에는 야고보에 대한 중점적인 묘사를 주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아나누스 (Ananus) 2 세의 불법적 형집행에 대한 비판을 위해 야고보의 이름만이 간략히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요세푸스의 예수 보도 역시 재고의 여지가 많다. 요세푸스의 작품들이 기독교 독자층 내에서 잘 보존되어 온 이유가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인물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보도는 그 중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초기 신앙인들은 요세푸스의 예수 증언을 실로 가치 있다고 여기고 이를 부각시켰던 것이다. 물론 주후 1-2 세기에 예수를 언급하고 있는 기독교 외부의 기록들이 극히 드물게 발견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랍비문서(b Sanhedrin 43a) 물론 이 문서에 대한 역사적 가치에 대한 논의는 양분되어 있다. 가령 J. Maier, Jesus von Nazareth in der talmudischen Uberlieferung, EdF 82 (Darmstadt 1978, 21992), p. 268은 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대표하는 반면, J. Klausner, Jesus von Nazareth (Jerusalem 31952), pp. 17-57은 이 본문에 일정 정도 역사적 가치가 있는 초기의 전승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본문은 L. Goldschmidt (Hg. und ubers.), Der babylonische Talmud, Bd. 7 (Berlin 1929-1936), p. 186을 보라. 시리아의 스토아 철학자 마라 바 사라피온(Mara bar Sarapion)의 서신: 시리아의 한 스토아 주의자가 감옥에서 아들에게 쓴 편지로 예수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있진 않지만 “현명한 왕”(a wise king)으로 예수를 지칭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말하면서, 이를 각각 아테네인들, 사미르인들, 유대인들의 잘못이요 이에 따른 불운의 사건이 해당 민족에게 잇따라왔음을 말하면서, 자신의 아들에게 철학하기를 계속할 것을 고무하고 있다.J. Blinzer, Der Prozeß Jesu (Regensburg 41969), pp. 53f.에 따르면, 이 편지의 집필 연대는 주후 73 년이 이후의 가까운 시기로 추정된다. 본문 내용은 F. Schulthess, Der Brief des Mara bar Sarapion. Ein Beitrag zur Geschichte der syrischen Literatur, ZDMG 51 (1897), pp. 371f.를 보라. 타키투스의 기록 (Tacitus, Annalen 15,38-44): 주후 116/117 년경에 작성된 이 기록에서 타키투스는 주후 64 년 네로 집권기에 발생한 대화재 사건을 보도하면서 기독교인들에 관해 언급한다. 여기서 타키투스는 “그리스도”를 예수의 고유명사로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수에톤의 황제 전기문 (Sueton, Vita Claudii 25,4): 수에톤은 케사르(Caesar)부터 도미티안에 이르는 열 두 명의 황제들의 전기를 주후 117-122 년 사이에 기록하였다. 이 중 클라우디우스 (Claudius) 황제의 생애 가운데, 수에톤은 소위 주후 49 년에 공포된 클라우디우스 칙령(Claudiusedikt)을 언급하였는데, 이 칙령은 기독교적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한다는 내용이다. 행 18,2 역시 이 칙령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데, 사도행전 기자는 수에톤의 설명과는 달리 “모든 유대인들”이 추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등 신약성서와 근접한 시기에 기록된 적지 않은 수의 비기독교 문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언급되고 있긴 하지만 그 밖에 예수를 언급하고 있는 비기독교 문헌들에 대한 개론적 이해를 위해서는 G. Theißen und A. Merz, Der historische Jesus. Ein Lehrbuch(Gottingen 1996), pp. 73-95를 보라. 또한 F. F. Bruce, Jesus and Christian Origins outside the New Testament (London 1974)를 참조하라. 이러한 기록들은 지극히 단편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요세푸스는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예수의 삶을 보다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 유일한 자료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세푸스는 예수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요세푸스의 보도는 그 진위 (眞僞) 문제에 있어서 어떤 문제점을 갖고 있고, 또 그 문제점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요세푸스의 작품에서 예수는 「유대고대사」에서 두 차례 언급되고 있다 (ant 18,63-64; 20,200). 각각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bell (유대전쟁사), ant (유대고대사), vita (자서전), c. ap (아피온 반박문) 1. 요세푸스의 예수 보도 A (ant 20,200) 우선 예수의 이름만이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는 ant 20,200은 주의 형제 야고보의 죽음에 대한 보도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요세푸스는 야고보의 정체를 “그리스도라고 불리운 예수의 형제 (toVn ajdelfoVn jIhsou' tou' legomevnou Cristou')”라고 적고 있다. 이 단락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베스도가 죽고 알비누스가 부임하는 노상에 있었으므로, 아나누스는 이를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회를 소집하고 그리스도라고 불리던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몇몇 다른 사람들을 그들 앞에서 고발했다. 아나누스는 율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넘겨주고 돌로 쳐죽이게 하였다. 그 도시[예루살렘, 필자]에서 존경받고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로 알려진 자들은 이 일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 본문은 당시 대제사장 아나누스 (Ananus) 2세가 야고보와 그 밖의 사람들 이들은 “기독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본문은 당시 대제사장 아나누스 (Ananus) 2 세가 야고보와 그 밖의 사람들을 처형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아나누스 2 세는 베스도(Festus)가 죽은 후 새로운 총독 알비누스(Albinus)가 유대지역으로 파견되기 전까지의 공백기를 이용하여 야고보에 대한 투석형을 실행했는데, 이 행위는 불법적 행위로 간주되어 아나누스 2 세의 대제사장직은 박탈당하고 만다. 이 대목에서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의 마지막 권 끝 부분에 처음 소개되고 있는 이 야고보를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불리던 예수의 형제 야고보"라고 부르고 있다. 간혹 "그리스도라고 불리던"이라는 구절이 후대 기독교 필사가의 삽입이라는 추측도 있어왔지만, 이 본문 전체는 후대의 조작이 아니라 요세푸스 자신의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위 본문은 유대고대사의 희랍어 필사본들에서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며, 또한 교회사가 유세비우스 역시 이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Hist. Eccl. 2,23,22). 둘째, "야고보"는 평범한 유대적 이름이었고, 따라서 이런 흔한 이름에 대해서는 "누구의 아들" 내지는 "어느 출신" 등이 반드시 첨가되어 소개되었다. 요세푸스의 작품에서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모두 다섯 명이나 된다. 요세푸스는 이 야고보가 "요셉의 아들 야고보"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고, 따라서 앞서 ant 18,63f.에서 한 차례 언급되었던 예수의 형제라고 소개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셋째, 요세푸스 본문에 나타난 "예수의 형제 야고보"라는 표현 방식은 기독교 문헌에서 낯선 것이다. 기독교 문헌들은 대개 "주의 형제 야고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cf. 고전 9,5; 갈 1,19). 따라서 후대 기독교인이 이 구절을 삽입했다면,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아니라, "주의 형제 야고보"라 기록했어야 할 것이다. 넷째, 요세푸스 본문에 나타난 야고보의 죽음 이야기는 기독교적 전승과 어긋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야고보는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주후 62년 투석형에 의해 처형되었다. 반면 유세비우스가 인용하고 있는 헤게시푸스(Hegesippus)의 보도는 이와 다르다. 헤게시푸스에 의하면, 야고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 탑에서 떨어뜨려졌고, 돌에 맞고 몽둥이에 맞아 숨을 거두게 된다 (유세비우스, Hist. Eccl. 2,23.12-18). 또한 헤게시푸스는 야고보의 순교 사건이 발생한 시기가 주후 70 년 베스파시안이 예루살렘 정복하기 직전이라고 말한다. 유세비우스는 헤게시푸스의 이 보도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말하고 (Hist. Eccl. 2,23; 3,19), 이는 곧 야고보의 순교에 대한 교회의 표준적인 이야기로 여겨진다. 따라서 요세푸스의 야고보 본문은 기독교인에 의해 후대에 삽입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야고보의 신앙, 야고보의 선행 등에 대한 칭송을 담고 있지 않다. 본문에는 야고보의 순교를 기리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지 않고, 야고보는 단지 관심 밖의 인물인 양 가볍게 처리되고 있다. 즉 야고보는 대제사장 아나누스 2 세의 법오용을 묘사하기 위해 언급된 한 사람의 희생자일 뿐이다. 위와 같은 논의들에 비추어 볼 때 이 본문이 기독교인의 삽입이 아닌 요세푸스 자신의 기록임을 의심할 근거는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2. 요세푸스의 예수 보도 B (ant 18,63-64): 소위 Testimonium Flavianum 야고보 처형 단락에서는 예수의 이름만이 잠시 언급된 것에 반해서, ant 18,63f.에서 요세푸스는 예수의 삶에 대한 보다 자세한 요약적 보도를 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즈음에 예수라고 하는 한 현자(a wise man)가 있었다, 만일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는 놀라운 일들(기적)을 행하는 자였으며,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의 선생이었다. 다수의 유대인들뿐만이 아니라, 헬라인들 중 많은 이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이는 그리스도였다. 우리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고소하였고,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처음에 그를 사랑하던 자들은 멈추질 않았다. 그는 삼일 째 되는 날 다시 살아서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는 하나님의 예언자들과 다른 많은 놀라운 일들이 그에 관해 선포했던 일이었다. 그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명명된 이 종족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단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이 본문은, 마치 신약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쌍을 이룰만한 고백적 진술을 담고 있는 듯하다. 혹은 예수의 십자가 밑에서 "이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는 백부장의 증언 (마 27,54; 막 15,39; cf. 눅 23,47 "의인")과 짝을 이룰만한 한 유대인의 증언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ant 18,63f.의 예수 단락을 일컬어 "요세푸스의 증언" (Testimonum Flavianum)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17 세기 이후) 비평적인 요세푸스 연구자들은, 이러한 단언적인 그리스도 증언은 요세푸스 자신의 필적이 담긴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 예수 보도 전체가 위조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따라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요세푸스의 예수 보도를 가리켜 "증언"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다소 문제가 될 수 있지만 "Testimonium Flavianum"(이하 TestFlav)이라는 이 단락에 대한 전통적 명칭은 오늘날 비평적인 학계에서도 편의상 널리 사용되고 있다. TestFlav의 진위 문제에 대한 논의는 크게 세 입장으로 분류된다. 순수설 첫째, TestFlav 전체가 요세푸스 자신의 것임을 옹호하는 입장 (요세푸스 저작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본문은 요세푸스 자신의 기록이 분명하며, 결국 요세푸스는 예수의 그리스도 됨을 인정하는 기독교인과 다름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 입장은 "TestFlav"이라는 제목과 의미를 일치시켜 이해한다. 그러나 전적인 순수성에 대한 주장은 매우 드물게 제기된다. 요세푸스 저작설을 지지하는 자들 역시 전적인 순수성을 말하기보다는 대개 "전반적인 순수성"을 주장한다. 위조설 둘째, 요세푸스는 예수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고, 후대의 기독교인이 조작하여 현재의 위치에 삽입했다는 "위조설" (혹은 "삽입설"). 앞의 순수 저작설과 마찬가지로 이 입장의 학자들은 대체로 "전반적인 위조설"을 주장한다. 변형설 셋째, 요세푸스는 예수 단락을 기록했지만,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본문과는 일치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으로, 현재의 소위 표준본문(standard text)은 후대의 기독교인의 첨가 혹은 수정이 가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를 "변형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완전한 진정성을 주장하거나, 혹은 완전한 조작설을 말하는 학자들은 극소수이다. TestFlav의 진위성에 관한 현대의 요세푸스 연구의 동향은 대부분 "부분적 첨가설", 혹은 "부분적 변형설"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문체의 특징만을 보더라도 TestFlav은, 후대의 첨가로 여겨지는 소수의 부분을 제외한다면 요세푸스 자신의 희랍어 구사 방식에서 이탈해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요세푸스가 예수에 관해 무언가를 기록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을 전제로, 현재 본문은 후대에 변형이 가해진 것이라는 입장이 주를 이룬다. 어떤 본문이 삽입되었고 어느 정도 변형되었는지에 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양한 가설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아이슬러 (R. Eisler), 비너트 (W. Bienert), 브랜든 (S. G. F. Brandon) 등은, 요세푸스는 예수를 대중적 저항 운동가로 묘사했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후대의 기독교인이 매우 교묘한 어휘 변경 방법으로 예수라는 선동적 인물을 비정치적인 사람으로 탈색시켜 놓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요세푸스 자신은 예수에 대해 어떤 보도를 하였을까? 이하에서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TestFlav의 원문 형태를 가정하여 원문을 재구성하는 시도 방식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양한 원문 재구성 방식들 중 가장 설득력 있는 두 가지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3. 원문 재구성 시도 방식들 (1) 소거 방식 어떤 이들은 몇몇 구절만을 후대인이 삽입하였고, 이를 제거하기만 하면 TestFlav의 원문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입장에 의하면 후대의 기독교인에 의해 삽입된 부분은 다음 세 부분이다: (1) "만일 그를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2) "그는 그리스도였다", (3) 부활과 예언 성취에 관한 진술. 이러한 원칙에 따라 본문을 재구성한 마이어(J. P. Meier)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At this time there appeared Jesus, a wise man. For he was a doer of startling deeds, a teacher of people who receive the truth with pleasure. And he gained a following both among many Jews and among many of Greek origin. And when [or better: although] Pilate, because of an accusation made by the leading men among us, condemned him to the cross, those who loved him previously did not ceaseto do so. And up until this very day the tribe of Christians (named after him) has not died out. 이렇게 단순하게 세 부분을 삭제하는 방식에 따라 재구성된 본문은 그리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위 세 부분들 중 "마지막 부활과 예언 성취에 관한 진술" 부분은 종종 요세푸스 자신의 기록이라는 의견도 제기되어 왔다. (2) 소거, 변형, 부가를 절충한 방식 마찬가지로 설득력 있는 또 다른 방식은 앞의 마이어가 취한 방법과는 달리 삭제와 변형, 그리고 부가 방식을 함께 적용한다. (1) 삭제: 예수의 "사람됨"을 황송하게 언급하는 구절인, "만일 그를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은 요세푸스 자신의 어투로 보기 힘들기 때문에 소거되어야 한다. (2) 변형: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단정하는 진술, "그는 그리스도였다"를 "그는 그리스도라고 일컬어졌다"로 변형한다. (3) 첨가: 예수의 부활을 확언하는 진술 앞에 간접화법을 이끄는 새로운 주문장을 첨가한다. 즉 예수의 추종자들의 주장을 간접 인용한 것으로 변형하는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밤멜(E. Bammel)은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favskonte" o{ti)라는 분사구문을 후대의 기독교인이 제거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이 문장을 다시 첨가하여 원문을 재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물론 어떤 부분을 삭제하고 어떻게 변형하느냐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요세푸스의 원문을 재구성하는 시도들은 대개 위와 같은 세 부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에 가장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원문 재구성 시도들과는 별도로 최근 TestFlav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영역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아랍어판 TestFlav에 대한 발견이었다. 이 아랍어판 TestFlav의 본문은 주후 10세기 경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의 주교였던 아가피우스 (Agapius)의 기록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아가피우스 본문"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아가피우스 본문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소위 희랍어판 표준 본문과 일치하지 않는 점이 많다. 이 본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당시에 예수라는 현자가 있었다. 그는 선한 삶을 영위했고 고결했던 자로 알려졌었다. 그는 유대인과 또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 많은 제자들을 거느렸다.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형에 처했으나, 그의 제자가 되었던 자들은 그의 제자됨(또는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가 십자가형 삼일 후에 그들에게 나타났고, 살아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들은 말하기를,] 예언자들의 놀라운 말씀처럼, 그는 아마도 메시아였을 것이라고 말이다." (아가피우스의 아랍어 본문) 이 본문에는 TestFlav의 진위 문제에 있어서 논란이 되는 세 부분이 모두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즉 예수의 사람됨에 대한 부연 설명의 누락 ("만일 그를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예수의 메시아됨에 대한 진술이 간접 인용으로 나옴 (또한 이 진술은 본문의 맨 마지막에 위치한다), 그리고 예수 부활에 대한 진술 역시 간접 인용으로 소개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앞서 제기한 원문재구성 방법에 의거해 희랍어판 TestFlav을 재구성한다면 몇 개의 차이점을 제외하곤 이 아가피우스 본문과 상당히 일치하는 원문이 재구성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해준다. 즉 아가피우스 본문은 TestFlav의 전승이 주후 10 세기경에도 단일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며 현재 사용하고 있는 희랍어판 본문은 요세푸스 자신의 기록에 변형이 가해진 본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뒷받침해준다. 4. 초기 기독교 저자들에 나타난 증거들 요세푸스의 작품을 담고 있는 희랍어 사본들은 주후 9 세기 이후인 늦은 시기의 것들이다. 물론 이 점이 사본들의 신빙성을 반감시키는 것은 아니다. TestFlav을 인용하고 있는 최초의 사가는 주후 300년대 초 유세비우스인데 (Hist. Eccl. 11,7f.), 그가 인용하는 본문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희랍어 본문과 거의 일치한다. 또한 이후 제롬(Jerome, 342-420)의 인용 역시 단 한 곳을 제외하곤 일치한다 ("그는 그리스도로 믿어졌다", Of Illustrious Men 13). 유세비우스가 첫 인용자라는 이유를 근거로 혹자는 유세비우스 자신이 TestFlav을 작성한 자라고 여기기도 한다. 물론 유세비우스 이전에 많은 기독교 기록자들이 요세푸스의 작품들을 이용하면서도 TestFlav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일견 의아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엔 TestFlav에 관련된 증거가 전무한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보다 이른 시대의 오리겐(Origen, 185-254)은 유세비우스 이전의 TestFlav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 「유대고대사」, 「아피온 반박문」 등을 매우 정확하게 인용하고 있는 오리겐은, 요세푸스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고 두 번에 걸쳐서 말하고 있다 (Contra Celsum 1,47; Commentary on Matthew 10,17). 이러한 오리겐의 진술은, 한 편으론 그가 참조했던 「유대고대사」 본문에는 어떤 형태로든 예수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는 점, 즉 요세푸스는 무언가 예수에 대한 언급을 했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또 다른 한 편으론 그 본문에는 "그는 그리스도였다"라는 단정적 진술은 빠져 있었거나 혹은 다른 간접 인용 형식으로 존재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증거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유세비우스와 오리겐 이전에 기독교 문헌들이 요세푸스의 예수 단락을 언급하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5. 전후 문맥상에 따른 이해 Ant 18,63-64은 빌라도가 유대 지역의 총독직을 맡고 있던 시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단락 (ant 18,35-89) 가운데 위치해 있다. 그런데 위조설을 주장하는 견해들 중에는 TestFlav의 위치가 전후 맥락에 잘 맞지 않는다는 근거가 제기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류의 견해에 의하면, TestFlav의 전후 문맥은 주로 유대 지역에서 발생했던 소요 사건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데, 예수 보도 단락은 전혀 이런 사건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애초에 요세푸스는 예수를 기록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빌라도 재임 중에 처형당한 예수에 관한 본문을 조작하여 누군가가 대충 이 단락에 삽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추정이 가능한지는 TestFlav의 전후 문맥을 직접 고찰해야 알 수 있다. TestFlav이 속해 있는 ant 18,35-89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빌라도 총독의 부임 (ant 18,35). (2) 빌라도의 첫 번째 실정 (ant 18,55-59): 빌라도는 한밤중에 황제의 상을 예루살렘에 몰래 갖고 들어온 최초의 인물로 이에 분노한 유대 백성들은 이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으며 심각한 소요 사태가 발생할 뻔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폭동 사태가 없이 무사히 위기를 넘기게 된다. (3) 빌라도의 두 번째 실정 (ant 18,60-62): 빌라도는 성전 재산을 팔아 수로 공사에 함부로 사용하였는데, 이번에는 백성들의 심각한 소요 사태가 빚어졌고, 이에 빌라도는 무자비한 강제 진압을 감행한다. (4) 예수 보도 (TestFlav): 빌라도의 세 번째 실정? (ant 18,63-64). (5) 로마에서 이시스 (Isis) 신전과 관련된 에피소드 (ant 18,65-80): 이 이야기는 사실 빌라도와 관련 없고, 유대 지역과도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다. (6) 로마에서 발생한 한 악덕한 유대인의 사기극으로 인해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ant 18,81-84): 이 본문 역시 빌라도와 관련 없이 로마에서 일어난 일이다. (7) 빌라도의 마지막 실정 (ant 18,85-87): 사마리아 지역에서 어떤 인물이 나타나 사마리아인들을 그리심 산으로 이끄는 대중적 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빌라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하는 무자비한 진압 방식을 취했다. (8) 빌라도 총독이 소환됨 (ant 88-89): 앞 사건에 대해 분노한 사마리아인들은 사절단을 파송하고 그 결과 빌라도는 총독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위 내용 분석에서 알 수 있듯이 빌라도 재임 기간 동안(주후 26-36 년)을 기록하고 있는ant 18,35-89에는 여러 다양한 전승들이 묶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이들 중 두 개의 에피소드들(ant 18,65-80. 81-84)은 로마에서 발생한 일로 빌라도의 재임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 단락을 대중적 소요사건과 관련 없는 것으로 본다고 해도, 예수 단락만이 아니라 이어 나오는 두 개의 단락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고, 따라서 이것은 조작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 또한 요세푸스의 예수 단락이 대중적 운동과 무관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식의 판단도 적절하지 않다. 요세푸스가 예수를 마치 철학적 교사처럼 묘사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고 하더라도, 요세푸스는 예수의 "대중적 인기"와 "예수 추종자 집단"에 대한 언급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예수는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형"에 의해 죽었다는 보도 역시, TestFlav이 전후의 다른 사건들에 비해 이질적인 것이 아님을 암시해주는 증거이다. 따라서 전후 맥락 관계를 근거로 TestFlav의 위조-삽입설을 주장하는 것은 문맥 파악의 오류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C. 결 론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해 볼 때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1. 요세푸스 자신이 ant 18,63-64에 예수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2. 그러나 요세푸스가 작성했던 TestFlav의 원문은 오늘날의 본문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그리고 요세푸스의 예수 단락의 중요한 부분들은 원래적 형태가 많이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가장 단순한 근거 곧 요세푸스가 기독교적 신앙고백을 공유한 자가 아니었다는 점을 토대로 우리는 현재의 TestFlav에 대한 원문 재구성 시도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요세푸스에 나타난 예수상 역시 추정 가능할 것이다. 요세푸스가 어떤 경로를 통해 예수에 대한 정보를 얻었는지에 대한 것은 보다 긴 논의를 필요로 한다. 그가 기독교인들을 통해 받은 정보를 가공하여 자신의 관점을 통해 기독교적 시각과는 상이한 중립적 묘사를 했던 것인지, 혹은 그가 가졌던 정보 자체가 중립적인 것이었는지에 대한 해답도 역시 짧은 지면에서 주어질 성질의 것은 아니다. 요세푸스의 예수 보도는 복음서들이 기록된 주후 1 세기말에 기독교권 외부에서 예수를 바라보았던 하나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것의 토대가 되고 있는 전승들과 그 전달 경로, 그리고 이러한 전과정의 사회적 배경을 밝히려는 시도는 초기 기독교 시대의 다양한 예수상과 전승들을 연구하는 값진 작업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학계의 주장과 기독교 복음주의 신학계의 주장을 잘 비교해 보기 바란다. 기독교계의 주장은 요세푸스의 문제의 구절 두군데가 약간의 조작은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데 이러 저러한 이유로 요세푸스가 쓴 두 군데의 구절이 요세푸스 자신이 쓴 구절이 맞을 것이라는 결론이고 비판적 학계의 주장은 여러 데이타를 종합해 보면 누군가 살짝 집어넣은 구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영원히 밝혀 낼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 비판학계의 주장과 기독교 신학계의 주장을 면밀히 비교하면 정답이 보인다. 대립된 두 주장의 결론은 매우 정밀하고 오랜 시간을 걸쳐(심지어 1,000년이 넘는 논쟁) 누적된 주장들이기 때문에 두 주장을 잘 비교하고 그 사이의 핵심을 집어 내면 진실이 훤히 보일 것이다. 물론 진실은 반기독교 정서나 무조건 믿습니다라는 종교적 아집 두개를 모두 뽑아내고서야 가능하다. 즉 제3자적 객관.과학주의적 사고와 연구에서만이 진실을 가려낼 수 있다. 비판주의 학자들의 주장은 비교적 객관성이 확보된 반면 기독교 신학계의 주장은 '그래도 주님은 살아계시다'라는 전제를 먼저 설정하고 접근한 면은 분명해 보인다. 반대로 비판학계는 어떤 형태로든 요세푸스의 구절은 조작일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듯이 느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
출처 : 창조적인 삶. 번영과 즐거운 인생. | 요세푸스의 예수기록은 사실인가?-비교정밀분석! - Daum 카페
나사렛 -- 신학이 날조해 낸 마을
나사렛이란 마을은 구약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또한 갈릴리 지역(대 런던 지역도의 크기) 구석 구석에서 전쟁을 치른 요세프스 (로마에 항복하여 로마 귀족이 된 그는 원래 유태 장군이었다)도 그의 저서 유대 고대사에서 이 지역의 열 대여섯개의 다른 도시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만 나사렛에 대하여는 함구무언이다.
여호수아 19장 10절이하 16절 까지에는 스블론(Zebulon)지파 사람들이 이 지방에 정착하는 과정이 기술되어있다. 이 기록에는 12개의 읍촌(邑村)들과 6개의 마을 이름들이 나오지만 나사렛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탈무드에는 갈릴리 지방의 63개 촌읍(村邑)들의 이름이 나오지만 나사렛이란 이름은 없다. 혹은 그 어느 랍비들의 문헌에도 나사렛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바울 조차도 나사렛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랍비 솔리(Solly)의 편지에는 예수의 이름이 221번이나 언급되고 있지만 나사렛이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상 ‘예수가 활동’ 했다는 지역은 모두 너무 작은 마을들로 다만 그 지역의 촌부들이나 알 수 있는 그 유래가 매우 의심스러운 지명들이다. (반면에 현재 많은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어 그 증거가 분명한 당시의 번성했던 이교도들의 도시는 예수의 여행일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우리를 경각시켜야 할 것은 실질적으로 예수의 일생으로 쓰여진 이야기들의 거의 모두가 예수 보다 훨씬 이전 시대부터 전해오는 신비한 설화속의 주인공들의 생애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처녀 탄생이라는 기적적인 탄생 이야기나, 어린 시절에 보여준 비범함이나, 기적을 행한다거나 혹은 병을 고치는 일 등등, 그 모든 표징들은 예수라는 성인이 갈릴리 지역을 거닐기 수세기 이전에 이미 다른 신들로부터 기인한 것들이다. 예수가 말한 것들로 되어있는 말씀들이나 지혜문들 또한 유대 경전이나, 신 풀라톤 학파의 철학, 혹은 스토아 학파나 견유학파들의 주석서들에서 따온 평상적인 것들이다. (옮겨온 글을 보완)
나사렛 -- 신학이 날조해 낸 마을
나사렛이란 마을은 구약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또한 갈릴리 지역(대 런던 지역도의 크기) 구석 구석에서 전쟁을 치른 요세프스 (로마에 항복하여 로마 귀족이 된 그는 원래 유태 장군이었다)도 그의 저서 유대 고대사에서 이 지역의 열 대여섯개의 다른 도시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만 나사렛에 대하여는 함구무언이다.
여호수아 19장 10절이하 16절 까지에는 스블론(Zebulon)지파 사람들이 이 지방에 정착하는 과정이 기술되어있다. 이 기록에는 12개의 읍촌(邑村)들과 6개의 마을 이름들이 나오지만 나사렛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탈무드에는 갈릴리 지방의 63개 촌읍(村邑)들의 이름이 나오지만 나사렛이란 이름은 없다. 혹은 그 어느 랍비들의 문헌에도 나사렛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바울 조차도 나사렛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랍비 솔리(Solly)의 편지에는 예수의 이름이 221번이나 언급되고 있지만 나사렛이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상 ‘예수가 활동’ 했다는 지역은 모두 너무 작은 마을들로 다만 그 지역의 촌부들이나 알 수 있는 그 유래가 매우 의심스러운 지명들이다. (반면에 현재 많은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어 그 증거가 분명한 당시의 번성했던 이교도들의 도시는 예수의 여행일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우리를 경각시켜야 할 것은 실질적으로 예수의 일생으로 쓰여진 이야기들의 거의 모두가 예수 보다 훨씬 이전 시대부터 전해오는 신비한 설화속의 주인공들의 생애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처녀 탄생이라는 기적적인 탄생 이야기나, 어린 시절에 보여준 비범함이나, 기적을 행한다거나 혹은 병을 고치는 일 등등, 그 모든 표징들은 예수라는 성인이 갈릴리 지역을 거닐기 수세기 이전에 이미 다른 신들로부터 기인한 것들이다. 예수가 말한 것들로 되어있는 말씀들이나 지혜문들 또한 유대 경전이나, 신 풀라톤 학파의 철학, 혹은 스토아 학파나 견유학파들의 주석서들에서 따온 평상적인 것들이다. (옮겨온 글을 보완)
출처 : 창조적인 삶. 번영과 즐거운 인생. | 요세푸스의 예수기록은 사실인가?-비교정밀분석! - Daum 카페
나사렛 -- 신학이 날조해 낸 마을
나사렛이란 마을은 구약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또한 갈릴리 지역(대 런던 지역도의 크기) 구석 구석에서 전쟁을 치른 요세프스 (로마에 항복하여 로마 귀족이 된 그는 원래 유태 장군이었다)도 그의 저서 유대 고대사에서 이 지역의 열 대여섯개의 다른 도시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만 나사렛에 대하여는 함구무언이다.
여호수아 19장 10절이하 16절 까지에는 스블론(Zebulon)지파 사람들이 이 지방에 정착하는 과정이 기술되어있다. 이 기록에는 12개의 읍촌(邑村)들과 6개의 마을 이름들이 나오지만 나사렛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탈무드에는 갈릴리 지방의 63개 촌읍(村邑)들의 이름이 나오지만 나사렛이란 이름은 없다. 혹은 그 어느 랍비들의 문헌에도 나사렛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바울 조차도 나사렛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랍비 솔리(Solly)의 편지에는 예수의 이름이 221번이나 언급되고 있지만 나사렛이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상 ‘예수가 활동’ 했다는 지역은 모두 너무 작은 마을들로 다만 그 지역의 촌부들이나 알 수 있는 그 유래가 매우 의심스러운 지명들이다. (반면에 현재 많은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어 그 증거가 분명한 당시의 번성했던 이교도들의 도시는 예수의 여행일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우리를 경각시켜야 할 것은 실질적으로 예수의 일생으로 쓰여진 이야기들의 거의 모두가 예수 보다 훨씬 이전 시대부터 전해오는 신비한 설화속의 주인공들의 생애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처녀 탄생이라는 기적적인 탄생 이야기나, 어린 시절에 보여준 비범함이나, 기적을 행한다거나 혹은 병을 고치는 일 등등, 그 모든 표징들은 예수라는 성인이 갈릴리 지역을 거닐기 수세기 이전에 이미 다른 신들로부터 기인한 것들이다. 예수가 말한 것들로 되어있는 말씀들이나 지혜문들 또한 유대 경전이나, 신 풀라톤 학파의 철학, 혹은 스토아 학파나 견유학파들의 주석서들에서 따온 평상적인 것들이다. (옮겨온 글을 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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