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요승 라스푸틴과 구한말 무당 진령군 그리고 2022년 대한민국에 다시 나타난 샤머니즘
제정 러시아 말기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에는 무능한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신경질적이고 편협한 알렉산드라 황후, 혈우병에 시달린 병약한 황태자 알렉세이 그리고 요승 라스푸틴이 있었다. 그리고 구한말 대한제국 이 씨 왕조에는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 병약한 순종 그리고 무당 진령군이 있었다. 요승, 무당, 황후의 총애, 막후 실력자, 비선 실세, 핵심 관계자, 국정 농단, 그 외 추잡한 행실들. 구한말 그리고 2016년에 이어 2022년인 지금, 목하 대한민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여러 사건들이, 또다시 시공을 초월하여 어찌 이렇게 앞의 두 사건과 절묘하게 닮았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계모와 단둘이 살던 가난한 처녀가 왕비로 간택된다. 구한말 1866년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의 이야기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조실부모한 까닭에 외척 발호의 병폐는 만들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그녀를 왕비로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명성황후가 요직에 앉혀 놓은 민씨 일족들에 의해 정권은 곧 부패해졌고 그 결과 국민의 불만은 높아져 갔던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미신에 관심이 많았던 명성황후는 첫째 왕자가 항문이 막힌 항문폐쇄증을 가진 기형아로 태어나 5일 만에 죽자 후사를 위해 무당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그 후 세자로 책봉된 외아들 순종이 성불구자에 자폐증이라는 불행이 겹치자 금강산 1만 2천 봉과 팔도의 명산마다 쌀 1 섬과 비단 1 필 그리고 돈 천냥을 바치며 치성을 드리니 국고는 1년 만에 고갈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유인이란 무당은 점 한 번 봐주는데 비단 백 필과 만 냥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맹인 무당은 정이품 대우를 받으며 세자 전담 무당으로 고용돼 처첩들을 거느리며 살았다고 하니 그 어처구니없는 실상이 미루어 짐작된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풍수사상에도 광적으로 집착하여 1866년부터 28년 동안 친정아버지 민치록의 무덤을 무려 네 번이나 이장했다고 전해진다. 황후는 국가와 국민보다 오로지 자기 소생으로 왕위를 이으려는 생각에만 몰두해 있었다고 보인다. 민치록의 묘는 2003년 또다시 후손들에 의해 원래의 자리로 이장되니 오천육장(五遷六葬: 묘를 다섯 번 옮겨 여섯 번 장례를 치름)이라는 조선 풍수사에 길이 남을 진기록을 세운 인물이 된다.
이에 나라 꼴은 차츰 엉망진창이 되어갔고 결국 고종 19년(1882)에는 국고가 모두 탕진되었다. 대궐을 지키는 구식 군인들의 급료를 13개월씩이나 밀리게 되었고 그나마 다급히 지급한 쌀에는 모래와 겨가 섞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급료로 지급한 쌀의 양도 절반이나 떼먹고 지급하자 구식 군대에 의해 군란이 발생하니 이것이 임오군란이다. 임오군란은 위정척사파와 명성황후에게 밀려난 대원군 세력이 폭동을 일으킨 구식 군인의 세력을 업고 쿠데타를 감행한 사건이었다. 분노한 군인들이 명성황후를 죽이려 경복궁으로 들이닥치자 황후는 상궁으로 위장해 시위 무관 홍계훈 등에 업혀 탈출했다. 그리고 장호원 충주 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도망가서 불안과 초조 속에서 지내게 된다.
이때 장호원에 숨어있던 명성황후가 날마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며 지낼 뿐 아니라 고독에 몸서리친다는 것을 알아챈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나중에 진령군이 된 박창렬이라는 미색과 신통력을 겸비한 무당이었다. 진령군은 원래 한양 천민 출신으로 충주에 사는 농부 김 씨에게 시집을 갔으나 일찍 과부가 되자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당이 되어 점을 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무당의 외모는 피부색이 희고 덕이 있어 보이는 인상에 성격이 원만하고 부드러워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이 무당이 은신해 있는 명성황후를 찾아가 마마라고 부르니 황후는 기겁했다. 놀란 황후가 어찌 내가 마마인 것을 아느냐 묻자 무당은 자기는 ‘관운장의 신령을 받아 천 리를 내다보고 백 년을 넘겨보는 영감을 가졌다’고 답하면서 자신의 꿈에 신령님이 나타나 중전이 장호원에 있다고 알려 주어 찾아왔다며 황후의 환심을 사게 된다. 그리고 예언하기를, 팔월 보름께 황후를 모시러 사자가 올 것이고 환궁할 것이라 하였다. 실력인지 우연인지 몰라도 정말로 그 무당의 말이 맞는 일이 발생한다. 그 당시 권력을 장악했던 흥선 대원군이 위안스카이의 모략으로 청국에 납치되어 베이징으로 끌려가자 무당의 예언대로 명성황후는 50여 일만에 화려하게 한양으로 환궁하게 된 것이다.
황후는 죽음의 공포와 절망 그리고 고독 속에서 자신이 힘들게 지낼 때 점을 쳐 주었던 무당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가까이 불러들여 동소문 성곽 안쪽,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북쪽에 큰 당집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진짜 영험한 무당’이라는 뜻의 진령군(眞靈君)이라는 호칭까지 내려주었다. 군봉은 정 2품의 벼슬에 해당하는 것으로 특별한 공로가 있는 신하나 왕의 장인에게만 내리는 호칭이며 이는 7종 천민인 무당이 봉군을 받은 조선 역사상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이제부터 바야흐로 진령군의 무당 정치가 시작되었다. 진령군은 명성황후의 수호신임을 자처하고 무려 12년 동안 세도정치의 중심인물로 거침없이 국정을 전횡하고 농단하였다. 왕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령군을 궁궐로 불러들였고, 무당 진령군은 아무 때나 궁궐을 출입하여 고종과 황후를 만났다. 왕과 왕비는 수시로 진령군의 북묘를 찾아와 점과 굿판을 벌였다. 구한말 지식인 황현에 의하면 황후는 무당 진령군을 언니라 부르며 모든 문제에 대해 무당에게 조언과 자문을 받아 결정하는 등 진령군의 말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고종과 명성황후는 정치적 악수를 계속 두게 됐다. 국가 최고 지도자 부부가 무속과 주술에 빠져 있으니 나라가 파탄이 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다.
무식하고 간사한 사이비 무당이 명성황후를 손아귀에 넣고 득세하는 조정은 기강이 문란해지고 나라는 혼란해졌다. 이제 무당의 권력에 그 누구도 대적할 자가 없었다. 권력 그 자체였던 명성황후에게 접근하려면 문고리 실세와 다름없는 진령군을 통해야만 했기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거나 승진하려면 진령군의 당집을 찾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진령군의 말 한마디면 수많은 사람이 벼슬을 얻어 벼락 출세를 하거나 하루아침에 파직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진령군이 거처하는 북묘 앞에는 벼슬을 구하는 자들이 보낸 뇌물로 가득 찬 수레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고위 관리들은 진령군과 남매를 맺거나 심지어 수양아들이 되기도 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이유인이 ‘진령군을 수양어머니로 삼고 북묘에서 기거를 함께 했으므로 추한 소문이 돌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유인이라는 자는 경상도 김해 사람으로 원래 시정의 무뢰배였으나 가짜 귀신 놀음으로 진령군을 속여 환심을 얻은 뒤 진령군과 어머니와 아들로 의를 맺고 양주 목사, 병조참판, 한성부 판윤을 거쳐 법무대신까지 승승장구했다. 세간에는 ‘어젯밤에 진령군이 창덕궁에서 한 말이 다음 날 아침에 어명이 되었다’는 말이 나돌았다. 이러다 보니 조정에도 ‘진령군파’가 생겨 국정을 농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당시 조선이 동서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내외적으로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 있는 어려운 정치 상황에서 이런 가당치 않은 인물들이 일개 사이비 무당의 힘을 빌어 요직에 발탁되고 중차대한 국정을 이끌어갔으니 조선이 망국이 되어가는 것은 사필귀정이었다.
그러나 하늘을 찌르던 진령군의 위세도 결국 종지부를 찍는 날이 왔다.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으로 진령군과 그 추종세력들은 모조리 구속된다. 진령군은 갑오개혁 정부 최고기관인 군국기무처에 의해 거열형을 선고받고 수많은 재산을 모두 몰수당하게 되며 북 묘인 관우 사당에서도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삼청골 오막살이에서 근근이 살게 된다. 그러다가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무참히 시해되자 그 충격인지 얼마 후 죽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써 12년 동안 명성황후의 수호신으로 자처하며 전횡을 일삼던 사이비 무당 진령군의 권세도 끝이 났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조정에서 '진령군파'가 실질적으로 축출된 건 13년이나 지난 1907년 이후의 일이니 진령군의 국정농단의 폐해가 얼마나 심했던 것인지 알 수 있겠다. 이렇게 한 번 잘못된 역사를 되돌려 정상으로 회복시키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많은 시간이 낭비되는지 우리는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진령군의 이야기는 무당의 혹세무민에 홀린 명성황후가 나라를 거덜 낸 치욕스럽고 뼈아픈 역사다. 따라서 국정을 책임지는 자나 국민은 깊이 경계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사건임이 명백하다.
신영복 선생이 말하길, 역사란 과거의 일을 현대에 빗대어 맞추어 보고 재해석해서 미래에 대한 안내길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E.H.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 양자를 더 깊이 이해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명성황후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한 무당 진령군의 국정 농단의 역사는 140년 전 구한말 나라가 망해가던 시절의 너무나 황당하고 수치스러운 야만의 역사다. 그런데 그와 유사한 일이 불과 몇 년 전 2016년에도 있었고 현재 2022년에도 그 기미가 보이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어서 무당 진령군의 국정농단의 역사가 그저 과거의 이야기 같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요즘 정국이다.
2016년,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결코 21세기 첨단 과학 문명의 시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른바 샤머니즘, 야만의 ‘무당 통치’의 산물이다. 즉 반문명적인 ‘무속 무당 통치’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헌정을 유린한 사건이다. 누군가 최첨단 IT와 AI인공지능의 시대에 ‘야만의 갈라파고스가 돼 버린 한국’이라고 갈파했듯이 우리의 비루하고 적나라한 민낯을 그대로 온세계에 드러내는 일대 사건이다.
고위 공직자들이 앞을 다투어 권세의 끄나풀을 잡고자 머리를 조아렸고, 언론은 받아쓰기에 여념이 없었고 대그룹 재벌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가져다 바쳤고 뜯겼다. 대학 부정입학이 이뤄졌고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 북핵 문제, 세월호, 위안부 협상, 사드 배치 등 국민의 생명과 국가 안보 등과 직접 관련된 중차대한 현안들이 어떻게 농락되었는지 우리는 눈으로 확인하고 놀랬고 비분강개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이라는 헌법기관이 사이비 무당에 의해 완전히 무력화되었고 대통령이 무당의 주술과 무속에 의지하고 국정을 운영해 왔다는 이 해괴망측한 사건이 문명화된 21세기 한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 온 국민은 망연자실해하며 분노했다.
2022년 현재, 이와 유사한 징후를 보이는 사건들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어느 누군가는 대충 덮고 가자고 말한다. 진위를 파악하고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연 발생하는 혼란이 크게 우려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혼란은 문제를 해결 과정에서 언제나 생겨나는 피할 수 없는 필연이다. 혼란스럽고 복잡하니까 그냥 덮고 쉽게 가자고 하면 다시 제2, 제3의 무당에 의한 정치가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일시적인 사회 혼란이 두려워 피 흘려 지켜낸 소중한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거나 불의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위장한 민주주의의 적들이 가장 바라고 기뻐할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대한 그들의 가장 무서운 복수가 될 것이다. 2022년 지금, 문명은 야만의 종식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기억하자. ( 황규호 : 캐나다 한인 문인협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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