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의 뿌리가 된 미국 선교사가 첫 발을 디딘곳은 조선의 서북지역이다.
이곳 서북지역은 홍경래의 난으로 인재들의 등용은 막히고 청일, 러일전쟁등 두차례의 전쟁으로 극도로 피폐해 있었으며 조선은 이지역 백성들을 지켜주지도 보호해주지도 못하는 조정이였다. 이곳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예배당에 성조기를 걸고 총칼을 피하게 하고 밥을주고 약을주며 온몸으로 이지역 백성들을 받아드렸다.
평양의 부흥운동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으로 모여들었고 이지역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러지기도 하였다.
그렇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서북지역이 1945년 일제가 패망함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북한에 들어선 소련군과 사회주의자들은 일제때 공산주의를 적대시하며 친일을 하고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던 개신교 신자들을 반 민족 세력으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결국 이 지역 대부분의 개신교 인들은 월남을 선택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크고 미국 장로회와 직 간접으로 연결 되어있고 엘리트층이 많았던 서북 출신 개신교인들은 남한에 기독교의 반공국가를 세우려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큰 환영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일제가 남기고간 일본의 종교재산을 전부 서북 출신 개신교에게 몰아주었다.
이렇게 탄생한 서북출신 개신교 인들은 남한에 쉽게 정착할수 있었고 출세까지 할수 있었다.
특히 서북출신 개신교 청년들의 생계를 손에 쥔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이용해 남한내 좌파 즉 그들이 말하는 빨갱이 숙청에 동원하였다.
제주에서 발생한 4.3 항쟁에는 군경과 함께 토벌대로 참여하였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출신 군인들과 주축이 되어 지휘관으로 전쟁에 참여 하기도 하였고 5 .16 쿠테타 이후에는 군사정권의 핵심 맴버가 되었고 일부는 목사로 전향하였다. 한국의 근대사, 한국 개신교와 이들 서북 청년회가 어떻게 연결 되어 있는지 간략하게 옮겨온 글로 알아 보겠습니다.
1. 광복절을 맞이해서 광화문에서 방역 테러를 시도한 일부 보수 개신교회와 그 구성원들을 보면서 오늘은 대한민국 대형교회의 근간을 이룬 개신교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보고자 한다.
해당 교회를 다니는 분들에게는 불편 한 내용이 될 수 있고 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나는 한국의 개신교 혹은 대형교회를 다니는 신도들을 비하하거나 비판하려는 의도가 없다. 단지 대한민국 정치가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보수 혹은 극우의 정치적 스탠스가 나오게 된 배경을 알면 이번 광화문에 나온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이다.
2. 지금 우리를 지긋지긋하게 하는 미래통합당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정당이 아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 후 7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의 주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키워드로는 친일, 반공, 독재, 재벌, 그리고 보수 개신교가 있다. 이승만의 친일파와의 결탁은 미래통합당 역사의 시작이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다.
3. 반공주의와 보수개신교가 결합해서 정권을 비호하는 시스템이 형성된 것은 해방 후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파가 살아남기 위해 반탁-반공 운동을 시작했는데 여기에 서북에서 내려온 개신교인 청년들이 대거 합류했기 때문이다. 왜 서북 지역에 유독 개신교인들이 많았고 그들이 반공주의자가 되었는지의 과정도 대단히 흥미롭지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길어 생략한다.
이들이 남한으로 내려와서 서북청년단의 주축이 되었는데 한국 개신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 중심에 대한민국 개신교의 큰 교세를 가지고 있는 대한예수교 장로회이자 한기총의 중심인 영락교회가 있었고, 그 외에 여러 대형교회들도 서북 출신 청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명박의 인맥 배출을 했던 곳으로 유명한 소망교회도 서북 출신 곽선희 목사가 세웠다. 이명박 인사 기준인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을 의미한다.
4. 서북청년단은 대한민국에 실존했던 정치깡패들이자 백색테러를 무수하게 자행했던 극우단체인데 폭행, 강도, 강간, 살인, 고문은 물론이고 제주 4.3 사건 당시에는 영아 살인까지 하면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의 끝판을 보여준 단체이다.
오죽했으면 해방 직후 3년간 임시로 조선을 통치하던 미 군정청에서는 “마치 나치와 KKK를 합친 것 같다.” 는 평가를 내릴 정도였다.
더구나 그들은 민간 조직이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사법권이나 수사권을 부여받은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군경을 쫓아다니면서 빨갱이 소탕을 한다는 명목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를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일까?
월남한 친일부역자와 친일 기독교인이 주축이된 서북 청년단은 이승만과 미 군정의 힘을 업고 각 지방마다 파견되어 공산세력 척결이란 명분으로 이승만과 미 군정에 반대하는 세력 색출에 동원되었다. 허나 보수나 지원없이 파견된 서북청년단은 현지조달을 위해 태극기나 이승만의 사진을 강매하는등 갈취와 약탈은 물론 강간과 폭행 고문 심지어 살인까지 자행해 국민들로 부터 원성이 높았다.
5. 서북청년단의 그런 과격한 활동의 배후에는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그들의 활동을 용인하고 지원해 준 것이 가장 컸다. 마치 마오쩌뚱이 홍위병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들을 숙청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활동이 얼마나 극성스러웠는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더 이상 숙청할 좌파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자 그들은 민간인을 공산당으로 몰아 학살했다.
두 번째로는 미 군정의 암묵적 동의와 지원도 빼 놓을 수 없다. 이 모든 일은 미국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꼬인 것뿐만 아니라 많은 무고한 피해자가 나온 것에는 미국 탓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서북에서 내려온 청년들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개신교단의 주류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서북청년회 활동을 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개신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6. 이는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권과 결탁해서 독재자를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군사정권이 붕괴된 후 보수정당의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보수개신교가 중심이 된 대형 집회가 열리고 여기에 성조기가 등장하는 유래가 되었다. 그들이 괜히 성조기를 흔드는 것이 아니다. 모두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북청년단은 너무 잔혹하고 과도하게 치외법권적인 활동을 했기 때문에 정권을 확실하게 잡은 이승만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1949년 10월 단체 등록을 취소시켜가면서 그들의 활동을 강제 종료시킨다.
이 때문에 이승만 정권과 서북출신의 개신교단은 사이가 소원해 진다. 대신 서북 출신의 개신교인들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 본격적인 유착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 그리고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미화 되었지만 사실은 일개 정치 깡패에 불과한) 시라소니 이성순이 모두 서북청년단 출신이다. 이성순은 동대문파 이정재에게 린치를 당한 후 깡패에서 은퇴하고 영락교회 집사로 변신한다.
7. 한국전쟁은 패망한 일본이 경제적으로 부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지만 서북에서 내려온 개신교인들에게도 대단한 기회가 되었다.
한국전쟁 직후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구호물자와 선교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를 주축으로 한 서북출신 개신교인들이 뛰어난 영어실력과 미국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이를 독점했고 새로운, 신흥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과는 더욱 소원해졌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했던 적이 있어 신사참배를 인정하는 한경직 목사와는 달리 이를 적극 반대했던 한상동 목사가 주축이 되어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는데 이를 고신파라고 한다.
고신대가 바로 이 교단에서 설립한 학교이다. 이승만은 당시 신흥세력으로 부상하던 서북 출신 개신교단을 고신파를 이용해서 견제하려고 했다가 실패했다.
8. 한국전쟁 직후 한경직과 서북 출신 개신교인들은 월드비전과 홀트 아동복지회 등을 통해 전쟁고아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취지와는 달리 일종의 정치적 목적의 사업으로 발전 하였는데 특히 미국과의 혈맹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하면서 반공, 반소를 위한 정책을 펼쳐 나가는 선전활동의 근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미국과 단단한 관계를 형성하고 한국 내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기반을 확고하게 쌓을 수 있었다.
홀트 아동복지회는 독실한 크리스찬인 미국인 홀트가 한국의 전쟁고아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반공 반소의 이념적 용도로 사용되었고 우리에게는 ‘고아 수출국’이라는 부끄러운 천륜적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이 고아 수출은 1980년대까지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9. 4.19 혁명에 의해 이승만은 쫓겨나고 5.16 쿠데타에 의해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그리고 당시 전후 선교 사업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던 서북 출신 개신교인들은 박정희 쿠데타와 그 정권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그들 구성원들이 5.16 쿠데타 당시 군 장성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1947년 조선경비대(국군)와 조선 경비 사관학교(육사)에는 서북 출신 청년들이 대거 입교했다. 47년 입교한 육사 5기생은 서북 출신이 무려 2/3나 되었고, 48년 입교한 8기에도 많았다. 그리고 이들 5기와 8기 출신의 장성들이 바로 1961년 박정희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10. 또한 미군정 시절 추진했던 국립대학설립 안에 당시 많은 교수, 학생들이 반대운동을 벌이자 서북청년단에서는 그 핵심을 좌파(공산주의)라 단정 짓고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6,000여명의 회원을 경성대학(현 서울대학)을 비롯한 각 학교에 편입학 시켰다. 이른바 대학 내 프락치의 시조가 된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정권의 브레인으로 성장했다.
11. 박정희는 서북청년단 출신의 개신교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자신의 쿠데타에 직접 참여 한 부하 장성들이 이곳 출신이기도 하지만 부당한 방법으로 확보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이 미국에 적극적으로 홍보해 주었기 때문이다.
1948년 10월 일어난 여순 반란사건 으로 이승만 정부는 대대적인 숙군을 시행중에 조선남로당 연락책을 맡아 활약하다 검거되어 무기징역을 언도 받아으나 감형으로 풀려난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민간사절단이라는 특사로 김활란 등 개신교계 인사들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여 쿠데타 당위성을 설명했으며 이후 반공연맹 임원 등을 맡아 예배와 각종 집회를 통해 군사정권을 옹호하였다.
한경직은 당시 전쟁고아들로 구성된 어린이 합창단의 미국 순회공연을 기획했고, 자신과 친분이 있던 미국 내 인사들을 통해 박정희 지지를 호소했다. 당시 어린이 합창단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덕분에 박정희는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미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박정희와 육영수가 어린이 합창단에 대한 지원을 적극적으로 했던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12. 또한 미군정 시절과 한국전쟁을 거쳐 미국 내 인사들과 친했던 서북 출신 개신교인들의 승공 담론은 박정희 정권 이후 모든 보수 정권의 중요한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차이점에 대해 자유와 인권에 대한 차이점을 두기보다 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경제적 토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승공이론이었다.
이 논리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체제임에도 자유와 인권을 무시하고 경제성장이 가장 중요하고 그를 위해서 독재를 해도 된다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는 보수 개신교회를 중심으로 목사들이 아직까지 즐겨하는 설교에 해당되고 현재 보수정치, 보수언론 등이 즐겨 사용하는 레토릭이다.
문재인 빨갱이를 외치는 목사들이나 그 설교에 ‘아멘’을 외치는 신도들이 모두 이 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1960년대의 만들어진 승공담론임에도 말이다.
13. 현재 대한민국의 주류 개신교 교단의 대형교회들은 일제강점기에서의 해방과 한국전쟁을 통해 이런 성장의 배경이 있고 그 교회들을 성장시켜온 교단의 목사들은 모두 보수 혹은 극우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 신학은 모르겠고 정치적으로 그렇다. 【‘한국전쟁과 기독교’라는 윤정란이 지은 책에 자세하게 이런 내용들이 실려 있다】
오늘날 대형교회의 상당수가 서북 개신교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의 성장과 영향력 확대는 한국 사회를 더 오른쪽으로 이동시켰다.
한때는 서울 4대문안 교회들은 서북청년 출신 목사들이 다 찾이 했고 이후 TK출신목사들이 서울의 큰교회들을 이어 받았다. 이와같이 한국의 주류세력은 표면적으로 TK(대구경북)이지만 WN(서북출신)은 이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채 드러나지 않게 한국사회의 주류로서 자리 잡고 있다.
기득권 세력들과. 조중동 언론은 ‘힘의 공백’을 스스로가 나서서 채우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이들 세력에는 이전에 민주화 전력이 있던 <서경석, 김진홍, 인명진> 등까지 전향시켜 현실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게하여 뉴라이트를 결성하게 한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할 세력은 친미반공으로 무장한 기독교 세력뿐이라는 것이 이들의 일관된 주요 논리이다.
○한경직(영락교회), ○하용조(온누리교회), ○김삼환(명성교회), ○곽선희(소망교회),
○김진홍(두레교회, 뉴 라이트 공동대표), ○인명진(갈릴리교회,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김홍도(금란교회), ○전광훈(사랑제일교회) 등이 모두 이러한 보수 혹은 극우적 정치 스탠스를 가진 목사들이다. 모두 유명세가 있는 사람들이다. 모든 일에는 이렇듯 인과관계라는 것이 있다.
14. 왜 미래통합당 소속 정치인들은 지금도 일본을 두둔하고 (혹은 일본과의 화해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보수 개신교단에서는 문재인 정부를 비토하고 급기야 전광훈은 코로나19 감염의 위험에도 광화문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는지? 거기에 따르는 교인들은 왜 그러는 것인지? 를 생각해보면 이런 배경이 있는 것이다.
광화문 극우 집회를 주도한 이들이나 참여한 이들 대부분이 노령 층인데 이들은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청춘과 중장년 시대를 보낸 산업화 세대라는 것도 상기와 같은 인과관계를 통해 그들의 참여 이유도 짐작이 가능하다.
15. 1989년 6월 한 신문기자는 당시에 흥미로운 유행어를 소개했다.
“비행기를 타려면 TK North-West United Airline 타라”
이 말이 나온 배경은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대구경북(TK) 출신들이고 여기에 국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로그룹 상당수가 서북 출신들 (국회의장, 국무총리, 대통령비서실장) 이라는 것을 빗댄 것이다. North-West는 서북청년단을 말한다. 또한 이들이 2020년 현재 반정부 극우 시위를 주도하는 세력이기도 하다.
16. 대한민국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이기 때문에 정치 목사나 그 선동에 심취해서 따르는 교인들을 강제할 수는 없다. 다만 법을 어겨가면서 그들의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서는 절대 안 된다.
※ 정치적 이념으로 혹시나 기분 나쁜 사람 있더라도 정치적 이념을 떠나 Fact에 근거한 것이므로 한번쯤 되새겨 봐야 할 내용이라 생각되어 전해 드립니다.
'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개독교라 하는가 (0) | 2021.01.22 |
---|---|
성령의 열매인가? 육의 열매인가? (0) | 2021.01.07 |
미트라 신화 (0) | 2020.12.25 |
예수는 실존 인물일까? (0) | 2020.12.24 |
아이들 20년간 성폭행한 목사 (0) | 2020.12.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