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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펠라기우스 사상(주의)과 아우구스티누스와의 논쟁

by 까마귀마을 2026. 5. 19.

 

펠라기우스는(360?~420?)는 브리튼 즉 오늘날의 영국 또는 웨일스 지역 태생으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에 활동한 기독교 사상가이다. 그는 주교나 사제와 같은 성직 서품을 받지는 않았으나, 폭넓은 성경 지식과 논리적 글쓰기 능력을 갖춘 인물로 401~409년에는 로마에서 수도 생활을 했던 인기 있는 설교자였다. 그는 엄격한 금욕과 높은 도덕적 기준을 실천한 수도자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삶의 태도는 로마 사회에서 상당한 존경과 영향력을 얻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그는 신학을 추상적 사변으로 전개하기 보다, 실제 그리스도인의 삶과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해하였다. 펠라기우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로마 제국 말기로 제국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의 삶이 복음의 윤리적 요구와 괴리되어 있다는 비판이 널리 제기되던 시기였다. 그는 이러한 도덕적 해이에 깊은 문제의식을 느꼈으며,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과 책임을 지닌 존재라는 확신 아래 인간의 책임성과 도덕적 실천 가능성을 강하게 강조하는 신학적 입장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특히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자유의지론은 인간이 타고난 이성과 의지로 스스로 선을 행하고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사상이다.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이단으로 단죄 되었으나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사상은 새로운 신학적 사상이 아니고 당시 수사들의 지배적인 견해였다. 이 논쟁에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것은 펠라기우스가 아니라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였다.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몇번의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펠라기우스를 강력히 반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 날수 없었다. 비록 이단으로 정죄되어 파문 되었지만 펠라기우스 사상은 후대에 인간의 잠재력과 도덕적 책임을 높게 평가하는 인본주의적 토대가 되었다.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핵심 사상
1) 원죄 부인 : 아담의 죄는 개인의 잘못일 뿐 후대 인류의 자유의지나 본성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보았지만 그 죄가 인간 역사에 부정적인 도덕적 모범을 남겼다는 점은 인정하였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아니라, 잘못된 선택의 반복을 통해 점차 죄에 익숙해지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죄는 생물학적·형이상학적으로 전가 되는 상태라기 보다,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로 형성되는 도덕적 습관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펠라기우스에게 인간의 도덕적 실패는 불가피한 운명이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할 선택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토대를 기반으로  인간의 회개와 도덕적 갱신 가능성을 강하게 강조할 수 있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과 악을 스스로 선택할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죄를 짓지 않을 자유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 의해 더욱 급진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카엘레스티우스(Caelestius)는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어떠한 부정적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원죄 개념 자체를 사실상 부정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교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펠라기우스 개인의 보다 제한적인 입장까지도 펠라기우스주의라는 이름 아래 포괄적으로 비판 받는 계기가 되었다. 
2) 아담과 인류의 죽음 : 아담의 죽음은 죄의 대가가 아닌 창조부터 정해진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았으며 아담은 타락하기전 이미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로 지어졌으며 인간도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자연적으로 죽는다는 주장이다.
​3) 유아 세례 부인 : 성경은 유아세레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없다. 원죄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유아세례는 무용하다.
4) 인간의 자유 의지 : 펠라기우스 신학의 핵심에는 인간 자유의지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명을 부여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그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이미 주어졌음을 전제한다고 이해하였다. 만일 인간이 본질적으로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존재라면, 하나님의 명령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 펠라기우스에게 자유의지는 신적 명령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필수 조건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적인 도덕적 책임을 지는 존재로 이해된다.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은 단순한 형식적 자유가 아니라, 실제로 선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실질적 능력을 포함한다. 따라서 도덕적 실패는 인간 존재의 불가피한 한계라기 보다,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로 간주된다. 펠라기우스는 이러한 자유의지 개념을 통해 회개와 도덕적 갱신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인간은 과거의 죄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현재의 선택을 통해 삶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할 수 있는 존재이며, 이 점에서 그의 신학은 강한 윤리적 호소력과 실천 지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5) 은총론 :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와 율법, 죄 사함, 그리고 인간의 도덕적 삶을 돕는 일정한 내적 도움으로서의 은총을 분명히 인정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은총 자체의 존재를 부인하는 체계라기 보다는, 은총과 인간 의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 인가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은총을 구원의 절대적이며 선행적인 조건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창조 시 부여 받은 자유의지와 도덕적 능력을 통해 먼저 선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은총은 이러한 인간의 도덕적 노력과 순종을 돕고 완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이해하였다. 이로써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 자유의지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행위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6) 구원관 :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온전한 자유의지를 지니며, 자신의 노력과 도덕적 선택으로 율법을 지키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은혜는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 아니고 다만 인간이 선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을 돕고  격려하는 외적인 조력자로서의 역할만 한다고 보았다.
​7) 율법관 :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을 명하시는 분이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의지로 죄 없이 완전하게 살 수 있다.
8) 최후의 심판 : 자유의지를 가지고 창조된 인간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해방되며, 최후의 심판관은 인간 각 행위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공의로운 분이라 보았으며 스스로의 의지로 거룩한 삶을 살았는지가 심판의 유일한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구원은 오직 인간 자신에게 달려있고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때 다시 개입 한다고 주장했다.

펠라기우스 이단 정죄
380년경, 펠라기우스는 법을 공부하기 위해 고향 영국을 떠나 로마로 갔으며, 거기서 일부 로마 기독교인들의 비도덕적이고 방탕한 생활에 경악하고 곧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로마에서 회심한 펠라기우스는 진정한 기독교적 삶을 일상 속에서 구현할 것을 호소하며 엄격한 도덕 개혁운동을 전개하여 로마 기독교인들의 방종에 저항하였다. 특히 그를 분노하게 한 것은 육체적 약함을 핑계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변명하는 방만한 태도였다. 펠라기우스는 이러한 태도에 반대하며 인간은 원하기만 하면 선을 완전하게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고, 육체의 약함은 단지 핑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의 본성의 힘을 높이 평가하는 수도자 전통 속에 있었던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교적 관습들을 제거하고 로마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405년 경부터 바울 서간에 대한 강해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강해와 설교에 탁월한 재능으로 단숨에 로마 공동체에서 유명세를 탔고, 390~399년 사이에 만나게 된 켈레스티우스를 회심시키기도 하였다. 그의 지지자들 중에는 귀족 출신이나 젊고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다. 405년부터는 그는 바울 주석을 저술하여 아담의 죄, 세례, 자유의지, 은혜 이해에 관한 본인의 견해를 피력했다.
409년에 펠라기우스는 로마를 떠났다. 그는 북아프리카로 갔는데, 이는 아프리카가 로마보다는 자유로운 지적 토론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북아프리카에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나려 하였지만, 당시 도나투스주의와 논쟁을 하고 있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후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갔고 그즈음에 히에로니무스와 갈등을 빚었다. 히에로니무스는 오리게네스의 신앙을 박멸하는데 열중했었는데 그가 보기에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새로운 오리게네스주의였던 것이다.
410년, 서고트족의 알라릭이 로마에 입성하고 로마를 약탈하였다. 시민들은 로마에서 아프리카로 피난을 가기 시작했는데, 펠라기우스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피난 가면서 히포를 지나갔다. 그곳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아쉽게도 그때 그는 카르타고에서 열린 15차 회의에 참석하여 히포에 없었다. 결국 둘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411년, 로마 제국에서 유명한 귀족 아니치(Anicii) 가문의 딸인 데메트리아스(Demetrias)가 상류층의 삶을 버리고 수녀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회심에 그녀의 부모님은 당시 저명한 신학자들에게 영적인 권고를 부탁하였고, 이에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펠라기우스가 편지를 써보냈다. 이들의 편지는 은총론에 관한 격렬한 논쟁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414년 펠라기우스는 히에로니무스의 비판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 본성의 관하여(Liber de natura)를 저술하였다. 펠라기우스의 제자들이 이 책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보내자 펠라기우스를 대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변했다. 그 이전에는 펠라기우스에게 존경을 표하고 문학적 자질과 우수성에 찬사도 보냈던 그지만, 이제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펠라기우스는 당장 교회에서 축출시켜야 될 이단이 되었다. 그는 펠라기우스에 반박하는 본성과 은혜에 관하여(De natura et gratia)를 415년에 저술하였다.
결국 415년 7월, 요하네스 주교에 의해 회의가 열렸고, 교황 인노첸시오 1세에게 이 문제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펠라기우스는 14명의 주교들에게 심리를 받았지만 자신의 정당함에 대해 설득하였다. 그러나 416년의 주교회의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는 이단이다 라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고, 펠라기우스는 정죄되었다.
418년,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칙령을 내려 펠라기우스를 로마에서 추방하였다. 같은 해에 열린 카르타고 주교회의(카르타고 공의회)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향해 대대적으로 정죄하였고, 교황 조시모는 회람서신을 통해 펠라기우스를 파문한다. 이후 펠라기우스는 팔레스타인에서마저 추방 당한다.
이후의 펠라기우스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저술들도 현재는 많이 남아있지 않고, 있더라도 원 저자가 정말 그 인지 의심스러운 저작들도 있어 그의 사상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와의 논쟁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학적으로 완전히 반대의 입장에 서있던 사람들이었다. 인간의 능력과 자유를 강조하며 원죄를 부인했던 펠라기우스와 하느님의 절대 주권과 은총 그리고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든 부딪힐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못마땅해 했는데 특히 고백록의 당신이 명하시는 것을 주소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명하소서.(고백록,10.40)라는 구절을 인간을 무기력한 존재로 만든다고 굉장히 싫어하였다. 당연히 둘의 견해는 은총론뿐만 아니라 구원론, 세례에 대한 관점, 자유의지론, 원죄론, 칭의론에 대해서도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전체적으로 이 둘의 주장은 교회사 2천년 동안 반복해서 논란이 되어 왔다.
펠라기우스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완전한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에 자신의 죄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자유로우며 이해할 수 없는 약함에 의해 손상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느님이 인간의 결정에 직접 간섭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성을 손상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이다. 하느님은 자신이 직접 인간을 지었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이 가능한지 잘 알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이 명령한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있고, 또 지켜야 했다. 하느님이 인간이 못 지킬 명령 따위 내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약해서 계명을 못 지켰다느니 하는 소리는 전부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적인 숙명론은 거부하면서 인간은 제한된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지만 이 자유는 죄로 얼룩져 계속 죄를 짓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포로 된 자유의지였으며, 오직 은혜만이 이 경향에서 해방시켜주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자유의지와 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그는 천칭의 비유를 들었다. 천칭에 아무 것도 올려놓지 않으면 천칭은 균형을 가진다. 그러나 한쪽 접시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으면 천칭은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 상태가 인간의 자유의지가 처한 상태이며, 따라서 인간은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악한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고, 타락한 인간은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완전한 인간 본성을 강력히 피력했던 펠라기우스에게 있어, 죄란 하느님을 거슬러서 고의적으로 저지르는 행위였다. 인류는 죄 없이 태어났고 본성상 죄된 성향이란 찾을 수 없다. 인간의 능력은 전혀 훼손되거나 손상되거나 하지 않으며, 인간은 언제든지 하느님의 계명을 수행할 수 있다. 육체의 약함은 변명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교회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도 이렇게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만 가능했다. 이러한 그의 낙관적인 인간관은 아우구스티누스식 원죄론을 철저하게 부정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담 안에서의 죄인을 얘기할 때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는 아담 당사자에서 끝나며 후의 인류에게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다.
젊은 시절 흑역사를 많이 보낸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 지성을 역설하였다. 또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된 성향을 갖고 태어나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백록이나 다른 반反펠라기우스 책에서 갓 태어난 아기도 죄를 갖고 태어남을 증명하고자 했다. 태어나자마자 우는 것을 그는 강력한 증거로 제시하였다. 따라서 죄를 씻겨주는 세례를 유아도 받는 것은 필수였다. 죄는 유전되는 것이며 죄의 세력은 인간을 포로로 잡고 있어 인간은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 오직 은혜만이 인간을 죄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사로, 교회를 병원, 인간을 치료가 필요한 환자로 자주 묘사한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때 그는 가라지의 비유를 들어 성도나 성직자 역시 죄인이며 교회란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닌 죄인과 의인의 혼합된 공동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은혜를 2가지 면에서 이해했다.
첫째 자연적인 인간 능력 : 인간의 능력은 하느님이 활용하라고 주신 것이기에 절대로 타락하거나 무능해지거나 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성과 의지 능력을 활용해 얼마든지 무죄 상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펠라기우스가 이해한 은혜였다.
두번째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깨우침 : 십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도덕적인 의무를 알려주며 인간은 이러한 모범을 통해 죄를 피할 수 있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굳이 하느님의 도움이 없어도 선한 행동을 충분히 해낼 수 있었고 이 선한 행위를 통해 구원을 성취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은혜란 죄에 의해 무력해진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상태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인간을 죄에서 꺼내주시고 치유해주시고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본성상 죄인인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베푸시는 관대한 호의가 필요한데, 이 호의가 바로 하느님의 은혜인 것이다. 은혜를 내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파악한 그에게 있어 은혜란, 인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변화시키고 실제적이고 구원하는 힘을 지닌 하느님의 임재였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저 가르침을 알려주기만 하는 것이 펠라기우스식 은혜 이해였다면 가르침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 가르침에 제대로 접근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것까지 도와주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식 은혜의 이해였다.
펠라기우스에게 있어 칭의(하느님이 인간을 의롭다 칭함)의 근거는 인간의 공적이었다. 얼마나 자유의지를 잘 활용하여 하느님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느냐에 따라 심판이 결정된다. 인간에게 부과된 도덕적 책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경우,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때문에 의인이라 칭함을 받으려면 도덕적 완전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칭의의 근거는 인간의 공적이 아니었다. 그의 죄에 대한 이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인간이 절대로 죄인이 상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고 구원을 받으려면 공로로는 얻지 못하는 하느님의 값없는 선물인 하느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었다. 마태 복음서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일꾼 비유가 그 근거다. 펠라기우스는 하느님의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 정확하게 보상하신다고 주장한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이 한 약속에 근거하여 보상하신다고 반박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믿음으로 이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하더라고 칭의를 받을 수 없다고 보았다.
 
펠라기우스(Pelagius)와 그와 연관된 사상 흐름인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는 기독교 교회사에서 가장 지속적이고도 복합적인 신학 논쟁을 야기한 주제 중 하나이다. 이 논쟁은 오늘 까지도 단순히 한 사상가의 정통성 여부를 넘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한 절대 자유의 의지로 결과 된 선과 악,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인 선별적 은총이 구원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 인가라는 근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자료를 수집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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