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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반민특위의 실패에서 12.3 내란 청산의 길 찾는다

by 까마귀마을 2025. 11. 29.

                                                특별재판부 만들고도 친일 청산 실패한 뼈아픈 기억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지난 25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반민특위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반민특위와 12.3 내란’ 국민토론회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는 반민특위 위원 및 조사관의 후손, 그리고 ‘국회프락치사건’의 피해자 유족들도 많이 오셨는데요. 그 자리에서 기조연설을 했습니다.

이승만이 반민특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국회의원을 불법적으로 체포하여, 끝내 반민특위를 좌절시켰던 과거를 돌아 볼 때, 현재 진행 중인 12.3 내란의 사법적 처리를 위해 내란특별재판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취지였어요. 그 내용을 정리해서 소개하려 합니다.

 

이승만 반대 속 친일 청산 기치 높이 들고 출범한 반민특위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면서, 그동안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력하면서 동족을 괴롭힌 친일파에 대한 청산이 요구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지요. 그러나 미군정청은 오히려 일제의 지배 하에서 많은 경험과 기회를 누렸던 한국인들을 계속 활용하는 현상유지정책으로 일관하여 친일파 청산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동안 미루어졌던 친일파 청산 작업이 시작되었어요. 제헌헌법 101조에서 ‘국회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친일파를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8월 5일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지요.

위원회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다음 날, 「반민족행위처벌법」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이 법안은 9월 7일 제59차 본회의에서 재적 140명 중 가 103, 부 6으로 통과되었어요. 국회의원 10명으로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며, 대법원에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고 국회에서 선출한 특별검찰부를 특별재판부에 병치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정 초기부터 국회와 대립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법이 3권분립의 원칙에 어긋나고, 법관의 자격은 법률로 정한다는 헌법에 위배 된다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하려 했어요. 그러나 거부권을 행사해도 압도적으로 통과된 이 법이 국회에서 다시 가결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결국 입장을 번복하고 반민법을 공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회는 반민특위를 ‘독립운동의 경력이 있거나 절개를 견수하고 성의 있는 자, 애국의 성심이 있고 학식과 덕망이 있는 자’를 자격 조건으로 하여, 각 도 출신 국회의원 중에서 위원을 선임하고 위원장으로 경북 고령 출신의 김상덕 의원을 선출했어요. 또한 반민족 행위자 가운데 경찰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산하에 별도로 특별경찰대를 만들었습니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왼쪽) 특위 위원 일동 기념사진              

 

국회 프락치 사건이 아닌 국회의원 프락치 조작사건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5일 중앙청 205호실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지요. 특히 1월 26일에는 독립운동가 고문으로 악명 높던 친일 경찰 노덕술을 체포했습니다. 이승만은 노덕술이 해방 후 미군정 경찰에 투신, 치안 확보에 공이 있다며 석방을 요구했지만, 반민특위는 이를 거부했어요.

그러자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헌법 위반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후 정부는 반민특위 활동에 대통령이 직접 관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이 개정안은 2월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되고 말았지요. 그러자 특위 위원들의 친일경력을 찾아내 공격을 하거나 심지어 살해하려는 음모가 진행되었습니다.

이승만은 4월 15일 반민특위는 조사활동에만 전념하고 ‘특경대’를 해산하라고 요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유독 반민특위가 감리교 총감리사를 지낸 양주삼 목사를 체포하여 “국제문제”를 일으켰다고 공격했습니다. 이는 반민특위의 해체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지요. 친일 경찰과 교회는 협소한 지지기반을 가진 이승만의 양대 축이었습니다.

그리고 5월부터 '국회 프락치 사건'을 조작하여 김약수 부의장을 비롯, 반민특위에 적극적이었던 13명의 소장파 의원들을 불법적으로 체포, 고문, 기소했습니다. 남로당의 프락치로 국회에 침투하여 첩보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지요. 이것은 대통령이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헌법으로 보장된 국회의원의 권리를 무시하고 저지른 친위 쿠데타적인 성격이었습니다.

사법부는 검거된 의원들이 살인적인 고문을 받았으며,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배척하였어요. 그리고 핵심 증인을 재판 도중에 사형시켜 버렸음에도, 일관되게 피고인들의 변론을 무시하였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이 사건이 이승만 정권이 조작한 공안 사건이었으며, 체포된 의원들이 억울한 누명을 쓴 것으로 결정을 내렸어요.

 

이승만의 반민특위 습격 지시, 그리고 김구 암살

1949년 6월 2일 친일 세력들의 사주를 받은 관제 시위 군중들이 국회 앞에서 반민특위 요원을 비방하고 체포된 반민족 행위자들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다가, 다음날에는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려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특경대는 이들의 주동자가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를 연행하였어요.

그러자 서울 시내 각 경찰서의 사찰 경찰 150여 명은 특경대 해산을 요구하며 집단 사표를 제출함으로써 반민특위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6월 6일 새벽 무장한 경찰들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하여 특위 요원들을 강제연행했어요. 사건 직후 이승만은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은 자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국회는 찬성 89, 반대 59로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어요. 하지만 결국 반민특위가 구속한 경찰들을, 경찰에 연행된 특경대원들과 교환 석방하는 선에서 정부와 타협했습니다. 이 와중에 1949년 6월 26일 김구 암살사건이 일어났지요. 친일파 청산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김구 암살이 준 충격은 컸고, 이로써 친일파 청산의 동력은 급속도로 상실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국회의원들이 원래 1950년 6월 20일까지 규정되었던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시키는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어요. 이 개정안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7월 6일 국회를 통과했는데, 공소시효를 2달도 안 남겨놓은 개정안의 통과는 사실상 반민특위 활동의 종료를 의미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김상덕 위원장 이하 반민특위의 모든 위원들은 개정안 통과 다음날 일괄 사퇴했지요. 그리고 이승만 정부에서 법무장관을 맡았다가,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로 들어온 이인 의원이 반민특위의 새로운 위원장이 되어, 특별한 활동 없이 잔무만 처리하는 수준에서 반민특위의 모든 활동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대체로 반민특위 활동 초기에 재판을 받은 사람들은 일정한 처벌을 받았지요. 그러나 반민특위 활동이 위축된 이후에 재판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무죄를 선고 받거나 공소기각 되었습니다. 징역형을 받았던 소수의 사람들도, 1951년 2월 14일 반민법 자체가 소멸되는 과정에서 모두 풀려났고 말았어요.

 

반민특위 내부의 문제점도 반성해야

반민특위 자체에도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반민특위 구성원 가운데 일부는 친일파 처리의 주체가 되기에 문제가 있었어요. 실제로 그들 중 일부는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조사위원으로서 친일파 체포에 주력하기보다는, 특정인의 체포를 반대하거나 체포된 친일파의 석방을 위해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반민특위에서 체포 대상자로 결정된 친일파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어 피신시키는 경우도 있었어요. 또한 반민특위 조사위원 가운데 자신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친일파를 관대하게 봐 주거나 석방시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친일파의 조사 서류를 빼돌려 허위 서류를 작성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어요.

또한 반민특위와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 세 기관은 상호 협의 없이 체포되거나 기소된 친일파를 보석시키거나 석방한 것에 대해 서로 비방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친일파 청산 주체의 권위와 도덕성을 훼손시켜 정부와 친일파 세력의 공격을 자초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승만 정권 차원의 방해공작이 결정적 좌절 이유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12.3 내란 특별재판부 원형은 반민특위 특별재판부

현재 ‘12.3 비상계엄’의 주요 종사자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데요. 행정권의 책임자인 대통령이 군대와 경찰을 통해 국회를 봉쇄하고 의원들을 체포하려 했던 내란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그 원형이 된 사건이 바로 ‘국회의원 프락치 사건’이었지요. 만약에 내란이 성공했다면 국회의원들은 그때처럼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사법처리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내란 재판의 방식과 속도는 국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요. 사법의 정치화를 시도했던 조희대 대법원장이 이끄는 사법부가 과연 내란 주요종사자들에 대해 엄정한 판결을 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특별재판부의 설치를 강력히 요구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특별재판부의 원형을 반민특위에서 찾을 수 있고 그 정당성과 합헌성 역시 반민특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지요.

반민특위에 설치된 특별재판부의 부장은 김병로 대법원장이 맡았습니다. 부장 재판관이 3명, 재판관 12명으로 구성되었는데요. 재판의 진행을 법관들이 전적으로 주도하지 못하도록 국회의원과 일반사회 인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도 반민법 2차 개정과 공소시효 단축 등의 이유로 사실상 활동을 종료했어요.​

 

그 후 특별재판부 업무를 인계받은 대법원은 1950년 5월까지 재판을 계속하였지만, 1951년 2월 14일 반민족행위 재판기관 임시조직법도 폐지되고 남은 사건은 공소취소되면서 반민법에 의한 판결은 모두 효력상실 되었습니다. 이로서 친일청산의 과제는 미완으로 남게 되었고 ‘역사의 빚’으로 넘겨지고 말았지요.

 

조희대 사법부에 내란 재판 맡길 수 없다는 반민특위의 교훈

이같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이번 12.3 내란에 대한 재판을 전담할 특별재판부의 설치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내란 특검의 시한을 연장하고 인력을 보강해야 합니다. 특히 ‘법기술자’만이 아니라, 반민특위처럼 ‘법철학’을 갖춘 국회의원과 일반 사회인사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내부에 친윤 검찰에 의한 방해공작은 없는지 감시가 필요해요.

당시에도 친일파들이 동원한 군중들에 의한 반민특위 공격이 심했다는 것을 통해, 오늘날 극우 세력들의 난동을 헌법과 법률에 따라 엄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아울러 법원에서조차 소란을 부리며 방해하는 변호사들을 제압할 수 있도록 더욱 단호한 의지를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다시 반민특위의 실패가 반복돼서는 안되니까요.

 

출처 : 반민특위의 실패에서 12.3 내란 청산의 길 찾는다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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