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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한국 교회의 훼절과 부일 행각

by 까마귀마을 2025. 7. 4.

한국 교회의 훼절과 부일 행각

 

1. 신사참배 결의와 일제화 교회

신사참배에 대하여 한국 교회들은 일치된 행동을 보이지 못하였다. 반대론이 있었는가하면 일본의 주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교회들도 있었다.

 

1) 각 교단들의 신사참배 참여

각기 시기의 차이는 있었지만 천주교, 감리교,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 교파들이 줄줄이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에 응했다. 1936년 감리교회에서는 양주삼 총리사가 총독부 초청좌담회에 참여 후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민의례라는 일본의 설명을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감리교 교회들이 신사참배들을 하고 감리교 계통의 학교들이 해방될 될 때까지 그대로 존속할 수 있었으며 교회의 수난도 가벼웠다. 감리교의 제3차 연회(1938.10. 5-13)가 모였을 때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참석하여 축사까지 할 정도였고, 총리사 양주삼 박사는 내선일체를 강조하기까지 하였다.

 

2) 장로교의 신사참배 결의

장로교의 경우는 그 양상이 달랐다. 1931년 9월, 경남 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신사참배 강요가 계속되자 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 실행 위원회를 1936년 초에 소집하고 미션 학교의 폐쇄를 원칙으로 정하며, 그해 1O월의 실행 위원회에서는 1938년까지 평양 내외의 학교 폐쇄를 단행하였고, 본국의 승인도 얻었다. 이런 장로교회가 신사참배 강요의 고통을 겪다가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강압에 의하여 불법적으로 참배 결의를 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1938년 전국적으로 노회가 모이기 시작하자 일본은 조직적으로 파괴 공작을 하기 시작하고, 반대자들에 대한 검속이 일어났다. 이런 험악한 가운데 1938 9월 9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제27회 총회가 회집 되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 97명이 193명의 총대들 사이에 끼어 앉아 회의를 감시하는 가운데 다음날, 오전 1O시 일제의 각본대로 박응률 목사가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이니 국민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 참배 결의와 성명서 발표 제안을 하였다. 이에 회장 홍택기 목사는 가(可)만 묻고 부를 묻지 않은 채 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방 위량 선교사와 한부신 선교사가 결의의 불법을 외치자 일본 경찰들은 폭력으로 밖으로 끌어냈다. 총회 폐회 후 부회장 김길창 목사가 각 노회장들을 인솔하고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하였다. 한국 교회의 신앙적 지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3) 변질 신학교 설립

(1) 조선 신학교 설립

1938년 9월 조선 예수교 장로회 체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선교회에서는 평양신학교 제2학기 개강을 무기연기 하였다. 제3학년 1학기 수강자들에게 대하여는 통신으로 수업하여 1939년 3월 28일부로 졸업증서를 우편으로 보내었다. 이것이 선교사들의 마지막 신학교육이었다. 이 때의 졸업생은 52명이었다. 이렇게 선교사 운영의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았을 때 서울에서 새로운 신학교 설립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1939년 9월 신의주에서 모였던 제28회 총회에서 조선신학원 설립 경영을 인준하였으며, 194O년 4월 19일 서울 인사동 승동교회 하층에서 개강을 보았다. 이 신학교의 설립 목적은 본 신학원은 복음적 신앙에 기초하여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충량유위의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한다 이었다. 역대 교장과 교수, 강사 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학원장 :김대현〔金大鉉), 윤인구(尹仁駒), 김재준〔金在俊), 송창식〔宋昌植), 함태영〔咸台永), 김정준〔金正俊)교수, 강사 : 윤인구, 김재준, 궁내창〔宮內彰),이정로,전필순, 현제명, 김창제, 갈홍기, 송본탁〈松本卓), 전성천, 유호준, 花村芳夫, 村岸淸彦, 박태준, 한경직, 정대위, 권태희, 공덕귀, 최윤관 (1945년까지).

이 신학원은 1943년 2월에 감리교 신학교와 합동 수업을 실시하였으나 5월에 분리하여 덕수교회에서 수업하게 되었고, 김재준 목사가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군정청에 학교인가를 제출하여 인가를 받고 김 재준 목사가 신학교장으로 정식 취임하였다.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 신학의 본산지인 오늘의 한신대학인 것이다.

(2) 평신〔平神)의 변신 복교(變身復校)

1939년 3월 평양에서 신학 교육부가 모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신학교는 총회에서 직영한다. 기본금 5O만원을 모금하고 신학교 인계 청원을 선교부에 발송한다.  이 청원에 대하여 선교사 연합 공의회에서는 수락할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동년 9월 총회에서는 평양신학교 복교를 결의한 뒤 1940년 4월 11일에 개교하였다. 그 진영은 다음과 같았다.

이사 : 이사장-김석창〔金錫昌), 실행이사-김석창. 이문주, 이인식, 이 승길, 이영희, 김선환, 고한규, 김관식. 교장 : 채필근. 교수, 강사 : 고려위, 田中理夫, 이승길, 齊藤佐, 山本新, 김관식. 이렇게 되어 장로교회의 신학교가 서울과 평양에 따로 따로 서서 일본의 어용 기독교 일군들을 양성하였다.

(3) 만주 신학교 설립

1941년 만주에 있는 교회들이 총회를 결성하여 신학원을 설립하였는데 교장에 정상인, 교수에 박윤선, 박형룡, 菊地一郞 이었으며, 강사에는 김선두, 안광국, 와다나베, 이성주, 김세진, 제창봉 이었다. 졸업생들을 보면 3회에 걸쳐 이웅화, 김치묵, 황금천, 이성찬, 장동훈, 오병수, 최의종, 남영환, 전영흥, 장찬준, 백리언 이었다.

 

4)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

일제는 기독교 계통의 기관들을 해산하고 일본 체제에 알맞게 변형시켜 나갔다. 선교사들은 아무리 총회의 결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신사참배를 할 수가 없어 한국 교회에서 제명하고 개인 자격으로 전도하였다. 선교부 경영의 미션 스쿨은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한국인이나 일본 재단에 이양하기 시작하였고. 1939년에 그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연희 전문학교의 경영은 194l년까지 원한경 박사의 고집으로 유지되었으나 총독부 손에 넘어갔고, 이화 여자 전문학교는 1940년 1O월에 경성 여자 전문 학교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자 1940년 1O월 서울 주재 미국 공사 마쉬(Marsh)는 선교사의 완전 철수를 명령하였고 이에 대부분이 철수하였다. 마지막으로 철수한 것은 원한경 박사인데, 1942년6월에 부산을 떠났다.

194l년 l2월 18일,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미국과 영국에 도전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 박해는 더욱 심하여졌다. 미국식 교파 이름은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일본식의 교단(敎團)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하였으며, 여러 교파들을 합동하여 일본기독교조선 교단을 만들었다. 침례교, 성결교 등이 재림 사상 문제로 1943년 해체되었고, 지도자들은 시골에 은거하거나 만주 등지로 망명하였으며, 감옥에서 수난을 겪고 있었다.

조선 교회의 일본화를 꾀하기 위하여 일본은 1942년 3월 革新敎團을 조직하고 헌법을 제정하며 전필순 목사를 의장으로 뽑았다 .성경에서 출애급기, 다니엘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구약성경을 없애고, 요한 계시록과 찬송가를 개편케 하였다. 이 부분을 떼어내든지 먹으로 칠하여 보지 못하게 하였으며. 후에 와서는 구약을 전부 없애고 신약성경도 4복음서 외에는 모두 없애 버렸다, 그러다가 1945년 7윌 19일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교파들도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으로 통합하여 일본 기독교화 시켜버렸다.

 

2. 교회의 부일(付日)행각

일본의 앞잡이 교역자들은 일본의 정책에 협력하여 하나님을 배신하며 조국을 배신하고 동역자를 배신하고 신사참배에 동조하였고 황국신민이 된 것을 감사하였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예수 이름으로 세례 받은 것을 깨끗이 씻고 천조대신 아들이 되기 위하여 한강에서, 부산의 송도 앞 바다에서 일본의 귀신대장 '미소기바라이'(淸淨)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944년 9월 경성 상동교회에 황도 문화관을 설치하여 갈홍기 목사를 관장으로 임명하고 류형기 목사 등은 교역자들에게 친일 교육사상을 교육시킨 후 이들을 한강에 끌고 가 '미소기바라'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머리에 일장기를 두르고 남산 조선신궁까지 구보시켜 신사참배를 하게 하였다. 해주 장로교 김응규 목사는 천황사진에게 배례하기를 건의하여 배례를 할 정도였고. 해주 강태동감리교회 관리자 박봉근은 신자 20여 명과 함께 아예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폐쇄해 버렸다. 경남 조평리 성결교회 신도들도 교회 사상이 일본 정신과 상용될 수 없다고 하여 해산하였다. 교인들은 가정에 '가미나다'라는 신사를 설치하고 거기에 '천조대신 지궁'이라는 팻말을 붙이도록 강요하였다. 전북 금산의 이칠봉은 기독교의 신사참배 거부에 불만을 품고 탈교하였고, 전남 보성에서는 기독교 교리가 국체에 반하는 것이라 하여 교인들이 탈교하고 예배당을 대일본 정신도장으로 개칭하고 그 안에 가미다나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정든 교회와 고향을 떠나 멀리 이역의 땅 만주로 이사한 은기호 집사를 한국인 목사가 일본 경찰을 앞세워서 고발하여 옥고를 치르며 탄식하게 하였다.

조선종교 전시보국회는  감리교의 갈홍기, 이동욱, 구세군의 황종률, 장로교 신삼일웅, 채필근, 천주교 김광한, 일본의 강본등이 가담되어 조직되었다. 유형기, 정춘수, 정인과, 갈홍기 등은 시국대응 전선사상보국연맹'과 '황도문화관'등의 단체에 적극 앞장섰다. 구자옥은 황도학회에 가입하여 일본을 찬양하였고 윤치호,구자옥, 정인과, 정춘수, 양주삼, 신흥우 등은 임전대책 협의회와 임전보국단에 가입하였다. 김활란은 조선언론 보국회에 가입하여 일본의 하수인 노릇을 하였다.

정인과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은 국민으로서 하지 못할 자국에 반기를 든 것"이라고 하여 일본을 '자국'이라고 하였다. 교회 안에는 '가미다나'가 설치되었고, 예배를 드리기 전 여기에 절을 먼저하고 천황을 향해 머리 숙여 동방요배를 한 다음 예배를 드렸으며 목사들 복장은 일본식 군복이었다. 장로교 총회 교육부 사무실에는 일본의 국조신인 아마데라스 오오카미의 사진을 걸었다.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이 신도의 창조설화와 위배된다고 하여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를 고백하지 못하게 하여 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또한 찬송가 260장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1939년 성결교회 이명직 목사는 기독교가 서양종교가 아니라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지지하면서 일본은 로서아보다 기독교 를 보호한다고 일본을 찬양하였다.

1941년 활천 9월호에 그는 “우리는 황국의 신민이다.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세계 어느 곳으로 가든지 일등국민의 대우를 받 는 것이다. 만세일계 천황봉대에 천황의 적자이다... 이것은 실제로 영광이다”고 하였다.

1940년 5월 31일 성결교 산하 성서학원이 경성신학교로 승격되어 11월 5일 오후 2시 개교식 때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제송, 만세삼창 등을 하여 조선총독부에서는 성결교총회에는 굳이 신사참배를 결의해 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

1938년 9월 9일 제27회 장로교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총회 기간 중 평양 기독교 친목회 회원 심익현 목사는 총회 회원 전원에게 신사참배 즉시 실행하기를 특청하여 12시에 부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로 전국 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해서 평양 서기산 신사에 도착, 신사참배하였다.

1938년 12월 12일 홍택기, 김길창, 양주삼, 김종우, 이명직 목사 등은 전국 기독교를 대표해서 일본의 이세신궁 가시하라신 궁등에 참배를 하였다. 이때 홍병선 목사는 “황국신민으로서 신사참배는 당연하다”고 하였다.

1939년 10월 8일, 경성 성서학원 강당에서 일제의 앞잡이 조직인 국민정신총동원 성결교회 연맹 결성식이 관계 당국자들의 축사와 함께 있었다.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규약선언, 묵도(황군장병과 동양평화 위해) 일제 내빈축사 일황을 위한 축포가 있었다. 규약에는 내선일체 거국일치 국민정신 동원이란 취지를 달성하고 전도보국을 실천하기 위해 각 지방에도 연맹을 조직하였고 이사장에는 이명직 목사였다.

1941년부터 활천의 매호마다 성결교회 신도(神道) 실천보고가 실렸고 십일조헌금을 명하여 총독부에 바쳤다. 설교시간인데도 12시가 되면 전체가 일어나 일본국가를 위해 일분간 묵도를 하였다. 이명직 목사는 황실은 신성불가침이요 절대요 통치자이므로 공경해야 한다. 신자는 제도에 순응해야 한다고 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2월 12일 이명직 목사는 경성 성결교회 신도에게 전시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수요일 정기 연합기도회를 시달하면서 “일본 필승의 기도”를 시달하였다.

1936년 6월 29일 총독부에서는 양주삼 목사에게 “감리교가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양주삼 통리는 “국 민의 의무일진데 누구나 참배할 것이니 구태어 결의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1937년 전영도 목사가 “중일전쟁은 성전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미국의 주지사, 시장, 상·하의원들에게 4,800여 통을 송달 하였다.

1941년 8월 20일 조선 임전복구단에 윤치호, 구자옥, 정인과, 채필근, 정춘수, 양주삼 목사와 김활란, 신흥우 등이 앞장 섰으며, 1943년 11월 조선 전시 종교복구회가 조직되어 감리교 갈홍기, 장로교 채필근, 천주교 김한수 등이 앞장섰다. 혁신교단들은 예배시작 전 5분간 천황사진 또는 동방요배, 전몰용사들의 영혼을 위한 묵념, 출정장병의 무운장구 기원, 황국신민의 서사제송을 한 후 예배를 드렸다. 1943년부터는 밤 예배는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

1942년 5월 8일 육밀 제1147호 “조선에 징병제 시행 준비의 건”이 발표되었다. 이 발표를 했을 때 친일파들은 일제히 환영을 하고 나섰다. 윤치호,최린,박춘금,백락준,배상명,현제명 등은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던 것이다. 일반인들만 환영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까지 환영을 하여 세인을 탄식케 하였다.

1942년 5월 11일 저녁, 기독교 대표들은 “징병제 시행감사 전 경성 신도대회”를 열었다. 국민의례를 마치고 화곡춘수 감독의 개 회사에 뒤이어 전필순 목사로부터 징병제 시행에 대한 감사와 아울러 이날 밤 장내의 감격이 동포에 전하여 지기를 기도한 후... 총독과 일본 수상 이하 관계 당국에 감사문을 타전할 것을 결의하였다.

1942년 10월 서문밖교회에서 모인 조선예수교장로회 31회 총회에서 교회 종 헌납이 1,540개였다. 다른 교단 것까지 합해서 2,500여 개를 헌납하여 교회는 군수물자 지원부대가 되었다. 감리교는 교회를 매각하여 군납헌금도 하였다.

1942년 7월 1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본군 환자용 자동차 2대를 헌납하였다. 그리고 조선 장로호라는 해군 비행기와 육군 비행기를 미군과 싸워 이겨달라고 헌납하였으며 그들은 1942년 11월 17일 용산역 연병장 헌납식에서 기독교 예배가 아니라 일본의 신도의식으로 거행하였다.

1944년 2월 2일 기독교신보 사설에서 “미·영을 토벌하기 위하여 하루라도 빨리 일선에 비행기를 보내자”라고 외쳤다.

1942년 12월 김활란은 신시대에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라는 글을 썼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반도여성은 웃음으로 내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 라고 하면서 전시 동원에 적극 협력 하라고 외쳤다.

1941년 12월 모윤숙은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직후 조선임전 보국단이라는 친일 어용단체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우리들 여 성의 머리 속에 대화혼이 없고 보면 이 위대한 승리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 이라고 권장하였다. 김동환, 노천명, 김동인, 주요한, 김상용, 서정주, 장덕조, 김소운 등은 일본을 대대적으로 찬양하였다.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미·영타도 좌담회가 박희도 목사의 사회로 15명이 참석하여 7시간 동안 개최되었다.

1939년 박희도는 동양지광을 창간하고 권두언에서 “반도 2천만 동포는 일본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황도를 앙양해야 한다. 또한 폐하의 적자로서 황국 일본의... 현재의 내지인 조선인이라는 호칭이 단순한 지방적 호칭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징병제가 실시되자 동방을 향해 엎드려 경배하며 “감격에 목이 메였다”라고 하였다.

 

채필근은 “국민 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이때 종교인들도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 야말로 도리어 이단이다”라고 단정하였다.

친일파인 그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한 분들에게 “유다 같은 사람이다”라고 매도하였다. 친일파들은 독립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는가. 감히 기독교는 얼굴조차 들 수 없는 형편이었다. (글 : 이기덕 목사)

 

출처 : Ⅱ 교회의 훼절과 부일 행각. : 네이버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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