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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김활란과 낙랑클럽

by 까마귀마을 2024. 4. 8.

최근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의 친일및 과거 행적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22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수원정에 출마한 민주당 김준혁 국회의원 후보자가 초대 이화여대 총장인 김활란에 관해 언급한 것이 논란을 일으켰다.

김 후보는 2022년 8월 '김용민 TV' 에서 "전쟁에 임해서 나라에 보답한다며 종군위안부를 보내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한 사람이 김활란"이라며 "미군정 시기에 이화여대 학생들을 미 장교에게 성상납시키고 그랬다"고 주장한 일이 있다.

이 발언이 이번 선거기간에 불거지자, 이화여대가 즉각 사퇴를 요구하고 국민의힘이 비판을 가했다.김 후보는 처음에는 "앞뒤 다 자르고 성과 관련된 자극적인 부분만 편집해 저와 민주당 전체를 매도하고 있다"며 맞서다가, 결국 민주당의 권고를 받아들여 2일 사과했다.

"과거의 발언이 너무나 경솔했음을 진심으로 반성한다"며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밝혔다.

그럼 민주당 김준혁 국회의원 후보가 지난 22년 8월 김용민 tv에서 언급한 종군 위안부는 무엇이며 성 상납 하였다는 진실이 무엇인지 검색으로 알아 보았습니다.

 

김활란

김활란은 1899년 2월 27일 인천에서 태어났고 아호는 우월(又月)이며, 기해(己亥)년에 태어났다고 하여 어렸을 적 이름은 '김기득(金己得)'이었다. 개신교인으로 신앙이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7세 때 가족 전체가 세례를 받았고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한자식으로 고쳐 '활란'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름이 '김활란'이 되었다.

1918년 3월 이화학당을 졸업했다. 1922년 조선 감리회 감독이었던 웰치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 입학해 철학, 교육학, 웅변학 등을 공부하고 1925년 10월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1930년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31년 10월 '조선의 부흥을 위한 농촌 계몽'이라는 논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1호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전인 1918년 3월 이화학당 졸업 직후부터 이화학당 보통과의 교사로 활동했다. 1919년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던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비밀 결사에 참여했다.

착실한 개신교 신자이지 신앙심이 깊은 그녀는 찬송가 345장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를 3.1 운동 직후 작사하기도 하였다.

1920년 6월 이화 전도대를 결성해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 계몽과 복음 전도 활동을 했다. 1922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기독교청년연합회에 김필례와 함께 조선 여성 대표로 참석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23년 3월 김필례, 유각경 등과 함께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창설했다. 이후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 겸 학감을 맡기도 하였다.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황제가 사망하자 조선총독부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단체로 모여서 망곡(望哭)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이화학당 학감으로 재직 중이던 김활란은 미국인 선교사 출신인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과 부교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화학당의 전체 학생에게 깃광목으로 상복을 입히고 창덕궁 앞에서 망곡을 하게 하였다가 주모자로 잡혀서 종로경찰서의 감옥에 갇혔다.

1927년 1월 전문직 여성들의 친목 모임인 망월 구락부가 직업 부인회로 개편될 때 실행 위원에 선정되었다. 1927년 4월 유영준, 유각경, 최은희, 황신덕, 주세죽등과 함께 근우회 창립 준비 위원을 맡아 근우회 창립 때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 김활란은 계몽 운동과 인권 운동에 힘쓴 동시에 오히려 독립운동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1932년 9월부터 1939년 8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사로서 학감 및 부교장을 지냈으며 이 무렵 농촌 교육을 통한 문맹 퇴치와 계몽 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개신교 단체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193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제7대 교장이 되었고 1942년에 사위 조석봉 등과 함께 동구여학교를 세웠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독립운동가로 대접받고 칭송받는 위인이었다.

 

친일 행적

1936년 이후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변절했는데 "아마기 카츠란"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것은 물론이고 1936년 말부터 갑자기 교육과 여성 계몽 분야에서 친일 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관제 단체에는 거의 다 참석했고 매일신보에 정신대 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글을 수백 편 쓰는가 하면 내선일체 찬양글도 많이 썼다. 1938년의 윤치호 일기를 보면 윤치호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석방을 위해 애쓰는 것에 대해서 김활란이 분노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만 봐도 김활란의 변절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 김활란과 함께 친일반민족행위에 앞장섰던 여성계 지도자들이 박마리아, 모윤숙, 노천명 등이다.

그의 반민족 행위가 본격화된 시기는 1937년 이화여전 부교장일 때부터이다. 참고로 1937년은 일제가 중일전쟁을 야기하고 식민지 조선을 전쟁기지로 만드는 시점이었다.

김활란은 1937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귀족부인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조직한 애국금채회의 발기인이자 간사를 맡았고, 특히 1938년 6월 20일에는 이화여전과 이화보육학교의 400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며 애국자녀단을 조직했다.또한 1941년 12월 1일에는 저명한 부인강사를 각지에 파견하여 전국인식과 징병, 징용제의 취지를 철저히 하는 순회강연을 하였으며 김활란 본인은 충청북도 지역으로 파견을 나가기도 했다. 같은해 12월 27일에는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 부인대회를 결성하고 여성의 무장이란 강연을 하기도 했다.

특히 1942년 2월에는 부민회관에서 열린 영 동양칙략의 아성 싱가폴 공략 대강연회에서 대동아 건설과 우리의 준비라는 연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김활란은  일제 침략을 미화하고 내선일체, 황민화 시책 등을 선전 선동하였으며 징병, 징용, 학도병 동원 등의 참여를 적극 독려하고 나섰다.

매일신보등에 실린 김활란의 글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여심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 : 신세대 1942.12)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의 총후는 우리 부녀가 질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뒷일은 우리가 : 조광 1943.12)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 반도 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롭게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매일신보 1943. 12)
'더욱이 반도에는 광명의 징병제가 실시되는 만큼 그에 따라 반도 부인들의 임무는 중대하다. 훌륭한 군인을 반도에서 많이 진출시키느냐, 못하느냐는 어머니의 손에 달린 것이다. 이러한 중대한 책임자인 어머니가 무식해서는 큰 문제이다. 여기에 우리 학교가 특별 연성소 지도자 양성소로 새출발을 하게 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먼저 국어(일본어)를 가르쳐서 일본 국민으로서의 자랑을 지니게 하고 따라서 내지 (일본인)여성에게서 본받아야 할 훌륭한 부덕을 가르쳐서 황국 여성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자격을 가지게 해야 할 것이다.'(진두에 나설 여전문생의 결의 : 1944.1)

광복 및 이승만 정부에서 활동

8.15 광복 후 1945년 9월 미군정청하의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45년 10월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복구하여 교장을 맡았다. 1945년 12월에는 이승만계 단체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가담하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했으며 한국 YWCA를 다시 재건해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1946년 4월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이화여자전문학교는 전문학교에서 대학 기관으로 승격되면서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는데 한국 최초의 종합대학이기도 했다.

1947년 3월 김구의 한국독립당이 주도하여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세우자 강사를 맡았는데 건국실천원양성소는 우익 진영이 전국 각지의 애국 청년들을 건국 일꾼으로 키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만든 교육 기관이다. 김활란 외에도 이인, 조소앙, 김학규, 지청천, 안재홍, 신익희, 박순천, 이은상, 양주동, 정인보 등등 강사진이 대단히 화려했는데 매 기수마다 1개월 단기 교육 형태로 운영되던 건국실천원양성소는 1949년 김구가 암살되면서 자연스레 문을 닫았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을 위한 홍보 사절로 장면, 조병옥, 김우평, 모윤숙 등과 함께 유엔에 파견되기도 하였으며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출마했으나 한국민주당 김도연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공보처 제3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52년 1월부터 1954년까지 영자 신문 코리아타임즈을 사장을 맡았는데 1953년 말에 경영권을 장기영 조선일보 사장에게 넘기고 1954년 장기영이 한국일보를 창립한 후 사장직도 넘겼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1970년 2월 10일 뇌출혈로 생을 마감했는데 “인간의 생명이란 불멸하여 육체가 없어지더라도 죽은 사람이 아니므로 장례식  대신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해 주는 환송 예배를 해주기 바란다.”는 이원론적이고 영혼 불멸적인 사상이 담긴 유언을 남겼다.그리하여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로 음악회로 치루어졌다.(참조 나무위키)

 

김활란과 낙랑클럽

김활란은 해방 이후 정국에서 모윤숙과 함께 낙랑 클럽이라는 고급 사교단체를 조직하였다. 문제는 이 단체가 주한외교사절, 미국 고위관리, 미군 고위장성 등을 파티에 초대하여 접대하고 정보를 빼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다는 것. 특히 낙랑클럽은 이화여전 등의 명문 여자 대학생 출신으로 이뤄졌다. 낙랑 클럽의 자세한 실체는 90년대 중반 중앙일보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가 비밀해제한 문서에서 발견하여 폭로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낙랑클럽은 서울에 거주하는 여성들에 의해 48년이나 49년께 사회단체로 조직됐다. 이 단체의 목적은 외국귀빈, 한국정부 고위관리 및 미군장성, 주한 외교사절 등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다. 이 단체의 회원은 한국의 모 일류 여대를 졸업한 교육받은 여성들에 주로 국한됐다. 이들은 대개 영어를 할줄 아는 매력적인 여성들로 교양있는 호스티스였다.

해방 후 4년 뒤 발행된 1949년 5월 20일 자 자유신문 2면 중상단에 '윌리엄씨 환영회 금일 인정전에서 거행'이란 기사가 실렸다. 이와 같은 기사에 더해 한국 독립을 도운 외국인들을 위해 낙랑클럽이 20일 저녁 창덕궁 인정전에서 환영회를 연다는 기사였다. 이후 비슷한 내용이 그해 8월 7일자 경향신문 2면에 낙랑여성클럽과 재경 외국부인클럽 주최로 내외빈을 위로하는 행사가 전날 덕수궁 마당에서 열렸다고 전했다.

이런 기사들에 거론된 낙랑클럽과 관련해 2016년에 발간된 최종고 서울대 교수의 이승만과 메논(유엔 한국 임시위원단 인도 대표) 그리고 모윤숙은 낙랑클럽(The Nang Nang club)과 관련해 언제 어떻게 결성되었는지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미 국무성의 조사에 따르면 1948년 혹은 1949년부터 있었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총재는 김활란이고 모윤숙이 회장으로 주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주로 이화여대 출신으로 영어를 잘하는 미모의 여성 150명 정도라고 되어 있다."

낙랑클럽의 회장 모윤숙, 그 역시 위에서 설명한 김활란에 못지 않은 반민족 행위를 자행했던 여성이다. 1910년에 태어나 김활란과 마찬가지로 "이대 나온 여자"이다. 모윤숙의 친일 행각은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입단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문인으로서 친일행각은 "동방의 여인들"이란 시 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당 시는 조선 민족의 딸이기보다는 동방의 딸이 될 것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대동아공영권의 이념을 여성들에게 교화시키기 위한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가난한 이 몸이 무엇을 바치리까. 오로지 끓는 피 한 목음을 축여보태옵니다'(삼천리 1941.1.1)

사실 나는 육군 지원제가 공포될 때보다 이번 해군 특별 지원병이 공포될 때 더 감격이 됐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바다를 무척 좋아하는 데서 나온 감격일 것입니다.(춘추 1943.6월호)

이외에도 모윤숙은 조선 교화단체연합회 등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약하며 일본군의 성전을 위해 조선 학도병 출정을 찬양 고무하는 시를 지었고 '지원병에게', '어린날개' 등이 대표적이며, 이에 더해 '여성도 전사다', '어머니의 힘' '내 어머니 한 말씀에' '오시지 않았는데' '신년송' 등의 반민족적 문화할동을 지속했다.

한편 최종고 서울대 교수의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에는 낙랑클럽(The Nang Nang club)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단체의 회원은 한국의 모 일류 여대를 졸업한 교육받은 여성들에 주로 국한됐다. 이들은 대개 영어를 할 줄 아는 매력적인 여성들로 교양 있는 호스티스였다. --(중략)-- 외국인 접대행위는 몇몇의 경우 외국인의 정부가 되는 일로 발전되기도 했다. 실례로, 낙랑클럽 조직 구성에 참여했던 한 여성은 부산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영관급 장교의 정부 노릇을 했다."

또한 낙랑클럽의 활동은 미국 언론에도 보도됐다.

방첩대 문서에 따르면 1952년 12월 24일 자 미국 데일리 팔로 알토 타임스는 이 클럽 여성들이 '낙랑걸'이나 '마타하리' 등으로 불린다면서 이들을 "자유당의 접대부"로 표현했다.

최종고 교수의 저서나 당시 미국 기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단순 행사진행에 있어서 호스티스 수준을 넘어 사실상 성관계까지 이어졌다란 점에 더 합리적 해석일 것이다.

특히 1995년 중앙일보는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가 비밀해제한 문서 가운데 한국관련 자료를 긴급 입수, 분석한 결과 한국의 여대 출신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미군 고위장성 등을 위한 접대행위를 하였고, 심지어 미군 영관급 장교의 정부노릇하기 한 사실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더해 이임하 성공회대 교수는 2004년 학술지 역사연구 제14호에 게재한 논문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에는 김활란이나 모윤숙에 의해 동원된 젊은 여성들이 파티에서 직접적인 성적 유흥을 제공하지는 않았을지라도...이미 사회는 미군(UN군)과 자주 접촉하는 그녀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고 적고 있다. 위 논문을 보면, 110쪽~117쪽에 김활란이 미군장교 등 고위층을 상대로 위안 명목의 파티대행업에 나섰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임하 교수는 논문에서 파티대행업을 한 여성 지도자는 김활란과 모윤숙이었고, 이들은 각각 전시국민홍보외교동맹(홍보외교동맹)과 낙랑클럽을 조직하고 여학생 등을 동원하여 파티대행업에 나섰는데, 홍보외교동맹의 활동은 사회부장관 허정의 도움으로 불하받은 적산가옥인 필승각(일명 빅토리하우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썼다. 그는 홍보외교동맹의 위문활동은 두가지로 하나는 주로 이화여자대학교 졸업생들과 재학생들로 구성된 위문단을 조직하여 하야리야 부대 등 부산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를 방문하는 일로 김활란이 직접 인솔했고, 다른 하나는 필승각 등에서 파티를 개최하는 일이었다고 기재했다.

​또한 필승각 파티에는 밴 플리트 등 미군(UN군) 고위 장교, 외교관들, 한국에 주재하는 외국의 민간인들이 초대받았고, 한국인으로는 김활란 등 여성인사들과 고위관리, 장성들이 참석했으며 이화여대 졸업생들과 조교들이 동원되어 파티를 준비하고 시중드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썼다.

낙랑 걸들은 두가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밤에는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고 불빛을 받으며 고위관리들을 접대하고 낮에는 한국군을 지원할 물품들을 구하기 위해 미군 막사의 문을 노크한다 낙랑클럽 멤버 김수임의 후배로서 클럽 멤버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전숙희는 수임 언니의 진심을 살려내기 위해 쓴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2002.정우사)에서 낙랑클럽을 아래와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기지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교클럽이다"

즉 낙랑클럽을 방문하는 인사들의 신분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란 사실을 비유한 것으로 실제 책 속에서는 모윤숙과 김수임의 모습을 고급 직업여성으로 그린 점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군 CIC 조사보고서에서 낙랑클럽을 고급 호스티스 단체로 규정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낙랑 클럽을 적극적으로 연구한 조직은 한국의 극우 조직인 뉴라이트 및 보수 언론이었는데, 당연히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의 이승만의 활동과 건국의 과정을 연관시키는 취지였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이승만 기념 사업을 하는 단체들에서 낙랑 클럽을 설명하는 책을 여럿 편찬하기도 했으며, 관련 세미나도 열었다.('이대 나온 여자' 김활란과 '자유당의 접대부..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김활란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인 낙랑클럽
 

낙랑클럽

낙랑 클럽의 자세한 실체는 90년대 중반 중앙일보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가 비밀해제한 문서에서 발견하여 폭로하면서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중앙일보에 실린 기사내용

정부 수립 직후인 48년무렵부터 6.25가 끝나가는 52년까지 한국의 여대(女大)출신 여성들로 조직돼 주한외교사절.미국 고위관리.미군 고위장성 등을 파티에 초대,접대하고 정보를 빼냈던 낙랑(樂浪)클럽의 실체가 처음 문서로 확인 됐다.

中央日報社 현대사연구소 사료발굴팀이 최근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가 비밀해제한 문서 가운데 한국관련 자료를 긴급 입수,분석한결과 개인에 대한 정보수집문서인 「모윤숙(毛允淑)파일」에서 이같은 사실이 확인됐으며 『月刊中央』2월호는 이를 단독보도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낙랑클럽은 48년께 시인이자 정치인이였던 모윤숙의 주도로 결성돼 국내 某여대 출신의 용모단정한 영어가능자 1백50여명을 회원으로 두고 주로 주한외교사절.미국 고위관리.미군고위 장성 등을 위한 접대행위를 했으며,이 과정에서 얻은 정보들을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미국측과의 협상에 이용했다는 것이다.

낙랑클럽에 초대받은 유명인사로는 덜레스 美국무장관,무초 주한美대사 그리고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밴플리트 美8군사령관,콜터장군 등이었다. 中央日報社가 입수한 미군방첩대(CIC)의 한 문서는 낙랑클럽의 실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낙랑클럽은 서울에 거주하는 여성들에 의해 48년이나 49년께 사회단체로 조직됐다.이 단체의 목적은 외국귀빈.한국정부 고위관리및 미군장성.주한외교사절 등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다. 이 단체의 회원은 한국의 某일류 여대를 졸업한 교육받은 여성들에 주로 국한됐다.이들은 대개 영어를 할줄 아는 매력적인 여성들로 교양있는 호스티스였다.

특히 부산피난 시절에는 송도(松島)돌산위에 세워진 시 사이드 맨션등이 파티장으로 이용됐다. 이 클럽을 앞장서 조직하고 이끌고 있는 사람은 YWCA총재이자 저명한 시인이다.그녀는 51년12월 유엔총회 당시 소련외무장관 비신스키를 열렬히 포옹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낙랑클럽 회원들은 기혼.미혼.무직.직업여성등 다양한 인적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초기에는 회원수가 1백50명에 달했다.외국인접대행위는 몇몇의 경우 외국인의 정부가 되는 일로 발전되기도 했다.실례로 낙랑클럽 조직 구성에 참여했던 한 여성은 부산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영관급 장교의 정부노릇을 했다.

이 문서는 또 낙랑클럽의 활동에 대해『부산 피난시절에도 미군들을 상대로 접대행위를 계속했는데 부산주둔 미국의 한 관리는 이 클럽 회원들이 심지어 軍막사에 까지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고 덧붙였다. 문서는 52년12월24일에 발행된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 데일리 팔로 알토 타임스紙의 기사도 인용하고 있다.

이 신문의 에니너 스폴딩기자는 당시 낙랑클럽의 활동무대였던 부산을 직접 방문,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한국에서 가장 전설적인 여성은 한국 여성 2백명을 주한외교관등을 접대하기 위해자유당의 접대부로 조직한 시인이자 정치인 모윤숙 이다.모윤숙 덕분에 이승만대통령은 유엔사령부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사전에 알 수 있다. 부산에 있는 낙랑클럽의 지도부는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을 갖춘중년여성들로 구성돼 있으며 이들은 군장성과 외교관들을 위해 항상 파티계획을 세우고 있다. 어느날 밤 파티에서 한 젊은 참석자가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10년은 더 나이 먹은 여성이 접대하러 나오자 화를 내면서 항의했다.그러자 15분안에 한국정부 고위관리가 젊은 낙랑회원을 대동하고 나타났고 나이먹은 낙랑회원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낙랑회원들은 두가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밤에는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고 불빛을 받으며 고위관리들을 접대하고 낮에는 한국군을 접대하기 위한 물품들을 구하기 위해 미군막사의 문을 노크한다.』 미군방첩대는 그러나 또다른 보고서에서 낙랑클럽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고 여겨지며 간첩혐의로 체포돼 처형당한 한 인물은 낙랑클럽의 적극적인 회원이었다며 용공혐의점을 두고 유엔관리들로부터 경제.정치등의 정보를 입수,한 정부에 전달할 수 있고 공산주의 첩자가 침투했을 가능성등이 있기 때문에 미국의 국익에 위험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방첩대는 결국 수사를 하지 않고 53년11월 사건을 종결하는데 그 이유는 낙랑클럽의 해체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방첩대가 내세운 또다른 이유는 수사가 시작될 경우 이를 불쾌 히 여긴 한국정부가 그동안 낙랑회원들을 통해 수집한 유엔관리들의 사생활 정보를 폭로할 가능성이었다.

방첩대 보고서는 52년12월 낙랑클럽이 해체됐다고 적고 있다.이로써 밀실외교를 담당했던 낙랑클럽은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채 역사속으로 묻혔으나 당시 최고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외국 외교사절.군인접대에 조직적으로 나서야했던 상황은 그늘진 역사의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金祥道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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