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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이야기

한시(漢詩)에 대하여

by 까마귀마을 2023. 6. 7.
한시(漢詩)에 대하여

 한시(漢詩)란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한문(漢文)을 사용하여 중국의 전통적인 시가(詩歌)양식에 따라 지은 문학작품이다.

이것을 자국어문(自國語文)으로 된 시가와 구별하여 부르기도 하며 통속적으로는 중국의 전통적인 詩歌(시가) 문학까지를 포함해서 한시의 영역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한시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이다. 근대 민족주의가 형성되고 종래의 국문(國文)과 한문에 의한 2원적인 어문생활이 국문으로의 단일화 방향으로 진행되어 국문시가 그 주체적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지금까지의 한문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한시(漢詩)의 개념

좁은 의미에서는 한대(漢代)의 시를 이르지만, 넓은 의미로는 중국과 주변의 한자 문화권에서 한자로 쓴 시를 포함한다. 중국 문학사에서 가장 발달했던 당나라 이후의 한시를 근체시(近體詩), 그 이전의 시를 고체시(古體詩)라 한다.

 

 우리나라 한시의 발달

 고대에서 한문학은 삼국의 건국 이전 전래되었으며, 삼국시대에는 한문으로 시문(詩文)과 기사문(記事文) 등을 지었다.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 신라 진덕여왕의 ‘치당태평송’ 등은 중국과의 투쟁과 교류를 계기로 지어진 작품들이다.

고려 초기에는 과거제도가 실시되면서 한시의 창작이 귀족의 일반적 교양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儒學)도 왕조의 중요한 사상적 구실을 하도록 했으며, 한문학의 문체는 고문(古文)이 성행하였다. 후기에는 도학파(道學派)와 사장파(詞章派)가 대립하는 가운데 이인로, 이규보 등과 같은 사대부의 독창적인 문체와 표현을 통해 발전하였다.

*道學派 : 조선 초기와 중기 때에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한학계의 학파. 문학은 우주와 인생의 근원적 이치를 탐구하고, 심성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도가 근본이요 문장은 부수적이라는 도본문말(道本文末)의 명제를 앞세웠던 학파.

*詞章派 : 조선 시대, 문장(文章)과 시부(詩賦)를 중요시하던 한 학파.

조선에서는 유교를 국시로 숭상하였다. 학행일치(學行一致)를 강조하는 유교적인 한문학이 발달하게 되어 순수한 서정적 한문학과 대립하게 되었다. 고려 후기 이후의 도학(道學)과 사장(詞章)의 대립은 선초에도 조광조와 남곤으로 대표되는 논쟁으로 이어져 결국 사장파의 독립을 가져 오게 되었고, 이후 순수 문학의 형태로 성장 발달하였다.

우리나라의 한시학문은 삼국시대 말엽에 발생하여 통일신라시대 때 성행하다가 말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고려 초까지 존재하였던 한국 고유의 정형시가(定型詩歌)로 불리는 신라의 향가(鄕歌)와 시가문학에 대한 구송성(口誦性)의 음악성을 지닌 고려의 가요(歌謠)와 한국 교유의 정형시로 일컫는 조선의 시조(時調)로 거쳐 왔다.

 

이처럼 한시(漢詩)는 다반사(茶飯事)란 말처럼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상과 같이 우리의 희로애락과 함께 했다. 작게는 가정사, 넓게는 세상사의 희로애락을 한시에 담아 다반사처럼 시를 마시며 읊조렸다. 그러던 것이 조선의 몰락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시는 쇠락해졌다. 한때는 구 시대의 유물정도로 취급받으며 현대시의 포스트모더니즘 그늘에 갇혀있는 것이 한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근래 대학의 교수들이나 선곡(仙谷) 전윤상 시인 같이 뜻있는 시인들의 한시 발표로 인하여 고려청자처럼 옛 선비의 울림에 미학으로 다시 피어나고 있다. 한시는 언제나 변함없는 고려청자처럼 난향(蘭香) 그윽한 내음으로 우리 내면의 울림, 유혹의 손짓으로 시나브로 다가온다.

조선중기 최고의 시인으로 알려진 권필(權鷝)이나 송강 정철의 장진주(將進酒)나 고려의 시인 이색(李穡)이나, 허균(許筠), 장약용(丁若鏞) 등이 대표적으로 한시를 사랑했던 점철성금(點鐵成金)의 시인이었다.

 

우리나라  한시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나타낸 시로 후대 문객들로 부터 서정시의 최고로 칭송받은 고려 성종 1478년 때 편찬한 시문선 동문선(東文選)에 실려있는 고려조 문신 정지상(鄭知常)의 送人(송인) "임을 보내며" 을 소개한다.

 

              送人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大洞江水何時盡 (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派 (별루년년첨록파)

 

비 갠 긴 둑에 풀빛 짙어지는데 

남포에서 임을 보내니 슬픈 노래 일렁인다 

대동강 저 물은 언제나 다 마르리오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푸른 물결 보태는 것을. . .

 
 
한시의 종류 및 발달과정

 한시의 종류에는 고체시(古體詩)와 근체시(近體詩)가 있는데 고체시는 당(唐)나라 이전의 한시이다. 형식이 자유롭다. 詩經, 楚辭, 古詩, 樂府(시경, 초사,고시, 악부)등이다. 

근체시는 당(唐)나라 이후의 한시를 말하며 시의 형식이 자유롭지 않다. 五, 七言 絶句詩, 律詩, 排律詩(오, 칠언의 절구시, 율시, 배율시)를 말한다. 이 시체가 완성 된시기는 당대 이지만 중국의 시가가 새로운 형식의 완성을 모색하기 시작한것은 육조말기 4성론이 발흥한 이후의 일이다. 특히 양의 심약이 4성 8병설을 주장함에 따라 이에 시에 있었서 성률을 중히 여기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鍾嶸 등의 반대가 없지 않았으나 何遜·徐陵·謝眺 등은 이미 5言律에 가까운 詩作을 하고 있었으며, 그 영향은 초당의 4걸로 불리는 王勃·楊炯·盧照鄰·駱賓王 등에 이르러 비교적 성취가 되었다. 王世貞은 초당 사걸의 5언을 율시의 始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5언율시는 성숙된 단계에 이르기는 하였으나 일정한 격식은 없었다. 沈佺期·宋之問에 이르러 5언율시의 격식이 확정되어 平仄의 성조와 句數·字數를 확정한 것이다. 7언율시도 이 시기에 생긴 것이지만, 고시에서 5언이 7언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과 같이 근체시에서도 5언이 7언보다 약 반세기 정도 앞선다. 근체시의 체제는 율시와 절구가 있으며, 排律은 율시를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율시(律詩) 

여덟 () 이루어지는 한시(漢詩) 형식을 말하며 한 구가 다섯 자면 오언 율시(五言律詩), 일곱 자면 칠언 율시(七言律詩) 한다.

율시의 명칭은 〈서경〉순전(舜傳)의 '성의영 율화성'(聲依永律和聲)에서 비롯되었는데, 처음에는 구수에 상관없이 운율이 있는 모든 시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3운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에서부터 100운, 150운에 이르는 장률까지도 모두 포함하는 통칭이었다. 당· 송대에 이르러 율시의 범주를 8구의 시에만 한정하기 시작했지만 절구를 율시라 부르기도 했는데, 그 경계를 확연히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원·명대에 이르러서부터이다.

8구로 이루어진 율시는 각 2구씩을 묶어 첫 구를 출구(出句), 둘째 구를 대구(對句)라 한다. 이 2구가 연이 되어 4연을 각각 기연(起聯)·함연·경연(頸聯)·미연(尾聯)이라고 부른다. 

5율의 출현은 6조시대 음갱(陰鏗)·하손(何遜)·유신(庾信)으로부터 비롯되지만 운율로나 내용으로나 율시의 정체가 성립된 것은 초당(初唐)의 심전기(沈佺期)·송지문(宋之問)에 이르러서이며 이때 비로소 7율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5율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률이 복잡하고 시의가 확대된 7율은 이보다 조금 늦은 성당(盛唐)에 이르러서야 확립되었는데 이는 두보에 의해 시체가 완성되고 고도의 예술성을 갖추게 된 뒤부터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2, 4, 6, 8구 끝에 운자를 붙이는 것이 법칙이나, 제 1구 끝에 붙이는 경우도 있다. 또 칠언율시는 1, 2, 4, 6, 8구 끝에 운자를 붙이는 것이 법칙이나, 제 1구 끝에 붙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율시(律詩)는 3구(句)와 4구(句)가 대(對)를 이루거나 5구(句)와 6구(句)가 대(對)를 이룬다.

이곳에서 대구법(對句法)은 한시(漢詩)에 있어서 많이 쓰는데 두 구(句)가 상대(相對)되거나 상응(相應)되는 구(句)로 구성하는 법이다. 공통점은 

① 글자 수 가 같다. 

② 문장성분의 배열이 거의 일치한다. 

③ 문장의 해석 순서가 거의 같다는 것이다.

 

春望 (춘망)- 杜甫의 五言律詩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나라는 깨졌어도 산하는 남아 있어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성안에 봄이 오니 초목이 무성하다.
感時花濺淚(감시화천루)  때를 느꼈는지 꽃도 눈물을 뿌리고
恨別鳥驚心(한별조경심)  이별이 서러운지 새도 놀란 듯 운다
烽火連三月(봉화연삼월)  봉홧불 석 달 동안 연달아 이어지니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집에서 오는 편지는 만금보다 값지네.
白頭搔更短(백두소갱단)  흰머리 긁으니 다시 짧아지고
渾欲不勝簪(혼욕불승잠)  아예 비녀조차 이기지 못하는구나

 

절구(絶句)

 () 이루어지는 한시(漢詩) 형식 구가 다섯 자면 오언 절구(五言絶句), 일곱 자면 칠언 절구(七言絶句) 라한다.

한시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절구시(絶句詩)가 압권(壓卷)이다. 우리 나라의 절구는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나라 우중문(于仲文)에게 준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이 시는 고시(古詩)이지 절구가 아니다. 5절은 최치원(崔致遠)의 「추야우중(秋夜雨中)」, 7절은 최치원의 도중작(途中作)이 절구의 효시가 된다

칠언절구는 1, 2, 4구 끝에 운자를 붙이는 것이 법칙이나 제 1구 끝에 붙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반면 오언절구는 2구와 4구 끝에 운자를 붙이는 것이 법칙이나, 제 1구 끝에도 붙이는 경우도 있다. 절구(絶句)는 기구(起句)와 승구(承句)가 대(對)를 이루거나, 전구(轉句)와 결구(結句)가 대(對)를 이룬다. 

 

江雪(강설) - 柳宗元의 五言絶句詩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온 산의 새는 날지 않고
萬徑人蹤滅(만경인종멸) 수 많은 길 인적마저 끊겼는데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외로운 배에 도롱이 입고 삿갓 쓴 노인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홀로 낚는 차가운 강에 눈발 날리네

 

 

배율시 (排律詩)

배율시는 오언배율  칠언배율이 있으며 6구절로 된 시도 있지만 보통 10구절 이상으로 이루어저 있다

平仄(평측)과 압운은 율시의 그것과 비슷하나 句數(구수)와 對語聯數(대어연수)가 다르다. 즉 제1·2구가 起聯(기련), 3·4구가 頷聯(함련), 5·6구가 頸聯(경련), 7·8구가 腹聯(복련), 9·10구가 後聯(후련), 11·12구가 尾聯(미련)으로 되며 이것들을 모두 對語聯句가 되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시체는 원래 南朝 宋代의 彦延之와 謝靈運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며, 唐대에 이르러 배율이라는 명목이 붙여지고 형식도 갖추어졌다. 정격인 12구 6연을 초과하여 수십구로 한편을 이루는 것은 長律이라고 한다.

 

月下獨酌 1首(월하독작 1수) 李太白의 五言排律詩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꽃나무 사이에서 한 병의 술을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함께 마실 벗 없으니 홀로 따르네 

擧盃邀明月(거배요명월) 잔 들고 밝은 달을 바라보니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그림자와 나와 달이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 달은 원래 술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나를 따르기만 하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나마 달과 나와 함께 있으니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봄이 가기전에 즐겨야지 

我歌月排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은 거닐고 

我舞影凌亂(아무영능란)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함께 즐거이 술 마시고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취하면 각자 헤어지는 것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무정한 교유의 길을 영원히 맺었으니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다음엔 저 은하에서 우리다시 만나세 

 ( 선곡 전윤상 시인의 글을 옮겨와 보충)

 

 *선곡 전윤상 시인은 1946년 충남 아산 선장의 양반가 선비집안에서 출생하여 서울로 유학을 간 한양학파이다. 대학 졸업 후 평소 뜻한 바 있어 1970년대에 교육계에 투신하여 40여년의 성상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후학들을 가르쳐 이 나라와 사회의 간성으로 육성하였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배려로 일찍이 천자문(千字文)을 들고 서당(書堂)을 출입한 덕분에 한학을 수학하였고, 사십대 중반에는 저 유명한 퇴운(退雲) 이지풍(李之渢) 선생에게 사서(四書)와 시전(詩傳)을 배워 본격적으로 한학에 눈을 떴다. 이때부터 선곡은 자연스럽게 한시(漢詩)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시나브로 시심(詩心)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교직생활과 국내외 여행을 통해서 세상과 자연풍광을 접하며 떠 오른 단상들을 틈틈이 기록하여 한시를 써 놓았다.이런 오랫동안의 갈고 닦은 한시풍의 기량으로 지난 2000년 10월 6일 남간정사 백일장 한시부분 차상 수상을 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리고는 2007년 8월 31일 38년의 교직을 명예퇴직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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