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인중에는 처음 교회가 만들어진 이후 오늘날의 교회 형태로 쭉 유지되었고 2000년 전과 똑같은 형태로 지금의 전통적인 믿음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인도 있을것이다. 만일 이런 생각(신념)을 갖이고 있다면 이는 믿음이 좋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무지하다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순진하다고 해야할까?
그러나 조금만 의심과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고 검색을 해보면 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초기의 기독교는 유대교였고 예수는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으로 죽었다. 기독교의 실질적인 시작은 유대교의 한 분파가 예수를 메시아로 보고 메시아의 시대가 왔다고 해석하는데서 시작했다. 기존 유대교는 메시아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고 보았고 이러한 해석을 이단으로 판단 그들을 추출했고 추출된 자들이 오늘의 예수의 기독교가 된 것이다.
이런 분화와 독립은 생성된 모든 종교가 걸어온 길이며 초기의 기독교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새로운 해석에서 이단(같은 종교 다른 해석)이 탄생하고 어떤 이단은 새로운 종교가 되는 것은 역사이래 끊임없이 있어왔고 그건 현대도 마찬가지며 지금도 진행중이다. 기독교도 예외이지않다. 예수가 죽은 후 예수를 따르던 추종자들은 여러 분파들로 나눠져 서로 다르게 예수 현상을 해석하였고 그에 따라 각기 다른 교리를 교인들에게 가르치며 자신들만이 진짜 신앙임을 주장하였다. 마치 중국 춘추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시대처럼 말이다.
그러면 초기 교회의 수 많은 분파중 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몇몇 종파를 알아볼까 합니다.
1.에비온주의
에비온주의는 유대주의적 기독교 일파를 뜻한다.
이 명칭은 히브리어로 'ebjonim'이고, 헬라어(그리스어) Ἐβιωναῖο '가난한 자'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에비온주의자들의 유래는 유대교의 한 종파이며 종말론을 신봉한 에세네파에서 변형되었거나 관련이 있다고 보고있으며 에비온파 교리의 특징은 대부분 사해 사본에 나타난 초기 쿰란 종파인 에세네파의 교훈에 이미 예시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이후 예루살렘 중심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던 유대적인 기독교인들로서 자신들이 대대로 믿어왔던 유대교의 율법과 전통을 예수의 기독교와 연결시키려 했던 사람들이다.
당시의 에비온주의자들은 세 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① 나사렛파 : 유대 정통파
② 바리새적 에비온파 : 정통 에비온파
③ 혼합적 에비온파 : 영지주의적 에비온파 또는 에세네적 에비온파
에비온파에 대한 언급은 이레네오의 저술들(185경)에서 처음 발견되며, 그들은 4세기까지도 여전히 존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을 떠나서 요르단 건너편과 시리아에 정착했으며, 뒤에 소아시아·이집트·로마에서도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종파는 예수가 유대교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메시아가 되었다고 믿었으며 . 율법을 경시한 바울을 율법을 변절한 유대교의 배교자로 불렀으며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채식주의, 청빈, 빈번한 정결의식을 포함한 자신들의 교훈을 지켰으며 할례와 안식일을 준수 하였지만 희생 제사와 유대 성전제의를 거부했다.
이들은 유대파 근본주의자 들처럼 기독교인이 되려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기독교의 창시자이기 전에 이미 율법을 지키고 유대의 전통을 지킨 유대교인 이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리고 율법을 없에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므로 먼저 유대인이 되는 것이 합당하다는 논리다.
에비온파는 이단적 기독론을 주장하였다. (기독론 : 신이라는 예수의 인격과 그 사역을 중심한 신학적 논의)
에비온주의가 예수의 기독교와 크게 상반되는 교리는 유대의 민족주의와 율법중시에 있었다 그들은 오직 유대교를 통해서만이 온전한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단순히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에비온 주의자들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가 있다며 후자는 현 세상을 다스리지만 선의 원리는 장차 올 세상을 통치한다고 믿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알리시기 위해서 선택한 인간에 불과하며 이러한 사상의 유대교적 기독교인 에비온파들은 다만 예수를 그 신학적 체계 내에 인정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이들중 일부는 예수의 동정녀 출생을 믿었지만 대부분의 에비온주의 자들은 예수님이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했다는 것을 믿지도 인정도 않았으며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즉 사람의 아들이며 신명기에 기록된 진정한 예언자라 했다. 예수의 메시야적 사명은 예언자나 가르치는 자의 사명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인간이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예수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여 메시아로 선택이 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바울의 교리를 가장 싫어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에비온파는 유대적 성향이 짙은 마태복음만 성경으로 인정하였지만 이 마태복음 마저도 만족하지 못하고 '에비온파 복음서'와 '나자렛 복음서'를 포함해 그들 나름의 문서를 따로 만들기도 하였다. 에비온주의는 요르단 등지에서 성행하였지만 유대인이 줄어들고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소멸되었다. 그러나 이 사상이 초기 교회에게 큰 도전이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다.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 )는 '앎'을 뜻하는 희랍어 그노시스(Gnosis)에서 유래하였으며 초기 기독교 당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을 두고 정통파 기독교와 대립한 기독교의 또 하나의 흐름이다. 이른바 정통파라는 문자주의 기독교와 영지주의의 본질적인 차이는 정통파 기독교에서는 구원이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진방면 영지주의에서는 앎을 통해 가능 하다는 견해를 가진것에 있다. 그러나 영지는 단순히 지식이나 이성적인 지식이 아닌 경이로운 마법으로 빛나는 지식, 통찰을 지칭하며 그 가르침 또한 동방의 모든 고대 종교들 중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과 일치한다.
2세기와 3세기에 신비 종교적 요소를 가미한 아주 강력한 종교적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들이 초기 교회시대부터 로마의 콘스타니우스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한 세력이 영지주의자들이다. 영지주의는 동양의 신비주의 종교, 바벨론의 점성술, 페르시아의 이원론 등의 동방 사상에서 비롯되었고 헬라 철학의 근본적 사상과 아주 유사하다. 영지주의 사상가들은 기독교의 구원론적 관점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깊이 매료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메시지를 영지주의의 체계 속에 포함시켰다. 이 사상이 최대의 영향력을 가진 기간은 2세기 후반이었으며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이는 문자주의 기독교 신앙을 뒤엎을 만큼 위협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기독교회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바울의 투쟁이 있은 후로 가장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기도 하였다.
현재 존재하는 영지주의 문헌은 거의가 2세기 중반 이후의 것이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그 기원을 바벨론 유수기까지 추산하기도 한다. 월터 바우어(Walter Bauer)에 의하면 주후 2세기에는 지금의 터키인 소아시아(Asia Minor)에 영지주의자들이 소위 정통이라는 문자주의 크리스천들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았다고 한다. 영지주의 자들은 물질과 육체를 죄악시 하고 영을 높이 평가하는 그들의 극단적인 이원론적 사상 때문에 물질세계를 창조한 구약의 야훼를 가장 저급한 신인 데미우르지(demiurge)로 간주하였다. 물질과 육체를 악하게 생각한 나머지 두가지 상반되는 그룹이 내부적으로 생겼났다. 육체를 구원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기에 그 육체를 철저히 억누르는 금욕적 형태의 그룹과 육체적 탐닉에 전혀 상관치 아니하는 쾌락주의적 경향의 그룹으로 분화되었다.
이들의 가르침은 당대의 많은 대중들을 매료시켰고 2세기 중반까지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되었다.
워낙 은밀한 그들의 행보로 그들의 가르침과 의식을 비판했던 교부들의 작품 속에서만 그들의 가르침의 일부를 간헐적으로 만나다가 1948년 (고대에는 케노보스키온으로 불렸던) 나그함마디(Nag Hammadi)라는 이집트 북부(우리가 보았을 때는 나일강 남부) 작은 촌락에서 주후 400년경에 정통 기독교의 박해를 피해 영지주의자들이 묻은 것으로 보이는 밀봉된 단지에서 가죽 장정 파피루스 코덱스 13권이 1945년 12월에 발견되어 세상에 영지주의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신약학계에서는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에 버금가는 중요한 발견으로 여기는 바, 초기 기독교의 기원을 밝히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으며 나그함마디 영지주의 문헌들은 유네스코(UNESCO)가 세계유산으로 등재 하였다.
영지주의 교리는
1) 이원론(二元論) : 이원론은 조로아스터 종교의 영향하에서 형성된 시리아 사상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이원론은 신화적인 것이었으며 두 가지의 상반되는 원리 즉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노스틱('영지주의자' · '영지주의파' 또는 '영지주의적'이라는 뜻, 그리스어로 '신비적이고 계시적이며 밀교적인 지식 또는 깨달음'을 뜻하는 그노시스(γνῶσις gnosis)로부터 따온 것으로, 이 낱말은 고대의 영지주의 종교 운동의 반대자들이 이 운동에 속하는 사람 또는 단체를 지칭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주의에 있어서는 이러한 빛과 어두움의 신화적 이원론이 정신과 물질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 발전되었다. 즉 악의 원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물질의 세계는 선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되는 정신의 세계와는 태초부터 날카롭게 대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충돌에서 정신적 원리 가운데 일부가 물질의 세계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계와 인간이 시작되었으며 죄와 고통이 생기게 었다고 믿었다.
2) 구원론(救援論) : 문자주의 기독교자들은 믿음이 구원을 얻는 방도이나 영지주의자 들에게 있어서는 지식이 구원을 얻는 방편이었다. 그들의 지식은 정신적 활동의 이성적 지식이 아니라 신비한 영혼의 광명에 의해서 주어진 ‘초자연적’ 지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신적인 일에 대해서 일반 신도들보다 더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처하였다. 이러한 신비사상은 대중적 신조를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정통파 기독교보다 더 심오 하다고 생각했다.
3) 창조주(創造主) : 영지주의 자들의 신들의 계보에서 가장 마지막이 되는 것은 창조의 신 혹은 데미우르지(Demiurge) 였다. 그는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의 중간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되었으며 일반적으로는 구약의 야훼와 동일시 되었다. 데미우르지는 비록 전적으로 악하고 적대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비교적 열등하고 적대적인 존재였으며 선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의식 중에 세계와 인간을 있게 만든 존재였다. 그러한 창조신은 악의를 완전히 초월하지 못했으며 일종의 천사와 같은 존재라고 간주 되었다.
4) 가현설(Docetism) : 영지주의는 성육의 교리를 부인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서 물질은 불결하기 때문에 신성이 물질에 속하는 육을 취할 수 없고 그리고 또 취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타락이라고 주장한다. 절대적인 존재는 유한한 상대적인 존재와 결합할 수 없으며 또 타락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예수라고 불리어진 심오한 영적인 인간에게 일시적으로 깃들었다가 떠난 것이라 주장하며 예수가 탄생할 때나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가 잠시 깃들었다가 십자가 처형 직전에 분리되고 떠나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5) 인간관(人間觀) :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이 가능한 ‘영적’ 인간과 사상의 전수가 불가능한 ‘물질적’ 인간으로 인간을 구분하였다. 후기 영지주의 발렌티누스(Valentinus) 학파는 이에 한 부류를 첨가하여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부류인 ‘영적’ 인간만이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어느 정도의 구원이 가능한 ‘정신적’(Psychical) 인간, 구원의 가망이 없는 ‘물질적’ 인간등 세 부류로 구분하였다.
6) 부활과 최후 심판의 부정 : 노스틱 사상에 있어서는 물질을 본래부터 악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부활이 용납될 여지가 없었으며 또 최후의 어떠한 심판도 있을 수 없었다. 노스틱주의는 가르치기를 해탈한 영혼은 단순히 그것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모든 신비적 의식을 다시 행하게 되며 결국에는 충만한 신적 존재 속으로 다시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노스틱주의는 개체의 인격적 불멸에 대한 소망을 주장하지 않았다.
7) 비밀전통 : 영지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조물주(Demure)에 얽매인 인간의 육적본질의 구원을 위해 Pleroma 세계에서 오셔서 구원의 지식을 권했고 그 구원의 지식이란 조물주의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신비스런 지식이며 보이지 않는 위대한 최고신에 관한 지식이라고 했다. 이 지식이 완전한 구원이라고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이 완전한 지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제자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이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비밀을 말씀 하셨으며 이 비밀의 계시는 베드로와 바울과 도마 등을 거쳐 자기들에게 전해 졌다고 하며 이 비밀 전통은 일반적인 육적인 신자들에게는 감춰진 것이라고 했다.
3. 마르시온주의
마르시온(Marcion) 은 85년경 소아시아 북쪽 지방인 시노페(Sinope)에서 주교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초기 기독교의 신학자로서 극단적인 바울 추종자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유대주의자들로 여겨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직 바울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한 진정한 사도로 여겼다.
AD 140년경 쉬프스리더(Schiffsreeder) 의 초청을 받고 로마로 갔다. 이후 로마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AD 144년경에 영지주의자로 낙인찍혀 파문 당했다. 영지주의자로 파문당하였지만 영지주의처럼 구원을 위한 비밀예식을 주장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을 단지 성경의 참된 해석자라 할 뿐, 선지자로 자칭하지도 않았고 신비스런 지식의 근원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영지주의자들의 중요한 특징인 이온들의 분출이나 숫자 풀이술 같은 사색적인 주장을 나열하지 않았다. 영지주의자들은 각종 해석 학파를 양산한 반면에 마르시온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바로 해석했다는 확신하에 독자적인 감독과 독자적인 성경을 갖인 독자적인 교회를 세웠다.
마르시온파는 성경의 여러 모순과 의문 중 구약의 난폭한 신과 신약에서 예수로 대표되는 사랑의 신이 동일한 신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집단이었다. 마르시온은 구약의 야훼는 신약성경의 예수가 말하는 아버지 이며 하느님과는 다르다고 주장하였으며 구약성경의 하느님은 폭력과 보복의 신이지만,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은 사랑과 정의의 신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마르시온은 신약성경에서 유대주의 적인 구약성경과 분리를 주장한 반 유대주의자 였다.
마르시온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성서만 선택하는 합리적인 성경의 해석, 여사제가 세워지는등 남녀를 차별하지 않은 합리적이고 평등한 문화를 기반으로 그가 세운 교회는 로마, 이탈리아, 이집트, 아라비아, 시리아, 소아시아, 페르시아등 전세계에 세워졌고 주류 카톨릭보다 교세가 더 확장되기도 하였으며 마르시온은 160년경에 죽었지만 이후에도 마르시온의 교회는 가톨릭교회와 비등한 교세가 5세기 까지 유지되었다.
마르시온의 신학은 영지주의와 동일한 파생적 의미의 이론이다. 이 물질적 세상에서는 율법과 공의가 통치한다. 이러한 힘들에 대항해서 은총을 기독교 복음이란 ‘전혀 다른 분’ 혹은 ‘아주 생소한 하나님’을 수식하는 말이며 이 세상을 다스리는 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뜻한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 즉 야훼는 유태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 야훼는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지만 피의 제사를 요구하며, 그 백성을 전쟁터로 내 보내며 전 주민을 학살하라고 명령하는 잔인한 하나님이다. 이렇게 잔인하고 보복적인 하나님 위에 전혀 다른 ‘알지 못하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은 구약 성경의 하나님과 다르며 외계로부터 이 땅에 오신 분임에 틀림이 없으시다. 따라서 율법적이며 무자비한 진노의 하나님이 기록되어 있는 구약 성경은 성경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제외시키고 신약 성서 가운데서도 바울의 서신 10개와 누가 복음서등 11권을 그가 세운 교회의 정경으로 삼고 구약과 관련한 모든 부분을 개편하였다. 마르시온온은 신약성경 모두를 그리스도에 관한 순수한 가르침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신약도 많은 부분이 유대적 영향하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하나와 바울 서신 10개등 11권의 성서를 가리켜서 마르시온의 정경(Marcionite Canon) 이라고 부른다. 마르시온교회가 편집하고 개정한 신약성경 정경화에 자극을 받은 정통파라는 가톨릭 교회도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작업을 촉진하게 되고, 393년 북아프리카의 히포 회의와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27권의 신약성경 정경 목록을 확정하게 되었다. 마르시온은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성경의 정경화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율법을 혐오하는 입장에서 기성 교회를 배격하였다고 볼 때에 그의 주장에는 율법적인 요소가 없고 자비의 하나님의 복음만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는 예수에 대하여 몸이 물질이 아니었고 물질을 입은 것 같이 보였고, 그는 직접 하늘로부터 오셨으며 인간 역사나, 인간 부모를 두지 않았다고 생각함으로 그리스도가 ‘참 인간’ 이었음을 부정하는 가현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물질 세계는 모두가 악하다고 봄으로 금욕 생활을 주장하였으며. 육체를 부정하고 肉食이나 性交는 창조신의 손에 놀아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금욕적 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재림도, 죽은 자의 부할도, 세상의 회복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4) 몬타누스주의
몬타니즘은 몬타누스(Montanus 135-177)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2세기 말 소아시아를 거점으로 아프리카 카르타고 지역까지 과격한 성령운동 및 예언운동이 있었다. 이 운동을 이끈 사람들이 몬타누스주의자들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속히 이뤄지리라 여겼던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자 뜨거원던 종말 신앙은 점점 퇴색했다. 몬타누스주의는 이처럼 신앙이 약화되고 경직되는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났다.
몬타누스는 본래 소아시아 중앙에 있는 브루기아(Phrygia)에서 활동한 이방종교 제사장 이었다. 156년에 몬타니즘이 일어난 소아시아 중앙에 있는 브루기아(Phrygia)는 그 광신적이고 예언적인 이방 종교 형태 때문에 유명한 곳이었다.
기독교로 개종 후에 몬타누스가 이방종교를 포기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된 후에는 그는 자신의 옛 종교적 관습에서 기독교 신앙을 행했다 몬타누스주의는 영지주의나 마르시온주의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기독교 운동으로 간주 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정통이라는 가톨릭과는 달랐다.
몬타누스는 어느 날 성령이 자기를 통해 직접하신 말씀이 '이제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짜를 이야기함과 동시에 요한 계시록에 예언된 새 예루살렘이 곧 내려올 테니 몬타누스 추종자들에게 짐을 싸 프리기아의 페푸자라는 동네로 가라고 예언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예언을 따라 페푸자로 이사를 했고,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금욕주의를 따랐다. 결국 예수님의 재림은 그 날 일어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환멸을 느끼고 사라졌지만, 이 은사운동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번져 나갔었다.
몬타누스는 성령 사역을 지나치게 강조했지만, 처음에는 카톨릭 교회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카톨릭 교회로부터 출교를 당하고 자신들만의 교회를 세우게 된다. 후에 몬타누스를 돕기 위해 가정도 버린 두 명의 여선지자 맥시밀라(Maximilla)와 브리스길라(Priscilla)가 몬타누스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몬타누스와 그의 두 여선지자의 예언은 당시에는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영감 받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드물지 않게 예언을 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몬타누스 이단을 경험하기 이전 초기 기독교회에서 예언이나 예언의 기능은 중시되었다. 그것이 꿈(dream)이든 환상(visions)이든 예언적 신탁(prophetic oracles)이든 혹은 다른 형태이든 사적(私的)인 예언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특별한 것은 그들이 주장한 예언 내용이었다. 새로운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 것이었다. 몬타누스의 사역을 통해서 보혜사(Paraclete) 의 세대(dispensation)가 도래했고, 그 보혜사는 선지자 몬타누스와 두 여선지자를 통해 새 예언을 말씀하신다. 그 새 예언은 곧 현실화된다. 곧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가까운 도시 페푸자 (Pepuza)에 정착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일터를 떠나고 금식하고 그때를 기다려야 한다였다.이는 급박한 종말론적 기대를 근거한 것이었지만 당시의 교회들이 점점 세속화 되어가고 죄인들을 너무 쉽게 용납하는 것에 대한 반동이기도 했다.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은 표식이 될 만한 영적 은사를 가져야 하며 순교가 장려되고 그것을 피하는 것은 죄이다. 독신도 장려 되어서 재혼은 금지되고 영적인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는 것도 기꺼이 허락되어야 하며 여인들도 교회에서 직분을 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언과 성령의 은사 강조는 그런 은사를 갖지 못한 많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기독교인 인지를 의심하게 했다. 세 명의 선지자들( 몬타누스, 맥시밀라, 브리스길라)과 특별한 성령 은사를 받은 이들에 의한 죄 용서는 가톨릭의 감독들을 불편하게 했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는 몬타누스 운동을 반대했다. 감독들은 당연히 교회의 치리권을 자신들이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반대 입장에도 불구하고 몬타니즘은 확산되어 소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북아프리카에 침투되었다. 몬타니즘은 핍박받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환영받았다. 또한 어떤 이들은 점점 세속화 되어가는 가톨릭 교회보다는 적어도 몬타니즘은 초대교회의 엄격성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해 그것을 받아들였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초기 교회의 종말론적 긴장을 되살렸고, 임박한 종말에 대한 확신과 성령의 특별 계시를 강조했다.
이런 무리들 중에 터툴리안(Tertullian)도 있었으니, 그는 위대한 북아프리카 신학자로서 207년경에 몬타누스주의자가 되었다. 터툴리안은 후에 몬타누스파에서 탈퇴하여 새로운 분파를 세웠다. 그 분파를 아프리카에서는 터툴리안파라고 불렀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중재로 그 터툴리안파가 카르타고의 카톨릭 교회로 다시 돌아왔다고 진술 한바있다.
몬타누스와 두 여선지자가 죽고 몬타니즘은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새 예루살렘은 페푸자 지방에 임하지 않았다. 예언은 그 본래의 긴박성을 상실하고 몬타누스 교회의 엄격성도 점점 퇴색되었다. 후대 가톨릭의 핍박도 몬타누스 운동의 쇠퇴에 한 몫을 했다. 교회는 회의를 소집하여 177년 몬타누스를 이단으로 정하였고, 교회의 결속을 위하여 감독의 지위와 권한을 강화시켰다. 500-550년 경에는 몬타누스 운동이 거의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후 가톨릭교회 내에서의 예언과 특별한 성령의 은사들은 금해졌고 치리는 감독들의 손에서 더욱 집중되었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살아야 하는 규칙으로, 그리고 교회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를 판단해야 하는 규칙으로 점점 더 고착화 되어갔다.
몬타누스 운동은 교회에 분명한 영향을 남겼다. 한편으로는, 교회의 영적 은사 남용에 대한 경고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계시는 성령의 뜻의 표출을 위한 길을 열어두도록 교회에 요청한 것이었다.
5.네오 플라톤주의 (Neo Platonism)
플라톤은 아테네에서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B.C. 427-347).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가 스승이 별세하자(A.D. 399) 그의 후계자가 된다. 그는 B.C. 387년에 아테네에다 아카데미 학원을 창설하여 20여 년 동안 가르치는 일과 저술 활동을 한다. 이 플라톤의 사상은 13세기까지 기독교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으로 바뀌어 질 때까지 플라톤 사상은 기독교 교부나 지도자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겐은 물론이고 어거스틴의 신학 사상에는 플라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면 플라톤의 사상이 무엇이길래 그토록 영향을 많이 미쳤을까?
그것은 플라톤의 사상 중 2원적 세계관과 영혼 불멸 사상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시공을 초월한 비물질적, 절대적인 영원의 실재 객관적이고 불변하는 사물의 본질로서 순수한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중세에는 신 안에 존재하는 만물의 원형으로 인식되었으며, 오늘날에는 관념 또는 이념이라는 의미)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있다고 했다. 이데아의 세계는 선한 것이고, 그것의 정점은 곧 하나님이며 이 하나님이 모든 사물의 근원이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선재적이다. 여기에 아이디어를 얻은 어거스틴은 영혼의 기원을 전이설로 주장하였고, 펠라기우스는 창조설을 주장하였다. 하여간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은 선재적(先在的)인데 범죄로 인하여 현상 세계인 육체와 결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혼 자체는 본래 이데아의 선한 것이므로 그것은 영원히 멸 할수 없다. 영혼은 비 물질적이며 생명력을 가진 영원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는 죽어 소멸되지만 영혼은 없어지지 않고 영원한 이데아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플라톤의 사상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혼의 구원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여기에 대해 초대교회는 많은 혼동을 가져왔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보이지 않는 영혼"(눅24:39 참조)만이 구원된다고 믿지 않고 영과 함께 부활되는 영체가 구원받을 것을 믿는 전인적 구원을 믿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와같이 유대교적 배경을 가진 에비온주의와 반 유대적 배경을 가진 마르시온주의와 헬라 철학의 배경을 가진 네오 플라톤주의와 모든 것을 섞어 혼합하려는 영지주의의 사상 등으로 많은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테오도시우스의 손자인 테오도시우스2세 치하에 니케아 정통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서로 대립한 종파의 하나로 비 칼케돈 교파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주장한 이성설(二性說)이 중심이다. 이주장은 그리스도에게 유일한 위격(位格)밖에 인정하지 않는 설과 대립 하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 주의는 네스토리우스의 독자적인 주장이라기 보다는 초기 교회 시절부터 이어져 온 안티오키아 지역 교회의 특성의 영향이 크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아타나시우스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두고, 그리스도는 사람의 육체와 혼을 모두 가졌을 뿐만 아니라 성장의 과정도 겪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더욱 긴밀한 관계로 연합할 수 있었으며, 그 성장 과정은 그리스도가 부활할 때 완성되었다고 했다. 니케아 신조에 따라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하느님과 동일시하면서도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변형된 것이 아니라 신성을 간직한 채 스스로 사람의 형체를 입고 자신을 사람의 본성에 연합시켰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사람의 본성을 하나의 신체적 기관으로 사용하면서 그 기관을 통해 활동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렇듯 두 본성은 각기 다른 것으로 존재하지만, 자신들의 활동과 목적의 일치에 의해서 연합될 수 있었다는 것이 안티오키아 학파의 주장이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모두 손상됨이 없이 보존하는 방향으로 신학을 정립했다. 따라서 신성과 인성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점차 융합되는 방식으로는 절대 변화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신적 본성을 가지신 분이지만 동시에 사람의 육체와 혼을 가진 진정한 사람이라는 것이 안티오키아 학파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427년 콘수탄틴노플의주교로 임명된 네스토리우스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한 예수가 신이자 인간으로써 단일한 위격을 가졌다는 공의회 결정을 반대하며 그리스도가 인간의 위격과 신의 위격이 라는 서로다른 두개의 위격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이주장을 이성설(二性說)이라 하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격은 예수의 복음서에 깃들고 인격은 사라진 육신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인성으로써 예수를 낳은 성모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Θεοτοκος)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현재 그와 관련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알려지기로는 타고난 언변가이며 수려한 외모에 매혹적인 음성, 뛰어난 사고력과 언변, 신학적으로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평판이 있었고, 안티오키아에서는 그의 강론을 들으러 사람들이 몰려 성당이 미어터질 정도였으며 사람들이 툭하면 강론 시간에 아멘과 찬탄을 외쳐서 자주 끊길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뛰어난 웅변에 힘입어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은 동방제국의 수도와 주요 도시들로 급속도록 기반을 넓혀갔으며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은 424년경부터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티나 지방 및 인도까지도 전파되었다.
431년 그의 강력한 반대자였던 키릴우스가 에페수스 공의회 의장을 맡아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함으로 주교직을 비롯하여 모든 성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결국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하고 적국 사산조 페르시아로 도피하는 아이러니한 신세가 되었다. 추방당한 네스토리우스와 그 일파는 페르샤(이란)의 에뎃사 시에 작은 신학교를 세우고 동방에 복음을 전할 선교사들을 양성했다. 훈련받은 선교사들은 인도나 중국을 찾아 전파 하였다. 이후 가톨릭교회에서 파문된 네스토리우스 교회일파는 시리아 교회로 존속하기도 하고 미국으로 가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네스토리우스교회의 전례와 교리를 신봉하는 아시리아 동방교회(정교회와는 별개의 계통)의 일부는 1553년에 가톨릭교회로 돌아와(Sulaqa) 칼데아 전례 가톨릭 교회(동방귀일교회, 동방전례 가톨릭 교회의 하나)라 불리게 되었다. 아시리아 동방교회와 칼데아 가톨릭교회는 현재도 서아시아의 아시리아(현재 이라크 북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당 태종 때인 7세기에는 중국 대륙에도 경교(景敎- 광명의 종교)라는 이름으로 전래 되었으며 페르시아인 경교 사제인 아라본(阿羅本) 등에 의해 전래된 네스토리우스교는 페르시아 교회라는 뜻인 파사사(波斯寺)라고도 불렀다. 경교라는 이름은 중국어로 빛의 신앙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당 현종(玄宗) 때에는 경교 교회인 파사사는 대진사(大秦寺)라 개칭하고, 각지에 교회를 건립하여 교세를 제법 떨쳤다고 전해진다. 경교는 한반도의 신라에 까지 전래되었는데 신라의 유물중 십자가나 마리아 관음보살이 발굴되는게 그 증거다 이후 9세기 당 정부의 탄압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를 볼때 종교의 부흥이나 교세의 확장은 철저하게 정치권력의 비호나 결탁이 있어야 함을 알수있다
7.아리우스주의(나무위키 참조)
아리우스주의는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관구의 사제 아리우스(Arius)가 주창한 기독교 신학을 바탕으로 한 교파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실제로는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주장이다.
그가 내세운 기본 전제는 성부는스스로 존재하며 불변하는 하느님의 유일성이며 성자는 이질적이고 차별적인 존재라고 본것이다. 성자(聖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성부 신성은 유일한 것이어서 나누거나 전가할 수 없으며 성자는 성부가 세계의 구원을 위해 만든 도구에 불과하며 신성은 불변하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타난 성장하고 변화하는 성자 즉 예수는 하느님 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성자는 무(無)로부터 존재하게 되었으며, '시작'이 있는 피조물로 본다. 게다가 성자는 유한하고 존재 질서가 다르기 때문에 성부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리우스파의 대표적인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들 즉 성자 예수그리스도는 성부(聖父) 하느님의 최초이자 최고의 피조물이며 하느님과 세상 간의 중보자 보혜사이고, 인지 가능한 모든 시간 전에 성부의 뜻에서 유래하여 무로부터 창조되어 세상을 창조하였다.
아들 이라는 용어는 비유이며, 예수가 하느님과 같은 존재 이거나 지위를 나누어 가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아들의 지위는 그 자체가 아버지의 의지의 결과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버지가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으며 하느님의 말씀 즉 성자는 영원 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닌 무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는 영원치 않고 시작이 있으며, 존재치 않았던 때가 있었다.
성령은 성자의 첫 피조물이자 비인격적 활동력이다.그러므로 성부에 성자가 종속되고 성자에 성령이 종속된다.
이러한 내용을 핵심 교리로 삼고 있는 아리우스파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핵심적 교리로 삼는 아타나시우스파 기독교와 공존하기 어려운 기독교의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아리우스파의 교리는 비록 직계후손은 아니지만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 혹은 유니테리언의 교리와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이 아리우스 논쟁이 전 그리스도교 세계의 대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문에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합법종교로 인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종교가 양분될 위기에 처했다. 본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직 완전히 기독교화되지 않은 로마제국에서 태어났던 로마인이라 교리가 어떻게 되든 의례만 잘 지키고 로마 제국만 통합되면 별 상관이 없다는 식의 생각이었던 듯하다.그러나 결국 교회의 분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최초로 공의회를 열 것을 명하여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주재하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는 황제의 강압 속에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하여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본질(homoousion)"로써 삼위일체가 정통임이 천명되었고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매우 간결하며 일관성이 있고 논리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서에는 예수가 하느님과 구분되는 듯한 구절과 동일시되는 듯한 구절이 모두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음서의 이런 태생적인 내부 모순점은 결국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의 논쟁, 그리고 이후에도 단성론, 단의론 등 지리하고 피비린내 나는 기독교의 교리 싸움이 전개된 원인이 되었다. 당시 아타니시우스파의 삼위일체론은 이 모순되는 부분들을 표면적으로 봉합시키기 위해 여러 우회 장치들을 사용했다. 이런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 모순을 따지는 것은 일반인들이 판단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들이었다. 반면 아리우스는 교리 자체의 일관성, 통일성, 논리적 무오류를 위해 복음서에서 모순되는 두 내용 중 한쪽은 취하고 다른 쪽은 무시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파는 이 부분을 맹렬히 파고들며 공격했고 결국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몰았다.
처음에 기독교에 거의 무지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일단 교리 통일이라는 정치적 목적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공의회를 애초에 공의회를 열기 전부터 교회 내에서 훨씬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고 나섰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서 진행된 공의회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의 주장은 난해한 삼위일체론과는 다르게 이해하기 쉽고 간결했고 일관성 있어 보였기 때문에 수세기 이상 세력을 떨쳤다. 게다가 처음에 기독교에 무지하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점차 기독교 교리에 대해 깊이 파고들면서 오히려 아리우스파에 빠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말년에 아리우스를 측근으로 두었을 정도였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후계자들인 역대 황제들이 아리우스파를 신봉해서 도리어 삼위일체파가 탄압을 받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아리우스파는 유럽에서 침입을 격화하고 있던 게르만족에게도 대대적으로 포교하여 많은 게르만족이 아리우스파를 추종하는 현상마저 일어났다.
아리우스파가 이렇게 위세를 떨치는 가운데 381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소집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삼위일체 천명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를 최종적으로 이단임을 재확인했다.
이에 따라 아리우스파는 제국 전역에서 탄압당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고트족이나 반달족, 랑고바르드족 등 게르만족에게 주로 포교하여 명맥을 이었다. 계속된 교파분쟁의 와중에 게르만족 중 프랑크족이 500년경 삼위일체파로 전향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8세기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아리우스파를 믿던 다른 게르만족들을 대거 점령하면서 삼위일체설로 개종하지 않으면 몰살하는 정책을 시행했고 이로 인해 아리우스파를 믿던 게르만의 작센족, 바이에른족 등이 모두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당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대량학살당하면서 아리우스파가 완전히 사멸했다.
'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와 비슷하고 공통점이 있는 신화적 인물이 있을까? (0) | 2023.06.16 |
---|---|
기독교 성경에서 금지한 놀라운 것들! (3) | 2023.05.31 |
"대통령님,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0) | 2023.05.05 |
어떤 마을 이야기 (1) | 2023.04.19 |
당신이 적그리스도(Anti-christ)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 (0) | 2023.04.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