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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身應是明月 幾生修到梅花

by 까마귀마을 2023. 2. 23.

前身應是明月 幾生修到梅花 (전신응시명월 기생수도매화)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어느듯 시절은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우수를 지나 봄이 오는 길목입니다.  혹한의 매서운 추위를 이겨낸 매화가 향기를 가득 머금은 꽃 봉오리를 터트리며 어느새  봄은 우리들 가까이 다가오나 봅니다. 매향 그윽한 이른봄, 매화와 인연이 깊은 이황(李滉) 퇴계 선생의 일화를 새겨봅니다.

 

퇴계는 살아생전 매화(梅花)를 끔찍이도 사랑했다고 한다. 

퇴계선생이 매화를 노래한 시가 1백수가 넘는다고 하는데 퇴계가 이토록  놀랄 만큼 큰 집념으로 매화를 사랑한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 퇴계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선생의 나이 48세 때였다.그리고 죽을때 까지 잊지 못할 인연이 된 두향의 나이는 18세였다.

선생이 부임한 관내 관기였던 두향은 퇴계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처신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했던 올곧은 선비였던 퇴계와는 한동안은 두향의 애간장을 녹였었다. 그러나 당시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었던 퇴계는 그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 ) 같았던 두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30년 세월을 뛰어넘는 사랑의 교감(交感)이고, 반상(班常)의 신분(身分)을 뛰어 넘는 로맨스다.

두향은 詩와 書와 거문고에 능했고, 특히 매화(梅花)를 좋아했다.

그녀는 언제나 퇴계의 곁에서 거문고를 타며 퇴계(退溪)의 얼굴에서 미소(微笑)가 떠나지 않게 한 여인(女人)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겨우 9개월 만에 끝나게 되니 퇴계가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두사람 모두에게 대단한 충격이였고, 관기(官妓)를 못 데리고 다니는 당시 규율(規律)때문에 결국(結局) 두향을 두고 퇴계는 혼자 풍기로 떠나야만 했다. 두향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변고였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 온 갑작스런 이별은

두향이에겐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마주 앉아 주고받았다는...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死別己呑聲)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네(生別常測測)”

 

선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

그러자, 두향이가 말없이 먹을 갈더니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시 한 수를 써내려 갔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때

어느 듯 술 다 하고 님 마져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1570년 퇴계가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 동안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퇴계가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준 수석 2개와 매화 화분 하나가 있었다. 이때부터 퇴게는 평생을 두향이가 준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퇴계는 두향을 가까이 하진 않았지만 매화를 두향을 보듯 애지중지 했다.

퇴계는 말년(末年)에 안동(安東)에 있는 도산(陶山)서원(書院)에서 조용하게 지냈는데 한 때는 병세가 위독해서 자신도 모르게 옷을 입은채로 설사를 하게 되었다.

그경황에도 그는 시중드는 사람에게 불결(不潔)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며, 매화 화분을 딴 방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 매화(梅花)가 바로 두향이 준 것이여서 각별(各別)히 애지중지(愛之重之)하였다

퇴계를 떠나 보낸 뒤 두향은 간곡한 청으로 관기를 그만두고 퇴계선생과 자주 갔었던 남한강가에 움막을 짓고 평생 퇴계를 그리며 살았다. 이별 후 이들은 만나지 못하고 서로 서신(書信)만 주고 받았다. 퇴계는 그 뒤 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말년엔 고향에 은거했다.

기록(記錄)에 의하면 그가 병이 깊어 누워있던 1570년 섣달 초여드렛날 제자들의 부축하에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창문으로 눈부신 겨울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윗목에는 매화 화분하나가 두 세송이 부푼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 저 매화(梅花)에게 물을 주어라! "

이 말을 끝으로 선생은 미소 띤 표정으로 앉아서 이승을 하직했으며 이 때 선생의 나이 70歲였다.

퇴계의 그 말속에는 퇴계선생도 죽는날 까지 두향이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었다는 증거가 아니었을까?.

퇴계는 시 한편을 남겼다.

 

前身應是明月 幾生修到梅花 (전신응시명월 기생수도매화)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퇴계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4일간을 걸어서 안동을 찾았다. 두사람의 인연은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이 만날 수 있었다.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두향의 사랑은 한 사람을 향한 지극히 절박하고 준엄한 사랑이었다,그래서 지금도 퇴계 종가(宗家)에서는 두향이 묘(墓)에 벌초하고  그녀의 넋을 기린다.

퇴계선생의 파격적인 사랑을 공식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지만  그 애달픈 사랑을 잊지는 않는 다는 것이 사람의 禮인 모양이다

 

그 때 두향이가 선생에게 주었던 매화는 그 대(代 )를 잇고 이어 지금 안동의 도산서원 입구에  그대로 피고 있다고 한다. 선생께서는 매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리 유별나 "내 평생 즐겨함이 많지만 매화를 혹독 하리만큼 사랑한다"고 '매화시첩(梅花詩帖 : 62제(題) 91수(首)의 매화시가 수록되어있다 )'에 적고, 매형이라 불렀다.  그는 매화를 직접 가꾸기도 하였는데 그의 매화 시는 이러한 직접적 체험을 통해 이루어진 진정성이 담긴 소산이라 할 수 있다.

 

手種寒梅今幾年 (수종한매금기년)한매를 심은 지가 몇 년이던고,

風烟灑蕭小窓前 (풍인려소소창전)바람과 연기가 작은 창문 앞에 쇄소하였구나.

昨來香雪初警動 (작래향설초경동)어제 핀 매화가 처음엔 깜짝 놀라 움직이는 듯,

回首群芳盡索然 (회수군방진색연)돌아보니 다른 꽃들은 다 쓸쓸할 뿐.

 

선생은 조정에 나아가 국사를 처리하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매화와 묻고 답하며 풀어 나갔고 눈 내리는 겨울밤 홀로 분매와 마주 앉아 술상을 가운데 놓고 "매형 한잔 나 한잔  하며 밤을 지새우며 시정(詩情)에 취하기도 했다한다.

                                                                      도산서원내 활짝 핀 매화

퇴계선생이 두향에게 보낸 서신중에서 

黃卷中間對聲賢(황권중간대성현) 누렇게 바랜 옛 책속에 좋은 말씀 보면서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빈 방에 홀로 조용히 앉았는데

梅窓又見春消息 (매창우견춘소식) 매화핀 창가에 봄 소식을 다시보니

莫向瑤琴嘆絶絃 (막향요금탄절현) 그대도 거문고 마주앉아 줄 끊겼다고 한탄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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