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망국론에 대한 박찬승 교수의 이야기.
갑자기 '조선망국론'이 돌출하여 세상이 시끄럽다. 한쪽에서는 조선은 이미 스스로 망하고 있었고, 일본은 이를 주워먹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른 한쪽에서는 조선이 비록 망하고 있기는 했지만, 일본이 이를 이용하여 군사적으로 침략하여 강제병합한 것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일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주장에는 '조선(대한제국)은 이미 스스로 망하고 있었다'는 것이 공통으로 전제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과연 당시 조선(한국)은 이미 망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망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근대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식으로 나뉘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일본의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 선생이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그는 일본의 개항은 1854년인 반면, 조선의 개항은 1876년으로 20여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가지무라 선생은 또 개항 이후에 일본은 외세의 특별한 간섭이 없어서 명치유신과 그 이후의 개혁 사업을 순조롭게 진행해 나갈 수 있었지만, 조선은 청국과 일본에 의해 사사건건 간섭과 방해를 받아(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봉기, 갑오개혁 등) 개혁 사업을 제대로 진행해 나갈 수 없었다고 보았다. 즉 '외세의 간섭'(外壓)의 유무가 일본과 조선의 향후 진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본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가지무라 선생의 논리에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조선이 문명개화의 길로 본격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의 일이었다. 개화파들은 갑오개혁을 통해 문명개화의 개혁사업을 본격화했다. 또 재야의 유생들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청국이 패배하는 것을 보고 문명개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급진적인 갑오, 을미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고종의 아관파천과 대한제국의 수립, 독립협회 해산 등이 있었고 개혁의 속도가 다소 조정되기는 했지만, 고종도 갑오개혁에서 제시한 문명개화의 길은 피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시기에도 각종 관제 개혁이 이루어졌고, 징세제도, 경찰제도, 군사제도 개혁 등이 진행되었다. 특히 군사비에 많은 재원이 투자되었다. 그러나 의욕에 비해 실제 개혁은 의도한 만큼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혁을 위해서는 더 많은 재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부와 왕실의 조세 수입은 이전보다는 늘어나고는 있었지만, 개혁 사업을 위해서는 크게 부족했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30년 정도 늦게 개혁을 시작했고, 그만큼 일본에 비해 국력이 크게 뒤져 있었다. 1900년 일본과 한국의 조세 수입은 거의 100배의 차이가 났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은 1890년대에 산업혁명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이 본격적인 개화의 길로 나아가기 전에, 아직은 국력이 취약할 때, 양국간의 격차가 심대할 때 서둘러 한국을 병합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 같다. 일본은 한국 침략을 서둘러서 러일전쟁을 도발했고, 결국 1905년 한국을 보호국화 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5년 뒤에는 한국을 완전히 강제병합했다.
정리하면, '한국은 스스로 망하고 있었다'는 논리는 사실에 맞지 않는다. 한국은 나름대로 문명개화를 위한 개혁의 길을 가고 있었고, 다만 일본에 비해 30년 정도 뒤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격차'가 그만큼 컸을 뿐이다. 1960, 70년대에도 일본과 한국은 약 30년 정도의 격차가 난다는 말들을 많이 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그 격차가 거의 좁혀졌다는 말들을 한다. 그만큼 '격차'는 얼마든지 좁혀질 수 있는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에도 이는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1905년 이후 이미 한국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입헌군주제를 모색하고 있었다. 또 1905년 이후 600여 명의 유학생들이 자비로 일본에 건너 갔고, 그들이 귀국하여 1919년 3.1운동의 주역이 된다. 대한제국이 그대로 존재했다면, 1919년 즈음에는 한국에 공화제 혁명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대한제국이 정치적으로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로 바뀌었다면, 개혁 사업은 훨씬 더 속도를 낼 수 있었을 것이고, 한일간의 격차는 더욱 좁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이 쇠망한 원인은 부패한 왕조와 양반 때문이라는 주장은 일찍이
기쿠치 겐조(菊池謙讓)가 쓴 <조선왕국>(1896)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시노부 준뻬이(信夫淳平)도 <한반도>(1901)에서 '양반망국론'을 주장했다.
시데하라 타이라(幣原坦)가 쓴 <한국정쟁지>(1907)는 '당쟁사'를 연구한 것인데,
이후 아오야기 쓰네타로(靑柳綱太郞)의 <조선4천년사>(1917)에서 '당쟁망국론'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왕조, 양반의 부패와 무능을 강조하고, 당쟁을 망국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한 조선망국론은 바로 일본의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논리였다(최혜주 교수의 책 참조). 그리고 이러한 망국론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어, 당대의 유명한 학자와 저널리스트들도 이에서 헤어나지 못하였고, 이후 일제강점기 내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이런 논리는 한국 사회에서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은 이미 스스로 망하고 있었다'는 논리는 식민주의자들이 만든 것이기도 하고, 또 앞서 본 것처럼 역사적 사실과도 거리가 먼 것이라는 점을 결론적으로 지적해 둔다.
최태성 강사가 sns에 올린 글
황현필 강사 : "완전히 역사적 오류"
79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역사 유튜버인 황현필 한국사 강사도 지난 11일 유튜브 채널에 영상을 올리며 정진석 위원장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황 강사는 20대 대통령선거 당시 이재명 후보를 공개 지지했던 인물이다.
정 위원장의 글을 본 황 강사의 첫 마디는 "환장하겠다"였다. 그는 "이건 거의 망언", "막말"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정 위원장의 글을 하나 하나 설명했는데, 글의 뉘앙스에 대해 "일본의 침략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쉽게 이야기해서 어떤 집안에 내분이 있었는데, 강도가 그 집에 들어가서 나쁜 행위를 했다. 그런데 내분이 문제였다. 그 강도의 침략은 큰 잘못이 없다 이래버리면 이건 진짜 이 사람의 사상을 의심해봐야 되는 거 아니냐"고 주장했다.
특히 황 강사는 '일본은 조선 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는 정진석의 발언에 "완전히 역사적 오류"라고 반박했다. 이어 "조선 건국하고 나서 왜구 침략이 178회, 제가 오죽하면 이걸 외우고 있다"며 삼포왜란(1510), 사량진왜변(1544), 을묘왜변(1555), 임진왜란(1592~1598) , 정유재란(1597~1598) 등을 나열하며 "일본에 침략을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황 강사는 동학농민운동(1894) 과정을 언급하며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과정 중에 3시간 동안의 전투가 있었다. 무혈입성이 아니다"며 "경복궁 전투를 통해서 강제로 장악했는데 (전쟁이 없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느냐. 그리고 1년 뒤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했잖나"라고 따져 물었다.
그러면서 황 강사는 정 위원장에게 "몰랐으면 무식한 것"이라며 국회의원이 "이렇게 무식한 소리를 하면 되나"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영상 끝에 황 강사는 일제강점기 친일파에 대해 "자신의 성공과 야욕을 위해 자신이 직접 친일을 선택했고, 그 친일은 (스스로의) 의지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 후손들의 친일은 친일파의 후손으로서 기득권을 누리고 호의호식하면서 자기 아버지이자 자기 조상에게 세뇌된 친일이기 때문에 답도 없다"고 일갈하며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던졌다.
지난 2014년 뉴스타파는 정진석 위원장의 조부인 정인각이 일제 강점기 당시 계룡면장을 지내며, 친일행적을 한 문건이 드러났다고 보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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