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주인공 산과 덕임만큼 중요한 관계가 바로 영조(할아버지)와 사도세자(아버지), 이산(손자)에 이르는 3대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비극적인 스토리가 드라마 전반에 흐르고 있지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옷소매 붉은 끝동> 이전 이야기를 조금 나눠보겠습니다.
영조의 두 가지 콤플렉스
영조에게는 평생을 안고갈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왕비가 아닌 무수리(숙빈 최 씨)의 아들이라는 것이었어요. 무수리는 궁녀보다도 낮은 신분으로 궁궐의 허드렛일을 담당하던 종 신분이었는데요. 출신을 중요하게 여기던 조선시대 당시 무수리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건 ‘개천에서 용 난다’ 정도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신분의 어머니란 존재는 영조에게는 마음 아픈 상처이면서 동시에 콤플렉스였을 겁니다.
또 하나는 이복형인 ‘경종’을 암살하고 임금 자리에 올랐다는 세상 사람들의 의심이었어요. 경종은 조선시대 임금치고 재위 기간이 4년 2개월로 비교적 짧았습니다.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난 경종 다음으로 왕이 된 이가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였습니다. 물론 영조가 이복형 경종을 암살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고, 단지 당시 정황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정황이라는 게 사람을 참 곤란하게 만드는 면이 있는데요. 사람들이 날 의심한다고 해서 그냥 인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의 결백을 확인해줄 확실한 증거도 없는 그런 상태니까 말이죠. 이는 <옷소매 붉은 끝동> 10회 마지막쯤에 나오는 ‘생감과 게장’ 에피소드의 모티프가 되는데요. 자신의 형을 죽였다는 의심은 영조 권력의 정통성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역모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10회를 소개하면서 자세히 이야기해볼게요.
임오년의 그날에 이르기까지
영조를 괴롭혔던 두 가지 콤플렉스가 아들에게 투영되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즉 다음 왕에게만은 영조 자신이 평생을 두고 시달렸던 ‘출신 성분 콤플렉스’와 ‘권력의 정통성을 부정 당하는 콤플렉스’에서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결심하게 했다는 거죠. 이런 이유 때문인지 영조는 사도세자의 교육에 유독 신경을 씁니다.
영조에게는 사도세자 이전에 낳은 ‘효장세자’란 첫째 아들이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죽고 맙니다. 그 후로 한참 아들을 낳지 못하다 영조의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아들을 얻었는데요. 그게 바로 ‘이선(사도세자)’입니다. 늦게 탄생한 아들이 얼마나 예뻤을까요. 애정이 큰 만큼 기대도 컸을 게 분명하죠.
세자는 영조의 기대에 부응해 어린 나이부터 매우 영특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하는데요. 공부를 게을리 할 뿐 아니라, 온갖 기행을 저질렀어요. 급기야 궁녀와 내관을 죽이는 사건까지 벌어지고 맙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습니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임오년의 그날, 아버지 영조는 아들 사도를 뒤주에 가두고 맙니다.
세자는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벌어진 참극이었어요. 이 사건이 바로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임오년의 그날’로 표현하는 ‘임오화변(1762년)’입니다.
물론 8일 동안 벌어진 사건만을 두고 임오년의 그날을 정확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날’이 있기 전부터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오랜 시간 좋지 않았거든요. 아들에게 유난히 엄격했던 영조의 성격, 아버지에게 상처 받아 끔찍한 짓을 저지른 사도의 잘못, 여기에 당파의 싸움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 얽혀 벌어진 임오화변의 원인은 몇 문장으로 정리하고, 설명하기엔 어렵기만 합니다.
지금까지 임오화변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에서 사도세자는 아버지 손에 죽은 불쌍한 아들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영조는 끔찍한 방법으로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로 보여졌죠. 이렇게만 해석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사도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 손에 죽었기 때문에 참 불쌍한 아들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수는 없는데요. 죽기 전까지 사도가 저지른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죽인 내관과 궁녀가 100여 명이 넘습니다. 그 방법 또한 매우 참혹했습니다. 글로 다 옮기기 어려울 정도죠. 그렇게 죽인 사람 중에는 사도세자의 후궁도 있었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궁녀들을 끔찍하게 살해한 사도세자에게 복수를 하려는 궁녀 비밀 조직으로 ‘광한궁’이란 설정을 두었습니다. 물론 광한궁이란 조직이 궁궐 안에 있었을 리는 없지만, 사도의 살인 행위라는 역사적 사건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당시 궁녀들도 사도에게 복수심이 있었지 않을까 하는 상상력은 설득력 있는 설정 같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도가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고 추측하고, 엄한 아버지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이유가 사도세자의 행동에 면죄부를 준다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왕조시대라는 점을 감안해도 실수로 덮고 넘기기에는 큰 죄를 저질렀던 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아들을 죽인 영조의 결정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영조가 보기엔 단지 아들이 왕이 되기에 조금 무능하거나, 행동이 불량한 수준이어서 다음 임금의 자리를 잇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었어요. 아들은 사람을 끔찍하게 여럿 죽인 살인자였던 겁니다. 살인자에게 다음 왕권을 넘긴다는 건 현재 조선을 이끌던 영조 입장에선 매우 무책임한 행동이었을 테고요.
조선의 임금인 영조로서는 조선의 세자 사도를 용서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생각해봐도 과정과 결과는 참으로 슬프기만 합니다. 정리하자면 임오화변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라 생각해요.
임오년의 그날 이후 궁궐에 남은 상처
임오년 이후 ‘그날’은 궁궐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을 게 분명합니다. 영조도, 이산도 그날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생을 살았을 거예요.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도 할아버지 영조는 손자 이산을 정치적 상황에서 보호하려는 행동을 합니다. 이산의 잘못을 용서해주기 위해 (신하들이 반발하지 않을) 때를 기다린다든지, 엄하게 체벌하면서 변할 수 있다고 다그친다든지 등의 모습입니다. 아들을 역적의 죄로 죽여야 했던 실제 영조도 자기의 다음 왕이 될 손자를 이렇게 때로 보호하고, 때로 다그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임오화변의 모든 과정을 겨우 열 살 나이의 이산이 지켜봤습니다. 이때 사도세자와 혜경궁 나이는 스물일곱이었고요. 지옥 같은 일을 겪기에 이들은 너무 어리고, 젊었습니다. 참혹한 일이 벌어졌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흘러갔죠.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이야기는 ‘임오년의 그날’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은 때 시작됩니다.
다음 글에서 본격적으로 01회부터 이야기를 이어가볼게요.
<옷소매 붉은 끝동> 01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주인공 산과 덕임이 처음 만나게 된 계기는 영빈의 죽음이었습니다. 내관이 징을 치며 궁궐을 돌아다니면서 “영빈 연서(捐逝)!”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영빈(1696~1764)’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친어머니,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이산의 할머니입니다. 임오년(1762)의 그날, 아들 사도세자가 죽은 지 2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영빈(暎嬪) 이씨(李氏)가 연서(捐逝)하였다. (…) 영빈이 사도 세자를 탄생하였는데, 후궁에 40여 년간 있으면서 근신하고 침묵을 지켜 불행한 때에 처하여 보호한 공로가 있었다.
- 《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1764) 7월 26일
이때 실제 산(1752~1800)의 나이는 겨우 열두 살이었습니다. 덕임의 실제 모델인 ‘의빈 성 씨(1753~1786)’도 겨우 열한 살이었고요. 드라마에서는 실제보다는 좀 더 어린 듯한 배우들이 연기를 했습니다.
두 사람의 운명이 시작되는 곳
<옷소매 붉은 끝동>의 주요 배경 장소가 궁궐이기 때문에, 저는 산과 덕임이 처음 만나는 장소가 궁궐의 어디일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01회에서 영빈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된 산은 몰래 할머니에게 조문을 갑니다. 할아버지 영조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그때 마침 덕임도 제조상궁 조 씨의 심부름으로 영빈의 조문을 가게 됩니다.
늦은밤, 멀리까지 심부름을 가게 되는 덕임을 친구 궁녀들은 걱정을 하죠. 이런 친구들을 돌아보며, 우리의 씩씩한 주인공 덕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후원길 완전 빠삭해!” 이 말을 듣고, 산과 덕임이 후원에서 만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후원이란 어떤 곳인지 우선 소개해드릴게요. 후원은 궁궐 뒤쪽에 마련해둔 국왕의 정원입니다. 궁궐의 기본 구조는 왕과 신하들이 모여 정치를 하는 공적 공간인 ‘외전(外殿)’과 왕실 가족이 살던 사적 공간인 ‘내전(內殿)’으로 나뉘는데요. 지금 덕임이 간다는 후원(後苑)은 내전 뒤편에 둡니다. 때문에 어린 아이들에겐 ‘떠난다’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멀찍이 떨어진 장소였지요.
임금은 업무를 보다가 종종 후원에 들러 휴식을 즐겼습니다. 정원이라고 하지만, 작은 마당 정도가 아닌데요. 숲이라고 하는 게 맞을 만큼 면적이 매우 넓습니다. 연못과 하천, 언덕과 정자, 건물 등을 절묘하게 배치해두었고, 숲길에선 산책도 할 수 있죠. 이곳에서 왕은 사냥을 하거나, 신하들 불러 잔치를 열기도 했어요. 해가 지고 어두운 밤, 이렇게 큰 정원에서 어린 산과 덕임이 길을 헤매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여러 장면을 창덕궁 후원에서 촬영했는데요. 이후 후원의 다른 장소에 대해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실제 산과 덕임이 살았던 궁궐은 어디였을까
그렇다면 영빈 이 씨가 세상을 떴을 무렵, 산과 덕임이 만난 곳은 어느 궁궐의 후원이었을지 궁금해집니다. 이곳이 어딘지 알면 (드라마 속 설정이겠지만) 둘이 처음 만난 후원의 장소를 추정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시간을 잠시 뒤로 돌려 ‘임오년의 그날(임오화변)’, 영빈이 세상을 뜨기 2년 전으로 돌아가보죠.
임금이 이날 경희궁(慶熙宮)으로 다시 이어(移御)하였다.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 윤5월 21일
임오년의 그날, 그 사건이 벌어졌던 현장은 지금의 창경궁입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확인하고 원래 머물던 경희궁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위 기록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산은 사도세자의 죽음 직후 잠시 궁 밖에서 살기도 했지만, 영조가 다시 궁궐로 불러들입니다. 왕세손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인데요. 따라서 임오년의 그날 이후 이산도 당연히 할아버지 영조와 함께 경희궁에 살았을 겁니다. 때문에 산과 덕임이 영빈을 조문하기 위해 간 장소는 경희궁 후원이 유력하겠죠.
‘경희궁에도 후원이 있었나?’하고 의아해하실 수 있는데요. 현재 후원이 온전하게 보존된 궁궐은 창덕궁뿐이지만, 원래는 모든 궁궐에 후원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창덕궁을 제외한 네 궁궐의 후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죠. 기록을 찾아보면 경희궁 후원은 현재의 성곡미술관과 대한축구협회 건물을 비롯해 사직동 주변이지 않을까 짐작만 해봅니다. 그곳 어딘가에서 우리의 두 주인공, 산과 덕임이 처음 만났던 거지요. 물론 이건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설정일 뿐이지만요.
기록으로 본 영빈의 장례
다음으로 또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영빈의 시신을 모신 장소는 어디였을까 하는 거죠. 대개 왕실 가족 중 한 명이 세상을 뜨면 시신을 ‘빈전(殯殿)’이라는 건물에 모십니다. 새 건물을 짓는 건 아니고, 궁궐에 있던 기존 건물을 장례 기간에만 임시로 용도를 바꿔 왕족의 시신을 안치하는 장소로 사용하는 거죠. 이때 빈전은 후원보다는 외전이나 내전에 있는 건물 중 한 곳을 골라 씁니다.
따라서 영빈 이 씨의 시신을 후원길을 통과해 가야 하는 멀리 떨어진 건물에 두었을 가능성은 적다 생각합니다. 주인공 둘을 중요한 사건을 통해 처음 만나게 하려는 드라마 속 장치였던 듯해요.
기록을 보면, 드라마에서처럼 영조가 영빈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임금이 임곡(臨哭)하기를 매우 슬프게 하였고, 후궁 일등의 예로 장사를 치르라고 명하였다.
- 《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1764) 7월 26일
그리고 영빈의 시신이 안치된 ‘영빈방’이란 곳에 자주 들렀다는 기록도 볼 수 있고요.
어가를 돌릴 때에 갑자기 영빈방(暎嬪房)에 들르겠다고 명하였는데, 이때 영빈이 죽어 아직 장사를 치르지 않았었다. (…) 밤이 되어서야 궁으로 돌아왔다.
- 《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1764) 8월 30일
이때 영빈방이라 부른 영빈의 빈전 위치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드라마에서는 영조가 영빈을 조문하는 것도, 추모하기 위해 곡하는 행위도 금지했다고 설정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실제 산은 어머니 혜경궁과 함께 영빈에게 조문을 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혜빈과 왕세손이 영빈방(暎嬪房)의 상차(喪次)에 가서 곡하고 돌아왔다.
-《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1764) 9월 24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산에게 할머니 영빈은 어머니만큼 의지하던 보호자였을 겁니다.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산의 마음 또한 무너졌을 테고요. 할아버지 어명을 어기면서까지 영빈의 조문을 간다는 설정은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보여주려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서로의 등불이 되어줄 존재
저는 산과 덕임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제조상궁의 심부름으로 조문을 가던 덕임은 냇물을 건너다 그만 등불을 떨어트려 꺼트리고 맙니다. 반대편에서 건너오던 산은 길을 헤매다 비록 넘어지기는 했지만 다행이도 갖고 오던 등불만큼은 꺼지지 않았고요. 이제 산과 덕임은 이 등불 하나에 의지한 채 영빈을 뵈러 갑니다.
이 장면을 보면, 산은 까칠한 성격임에도 ‘하찮은 생각시’를 위해 등불을 들고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의심합니다. 혹여 ‘여우가 둔갑술을 부려’ 이렇게 밤길에 나타난 건 아닌가 하고 말이죠. 의심하는 건 덕임도 마찬가지고요. 어린 산과 덕임을 연기한 두 배우의 케미가 무척 잘 어울렸습니다. 둘은 어두운 숲길을 걷다, 환하게 비춰주는 등불이 여러 개 걸린 길로 안전하게 들어섭니다.
제 생각에 영빈은 덕임의 미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아들 세자를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영빈처럼, 덕임의 실제 모델 의빈 성 씨의 삶 또한 슬프고 애절했거든요. 영빈이 떠났으니 이산 입장에서는 자신을 지켜주던 큰 산 하나를 잃은 셈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작고 보잘 것 없어 낮은 언덕조차도 되지 못하는 존재지만, 훗날 영빈만큼 커다란 산이 되어 자기를 지켜줄 동무를 하나 얻었으니 이 어두운 밤길에서 이산은 큰 행운을 만난 겁니다. 떠나는 영빈이 남긴 뜻밖의 선물이라고 할까요. 게다가 그 장소가 미래의 자신이 소유할 정원이었으니, 이 또한 의미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01회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다음에는 드라마에 나오는 장소 몇 곳에 대해 더 알아볼게요.
오늘은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 몇 곳을 소개해드릴게요. 직접 산책을 나가셔도 좋을 장소들이랍니다.
실제 이산(정조)의 글씨를 볼 수 있는
창덕궁 존덕정
02회 앞부분에 덕임과 경희가 필사 모임에 참여했다가 돌아오면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덕임은 궁녀로 살지만 ‘선택이라는 걸 하면서 살고 싶다’는 얘기를 합니다. 이 ‘선택’은 두고두고 덕임의 정체성을 정확히 보여주는 단어인데요.
덕임은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 앞에서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능동적인 의지로 원하는 방향을 선택하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 대사가 주체적인 궁녀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선언처럼 들렸죠. 바로 이 장면에서 두 사람 뒤로 정자 한 채가 보이는데요. 창덕궁 후원에 있는 ‘존덕정(尊德亭)’입니다.
앞서 01회에서도 설명드렸듯, 산과 덕임이 창덕궁에 있었을 가능성은 적은데요. 이곳 후원의 경치가 워낙 빼어나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촬영지로 자주 등장합니다.
실제 역사에서 정조는 즉위 다음해에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겨 갔습니다.덕분에 창덕궁에는 실제 정조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어요. 그중 대표할 만한 곳이 바로 존덕정이고요.
창덕궁 후원에는 멋진 정자가 많은데, 존덕정도 그중 하나입니다. 존덕정은 ‘관람지’라고 하는 연못 뒤편에 있습니다. 큰 건물은 아니고, 성인 서너 명 들어가 앉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육각형 지붕을 겹으로 올린 모습이 무척 근사하죠. 이곳은 인조 때(1644) 세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옷소매 붉은 끝동>이 설정한 시대에도 그곳에 있었다는 얘기지요.
직접 존덕정에 가보신다면 꼭 눈여겨봐야 할 것들이 있어요. 우선 지붕 안쪽에 걸어둔 현판을 주목해주세요. 정조가 직접 짓고 쓴 글이 걸려 있거든요. 긴 글의 시작 부분은 이렇게 됩니다.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만 개의 냇물을 비추는 하나의 밝은 달의 주인이 직접 쓰다
‘만 개의 냇물’이란 신하를 말합니다. ‘밝은 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정조 자신을 가리키는데요. 수많은 냇물을 비추는 달빛은 오직 나 하나뿐이란 사실을 잊지 말라며 신하들에게 은근 압박하는 내용이랄까요. 대단한 자신감 아니고는 쓸 수 없는 글입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이 그리는 어린 이산의 모습도 이 글씨를 썼던 훗날의 정조를 빼닮은 듯해요. 현판이 지금처럼 존덕정에 걸린 시기는 정조 즉위 후입니다.
천장 중앙에 걸린 용 두 마리 장식도 빼놓지 않고 봐주세요. 부리부리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마리 용이 천장에 달려 있습니다.
존덕정에 올라가 앉으면 아름다운 주변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어요. 특히 비 오는 날의 분위기가 매우 운치 있습니다. 봄가을에 궁궐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이때 존덕정을 개방하고는 했어요. 기회가 된다면 이때 한 번쯤 존덕정에 올라가 정조의 마음처럼 달빛이 비췄을 연못 경치를 감상해보기를 추천합니다.
이산과 성덕임이 다시 만난 장소
동궁(東宮)
01회에서 어린 산과 덕임은 후원에서 처음 만난 후 헤어집니다.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엇갈리죠.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시간은 흐르고 둘은 성장해 또 한 번 우연히 만납니다. 그리고 애틋한 마음을 키워가는데요. 그 장소가 바로 ‘동궁’입니다.
사극에서 세자를 ‘동궁’이라고 하는 걸 들어 보신 적 있죠? ‘동궁’이란 세자의 별칭 같은 겁니다. 세자는 미래의 권력자잖아요. 해가 동쪽에서 뜨듯, 세자가 머무는 방과 학교(세자시강원)를 궁궐의 동쪽에 두었는데요. 이런 점에서 착안해 세자를 동궁으로 부르는 겁니다. 세자는 이곳에 머물며 왕이 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경희궁의 동궁에는 경현당과 문헌각, 집희당, 경선당 등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중 책을 보관하던 건물이 ‘문헌각’이에요.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산과 덕임이 아웅다웅 다투며 사랑을 키우는 실제 장소가 어디일지 짐작해 본다면 여기 문헌각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세자는 주로 동궁에 머문다는 점에서 성장한 산과 덕임이 동궁에서 다시 만난다는 설정은 첫 만남의 장소를 후원으로 설정했던 것처럼 좋은 선택 같습니다.
경희궁의 동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좋겠지만, 현재 그곳엔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어 실제 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궁궐 중 현재까지도 동궁 영역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을 소개해드리려고 해요. 바로 창덕궁 ‘성정각’과 ‘중희당’, ‘승화루’ 주변입니다.
이곳들은 창덕궁의 동궁에 해당합니다. 세자는 ‘성정각’에서 여러 스승을 모시고 공부를 했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이산이 스승 여러 명과 함께 공부하는 장면과 비슷했을 겁니다.
‘중희당’은 세자가 머물던 방인데요. 17회에서 정조의 첫 아들, 문효세자가 세상을 뜨는 안타까운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가 바로 중희당이에요. 현재 이 건물은 사라지고 바닥에 건물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매표소와 대기 장소로 쓰이는 곳이 바로 중희당 터입니다.
성정각과 맞은편에 자리한 담장을 보면 건물 세 개가 이어져 있는데요. ‘칠분서’와 ‘삼삼와’, ‘승화루’입니다. 모두 동궁 영역에 속한 건물들이죠. 세 건물이 이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규모가 매우 큰 건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주목할 곳은 책을 보관하던 서고인 ‘승화루’입니다. 궁궐 안에는 서고가 여러 군데 있지만, 이곳은 세자만을 위한 서고였어요. 산과 덕임이 만났던 바로 그 서고처럼 말이죠.
실제로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창덕궁 후원에 주합루를 짓고, 이 건물 1층을 왕립도서관처럼 이용했어요. 지금도 후원에 들어가면 볼 수 있습니다. 부용지라는 연못을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2층 건물입니다. 왕의 도서관 이름이 주합루라는 점에 빗대어 세자의 도서관이었던 승화루를 ‘소주합루’라고도 불렀습니다.
소개해드린 ‘성정각 – 중희당 – 칠분서 – 삼삼와 – 승화루’를 한데 묶어 창덕궁의 동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산과 덕임이 만나 사랑을 키우는 장소로 창덕궁을 설정했다면, 바로 이 건물들이 주요 배경으로 나올 수 있었겠지요?
궁궐 덕후가 본 <옷소매 붉은 끝동> : 03회
영조와 이산을 둘러쌌던 장막 그림의 의미는?
03회에서 이산은 벌을 받습니다. 궁궐에 침입한 호랑이를 잡는다는 이유로 ‘타위(打圍)’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타위’란 임금의 사냥을 말합니다. 이때 ‘임금의’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호랑이로부터 궁궐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냥을 했다고는 하지만,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 때 아직 임금이 아닌 왕세손이 임금의 놀이를 허락 없이 벌였다는 건 많은 이들의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일이었죠.
호랑이를 잡았던 이산의 화살이 용(龍, 임금)에게도 향할 수 있지 않겠냐고 의심하는 이들이 생길 수도 있거든요. 이산은 영조가 머물고 있는 건물 마당 앞에 꿇어 앉아 용서를 빕니다.
할아버지 영조는 당장 손자 이산을 용서해주고 싶지만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왕세손을 향한 일부 신하들의 불신을 해결해주어야 했기 때문이죠. 용서해줄 정치적 명분을 찾으며 기다리고 있었다고 할까요.
늦은 밤 영조는 마당에 꿇어앉은 손자 이산에게 갑니다. 이때가 참 명장면이었어요. 내관에게 명령해 영조 자신과 이산의 주변으로 커다란 장막을 치고는 그 안으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바로 장면요. 정말 깜짝 놀랐거든요.
장막 안에서 영조는 이산을 끌어안으며 용서해줍니다. 이때 영조와 이산을 둘러싼 장막에 그려진 그림이 보이는데요. 부리부리한 눈으로 상대를 쏘아보는 듯한 흑룡 한 마리가 할아버지와 손자의 포옹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을 극장 스크린으로 봤으면 참 좋았겠다 싶었던 장면이었어요.
이 장면에서 놀란 건 단지 촬영이 좋아서가 아니었어요. 장막에 그려진 커다란 흑룡 때문이었습니다. 왜 하필 흑룡을 그린 장막으로 영조와 이산을 감쌌던 걸까요? 잠시 이산이 태어날 당시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사실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첫 아들은 이산이 아니었습니다. 1750년 장남 의소세손(懿昭世孫)이 태어났지만, 겨우 2년 후 1752년 3월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같은 해 9월에 낳은 아들이 바로 이산이었습니다. 아래 기록은 이산이 태어날 당시를 기록한 자료입니다. 내용 중 장헌세자가 사도세자이고요.
창경궁(昌慶宮)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탄생하였다. 처음 장헌세자가 신룡(神龍)이 구슬을 안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꿈을 깬 다음에 손수 꿈속에서 본 대로 그림을 그리어 궁중 벽에 걸어 놓았었다.
-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1776) 3월 10일
눈치채셨나요? 사도세자가 아들 이산의 탄생을 기다리며 꾼 태몽이 흑룡 꿈이었어요. 이산을 임신했을 당시 이산의 어머니 혜경궁은 주로 창경궁 경춘전에 머물렀는데요. 이산은 바로 이곳 경춘전에서 태어납니다.
첫 아들을 잃은 지 몇 개월 뒤, 둘째 아들이 태어났으니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게다가 꿈에서 범상치 않은 흑룡까지 보았고요. 평소 그림 그리기를 즐기고, 실력도 좋았던 사도가 그 꿈을 그림으로 남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이 그림은 경춘전 벽에 걸어두었다고 전하지만, 안타깝게 현재 그림의 행방은 알 수 없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이 그림을 참 절묘하게 이용해 명장면을 만들었습니다. 이산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신하들이 자신이 왕세손을 용서하는 모습을 혹여 볼까 싶어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등장시킨 장막. 그 그림에 이산의 탄생을 기뻐하며 아버지 사도가 그린 흑룡을 그려넣다니!
‘흑룡 장막 에피소드’는 <옷소매 붉은 끝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압권이었어요. 영조와 사도, 이산에 이르는 3대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을 압축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보여준 장면이었습니다. 이러니, 옷끝동을 좋아할 수밖에요!
궁궐 덕후가 본 <옷소매 붉은 끝동> : 04회
산과 덕임의 마음에 피었을 연꽃 한 송이
<옷소매 붉은 끝동>의 많은 장면은 창덕궁 후원에서 촬영했습니다. 후원은 창덕궁 뒤편에 있는 왕의 정원인데요. 사계절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어 처음 가보는 분들은 감탄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후원에 대한 이야기는 01회 이야기에서 다루었어요.
둘의 첫 만남은 후원, 둘이 아웅다웅하며 마음을 쌓아간 장소가 동궁의 서고였다면, 둘의 사랑이 처음 움트는 곳은 04회의 마지막쯤 산이 덕임에게 ‘세심함’에 대해 말하며 칭찬하는 장면을 촬영한 ‘애련지(愛蓮池)’였던 것 같습니다.
애련지는 창덕궁 후원에 들어갔을 때 두 번째로 나오는 연못입니다. 디귿자를 옆으로 세운 모양의 ‘불로문(不老門)’이라는 문을 통과하면 나옵니다. 건너편에는 ‘애련정(愛蓮亭)’이라는 정자가 있어요. 이 부근에서 촬영을 했더라고요.
이곳의 이름에 붙은 ‘애련(愛蓮)’이라는 단어가 참 예쁩니다. ‘연꽃을 사랑하는 마음’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이름을 붙인 이는 숙종(19대) 임금입니다. 숙종은 영조의 아버지예요. 이산에게는 증조할아버지가 되겠죠.
증조할아버지 숙종이 직접 이름 붙인 후원의 근사한 풍경 앞에서 훗날 자신의 배우자가 될지 모를 사람에게 다정한 말을 건넨 거죠. 이때 산의 눈에는 덕임이 연꽃처럼 예뻤을까요. 또는 산의 말을 들은 덕임의 마음에는 연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났을까요. 이 장면은 연꽃처럼 무척 우아했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의 또 다른 주인공은 ‘궁녀’들입니다. 덕임과 그의 동료들의 활약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죠. 다음 글에서는 궁녀들 이야기를 해볼게요.
궁궐 덕후가 본 <옷소매 붉은 끝동> : 05회
궁녀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05회에서 중요한 이벤트는 ‘계례(筓禮)식’인데요. 일종의 성인식을 의미합니다. 남자가 상투를 틀고 관모를 쓰는 의식을 ‘관례(冠禮)’라고 하듯, 여자도 계례를 통해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으며 비로소 성인으로 공식 인정을 받는 거죠.
계례식 예행연습을 하느라 계례 옷을 입고 머리를 올린 덕임을 보고 산이 놀라 뛰어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할아버지 영조의 후궁이 되어 머리를 올린 줄 알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보통은 혼례를 올리면 머리를 올리잖아요. 그런데 혼례를 올리지 않아도 15세를 전후해 계례식을 올렸습니다.
왕의 즉위식이나 혼례 같은 행사는 많이 보았어도 궁녀들의 계례식을 이렇게 자세하게 다룬 드라마는 처음인 듯해요. <옷소매 붉은 끝동>의 큰 매력이 바로 이 부분인데요. 지금까지 궁녀가 주인공으로 나온 사극은 많았지만, 궁녀 집단에 집중한 드라마는 없었거든요. 오늘은 궁녀즈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생각시? 항아님?
궁녀는 보통 6~7세쯤 궁궐에 들어갑니다. 이보다 더 어린 4세 때 들어가기도 하고, 늦게는 13세 때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어요. 궁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궁녀가 되는 건 아닌데요. 처음 이들을 부르는 호칭은 ‘생각시(애기나인 또는 견습나인이라고도 함)’입니다.
생각시는 일종의 ‘인턴 궁녀’라고 할 수 있어요. 계례를 치를 때까지 스승 상궁 밑에서 궁궐의 기본 예법과 글 등을 배우죠. 덕임이 스승 상궁인 서 상궁(장혜진) 곁에서 배우는 것처럼 말이죠.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홍덕로가 덕임에게 ‘항아님’이라고 부르는 건 생각시를 존중해 높여 부를 때 쓰는 호칭이에요.
생각시는 궁의 7개 부서에서 일했습니다. 왕족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일하는 부서가 ‘지밀(至密)’이에요. 덕임은 글씨를 잘 쓰는 덕에 산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심부름을 하는 지밀나인으로 일하죠.
왕의 옷이나 이부자리, 병풍 등에 수를 놓는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는 ‘수방(繡房)’입니다. 수방과 비슷하게 왕족의 옷, 이불, 베개 등을 만드는 업무는 ‘침방(針房)’에서 담당했는데요. 덕임의 친구 ‘배가 경희(하율리)’가 바로 침방나인이었습니다. 궁녀즈가 모여 경희를 도와 함께 바느질하는 장면이 자주 나왔었죠.
왕과 왕비의 세숫물과 목욕물을 준비하는 부서는 ‘세수간(洗手間)’이었습니다. 덕임의 친구 ‘김가 복연(이민지)’이 세수간나인이었죠. 지난 3회에서 필사한 책을 바치기 위해 영조를 만나러 가야 할 덕임이 복연을 붙잡고 영조의 심기를 묻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귀를 씻으셨다고, 전하의 지금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며 정보를 주는데 세수간나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빨래와 다림질 등은 ‘세답방(洗踏房)’에서 담당했습니다. 덕임의 친구 ‘손가 영희(이은샘)’가 세답방나인이었고요. 왕의 식사는 ‘소주방(燒廚房)’에서, 왕의 디저트는 ‘생과방(生果房)’에서 담당했죠.
현재 경복궁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해 왕족이 먹던 다과를 재현해 판매하는 ‘생과방’이란 이름의 카페를 운영 중입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영조나 이산이 탕약을 마신 후 먹던 편강도 맛볼 수 있어요. 조선시대 왕족이 된 기분을 느끼며 한과나 차를 맛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한여름과 한겨울에는 운영하지 않으니 방문 전 꼭 확인하셔야 해요.
이들 부서 사이에도 업무의 특성상 격이 존재했는데요. 권력자를 가장 가까이서 돕는 지밀부서의 중요성이 가장 높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세수간, 세답방, 소주방, 생과방의 일이 매우 힘들었을 테고요.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보여준 <옷소매 붉은 끝동>
지금까지 많은 사극 드라마와 영화에서 궁녀들을 왕족이나 신하들에게 무시 받거나 잔심부름이나 하는 존재로 그려졌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가 오랜 시간 수련을 통해 성장한 궁녀는 궁궐 운영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국가 공무원이었어요.
물론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처럼 궁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비밀 조직을 결성하거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 다음 왕을 선택한다는 설정은 실제 역사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곳에 엄연히 있었지만, 마치 모두가 의식하지 않았던 궁녀란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켜준 게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성과가 아닐까 해요.
조 상궁, 서 상궁으로만 불리던 그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늘 고개 숙인 채 서 있어 보이지 않았던 그들의 얼굴에 조명을 비춰준 드라마라는 점에서 저는 <옷소매 붉은 끝동>이 참 좋았습니다.
궁궐 덕후가 본 <옷소매 붉은 끝동> : 06회
이산의 스웩을 엿보다
이산은 어릴 때부터 정적(政敵), 그러니까 정치적인 경쟁자와 적들에게 심한 견제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여러 차례 암살의 위기를 겪기도 하는데요. 이산이 세손 시절부터 쓴 《존현각일기》에 당시 상황이 잘 나와 있습니다.
이때 적도(賊徒)와 역당(逆黨)들이 흉모(凶謀)를 빚어내고 얽어내어 위태롭게 만들려는 계략과 협박하려는 꾀가 날로 더욱 급박하게 이루어지니, 나는 낮에는 마음을 졸이고 밤에는 방 안을 맴돌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 흉도들이 내가 거처하는 집을 엿보아 말과 동정(動靜)을 탐지하여 살피지 않는 게 없었기 때문에 또한 옷을 벗고 편안히 잠을 자지도 못하였다.
《존현각일기》, 1775년 윤10월 5일
하루도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던 이산은 이때 책을 읽으며 공부를 했다고 해요. 뿐만 아니라, 암살의 위기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예도 열심히 갈고 닦았습니다. 어찌 보면 인간 이산의 삶은 참으로 힘겹고 외로웠을 듯해요.
겸손까지 계산하는 이산
06회에서는 이산이 활을 쏘는 장면이 있어요. 옆에서 덕로가 신경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데도 모두 명중합니다. 이때 두 사람의 대화가 재밌습니다.
홍덕로 : 저 화살은 빗나갈 줄 알았습니다. 늘 마지막 화살은 빗맞추셔서….
이산 : 생각 없이 쏘다 보니, 그만 다 맞춰버렸군. 겸양의 미덕을 보여주지 못했어.
이만한 스웩이 있을까요. 생각 없이 쏘아서 모두 명중이라니요.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에피소드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이산의 활솜씨는 대단했다 전합니다. 아래 기록을 잠깐 보겠습니다. ‘상’이 바로 정조 이산입니다.
상이 활을 쏘아 연거푸 명중시키고는 제신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가 요즈음 활쏘기에서 49발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모조리 다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 《정조실록》 36권, 정조 16년(17692) 11월 26일
모조리 명중시킬 수도 있지만, 한 발쯤 일부러(?) 빗나가게 쏘고 그냥 49발만 맞췄다는 건데요. 산과 덕로가 대화를 나누던 저 장면은 위 기록을 보고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사실 기록만 보자면 정조가 잘난 체하는 캐릭터로만 보일 수도 있어요. 위 기록이 적힌 이때 정조의 나이가 마흔. 당시로선 적은 나이도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어떤 면에선 남들에게 일부러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반대파들에게 ‘내가 이렇게 무예를 연마 중이니, 나를 함부로 해치려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일종의 엄포라고 할까요.
이산의 진짜 활솜씨는 09회에서 그려집니다. 능행에 나간 이산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요. 이때 이산의 멋진 활쏘기를 볼 수 있죠.
다음 글에선 산이 덕임에게 반발자국쯤 다가가면서 주는 귀여운(?) 선물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 05회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해 소개합니다.
우리의 주인공 덕임이 계례식이 열리는 아침에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던 거죠. 중요한 계례식에 늦다니! 큰일이 났습니다. 궁녀 체면은 잊고 덕임과 서 상궁은 계례식 장소까지 부리나케 뛰어갑니다.
계례식이 시작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덕임이 도착하지 않아 궁녀 친구들은 걱정스럽습니다. 드디어 덕임과 서 상궁이 행사 장소에 헐레벌떡 들어와 자신들의 자리에 서는데요. 이때 덕임이 얼마나 급하게 뛰어들어왔는지를 보여주는 디테일한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덕임의 신발입니다.
제조상궁 마마님도 모시고, 동료 궁녀들도 모두 참여해 진행하는 엄숙한 계례식이다보니 당연히 신발 한 켤레라도 정리정돈이 확실히 되어 있어야 할 텐데…. 위 사진을 보면 덕임의 신발이 그만 삐뚤어진 모양으로 벗겨져 있어요. 그렇다면 덕임이 들어오기 전 행사장 모습은 어땠을까요?
계례식에 지각한 덕임의 자리만 비어 있습니다. 모든 궁녀들의 자세는 물론, 신발까지 가지런히 놓여 있고요. 위 두 사진은 언뜻 보면 같은 장면 같지만, 자세히 보면 마치 다른그림찾기를 하듯 신발 모양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소한 디테일까지도 신경 써 만든 <옷소매 붉은 끝동>의 재미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궁궐 덕후가 본 <옷소매 붉은 끝동> : 07회
이산이 덕임에게 건넨 로맨스 굿즈, 감귤
04회에서 산은 ‘세심함’이라는 단어로 덕임의 마음을 살짝 흔들어 놓았습니다. 둘이 서 있던 바로 옆 애련지 연못 수면에 잔물결을 일으키듯 말이죠. 07회에서 산은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덕임을 향한 마음을 드러내는데요.
산은 궁중 온실에서 키웠다는 ‘감귤’을 먹지 않고 보관해뒀다가 덕임에게 몰래 줍니다. 과일 한 개로 마음을 전하려는 산의 모습이 귀엽게도, 로맨틱하게도 보이는데요. 그런데 감귤을 본 덕임의 반응이 조금 이상합니다. 엄청난 선물을 받은 것처럼 정색하며 거절을 하더라고요. 고작 감귤 하나뿐인데 말이죠.
조선시대 때 감귤은 결코 작은 선물이 아니었어요. 감귤은 궁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상에 올리는 과일이었습니다. 중요한 행사 때나 나오던 귀한 음식이었던 거죠.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날엔 먼 지방에서 재배한 과일이나 작물이 서울까지 오는 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조선시대 때는 달랐겠죠. 지금도 귤은 제주도에서 재배하는 과일이잖아요. 조선시대 때 제주도에서 재배한 과일을 궁궐이 있는 한양까지 갖고 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때 감귤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공을 세운 신하나 성균관 유생들에게 왕이나 왕비가 선물로 내리는 과일이기도 했고, 심지어 감귤을 뇌물로 바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드라마 속 서 상궁이 어린 나인들이 감귤 하나 맛보겠다고 싸울지도 모른다며 미리 걱정을 했던 거죠. 그렇게 귀한 과일을 산이 덕임에게 건넨 겁니다. 마음에 둔 사람에게는 소중한 물건을 줘도 아깝지 않으니까요.
감귤에 담긴 진짜 마음
그런데 우리의 덕임! 산이 주는 그 귀한 감귤을 받지 않더라고요. ‘수라상에나 올릴 귀한 과일’이라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죠. 산의 마음이 서운할 수밖에요. ‘순순히 받고 기뻐하기만 하면 될 텐데’ 겨우 과일 하나를 두고 정색하는 덕임에게 괜히 화를 냅니다. 그럼에도 덕임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귀하고 과분해 처음부터 원치 않았으니’, 자신에게 감귤보다는 차라리 ‘사양할 자유’를 달라고 하면서요.
감귤 하나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감귤은 곧 상대를 향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산은 감귤 하나를 건네며, 딱 이만큼 덕임에게 다가가고 싶었을 거예요. 덕임 역시 감귤을 받는다는 건 산의 마음을 그만큼 허락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고요.
덕임이 정말로 사양하고 싶었던, ‘귀하고 과분해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대상은 감귤이 아니라 실은 왕세손 이산이라는 존재였을 겁니다. 그 마음을 받거나 거절하는 결정을 자신이 직접하고 싶었던 걸 테고요.
감귤을 주는 사람이 왕세손이 아니었다면 덕임은 그 귀한 과일 맛을 봤을지도 모르겠어요. 07회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산과 덕임의 밀당은 이어집니다. 때론 애틋하게, 때론 안타깝게 말이죠.
정조가 낚시하던 장소, 부용지
07회에는 궁궐 어딘가에서 이산과 영조가 나란히 앉아 낚시를 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바로 이곳은 창덕궁 후원에 있는 ‘부용지’라는 연못입니다. 창덕궁 후원에 입장하면 처음 나오는 장소죠.
부용지는 사각형 모양의 연못 이름입니다. 이산과 영조가 낚싯대를 던져놓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연못 건너편에 정자 한 채가 잠깐 보이는데요. 이곳의 이름은 ‘부용정’이고요. 연못 한가운데에 떠 있는 원형 인공 섬도 잠깐 보입니다.
실제 이산은 왕이 된 후 신하들을 불러 후원에서 연회를 즐기기도 했는데요. 시를 짓는 놀이를 하곤 했대요. 이때 정조가 내준 시제(詩題)에 맞춰 시를 바로 짓지 못하는 신하에게는 연못 가운데 떠 있는 그 인공섬으로 잠시 유배를 보내기도 했답니다.
이 벌칙을 받아 인공 섬으로 유배를 떠난 신하들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정약용도 있었다 해요. 정조가 내준 시제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 유명한 정약용도 시를 짓지 못했던 걸까요.
궁궐 덕후가 본 <옷소매 붉은 끝동> : 08회
사도가 이산을 위해 남긴 선물
추위를 막기 위해 썼던 모자, 휘항의 등장
<옷소매 붉은 끝동>의 궁녀 중 박 상궁이란 인물이 있습니다. 출연 비중은 많지 않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08회에서 박 상궁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이산에게 어떤 물건을 전하려 합니다. 그러다 제조상궁 조 씨에게 납치를 당하고 말죠.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박 상궁이 이산에게 전하려던 물건은 ‘휘항(揮項)’이었습니다.
휘항은 조선시대 남자들이 한겨울에 쓰던 모자입니다. 안쪽에 털가죽을 붙여 머리에 쓰면 체온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죠. 그런데 세답방에서 일하는 나이든 상궁이 왜 이산에게 휘항을 갖다 주려는 걸까요. 시간을 돌려 다시 ‘임오년의 그날’에 잠시 다녀와 볼게요.
당시 영조와 사도의 갈등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도는 내관과 궁녀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죠. 결국 역모를 저지르려 한다는 소문까지 영조의 귀에 들어가고 맙니다.
이대로 둘 수만은 없다고 판단한 아버지 영조는 어려운 결심을 하고는 아들 사도를 부릅니다. 사도는 이대로 아버지에게 가면 죽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데요. 아내 혜경궁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학질이 걸렸다고 말씀드리려고 하니 세손의 휘항을 가져오라.”
한여름이었던 이때 자신을 죽이려고 부르는 아버지에게 가서는 학질에 걸렸다는 꾀병이라도 부리려고 한겨울에 쓰는 휘항을 갖고 오라는 거였습니다. 자신의 휘항도 아닌, 아버지가 그토록 아끼는 손자 이산의 휘항을 가져오라고 한 건 혹시라도 그 휘항을 보고 손자를 생각해 자신을 살려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을 거라 추정합니다.
사도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혜경궁은 아들 이산의 휘항이 아니라 사도세자 자신의 것을 쓰고 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합니다.
“내가 오늘 나가 죽을 터이니 세손의 휘항을 쓰지 못하게 하는 심술을 알겠네!”
이것이 사도와 혜경궁이 나눈 마지막 대화입니다 이렇게 영조 앞에 불려 나간 사도는 그대로 뒤주에 갇히고 8일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이때의 슬픔을 혜경궁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간장은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앞이 캄캄하니 (…) 만고에 나 같은 모진 목숨이 어디 있겠는가!”
위 대화는 모두 혜경궁이 직접 쓴 《한중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08회에 등장하는 박 상궁은 바로 사도세자의 보모상궁이었다는 설정으로 나옵니다. 정치적 반대파들에게 견제 받으며 늘 추운 계절을 보내고 있을 이산을 감싸주기 위해 과거의 사도가 박 상궁의 손을 빌려 아들에게 휘항을 전하려 했던 것 같아요. 휘항은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자만, 이후에 중요한 단서로 다시 나옵니다.
이후 이야기는 책과 ‘궁궐을 걷는 시간’ 산책으로 전하려고 해요.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보는 내내, 그리고 드라마 속 궁궐을 소개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할 얘기가 무척 많은 드라마였어요. 덕분에 연말과 연초를 즐겁게 보냈고요.
<옷소매 붉은 끝동> 연재 글은 일단 여기서 마무리하려고 해요. 나누고픈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책자로 만들 계획입니다, 드라마에 나온 실제 장소를 찾아가는 ‘궁궐을 걷는 시간’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소식 전할게요. 그동안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 궁궐을 걷는 시간, 역사 문화 콘텐츠 작가)
'잡다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盜跖之犬(도척지견: 도척의개) (0) | 2022.03.17 |
---|---|
직장생활을 잘 해낼수 있는 열가지 방법 (0) | 2022.03.14 |
최초의 태극기 누가 만들었나? (0) | 2022.01.07 |
일본에서의 恩 이란 (0) | 2021.10.21 |
조선은 왜 500년만에 망했나? (0) | 2021.09.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