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서 신은 인간과 자주 대화를 나눈다. 심지어 밤새 싸움도 한다. 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 신은 예수에게 조차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앞두고 큰 고통에 아버지에게 호소해 보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여 보낸 외아들이 너무 힘들어서 왜 나를 버리냐고 소리를 질러도 아무 대답을 듣지 못하고 죽게 내버려 둔다.
성경에서 예수는 그 당시 갈리리 지방 사투리인 아람어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나온다.
“E′li, E′li, la′ma sa‧bach‧tha′ni?”(Mt. 27:46, Mk 15:24). 이를 번역해 보면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요?”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사실 이는 구약의 시편에 나오는 말이다.
“אֵלִ֣י אֵ֖לִי לָמָ֣ה עֲזַבְתָּ֑נִי רָח֥וֹק מִ֜ישֽׁוּעָתִ֗י דִּבְרֵ֥י שַֽׁאֲגָתִֽי”(Psalm 22:2) 이를 번역해 본다면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요? 왜 나를 돕지 않고 멀리 계시나요? 내 울부짖는 소리를 멀리하시나요?”
신약의 기자들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구약을 많이 이용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래서 이 부분도 기자들이 각색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는 구약에 능통한 유대인이었으니 큰 고통 속에서 유대인들이 즐겨 암송하던 시편 구절을 저절로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그 어떤 해석이든 다 가능하니 이를 두고 굳이 논쟁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엄청난 고통 속에서 아버지인 신을 찾은 것은 분명함에도 신이 대답을 하거나 사람들은 들을 수 없어도 어떤 표징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수를 신과 동일시하는 신학을 전개한 요한이 쓴 것으로 전해진 복음에서는 아예 이런 울부짖는 예수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숨을 거두자마자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리며 신전의 장막이 둘로 갈라지는 이적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나온다. 심지어 마태복음에서는 무덤이 갈라지고 죽은 이들이 부활했다는 묘사까지 나온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이와 관련된 그 어떤 설명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당연히 각 복음서를 쓴 기자들의 예수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신은 예수에게만 침묵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늘 침묵했다. 그래서 이러한 신의 긴 침묵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이 전쟁에 참여한 이들은 소련을 빼고는 모두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그들끼리 살육을 하는 것도 모자라 야훼 신을 인간 역사 안에 드러낸 유대인마저 대량살상을 해도 신은 침묵 했다. 물론 일부 신학자들은 신이 말을 했으나 인간이 귀를 닫아서 못 들었다는 해석을 한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매우 부족한 주장이다.
그런데 인류의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도 신의 말을 들은 사람은 아직 없다. 물론 일부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에는 ‘분명히’ 신의 목소리를 들었고 심지어 신을 ‘보았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적 체험에 머무는 것이기에 객관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없는 주장들일뿐이다.
인간과 자유롭게 교제하던 구약의 신은 이집트 탈출 시대부터 오로지 자신이 선택한 예언자와만 대화를 나누었다. 그 외의 인간들은 그 예언자의 신탁을 전해 들을 뿐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는 아예 예언자와도 대화를 끊었다. 물론 바울이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성경 구절이 나오지만 그것의 신인지 예수인지 아니면 천사인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길은 전혀 없으니 타당성이 부족하다. 외아들인 예수에게도 침묵한 신이 바울에게 말을 걸었다고?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2000년 가까이 신이 침묵하고 있음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과의 대화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 대화의 유일한 방법은 기도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기독교 신자들, 특히 20세기 들어와 발흥한 오순절 교파 계통의 신자들은 마치 무당이 접신을 하듯 신적 경험을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예수의 목소리와 모습을 직접 체험하고 그 은총을 몸으로 느꼈다는 보고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런데 가톨릭의 경우는 신과의 직접 대화에 대한 보고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라는 형식으로 체험한 신적 계시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 성모 마리아는 유럽을 중심으로 발현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마침내 아시아 대륙에서도 발현했다고 보고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신이 직접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것이 제삼자의 객관적인 검증까지 받았다는 사례는 실질적으로 단 한 번도 없다. 왜 그런가? 신은 왜 그리도 끈질기게 너무 사랑해서 외아들마저 서슴없이 내어준 인류에게 침묵하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신의 목소리를 듣거나 모습을 보면 인간이 죽기 때문이라는 다분히 구약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그런 설명은 유대인의 민족 신에 대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설파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성숙된 오늘날의 기독교는 비록 그 뿌리를 유대교에 두고 있지만 유대교가 아니다.
그렇다면 신의 침묵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은 무엇인가?(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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