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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우리는 왜 친일파 청산에 실패했을까?(꼭 알아야 할 근대사)

by 까마귀마을 2021. 3. 20.

우리가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인류의 발자취는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데, 실수를 거듭하지 않고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형성 과정에는 일제강점기를 벗어나지 못한 비극이 반복되었고, 아직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실질적인 대한민국의 역사가 시작된 1945년 8월 15일로 돌아가 봅시다.

물론 헌법에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 3월 1일의 임시정부 수립으로 기록되어 있고, 혹자들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주장해야 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에 관한 것은 글 후반부에 말씀드리도록 하고 일단은 광복절로 가보지요. 일제강점에서 해방된 이 날은 역설적으로 일본에서는 종전기념일입니다. 일본은 전쟁에서 졌다거나 패망했다는 단어를 쓰지 않고 일왕이 국민들을 불쌍히 여겨 전쟁을 끝냈다고 역사책에 적고 있지요. 정신승리의 극치를 달리고 있습니다.

 

                                                                     몽양 여운형 선생

 

8월 15일 아침, 조선총독부는 여운형과 교섭하여 일본인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받으려 합니다. 여기서 먼저 여운형에 대해 말씀드리면 3.1운동 이후로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김구와 임시정부 수립에도 관여합니다. 운동, 외국어, 풍채, 인맥 등 못 하는 것이 없는 엄친아였고 평생 일본과 대립하며 해방을 위해 노력합니다. 오죽하면 조선총독부 서열2, 3위가 ‘지금 여운형을 건드렸다가는 조선 전체에서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난 독립투사들, 민중들은 8월 15일 저녁이 되어서야 일어나는 일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여운형이 조선총독부와 교섭한 것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에 총칼을 지니고 있던 것은 아직 일본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실제로 드라마에서처럼 8월 15일에 바로 군중들이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은 거짓입니다. 36년이라는 일제강점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인데, 35세 이하는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를 본 적도 없으면 태극기와 한글은 일부 지식인과 노인들만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20세 이하의 학생들은 우리나라가 망했는데 왜 만세를 불러야 하는지 의아해했다고 합니다. 일본과 우리나라가 같은 나라라고 평생 배운 탓이죠. 북한이 하고 있는 세뇌가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16일이 되어서야 무슨 일인지 파악한 사람들이 뛰쳐나와서 만세를 불렀지만 일본경찰은 9월 9일까지 건재했고 위안부와 징용, 징병, 수탈, 학살에 관한 자료들을 불태우기 바빴습니다. 또한 광복 이후에도 만세를 부르는 조선인을 총으로 쏴 죽인 경우도 빈번했습니다.

 

1945년 9월 9일에는 조선총독부 대신 미군정이 세워진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 우리 국민들의 정부는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한반도가 해방된 것이니 한반도의 문제는 승전한 연합군이 풀어야 한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답변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너네는 한 일이 없으니 입다물고 있어라’라는 통보였지요. 애석하게도 9월에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한반도로 진군하려 했으나 8월에 일본이 항복해 버리면서 대한민국은 연합군에 들어갈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따라서 미군의 정부(미군정)가 한반도에 들어오게 되면서 여운형, 김구 등이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의 조직은 미군정에 의해 부정되고, 조선인들이 주체적으로 조선인들의 정부를 세울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는 날아가고 맙니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은 북한 지역으로 들어오게 되고 38선은 서서히 단절되게 됩니다.

 

                                                                 대표적인 친일 경찰관 노덕술

 

그리고 1945년 9월 9일에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친일파 청산의 기회는 사라졌고, 현재까지 실현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미군정은 군인들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행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여 일제강점기에 공무원과 경찰로 있었던 조선인들을 그대로 기용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본한테 붙어서 독립투사들을 고문했던 친일파들을 그 자리에 그대로 놔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노덕술이라는 친일경찰이 있는데 이 사람은 광복 이후에도 경찰로 있으면서 독립투사인 김원봉(암살에 등장하는 그 김원봉 맞습니다)을 고문하기도 했고, 야인시대에 나왔던 임화를 고문하다가 죽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친일파이지만 이 사람은 군인이 되어 1968년에 자연사하기 까지 잘 먹고 잘 살았는데 그럴 수 있던 이유도 계속해서 짚어볼 것입니다. 참고로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때도 잡히지 않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자신이 해방 이후에 친일경찰에게 고문을 받아야 했다는 사실에 울분을 토하면서 홧병으로 죽습니다.

 

미군정이 조선인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자 조선인들은 정당을 만들어 미군정과 협력하려 했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당은 수백개가 넘어서 근대사 공부하는 학생들을 포기하게 하지요. 그래도 중요한 몇몇 당만 짚어보자면

 

김구의 임시정부가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

이승만의 아이들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김성수, 송진우의 ‘한국민주당’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싸움터였습니다

 

이 중에서 미군정은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지지했고,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과 연대하게 했습니다. 미군정이 한민당을 택한 이유는 냉전이라는 시대배경이 큰 역할을 합니다. 당시 미 군정에서 실시한 국민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의 정치성향이 70% 이상이 좌파였다하니  소련과 대립하고 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일단 확보하고 있는 남한만이라도 독립된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습니다. 여기서 한민당과 이승만은 미국의 말을 잘 들었지만 김구와 여운형은 통일된 한반도의 정부를 주장하면서 미군정의 눈 밖에 났고, 박헌영이 세운 정당은 공산당이라서 애초에 눈엣가시였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1945년 12월 16~2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이 개최한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되었다는 신탁통치 안은 이제 조선인들에게 극단의 선택을 강요했습니다. 여기서 신탁통치 안은 미․영․소․중의 4개 나라가 5년 동안 한반도를 위탁해서 통치한 이후에 한국민주정부를 설립한다는 안이었습니다. 물론 이후에 밝혀진 내용을 보면 소련은 이때 이미 따로 북한을 설립할 생각을 굳혔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래도 5년 신탁의 내용을 빼면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정부를 설립한다는 안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5년의 신탁통치에 대한 내용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신탁통치안은 반감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다

 

근거만 놓고 보면 매우 합리적인 내용이라도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100만 명의 희생을 막기 위한 한 명의 희생이라던가, 10년 후의 미래를 위해 참아야 하는 현재의 고난처럼 신탁통치도 조선인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심지어 당시 정세를 따져보면 그 방안이 그다지 합리적이라고 보기도 어려웠지요). 36년간의 지배에서 막 벗어난 조선인들을 신탁통치한다는 것은 또 다른 지배로 받아들여졌고 대대적인 반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방안을 반대했지요.

 

                                                           신탁통치 문제에 관한 동아일보의 기사

 

 

조선인들이 이 일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1945년 12월 27일에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내용이었습니다. 헤드라인은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독립문제 -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주장’이었고 이것을 근거로 사람들은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됩니다.

 

                                             신탁통치 찬반운동으로 인해 민족반역자의 정의가 바뀌게 된다

 

그리고 ‘민족반역자’에 대한 정의가 바뀌는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비극은 시작됩니다.

신탁통치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 ‘민족반역자’는 말 그대로 민족에 대해 반역한 친일파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아직은 국가가 안정이 되어있지 않아서 불거지지 않았지만 제대로 된 정부가 설립되면 민족반역자를 처벌하면서 친일파 청산이 이뤄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신탁통치에 대한 찬탁과 반탁이 대립하면서 민족의반역자는 친일파에서 신탁통치 찬성 세력으로 바뀌게 되면서 찬탁의 중심이된 공산당이 집중포화를 맞고, 친일파는 공산당을 때려잡았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게 됩니다.

 

이후에 북한이 설립되면서 ‘민족반역자’의 정의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나던 몇 달 만에 친일파에서 공산주의자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시기에 생성된 사상이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역사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박정희가 정권을 잡던 6-70년대를 거쳐 80년대 까지도 민족반역자는 공산주의자였고, 친일파 청산을 위한 기회는 단 한 번 있었지만(계속해서 다루겠습니다) 흐지부지 되었으며,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간간히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그 후손들의 상당수가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는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렇게 친일파 청산의 기회는 날아가고 대한민국은 반공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아직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충격적인 반전이 있습니다. 바로 1945년 12월 27일의 동아일보 기사가 잘못된 기사라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위에 말한 것처럼 대한민국의 방향을 바꿔버린 ‘동아일보 오보 사건’입니다. 그럼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봅시다. 실제로 신탁통치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정책이었고 미국은 신탁통치로 50년을 주장했습니다. 반면 소련은 신탁통치에반대하는 입장이었고 한다 해도 5년 이상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소련도 한반도를 생각해서 말한 것은 아니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미국이 주도권을 잡을 것 같으니 북쪽에라도 빨리 공산주의 정권을 성립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측 상단의 날짜는 12월 27일이라고 적혀있다

 

이것이 오보라는 또다른 증거는 발행날짜입니다. 미국이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소련이 찬성한다는 내용은 12월 27일에 나온 기사인데, 모스크바 3상회의의 선언문은 27일에 발표되었습니다. 신문은 하루 전에 찍어야 하고 지금처럼 전화로 바로 연락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동아일보는 나오지도 않은 공동선언문을 하루 전에 보도한 것입니다. 12월 30일에 조그맣게 실제 공동선언문을 실었지만 그때는 이미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싸우는 중이라 그런 기사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동아일보의 오보에는 미군정이 개입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당시 미군정은 남한지역의 모든 언론을 철저히 검열했기에 적어도 미군정의 용인 없이는 불가능한 보도였습니다. 또한 동아일보는 한민당의 기반세력이었기 때문에 송진우와 김성수 등의 한민당 친미세력과 미군정이 짜고 김구와 여운형, 박헌영 등의 중도와 좌익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그랬다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좌우합작운동의 중심인물들

 

결국 이 사건으로 우파는 반탁운동이 민족을 위한 운동이라는 프레임을 걸고 미군정의 지지를 바탕으로 세력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이때 한국독립당의 김구와 이승만이 민중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반면 사회주의 계열은 처음에는 반탁이었지만 1월부터 찬탁으로 바뀌면서 우파의 공격을 받게 되고 남한에서의 지지기반이 약화됩니다. 여운형과 김규식, 김성수 등의 중도파는 고심하면서 통일임시정부 설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펼치게 되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 와중에 중도는 반탁이 아니라면 민족반역자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점점 지지기반을 잃게 되고, 송진우는 반탁세력에게 암살까지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열광적인 반탁운동이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정부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1946년 1월 16일에 예비회담을, 3월 20일에 1차 회담을 개최합니다. 그러면서 이승만이란 인물이 점점 수면위로 부상하게 되는데...당시는 한반도 전체의 정부가 세워질 가능성도 있었고, 38선도 쉽게 넘나들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직까지는...

 

1946년 3월 20일의 미․소 공동위원회 1차 회담에서 소련은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한반도의 정치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찬탁을 주장한 공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삼고자 하는 소련의 주장은 미국의 예상범위였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반탁을 하지 않겠다는 문서에 사인을 한 정치인들은 끼워주자는 미국의 협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5월에 회담은 결렬되었습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

 

그러던 중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남한 각지를 순회하면서 연설하던 도중 정읍에서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할 것’이라는 발언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정읍발언’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진 김구는 이승만과 척을 지게 됩니다.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백범 김구선생은 이승만과 매우 두터운 사이였으나 정치적인 성향이 다른 관계로 갈등을 빚었고, 이후 한민당 총수였던 장덕수가 암살당할 때 이승만이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면서 둘은 결별하게 됩니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1심 공판

 

또한 1946년에는 공산당 세력이 더욱 축소되는 사건이 두 가지나 터지게 됩니다. 먼저 1946년 5월에는 공산당이 ‘해방일보’라는 신문을 인쇄하던 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찍어냈다는 혐의로 공산당의 2인자였던 이관술이 체포되고 조선공산당의 활동이 미군정에 의해서 금지되는데 이것이 바로 ‘정판사위조지폐’ 사건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조선공산당의 활동을 막기 위해 미군정과 우익 인사들이 조작한 사건이라는 의혹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9월 총파업에 들어간 부산 노동자들

 

1946년 10월에는 대구에서 10.1 사건이 터집니다.

이미 9월 23일에 부산에서 약 25만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유로는 식량난이었는데 미군정의 실책이 반복되면서 쌀값이 열배가 넘게 올랐고 저임금의 노동자들을 굶어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여기에 정판사위조지폐사건으로 세를 잃은 조선공산당은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9월 총파업을 이끌고 이것이 커져서 대구에서 10월 1일에 폭력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3개월간 경상도 전역에서 시민들이 일어났고 경찰과 군인들이 총격을 가하며 진압에 나서 신고된 것만 총 136명이 사망했고 8천여명이 구속되었습니다. 여담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형이었던 박상희는 당시 조선인민당의 간부였고, 이 사건 중에 경찰에 총격으로 사망합니다. 그에 대한 복수심으로 박정희도 잠깐 남조선노동당(조선인민당을 계승하여 설립된 당)에 입당하여 활약하다가 여,순반란 사건이후 벌어진 군 숙정작업에 검거되어 사형을 구형 받았지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요.

 

                                                                      대구 10.1 사건

 

9월 총파업은 조선공산당이 개입하여 일으킨 것이나, 이어진 대구 10.1 사건은 민중들이 들고 일어난 것임에도 공산당이 사주한 것으로 알려져 억울한 사망자의 유족도 오랜 세월동안 쉬쉬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은 활동이 금지되다시피 합니다. 공산당이 사주한 폭동과 민중들의 봉기라는 엇갈린 시선 중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이 사건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이 친일 행적이 있는 관리를 고용하고 북한에서는 실시된 토지개혁을 지연하여 공출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이것으로 인해 남한에서 공산당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하고 지하로 숨어들게 됩니다.

 

이후 1947년 5월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지만 결국 입장 차를 좁히지 못 해 결렬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끝까지 좌우합작을 주장한 여운형은 7월 19일에 암살되면서 좌우의 대립은 극단으로 치닫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설립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1947년 9월에는 결국 유엔에서 한반도에서 남한만의 총선거가 가결됩니다.

 

                                                           4.3 사건에서 희생된 제주도민

 

선거일은 1948년 5월 10일로 결정되었는데, 역시 순탄케 흘러가지는 않아서 4월에는 제주도 역사상 최악의 비극인 4.3사건이 터집니다.

1947년 즉 제주사건이 일어나기 1년전 3.1절 기념행사에서 어린이가 기마순경의 말발굽에 밟혀 다치는 사건을 발단으로 시작되어 4월 3일에 남로당 제주도 지부 무장대가 남한 총선거를 반대하여 들고 일어나 폭동을 일으킵니다. 제주도는 일제시대때 일본과 왕래하는 연락선이 있어  본토보다 문물이 깨여 있었고 광복후 일본등 해외에 나가있던 도민중 6만여명이 귀향해 상대적으로 선진제도를 접한 사람이 많았고 정치성향도 좌익이 우세하였고,  문제는 500명 정도로 추정되는 폭도들을 잡기 위해 제주도민 전체를 잡기 시작하면서 생깁니다. 육지에서 온 군경과 서북청년단(북한 서북지역에서 월남한 개신교도 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이며 반공단체로 빨갱이는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좋게 말하면 의용군, 나쁘게 말하면 우익의 정치깡패 집단이나 다름 없었고 이들은 군인이 아니었지만 군복을 입었고 일체의 보수나 급여가 주어지지 않았으며 현지에서 자급, 총족토록 했다. 이후에 이들은 경찰과 군대로 흡수되었으며 1947년 입학한 육사 5기생의 2/3가 서북출신이었고 1948년의 육사 8기에도 많았으며, 1961년 박정희의 군사 쿠테타의 주역이 되었고 일부는 목사로 전향하였습니다.) 소속 토벌대는 제주도민 전체를 빨갱이로 몰아서 보이는 대로 죽이기 시작합니다. 당시 제주도민은 육지에 비해 은근히 차별받고 있었는데,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덧 씌워서 학살, 강간, 약탈, 고문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또한 남로당 빨치산이라고 딱히 나은 것은 아니라서 밤에는 빨치산이 군경에 협조한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군경과 빨치산이 구분이 가지 않는 어두운 밤에 누군가 방문을 열고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물었을 때 했던 대답에 따라 생사가 오고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까지 이어져서 최대 제주도민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8만명의 양민들이 학살되었고 제주도의 폭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여수,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를 이동 진압하려다가 일부 군인들의 저항으로 이른바 여,순 반란사건이 일어났으며  2003년에 이르러서야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사건 55년만에 국가원수 최초로 사과를 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에는 국민들의 피가 배어 있었다

 

4.3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투표가 미뤄졌지만 1948년 5월 10일에는 제헌국회의원선거가 열리게 됩니다. 김구가 주도하는 한국독립당과 남북합작선거를 바라는 세력은 출마하지 않았고 덕분에 이승만의 아이들인 독립촉성국민협회가 48석을 당선시켰고 한민당이 22석을 당선시켜서 제1,2정당이 됩니다. 또한 최초의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이 뽑는 간선제였기 때문에 지지의원이 많았던 이승만이 대통령, 이기붕이 부통령이 되고 7월 17일에 대한민국 헌법이 세워집니다(제헌절).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됩니다.

 

그런데 아직 비극은 끝나지 않았으니....

 

해방이 된지 3년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남한의 친일파 청산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고, 친일파가 청산된 북한과 대비되어 민심은 끓어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을 계속해서 거부했는데 이는 자신의 아이들인 독립촉성국민회와 또 다른 지지기반인 한민당의 대부분이 친일파로서(이 친구들이 국회의 절반을 차지했습니다.....) 친일파 청산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1949년 1월 5일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설립하였습니다. 대법원장이었던 김병로는 반민특위에 특별재판부장으로 일을 시작했고, 국권피탈에 협력한자,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고 탄압한 자,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일본에게 직간접적으로 협력한 자들을 징역에 처하는 반민족행위 처벌법(반민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킵니다.

 

                                                                         반민특위

 

하지만 이승만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인 친일파를 보호하려 노력했습니다. 반민특위의 활동을 반대하는 담화와 법률을 통해 이를 막으려했고 ‘친일파를 처단하자고 하는 놈은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반민특위의 활동을 결사적으로 막았습니다(정말 욕이 나옵니다...). 악질 경찰인 노덕술은 반민특위 요인들의 암살까지 기획하지만 실패합니다.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석된 김약수 의원

 

이승만 정부는 결국 1949년 5월에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는 것을 기획하여 반민특위 위원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국회의원 13명을 빨갱이로 몰아 구속합니다. 그런데 통탄할 일은 김약수를 비롯한 구속된 의원들은 독립운동가 출신이었고, 이 사건을 수사하는 군인과 경찰들은 반민특위에서 친일파로 지목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친일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임명된 사람들을 친일파가 수사하게 된 것입니다. 사건의 물증은 없었지만 결국 의원들은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반민특위의 추진 동력은 약해지고 맙니다.

 

이렇게 이승만과 친일세력에 의해 반민특위는 해산됩니다 - 출처 : KHAN으로 보는 역사

 

또한 1949년 6월 6일 오전에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서울중부경찰서 소속 경찰 80여 명(이들도 친일파로 지목된 사람들입니다)이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합니다. 경찰이 국가기관을 습격하는 유래없는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이들은 조사관들을 때려눕히고 친일파 관련 서류들을 강탈합니다. 국회는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으나 이승만은 거부권을 행사하고 그에 반발해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독립운동가 출신)이 위원장직을 사퇴하자 그 자리에 자기 심복 이인을 앉힙니다. 예상대로 이인은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고 결국 반민특위는 10월에 해체됩니다. 이 사건을 ‘6.6 반민특위 습격사건’이라고 하며 ‘국회 프락치 사건’과 함께 반민특위를 없애버린 사건입니다. 또한 친일파로 기소된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모두 풀려나면서 대한민국은 친일파를 청산할 기회를 영영 잃게 됩니다.

 

                                               대한민국과 비교되는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벌

 

그렇게 대한민국은 동아일보 오보사건으로 민족반역자를 친일파에서 공산주의자로 돌려버렸고, 이승만의 조직적인 방해로 친일파 청산의 마지막 기회인 반민특위 활동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대한민국에 많은 친일파의 후손들이 높은 곳에 계시고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폐지를 주워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친일행적이 있는 대통령(박정희)이 이후에도 또 등장하여 장기집권 했기에 어느 순간부터 친일청산 대신 반공만을 외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 분들은 반공과 빨갱이 색출을 외치고 있고, 특히 북한의 남침으로 반공사상이 더 고취되었고 7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런 주장은 힘을 얻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은 광복절입니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건국 수립일입니다. 8월 15일을 광복절 대신 건국절로 만들자는 주장이 요새 힘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이는 헌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헌법에는 3.1운동이후 설립한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의 적통이라고 되어있고 이승만도 제헌헌법에서 ‘대한민국 30년’에 정부수립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면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 임시정부에서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과 1948년 8월 15일 사이에 일어난 미군정의 진주, 친일파 청산 실패, 동아일보 오보사건, 좌우합작, 대구 10.1 사건, 4.3 사건은 모두 대한민국 근대사의 비극입니다. 1948년 건국절이 광복절을 대체하게 되면 이 사건들은 모두 수면 아래로 묻혀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그렇게 묻혀버릴 문제가 될지, 아니면 제대로 꺼내서 떳떳하게 펼쳐보아야 할 문제들로 바뀔지는 앞으로 우리하기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옮겨온 글을 일부 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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