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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기독교(개신교)의 십일조 헌금은 성경적일까?

by 까마귀마을 2020. 10. 9.

기록된 성경에 의하면 기독교 십일조의 근원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이주후 점령한 땅을 배분할때 12지파중 11지파에만 땅을 배분 하고 나머지 한 지파, 곧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배분 하지 않고 땅을 배분받은 11지파의 소산의 십일조를 받아 부족을 대표하여 성전제사를 이어가는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하게 한것과 신명기에 기록된 삼년마다 소산의 십일조를 비축하여 성안에 우거하는 객과 고아및 과부를 배부르게 하라 한것으로 비롯되었다.
이는 십일조 제도의 본 목적은 부족의 성전제사와 가난한 객(도피해온 망명객으로 여겨짐) 이나 전쟁으로 죽거나 부상으로 노동력을 잃거나 상실한 유족들을 구제하고 돌보기 위한 제도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당시는 이스라엘이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이고 신정이 일치하던 때이니 곧 레위지파가 종교, 정치, 외교, 국방을 장악한 실제적인 이스라엘의 정부이고 지도자 였을 것이며 개인이나 가정의 길흉화복은 물론 축, 농업의 풍요와 빈곤 , 민족의 흥망성쇠가 걸린 이(異) 민족과의 전쟁의 승패등, 개인의 삶과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모든분야가 그들을 지켜주는 민족신 야훼에 의해 좌우 된다고 믿는 신 우선의 신본주의 시대이니 성전 제사가 신성시된 최고의 국가적이며 민족적 행사 이었을 것이고 외세와의 전쟁이 일상사라 전쟁으로 인한 많은 과부나 고아의 구제가 범 민족적 필수 사업 이었을 것이며 이에 소요되는 예산을 부족의 십일조로 충당했음을 볼때 나라에서 걷는 세금은 아니지만 지금의 조세제도와 유사하다고 보여진다.
이스라엘의 십일조 제도를 조세제도로 유추해 볼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로마의 세금율이 10% 임을 볼때 지중해 연안이나 중 근동지방의 세금율도 10% 였을 확율이 높고 이스라엘의 십일조가 이스라엘만이 지켜온 특별한 의미가 있거나 고유한 제도가 아니고 주위 나라나 부족들의 세금율을 그대로 따라한 것같고 그리고 10%라는 의미는 당시 그지역의 오래전 부터 전해 내려온 보편적인 세금율이 아닌가 생각된다.( 로마시대도 맹자도 '적정세율은 10% : 로마시대도 맹자도 적정세율은 10% .한국경제 (hankyung.com)
그러면 가나안 이주 이전에는 십일조에 대한 기록이 없었을까?
아니다, 아브라함이 부족간 싸움에서 승리하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여 그중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바친 기록도 있고, 야곱이 집을 떠날때 야훼 하느님과의 서원중에 내가 부자가 되고 성공하여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면 야훼 하느님께 십일조를 드린다는 조건부 기록도 있다. 이것을 볼때 가나안 이주 전에는 십일조가 의무 사항도 아니고 민족 전체의 제사나 이웃 구제와는 전혀 무관한 개인적인 것이었다.
허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40여년 뒤 즉 주후 70년경에 로마군에 의해 돌로 지어진 성전은 돌하나 남지않고 파괴되었으며, 예수님은 성전 제사를 부정했다,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삼일만에 지을것이라 함은 곧 당신몸이 성전이란 뜻이고, 삼일만에 지음은 삼일만에 부활할 당신의 몸을 말한 것이다. 성경은 또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라 했으니 곧 우리몸이 성전이고 성도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왕 같은 거룩한 제사장이라 기록 되어 있으니 우리모두가 제사장이고 우리 몸이 곧 성전이다.  이는 지금의 교회나 예배당이 성전이 아닐뿐 아니라 목사가 제사장도 아니라는 것이다.
불우한 이웃 구제가 아니면 명목상 십일조 제도는 사실상 사라진것이나 다름없다. 
허나 십일조 헌금을 받고있는 우리나라 교회중 재정이 넘쳐나는 일부 대형교회나 재정자립이 되는 교회들의 이웃구제에 사용되는 예산은 교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통계상으로 총 지출의 2-3%정도라고 하니 성경에서 기록한  십일조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것 같다. 그렇다면 3년마다 걷어야 할 십일조를 1년 365일 내내 걷우고 있는 한국교회의 십일조는 도대체 누가, 어디에, 어떻게 쓰고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교회 헌금이 교회 사역을 위해 사용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교회 헌금이 목회자의 사례비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의 헌금의 50% 이상이 목사의 사례비로 지출되고 있으며 실제로는 그 이상이다.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중·대형 교회는 중·대형 교회대로 헌금 대부분이 인건비로 지출되고 있다(한국교회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 조엘 박, 박스북스, 90쪽).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여러 개혁자들은 가톨릭의 성직자인 사제 제도를 부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개신교회 내에서 가톨릭의 사제에 해당하는 권한을 줄여서 사제를 대신하여 장로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얼마 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중에 개신교 신학교를 졸업한, 안수 받은 사람들을 목사로 내세워 그들을 가톨릭의 성직자인 사제 역할을 대신하게 만들고 그들은 이 임무를 위해 급여를 받았다.이렇게 시작된 목사의 월급 제도가 오늘날까지 개신교회에 이어져 내려왔다. 오늘날 개신교회의 목사들은 신자들이 내는 헌금을 받아 생활한다. 그리하여 교회의 규모, 다시 말해 신자들의 숫자에 비례하여 목사들의 월급도 정해지게 마련이다. 한편, 국내의 미자립 교회, 즉 독자 건물 없이 상가 등에 세 들어 있는 형태의 교회는 국내 전체 교회의 70%를 차지한다고  한다.(진정 회개할 곳은 교회다, 권영진, 리북, 101쪽). 이런 곳의 목사들 월급은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인 수가 수백, 수천, 수만 명일 경우에는 목사들의 월급도 수백만 원, 수천만 원, 수억 원이나 된다. 예컨대 신자 1,000명 이상만 되어도 목사는 판공비 등 잡수익을 합쳐 실생활비가 1억을 윗돌며 고급 자가용을 타고 다니고 외국을 자기 집같이 드나든다. 일부 대형 교회 목사는 비행기도 항시 일등석을 타며 노회 임원들의 한 끼 식사에는 1,000만 원을 지출 하기도  했다.(한국교회 상식이 운다 황규학, 에클레시안, 77쪽).

이렇게 성경적으로 의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개신교회에 십일조가 사라지지 않는것은 대부분의 신도들이 예배당이 성전이라 말하거나 믿고 있고 목사를 제사장으로 생각하거나 착각하고 있는 교인이 있음은 성경은 분명히 만민 제사장이라 기록하고 있는데도 때로는 목사 스스로 선택된 주의 종이라등, 영적 우월과 권위를  내세우거나 강조하니 신도의 입장에서 이를 부정하기가 쉽지 않고 또 이를 거부없이 받아 드리느 교인이 많기 때문인것 같다. 
이미 페지 된 십일조 헌금을  의무로  받아 드리는 또 다른 이유는 십일조등 헌금행위가 하나님으로의 축복의 통로라는 반복적이고 의도된 설교의 세뇌가 한 몫을 하고있고 특히 개신교에만 있는 교회 직분제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교회 직분의 원래 취지는 봉사와 헌신을 위한 직인데 현실은 교회내에서 교인간 서열, 교회(목사)신임의 기준이 되고 있으니 신임을 받은 직분자가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는다는건 신임을 배반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교회에 봉사하고 교인에 헌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분이 십일조등 헌금의 압박이 되고 의무가 되며 한편으로는 교회라는 조직을 얽어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십일조 헌금자를 공개하는등 경쟁하거나 압박하는 분위기도 일반 교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일부 교인들은 십일조를 많이내고 잘함이 마치 자신의 신앙심의 깊이이고 교회충성의 척도인냥 우쭐되니 참으로 한심하고 무식하며 한편으로는 측은해 보이기 까지하다.
 
(나라에 세금은 세금대로 내고 또 교회에 수입의 십일조를 그리고 온갖 헌금을 해야하는 우리나라 개신교인은 무슨 채무자도 아니고 노예도 아니고 기독교이 아닌 무교인들이 볼때 참으로 이해 불가하며 황당한 일로 여기지 않을까?)

오직 성경을 부르짖으며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오늘날의 개신교다. 그렇다면 오늘날 개신교의 상징이고 주축이된 목사는 과연 성경에 있는 직분일까?
여기서 우선 목사라는 직분이 성경에 있는지?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을것 같다. 신약성경에서 지역 교회의 직분은 오직 장로(감독)와 집사 두 가지밖에 없다. 그러므로 목사는 성경에 나오는 지역 교회의 직분자가 아니다. 목사는 에베소서 4장 11절에 나오는 우주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한 다섯 가지 유형의 은사자들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자, 교사,)가운데 하나인 목자(牧者)를 목사(牧師)로 오역시켜 만들어 낸 가짜 은사자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진짜 은사자는 헬라어 원어에 나오듯이 포이멘(ποιμην), 즉 목자(牧者)가 올바른 번역인 것이다(공동번역 성서, 대한성서공회 발행, 신약 371쪽, 가톨릭 성경,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신약 330쪽). 따라서 목사라는 존재는 성경에 없는 인물로서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지도자들이 성경을 오역시켜 만들어 낸 인물이며 당시 개신교회에서 로마 가톨릭의 신부(사제)에 해당하는 성직자를 대체하기 위해 만든 술책이었다(교회가 없다, 프랭크 바이올라, 대장간, 204쪽). 신약성경에는 목사라는 존재는 없으며 지역 교회에는 성도와 장로들과 집사들만이 있을 뿐이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목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들이 있다. 예컨대 형제교회· 지방교회· 평신도교회 등이다. 
좋게보면 오늘날 교회의 목사는 교사와 설교를 맡은 직분중에 하나라 할수있다. 기억이 안나지만 가톨릭에서도 설교자는 있었다는 글을 읽은적이 있다. 아마도 가톨릭에서의 설교자는 사제와는 동일한 직분은 아니었을 거라는게 내 생각이다. 
이는, 성경에도 없는 목사라는 직분이지만 오랜 관례를 따라 인정 하더라도 존경은 하되 무조건 높이고 떠 받들고 우르러고 복종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 존경도 예수의 향기가 없고 삶의 감동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것이다. 목사는 우리보다 더 많히 배운 성경을 우리 삶에 적용 깨닫게하고 가르치며 교회라는 조직을 성경과 교회법에 따라 이끌어 가는 직분중에 하나라는  뜻이다. 강단에 논어를 많이 알고 잘 가르치는 교수가 공자가 될수 없듯이 설교를 잘하고 성경에 대해 많이 안다고해서 예수가 될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되며. 아무리 어려운 여건 속에서 교회를 세우고 개척했다 해도 교회의 주인은 머리는 목사 아니라 예수님이 되어야 함은 말할것도 없다.

또하나,
십일조도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이주 이후 지켜온 율법의 하나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십일조가 있었다, 허나 아브라함이 제사장에게 드린 십일조는 땅에서 거둔 소산이 아니고 전리품 이였으며 야곱은 조건부 였으니 가나안 이주 이후의 십일조와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구원은 지금도 모세가 정한  수백가지의 율법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지금 이시대 우리에게  지워진 율법의 무게는 얼마 만큼일까?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려 온것이 아니라 완성하려 왔으며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전에는 율법의 한자 한획도 없어지지 않을것이다고 말씀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죄를 대신지고 희생제물이 됨으로 율법은 완성 된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고  알고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걷우시며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수백가지의 율법을 지켜서 구원이 있는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라고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만 하면 우리는 구원이 있다는 로마서의 기록이 증명 하는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을 은혜시대 라고 말하는 것이다.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님이 십일조에 대하여 말한 기록들이 있다. 허지만 이는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 지기 이전의 말씀이며 예수님 사역시는 아직 기독교가 생성하기 이전이고 예수님은 유대교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으로 돌아 가셨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이 율법의 하나인 십일조를  부정  한다는 것은 유대인으로 살기를 포기하는 아주 위험한  행위임을 알  필요가 있다. 
그 많은 육백여 가지의 율법은 하나도 지키지 않고 유독 십일조만이 지켜야 된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궤변이고 헛소리다.
걸핏하면 십일조를 성실히 하지않는 교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것을 훔쳐가는 도둑이라는 설교로 신도들을 위협하고 난감하게 하지만 말라기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것을 훔쳐가는 도둑이라는 기록은 당시 제사장들에게 바쳐진 제물중 좋은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함에도 흠있는것만 골라 드림으로서  백성들 까지도 그릇된 길로 인도한 제사장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한 말라기 선지자의 경고 일 뿐이다.
(참고로 천주교는 매년 연초에 교인 스스로 교무금 즉 교인 의무금을 정하여 일년동안 분활하여 내며 성직자가 국가직이며 교회의 모든자산이 국유화 되어있는 서구의 국교가 기독교인 나라들은 오래전 부터 폐지 되었거나 종교세가 따로있으며 이를 납부할시 본인이 납부할 각종 세금에서 이금액 만큼 공제 하는것으로 알고 있음. 전 세계에서 십일조를 거두는 나라는 미국 오순절파의 일부 개신교와 우리나라 개신교가 유일하다. (아래 세계 십일조 현황 참조)

목사 설교중 교회와 목사에 충성하고 십일조나 헌금을 많이 할수록 십배 백배 물질적인 복을 받고 집안이, 자손이 잘된다고 가끔은(어떤 교회는 입만 열면 하는 말이지만) 설교로 듣게된다.
허나 이는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예수님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르다, 즉 구약시대의 복은 요즘말로 잘먹고 잘살고 자손이 번창하는 것이고 예수님 말한 복은 세속의 복과는 반대 이거나 전혀 다른 개념이다.
"예수믿고 구원받아 천국간다"는 기독교의 지고지선의 교리이자 교회 존재 이유인 구원론도 부활은 물론  내세를 믿지않는 이스라엘인들은 현세에 잘먹고 잘살고 번성하고 외세나 적으로 부터의 위협에 안전하고 싸움에 승리하여 지금 여기에서 지상왕국을 만드는 것이 그들이 야훼로 부터 받은 복이고 구원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에게는 부활도, 천국과 지옥의 내세관도 없고 예수가 메시아인 신약 시대가 오지도,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이스라엘의 율법시대를 왜 우리가 쫓으며 그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지금이 율법의 구약시대인가?
구약성경이 교회정경에 포함되어 있다고 지금이 율법의 구약시대라고 착각하고 있는가? 다신주의 였던 유대인들이 신중 하나인 야훼가 모세를 통해 제정한 수백가지의 율법을 지키면 대대손손 복을 주겠다며 맺은 약속이 구약이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야훼의 율법으로된 구약은 페기 되었고 새로운 계약을 맺은지 2천년이 지났건만 허구한날 구약시대 야훼의 복타령이니...
가끔 대형교회 목사들이나 일부 목사들이 나는 주의 종으로 복종하고 충성했더니 복을 받아 교회를 크게 이루고 좋은집에 좋은차에 거액의 보수를 받는다고 자랑하거나 간증을 하고 자식에게 자기가 세운 교회를 세습함을 마치 구약시대 제사장이 대대로 세습하듯 당연하다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와 제자들은 하느님의 종도 아니고 불순종 하여 복은 커녕 저주를 받았다 말인가. 예수와 그 제자들은 오늘날의  제도화된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고 결혼도 가정도 이루지도 못한채 거리에서 노숙자처럼 살았으며 예수와 베드로는 나무에 메달려 처참한 죽임을 당했는데 이보다 더한 저주가 있겠는가.
참으로 교만이며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성경에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것은 낙타가 바늘귓를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고했고. 단지 부자라는 이유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였으며, 구원을 받으려면 자기의 소유를 모두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고 기록 되어있다.
그렇다면 매 예배때 마다, 성도들의 모임마다 부자가 되라는 축복의 기도는 성경대로라면 결국은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라는 저주가 되고만다 그럼에도 물질의 복을비는 기도나 축원이 교회에 넘쳐나는건 우리의 믿음이나 영성이 기복의 무속신앙에 갖혀 있으며 구약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 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수님의 올바른 제자이고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올바른 기독교인 이라면 성직이든 평신도이든 청빈하게 살아야 됨이 예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고 성경이 주는 참된 교훈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너는 복이 있을것이다 했는데 이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이지. 절대 잘먹고 잘사는 세속의 복을 말하는 것이아니다. 간디가 천국의 법이라는 산상수훈의 팔복을 한번만이라도 읽어 보면 싶게 이해 할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믿음, 영성, 행위가 기복을 위한 것이라면 정한수 한그릇에 복을 비는 미신과 무엇이 다르고 부적 굿으로 복을 파는 무당을 믿는것과 무엇이 다를까?
가르침으로 교화되고 참회로 거듭나고 내세의 소망으로 이 세상 욕심을, 욕정을 조금씩 포기 함으로 절대자를 닮아가거나 절대자에 한발짝 다가 가는게 종교이지 세속적 욕심을 위해 울고 불고, 또 돈을 놓아야, 돈을 바쳐야 한다면 이게 종교인가 허접하고 미개한 미신이지.
대부분의 우리교회는 예수님의 삶이나 길과는 정반대인 권력과 아파트를, 땅을, 돈을 많이 차지한자가 축복을 받은자라는 무속신앙과 다를바 없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하나를 줄테니 아홉을 달라고 울부짖는 자들로 소굴이 되고 그런자들로 넘쳐난지 이미 오래다. 지금도 우리 죄를 대신지고 피흘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회생은 무엇이며, 길잃고 수고하고 짐진자들이 쉬고 위안을 받아야 할 교회는 어디에 있는지 묻고싶다.

복을 비는 기도와 간구가 교회마다 차고 넘쳐도 우리주위의 교회가 다 배부르고 풍요로운건 아니다. 돈이 넘쳐나는 교회도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들 특히 지방이나 시골의 작은 교회및 개척교회는 적극적인 헌금이나 외부의 도움 없이는 자립도 교회의 운영이나 지속마저도 어려운 교회가 많다는 현실은 개혁이 필요한 한국교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떠나 한때 열심의 신앙인으로서 마음 아프고 안타깝기도하다.
이렇게 교회의 영속마저 어려운 작고 영세한 교회도 많지만 도시의 큰교회나 일부 대형교회는 풍요를 넘어 넘치도록 너무 많은 재물을 가졌고 그리고 권위와 권력마져 가졌으며 또 가지려는 욕심으로 가득찬 교회들도 쉽게 볼수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증명된 사실중 하나는 교회에 돈이 쌓이면 교회는 부패하고 세속화 되며 성직자의 배가 부르면 신 앞에 무릎을 꿇지않고 신도 찾지 않을뿐 아니라 돈을 숭배하며 육신의 욕심을 채우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돈을 만악의 근원이라 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 : 디모데전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옷 한벌과 신 두컬레만 지니며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했다.
만일 오늘 예수님이 이땅에 재림 한다면 아방궁이 무색한 거대하고 휘화찬란한 예배당과 기복에 찌들어 있는 우리 한국교회를 보고 무슨 말을 할지? 기복신앙, 번영신학, 물신주의에 빠저 헤어나오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오랜세월 공들여 지어진 거룩한 예배당이 술집으로, 이슬람의 모스크로 팔려가는 참담한 유럽교회의 현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토록 권세와 부를 가진 유럽의 교회들이 쇠퇴하고 망하는 이유가 오늘의 한국교회처럼 십일조를 걷우지 않아서 인지 그 이유는 알수 없지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의학, 자연과학의 발달, 이성의 진보, 자유와 개인주의의 확장등이 한 이유라 여겨진다.
여기에다 걸핏하면 일어나는 목사들의 성추문등 세속적인 욕망추구와 물질숭배가 더 해진
한국교회의 앞날도 예외일수는 없을거다. 이미 우리주위의 많은 교회들이 하루가 다르게 유럽의 교회처럼 쇠락하고 있다. (한 때 내가다닌 교회는 광역시에 소재한 세워진지 50년이 되어가는 오래된 교회이고 꽤 많은 교인이 있었지만 해마다 신도수가 줄어들더니 이제는 신도 대부분이 70대 이상 노인들  수십명 뿐이다)
어쩌면 이점이 현대 사회에서의 종교의 한계일수도 있지만  인간은 태생적으로 무엇이든지 믿고 싶어하는 나약한 존재이며 본능적으로 어디에 의지할 절대자가 필요하다. 불확실한 미래의 의지, 도덕이나 교육만으로 다 채울수 없는 세속적인 욕망의  절제 , 연약한 육신을 가졌기에  따라오는 삶의 고단함과 고통을 위안하고 덜어주는 종교가 가진 순기능이,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물질만능 속에서 가지지  못한 박탈감과  좌절을 신앙의 가치로 채워주는 종교의 소명이 더 요구되고 필요 하다고 여겨진다.

어떻게 변화하고 혁신하여야 되는지 믿음도 부족하고 성령의 체험도, 은혜도 받지못한 나로서는 믿음이나 신앙적으로 미숙하고 알수없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이제는 믿음과 복종을 강요하며 하늘 높은 곳에서 우리를 감시하듯 내려다보는 그런하느님도 예배당에 갖혀 숭배 받기를 원하는 그런 하느님, 그런 신앙은 이제  사라져야 할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단지 수년간 교회에 다니며 내가 느끼고 본 교회는,
*신도들이 성경전체는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인 신약성서 27권 마저도 제대로 잘 읽지 않고 목사가 들려주는 일부의 성경구절만을 달달 외우며 이를 성경의 전부인냥 이로 남을 가르치려 한다. 이는 하느님의 초자연적이고 광대무변(廣大無邊)함을 몇몇 성경구절에 가두어  버리는 어리석고 무지함이며 하느님이 아닌 성경에  쓰여진 문자 자체를 숭배하는 것으로 보여졌으며.
*성경이 아닌 기독교에 관한 저서나 서적, 기독교의 역사, 성경이 쓰여진 배경이나 의도등 발굴이나 고고학등으로 밝혀진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기독교에 관한 사실등을 고의로 기피하거나 외면하고 알고자 하면 시험이니 하며 사악시하고,
*기복이 모든 신앙의 귀결이 되어 있는것 같고,
*조금은  가식적이고 이중적인 성격을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으며 이른바 믿음이 좋고 교회생활을 오래한 사람들 일수록 더 많은것 같았다,
*목사의 설교가 때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폄훼하거나 정확히 진실이 밝혀진 사고나 사건을 왜곡하고 비하하기도 하고 ,
*타종교에 너무 공격적이고 적대적이며,
*공적 예배에서도 설교자의 개인적 감정이 묻어 있는 설교를 서슴없이 할때가 많고,
*때로는 목사 스스로 주의 종이니, 미세한 주의 음성을 듣는 다는등 영적 우월과 권위를 내세우기도 하고,
*특히 헌금이나 돈에 대한 설교가 수시로 있고,
*목사나 목회의 잘못된 점이 알려져도 대부분의 교인들은 방관하거나 관대하며 사안에 관계없이 너무 순종적이고,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해 공익이나 진실에 관계없이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미국에 대해 지나치게 의존적이고 친미적이며,
*목사를 위시하여 퇴색된 반공주의가 정치적 신념이 되어있는 사람들이 많고 때로는 선동하거나 설득하려  하고,
*교회내 모든 사무나 회계가 때로는 즉흥적이고 일방적이며 사회의 계급조직처럼 수직적으로 집행되는것 같이 보여졌다.
회계와 교회내 모든 시무가 즉흥적이고 수직적 조직에 의해 처리 된다는 것은 계획적, 민주적이 아니고 권위나 계급에 의해  또는그때 그때 분위기나 상황에  따라 처리 된다는 의미이다. 사전 철저히  고민하고  기획된 계획에  의하지 않는 이런 회계나 일처리는 투명성에  심각한 의심을  받을수 있고 실수나 부작용도 있을수 있다. 수백만원의 금전을 받고 일하는 직장에서도 수직적인 계급문화가 싫어 직장을 그만 두는게 요즘 젊은이들의 행태인데 봉사가 강요되는 교회에서 이런  수직적 일처리에 순응하고 머물 젊은이가 몇이나 될까?
그리고 내가 교회생활중 가장 이해할수 없고 황당한일은 통성기도라는 기도였다. 통성기도를 하겠다는 설교자의 말한마디에 조용하던 예배가 순식간에 괴성을 지르고 괴이한 몸짓으로 마치 무당이 접신하는 굿판처럼 변해버리는 상황이, 과정이 너무 불편하고 한편으로는 소름돋고 무섭기까지 했다. 내가 생각하는 종교, 종교의식은 조금은 신비하고 경건하며 속세의 때 묻은 요란함이나 천박함이 아닌 거룩함이라 기대했고 믿었지만 통성기도를 처음 접한 순간 나의 이 믿음과 기대는 송두리째 없어져 버렸다. 기도란 영과 영의 대화이지 말의 대화가 아니다, 주여, 주여 고함을 지르고 울고불고 해야만이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 닿는다는 말인가? 내가 만나야 할 하느님이 이 난장판 속에 계시는건지? 참으로 많은 날밤들을 회의로 시달여야 했다.

도올 김욕옥은 우리나라 기독교를
우리사회의 모든 정치적 퍼내티시즘(광신적인)극렬한 우파성향,
서구문명에 대한 굴종,
미국에 대한 비열한 의존심,
신화적 사유에 대한 맹종,
합리적 삶의 실종,
초월적 허구에로의 귀순 귀위,
과학적 사유를 관철하지 못하는 허약성,
이 땅의 주인이라는 자각을 갖지 못하는 노예근성,
길잃은 양이 집 찾아 돌아가듯 예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무릎꿇는 비굴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 이라면 도올의 주장을 한번쯤 새겨 들어야 할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선
우리가 할수있는 변화의 새로운 시작은 물질숭배의 기복신앙에서 깨어나, 합격도, 영전도, 번영도, 건강도, 재물도, 권세도 다 하나님이 되는 만신우상의 율법주의적 야훼신앙이 아닌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 가르친 예수신앙으로 돌아가야 되며, 잘못된 관행이나 제도는 고치고 바로잡는 지속적인 자정노력과 성안의 과부와 고아를 배부르게 하려 모아진 십일조가 누구의 배를 부르게 하며 누구의 배가 불러 있는지 의심하고 성찰하는 성도가 더 많아 질때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종이 결코 두 주인을 섬길수 없나니 이는 그가 이 주인을 미워하고 저 주인을 사랑하거나 혹은 이 주인을 떠받들고 저 주인을 업신 여길 것이다, 너희가 하느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 없는니라."(마태복음에서)

전세계 십일조 현황
영국 : 1688년 폐지.
프랑스 : 1789년 폐지. (대혁명 이후 모든 교회재산 국가소유, 교회재정은 국가 예산에서 배정)
독일 : 1807년 폐지.
스페인 : 1841년 폐지.
아일랜드 : 1869년 폐지.
스코틀랜드 : 2000년 폐지.
스웨덴 : 종교세로 징수하였으나 2000년 이후 폐지.
이탈리아 : 종교세로 징수하여 각 교회에 배부.
스위스 : 종교세로 징수.
네델란드 : 교인들의 생활수준에 따라 자발적 헌금.
오스트리아 : 종교세로 징수.
덴마크 : 종교세로 징수.
미국 : 종교와 정치 분리로 십일조및 종교세 없음.(남침례교회, 오순절교회등 일부교회 십일조 헌금)
멕시코등 남미국가 : 모두 폐지.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 모두폐지.
가톨릭 : 모두 폐지.(교인이 스스로 정한 의무금으로 대체)
이스라엘 (유대교) : 모두폐지.
그리스, 러시아 정교회 : 모두폐지.
동방교회 : 처음부터 십일조 개념 자체가 없음.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 gospel of success, prosperity gospel, the health and wealth gospel)이란 
재정적 축복이나 물질적 풍성함이 항상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신앙이 자신들의 물질적 부를 증가시킨다고 믿는 반성경적 신학이다. 번영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가 안정과 번영을 준다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으로서 성경을 이해한다. 번영신학의 교리는 개인적인 능력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성경해석은 초기 유대주의의 주된 흐름에서 나타나는데 기독교 전통에서는 없다.
하나님과 화해된 속죄를 죄와 가난을 완화시킨다고 해석하며 저주란 믿음이 깨진것을 말한다고 한다. 대표적인 교회는 호주 시드니에 있는 힐송 교회이다. 번영신학은 인본주의에서 나온 신학이다.
샤머니즘에 뿌리를 둔 번영신학은 성경적 관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기독교의 참된 축복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며 현세에 결코 이루어지 않는다. 번영신학의 한국교회의 세속화의 시작으로 평가한다.(나무위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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