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鸛雀樓 (등관작루)
白日依山盡 (백일의산진) 눈부신 해는 산넘어 지려하고
黃河入海流 (황하입해류) 황하는 바다로 흘러 가는데
欲窮千里目 (욕궁천리목) 저 멀리 천리를 바라보려면
更上一層樓 (갱상일층루) 다시 한층 누각을 올라야 하네
---- 王之渙 (왕지환)----
등관작루는 당나라 시인 왕지환이 지은 오언절구의 시이다.
저물어 가는 저녁시간 누대에 올라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풍경을 쉽고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1.2구절). 그러나 낭만적인 서사에 그치지 않고. 3.4구에서는 천리 먼곳까지 바라보고자 한층 더 올라 가야하는 웅대한 기개와 진취적인 기상을 읊으며 천하를 마음에 품고 그 뜻을 이루고 싶다는 호방함을 노래하고 있다.
넓고 긴 황하의 물줄기가 유유히 흐르는 누대에 올라 보니 먼 산으로 석양이 지고 있다. 해가지는 저 먼 곳에는 시인이 알 수 없는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다. 또한 강물은 흘러 바다로 가지만 그 바다는 누각에서 보이지 않는다. 공간적 거리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인생의 미래일 것이다. 더 멀리 보려면 더 높이 올라야 한다. 높이 나는 새가 더 멀리 볼 수 있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천리 먼 공간을 바라보려면 누대의 한층 더 높이 올라야 하듯이, 삶이 더 낳은 모습으로 승화하기 위해서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
시인은 궁(窮)과 천리(千里)라는 언어로 아득한 먼 곳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을 표현하고있다. 성공하려면 한 층계씩 밟아 올라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관작루의 원래 위치는 산시성 푸주이다.
남북조 시대에 북주의 북제가 이 마을에서 적과 군사적 대치상황에서 북주의 장군 우문호가 방어를 위해 푸주 서문밖에 한채의 높은 누각을 건축해 군사 전망대로 삼어면서이다.
관작루란 이름은 누각위에 항상 황새가 둥지를 틀어 머물며 보급자리를 삼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 지어진 관작루는 전쟁으로 훼손되고 황하의 물길이 바뀌는등 풍파와 곡절을 껶어면서 소실되어 사라지고 현재의 관작루는 당(唐)시대의 높은 누각을 모방하여 1997.12월에 재건을 시작하여 2002. 8월에 재건축된 것이다.
누각의 중앙에 왕지환의 청동으로된 동상이 있고 1층에는 모택동 주석이 직접쓴 등관작루의 현판이 걸려있다. 모택동이 생전 이시를 좋아했다고 알려짐.
등관작루는 오래전부터 원래 많이 알려진 시였지만 이 시가 세간에 유명해진 것은 중국의 마오쩌둥. 장쩌민 주석등 국가주요 인사들이 이시를 자주 애송 하면서이다. 특히 우리나라에도 이 시가 많이 알려졌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 했을때 시진핑 주석이 북경대 교수이자 서예가인 예페이 꾸웨이 교수가 쓴 등관작루의 서예작품을 선물한것이 매스컴에 보도 되면서이다. 특히 마지막 구절인 更上一層樓는 누군가 앞날의 승승장구를 기원하거나 더 높은 곳에서 능력을 발휘하길 염원하는 문구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왕지환 (王之渙)은 성당 시기의 유명한 시인으로 자는 季陵(계릉)이다. 오늘날 산시성 신장현 출신이다. 과거합격이나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고 호방불기하여 항상 검을 차고 다니며 구슬프게 시를 지었다 한다. 오언(五言)에 능했으며 邊塞(변새)의 풍광에 대한 묘사가 뛰어났었다. 당시 장안 기생이나 악공들이 왕지환이 지은 시를 노래 부르기를 즐겨했으며 고적 (高適), 장삼, 왕창령,과 함께 이름을 날렸고 작풍도 비슷하다. 왕지환의 시는 대부분 망실되어 전당시에 양주사와 등관작루등 6수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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