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지옥.
요즘은 잘 볼 수없는 용어 이지만 참 익숙하고 쉽게 마주한 단어이다. 역 광장이나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프랑카드나 핏켓을 들고 유인물을 나누어주며 기독교를 전도하던 낯설지 않은 정경들이다. 지금도 서울역 모퉁이에서는 천막을 치고 수십년째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인간들이 있다는 보도가 있지만... 예전의 핏켓 전도는 사라졌지만 내가 운동하는 공원에는 나이든 할머니 너 댓명이 탁자위에 큰 보온통을 올려놓고 차(茶)를 나누어 주며 "예수믿고 복 받으세요" 하는 모습은 지금도 주기적으로 대하는 정황이다. 그리고 조금은 오래된 기억이지만 집 앞의 동해 남부선 열차안에서 나이 지긋한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예수님은 그리스도 이십니다" 를 큰 소리로 반복하여 외치는 전도 모습도 낯설지 않다. 이런 전도 행위를 보면서 내가 느끼는 심정은 저런다고 과연 교회 새 신자가 한 명이라도 늘어날까 하는 의문이다. 왜 아무 성과도 없는,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저런 행동을 서슴없이 할까? 신앙적 사명감일까, 아니면 자기 만족에 취한 정신승리 일까? 그것도 아니면 조직이나 사람에게 인정 받으려는 몸부림이고 욕구일까?
불신지옥, 사실은 너무 귀에 익고 자주 들어서인지 별 감흥이 없다. 그러나 이 단어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단어가 가진 뜻은 정말 무섭고 섬뜩하며 협박적인 말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지옥이 존재 한다면... 나는 지금 천국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는데 지옥 얘기부터 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인이든 불신자든 지옥과 천국은 상대 개념으로 지옥을 말하지 않고는 천국을 말 할수 없다. 지옥이(處) 없이는 천국도(處) 존재 할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지옥하면 떠오르는 현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영원히 꺼지지 않은 불구덩이, 죄 지은자들에게 온갖 육체적 형벌이 가해지는 지하 깊고 어두운 곳이 상상된다. 그러나 진실은 기독교 성경 어디에도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지옥은 없다. 구약의 스올, 신약의 하데스, 게헨나(힌놈의 꼴짜기)로 표기된 이 단어들은 거리에서 외치고 있는 불신지옥의 그 지옥이 아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현재의 지옥개념은 중세 유럽교회가 교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고의적인 왜곡이 아니면 타종교, 타문화와 뒤섞이거나, 잘못 번역한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작가들의 문학적 상상력이 더 해지면서 지옥이란 무서운 상상이 현실적 실체가 되었다. 특히 14세기에 초반에 저술하여 15세기에 발표된 단테의 신곡소설이 세상에 나오면서 오늘날 기독교가 주장하는 지옥이 고착화 되었다.(기독교(성경)에서 지옥 )
예수천국.
하늘나라 (天國)에 해당하는 단어는 한글 번역 성경에 무려 342회가 나온다 한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3장 2절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리라" 의 천국으로 글자 그대로 하늘나라 곧 장소, 곳, 처소를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이면 때로는 하루에도 몇번씩 고하는 주님이 가느쳐준 세계적인 기도인 "주기도문"역시 한글 번역성경에는 아버지의 왕국이 아닌 나라로 되어있다. 나라(國)도 주권이 포함되겠지만 통치 개념인 왕권과 같다고 할수는 없다."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미래의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삶속에 이미 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럼에도 가장 늦게 쓰인 요한 복음에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라며 장소 개념으로 바뀌어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천국이 장소이면 어디에 있고 어떤 모습일까? 우선 이를 바르고 쉽게 이해하려면 헬라어 성경 원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글성경의 천국으로 번역된 헬라어 바실레이아(βασιλεια)는 천국이 아니라 왕국을 의미하며 영어로 번역하면 킹덤(kingdom)이다. 이 단어는 원 뜻은 원래 왕권을 의미했으나 후에는 주로 왕이 다스리는 통치 체제, 즉 왕국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한글 성경에는 왕국으로 번역된 단어를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다. 이런 중요한 단어를 대부분의 한글 성경들은 헬라어 원문 성경과 영어 성경들처럼 왕국(kingdom)으로 번역하지 않고, 중국어 성경과 일본어 성경의 번역을 그대로 모방하여 천국이나 나라 등으로 일관성 없이 번역하였다. 그래서 한글 성경으로는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 의 왕국이 무슨 말인지 뒤죽박죽이 되어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헬라어 바실레시아 곧 왕국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한글 성경만으로는 왕국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헬라어 원문이나 영어성경에서 말하는 왕국(하늘나라)은 하늘의 왕국, 하나님의 왕국이다. 한글 번역 성경의 천국을 더 하여 이를 성경이 의미하는 성경적으로 해석해본다.우선 하늘왕국(kingdom of god)은 구약성경을 통해 예언된 메시아가 왕으로 직접 다스리는 실제적인 지상의 영역으로 주권적인 통치의 왕국을 말하고 있다,(마태복음, 주기도문), 다음은 하나님의 왕국으로 (kingdom of heaven) 시간과 영원, 하늘과 땅을 포함한 전 우주적 하나님의 통치를 뜻하며, 누가복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왕국으로, 우리의 삶속에 이미 도래한 현재적 상태이며, 오로지 거듭난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미래적 나라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한국 성도 대부분이 믿고있는 죽으면 가게되는 요한복음의 장소 개념인 천국, (heavene 또는 paradise)으로 즉 낙원이다. 어찌보면 천국이라는 용어보다는 천당(天堂)이 더 적합한 표현이다. 기독교 초기 전파시 천당(天堂)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한다. 허나 이 용어는 불교 용어로 육도(천당, 인생, 아수라,축생, 아귀, 지옥) 윤회 가운데 가장 좋은 곳을 말한다.
한국 개신교인들은 초창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도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는 왕국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10여 종의 한글 번역 성경들 가운데, 왕국으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가 어디에도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왕국을 죽어서 가는 천국, 하늘나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말씀에서, 여기 나오는 천국을 신자가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태복음의 하늘나라는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낙원)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유대 땅에 세우려 하셨던 천년 왕국으로 이해된다. 예수의 십자가 사망 전까지는 유대인들에게는 왕국의 복음을 선포한 구약시대 였으므로 예수님의 설교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지 현재의 신약 성도에 하신 말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왕국을 천국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한글 성경에 왕국이 천국 또는 하늘나라라는 장소로 번역되어 있고, 또 예나 지금이나 목사들이 설교를 통해, 천국은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로 잘못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얼마전 기억이다. 서울의 초 대형교회 개척자인 목사의 빈소에 "천국에 가신 000 목사님"이라는 커다란 플렉카드가 왜 걸려 있었는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설사 그들만의 천국이 있다해도 심판은 예수재림때 일어나고 양이 될지 염소가 될지는 하나님의 결정이지 그들 몫이 아니다.
하늘나라.
이 땅을 살아가는 실체적, 실제적 현실의 삶속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드리며 어떻게 사는 삶이 하나님이 말한 하늘나라에 가까운 삶일까? 하늘 나라는 예수가 가장 많이 말했지만, 가장 오해받은 언어다. 교회는 이 개념을 너무 쉽게 죽고 나서 가게 될 곳(處)으로 옮겨버렸다. 그렇게 하늘나라를 죽음 이후의 세계, 또는 이 세상을 넘어선 초월적 질서로 이해해 왔다. 그렇게 이해하는 순간 하늘나라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의 삶과 분리된다. 그것은 믿어야 할 교리가 되지만, 개인이 오늘 살아낼 수 있는 현실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가 말한 하늘나라는 언제나 현재형이었다. 그는 하늘나라가 이미 와 있다라고 말했고, 동시에 다가오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말 속에 중요한 단서가 들어 있다. 하늘나라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이 땅에서 마주하고 있는 상태이며 연습해야 하는 삶의 방향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지금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산다는 것은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 아니라, 방향을 익히는 일에 가깝다. 그것은 도착점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이고 훈련의 과정이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을 체계적으로 교리화 해서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회개를 가장 먼저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의 뜻을 실천하는 자만이 하늘나라에 속한다는 것도 분명히 했다. 그리고 하늘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 하는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비유를 들어가며 이야기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 하루 품삯을 동일하게 주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 가장 작은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는 비유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 이미지 속에서 하늘나라는 자주 인간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반드시 공정하지도 않고, 늘 효율적인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성과 중심적이지도 않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이 연습의 중요한 특징은 실패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하늘나라를 산다는 것은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삶이 아니다. 우리는 쉽게 화를 내고, 쉽게 자기 보호를 선택하며, 침묵해야 할 곳에서 침묵하지 못하고, 정작 말해야 할 곳에서는 말을 삼켜버린다. 예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이런 실패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방향을 조정하는 훈련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실수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실수 이후에 어디로 돌아 오는가에 관한 문제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연습은 늘 작고 구체적이다.
거대한 결심보다는 반복이 가능한 선택에 가깝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꾸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오늘의 관계에서 다른 선택을 하라고 요청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감정을 강요하는 명령이 아니라, 그동안 조건 반사적으로 작동하던 반응을 멈추고 다른 방향을 시도해 보라는 초대였다. 이는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그 실패 자체가 연습의 일부다. 중요한 것은 이 연습이 결코 축적된 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 많이 연습했다고 해서 더 나은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이 길을 걸을수록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쉽게 예수의 길에서 벗어나는지를 더 분명히 보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이 바로 건강한 신앙의 징표다. 하늘나라를 연습하는 사람은 자신을 의인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대신 끊임없이 방향을 다시 묻는다. 나는 지금 어느 쪽을 향해 가고 있는가? 라고 말이다.(참고인용, 하늘나라 :글 : Francis Lee, 브런취 작가 칼럼니스트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천국(마3:2)은 죽어서 가는 천당(天堂)인가? : 글 권영문 전 경성대 교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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