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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캄비세스와 사무엘의 아들 요엘의 재판

by 까마귀마을 2024. 11. 16.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에는 어느 도시에 가던 멋진 예술 작품이 걸린 미술관이 즐비하다. 그래서, 여행자들로 하여금 반드시 발길을 이끌게 만든다. 사람들은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집에 미술작품을 걸어놓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나,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작품을 걸어놓고 자주 보는 것이다. 재미난 사실은 미술관과 집뿐만 아니라, 공공기관에서도 언제나 좋은 그림들을 걸어놓는다는 점이다. 

 그 예로 내가 일했었던 미국 앨라배마주 대법원에도 수많은 판사들의 초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그림들이 걸려있다. 물론, 일하면서 그런 작품들을 볼 시간은 없지만 말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그러한 일은 자주 일어난다. 법원이나 의회 같은 기관에 좋은 작품들을 걸어놓는다. 그냥 걸어놓는 것일까? 그럴 리가. 그 작품에는 큰 의미가 있다. 그 기관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Kimbell Art Museum

 

캄비세스의 재판 (The Judgment of Cambyses)

여느 유럽의 공공기관이 그렇듯이, 벨기에에서도 예술 작품에 대한 문화가 존재했던 거 같다. 16세기경, 벨기에 브뤼헤에서는 화가 Gerard David에게 해당 시의 법정으로 사용되는 시의회 건물에 걸어놓을 미술 작품을 주문한다. 그 작품의 이름은 캄비세스의 재판(The judgment of Cambyses)이다.

 

이 작품은 BC 6세기 페르시아에서 일어났던 일을 그린 그림이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페르시아 제국 시대 당시 시삼네스라는 재판관이 돈을 받고 판결을 내리는 사건이 발생했고 페르시아 제국의 왕 캄비세스 2세는 해당 재판관에게 끔찍한 처벌을 내렸다. 그림은 왕이 해당 재판관에 찾아가 처벌을 명령하는 것과, 해당 재판관이 피부를 벗겨내는 잔인한 형벌을 받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산사람의 껍데기를 벗기는 형벌이었다. 이야기를 찾아보면, 이후 왕은 그 껍데기를 재판관 의자에 깔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의자에 앉을 새 재판관으로 시삼네스의 아들인 오타네스를 임명하였다. 이 두 그림은 그 이야기를 담고 있다.

 

Gerard David, The Judgment of Cambyses, 1498 Oil on wood, Groeninge Museum, Bruges, Belgium

 

이 두 그림은 도대체 왜 법정 건물에 붙어있었던 것일까? 당시 페르시아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이었고, 해당 형벌을 내린 왕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정복을 이룩하고, 에티오피아와 카르타고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거느린 페르시아 황제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그에게 있어서 고위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눈감아주거나 덮어주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황제는 왜 이토록 잔인한 형벌을 내린 것일까? 벨기에 판사들과 정치인들은 판사들로 하여금 매일 이러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을 전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했을 때, 온몸의 피부가 벗겨졌던 시삼네스 재판관을 기억하며 재판을 하라고 말이다.

 

사무엘의 아들 요엘의 재판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구약 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던 위대한 리더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선지자인 사무엘이 있었을 때 생긴 일이다. 이스라엘을 잘 이끌던 사무엘은 결국 늙게 되고, 그를 이어 두 아들들이 사사가 된다. 그러나 그 아들들은 사무엘이 기존에 맡고 있던 재판관의 역할을 맡아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일을 저지른다. 재판관의 부정부패는 이미 제사장나라 법에서 금지되어있던 범죄였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출23:8)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신16:19)

 

그러자 이러한 사무엘의 아들들의 부패를 참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나와 '왕을 달라'라고 요구한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게 무슨 문제인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그들이 하나님과 약속했던 것들을 어기는 일이었고 결국 이스라엘이 망하는 길로 가는 시작이 되었다.

 

사무엘이 나이가 많이 들자, 자기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웠다. 맏아들의 이름은 요엘이고 둘째의 이름은 아비야였다. 그들은 직무를 맡아 브엘세바에서 일했다. 그러나 사무엘의 아들들은 그와 같지 않았다.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뇌물을 받았고, 재판에서 부정을 일삼았다. 그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 따졌다. 그들은 이런 주장을 내세웠다. “보십시오. 당신은 이제 늙었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다른 모든 나라처럼 우리에게도 우리를 다스릴 왕을 세워 주십시오.” 유진 피터슨, 『메시지 성경』, 삼상8:1-5

사사가 된 사무엘의 아들들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삼상8:1-3) (글 :문용석. 브런취에서 옮겨옴)

 

 

출처 :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다

 

<잘못된 판결이다>

나는 이재명에 대한 서울중앙지법의 유죄 판결을 지지하지 않는다. 가장 근본적인 오류는 이재명은 낙선자라는 점을 재판부는 다만 경감 사유로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공직선거법의 근본적인 취지를 감안하지 않은 것이다.

공직선거법은 법조문상 당선 낙선을 구분하여 적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낙선자는 이미 유권자의 사실상 판결을 받은 결과라는 점에서 공직선거법이 보호하려는 실질적인 이익이 없다.

공직선거법이 당선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거짓과 허위로 당선되는 것을 재판이라는 절차를 통해 사후적으로라도 막아야 한다는 것임은 두 번 강조할 필요도 없다. 예방의 실익이 없고 회복이 이 법이 원하는 법적 정의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 경우 이재명과 사건의 진실을 다투는 당선자는 기소 검사를 감독하고 포괄적으로 지휘하는 입장에 있는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다. 이 경우 당선자의 종국적 법적 권한과 절차적 권한은 모두 크게 제약 된다고 보아야 하고 우리는 그런 절제를 통해 실질적 민주적 형평성을 이룬다고 보아야 정당하다. 더구나 대통령을 장악한 당선자와는 달리 낙선한 자는 공권력의 지원을 기대하는데 있어서 아무래도 적지 않은 실질적 제약을 받기 마련이다.

이번 사건은 이재명의 발언 중 1. 김문기를 알지 못한다는 점 2. 백현동 토지 용도 변경은 국토부의 압력을 느껴 시행하게 되었다는 발언 두 가지가 사실과 달라 공직선거법을 위반했다는 공소의 제기다. 두가지 모두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진술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재명 본인이 갖는 매우 주관적인 상태에 대한 평가다.

국토부의 압력을 느꼈다는 부분은 더욱 그렇다. 매우 주관적인 평가이고 이는 국토부를 상급단체로 하는 자치단체장으로서는 충분히 있음직한 심리 상태다. 재판관이 몇 가지 반증 사례를 근거로 이재명 본인의 심리까지 특정한 상태였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

그리고 김문기를 "안다" "모른다"는 것은 만인이 주관적으로는 명백하지만 이를 객관화해서 말할 때는 매우 애매해지는 중간영역으로 달아나고 만다. 재판부의 설명을 들어보면 판사는 마치 국어시험이라도 치러듯이 이재명 발언의 문법적 의미의 정답을 찾으려 시도하고 있다. 이는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이를 근거로 유무죄를 구하는 것은 법관의 재량을 넘어서 존재하는 영역이다.

미국 영국 등 오랜 선거의 경험치를 갖고 있는 선진국에서는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죄라는 것 자체가 아예 없다. 유권자가 판단할 문제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숱한 거짓말을 한다는 트럼프도 당국의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선거를 치렀고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독일 프랑스 등에서도 심각한 명예훼손적 사태(손실)가 아니라면 처벌(보상)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이미 유권자가 판단한 것을 그리고 패배한 사람의 사소한 말 실수를 추후에 판사가 다시 처벌하는 것은, 그것도 매우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진술을 주제로 언어적 진실 여부를 다투는 것은 실로 가당치 않고 실효적이지도 않다. 추후의 선거를 위한 예방이라는 말을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 시점의 유권자들의 몫이다.

선거중에 발생하는 언어적 갈등을 국가 혹은 사법부에서 권위를 갖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중대한 장애요 제도적 월권이다. 오늘 이재명의 재판이 그런 것이다. jkj

추가:공직선거법은 자유의 원칙에 걸맞게 개정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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