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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야기

암을 만난 후 겪는 다섯 번의 감정 변화

by 까마귀마을 2022. 10. 2.

 



‘죽음 학자’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에 의하면 인간은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다섯 단계를 거칩니다.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입니다. “암입니다”라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 나면, 비단 죽음을 앞둔 말기 암환자가 아니어도 대부분 이 단계를 경험하는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앞으로 받아야 할 치료에 대한 두려움, 나 없이 남겨질 가족에 대한 걱정 등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어우러져서 말입니다. 암환자와 보호자는 이런 감정의 변화에 대해 알아둬야 투병 기간을 현명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환자들이 흔히 먼저 겪는 감정은 ‘부정’입니다. “뭐라고요?” “아니에요” “검사가 잘못됐을 거예요” “아무런 증상도 없었어요” “오진 아닌가요?” “술 담배도 한 적이 없어요” “건강검진도 잘 받았는데” 등 암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하곤 합니다. 부정의 단계에서는 진단받은 내용을 인정하지 못해서 이 병원, 저 병원 여러 의사들을 만나면서 소위 말하는 ‘닥터 쇼핑’을 하는 환자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내 곧 ‘왜 하필 내가?’ ‘직장 때문이야’ ‘왜 그때 담배를 끊지 않았을까’라며 주변 사람들뿐 아니라 본인에 대한 원망의 감정을 느낍니다. 분노 단계에 이르는 겁니다. 이 과정 중에서는 지지자 역할을 하는 가족들과의 불화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의료진에 대한 원망을 품기도 하고요.

 

이후에는 ‘아이가 결혼할 때까지만 살았으면’ ‘이제라도 봉사하는 삶을 살면 신께 용서받을 수 있을까’와 같은 ‘타협’의 단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우울’의 단계, 자신의 운명에 대해 더 이상 분개하지 않으면서 치료과정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다섯 단계 중에서도 부정적인 감정에 속하는,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현명하게 거쳐 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암 투병 과정이 보다 수월해질 수 있습니다. 조절되지 않는 부정, 분노, 우울의 감정은 환자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합니다. 반대로 보호자의 섣부른 조언이나 격려가 환자의 부정적인 감정을 부추길 수도 있습니다. “의학이 발전해서 치료가 잘 된대” “약이 좋아서 별로 안 힘들대”와 같은 말들은 환자로 하여금 고립감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드물지만, 치료를 시작하기도 전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도 합니다.

 

환자 주변 사람들은 환자가 암에 걸린 상황을 타협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지지해줘야 합니다. 타협의 감정은 특히 중요합니다. ‘암에 걸렸지만 치료를 잘 받으면 괜찮아질 것이다’라는 결심을 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특별히 해야 할 건 없습니다. 환자의 슬픈 감정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이죠. 그러면 환자가 암 진단 사실을 잘 받아들여서 식사도 잘 하고, 체력 관리도 잘 하는 등 치료에 대한 의지를 키울 수 있습니다.

 

저는 암이라는 질병을 진단하는 암 주치의로서, 환자들이 겪는 감정의 변화를 환자와 보호자에게 최대한 상세히 설명하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는 걸 미리 아는 것만으로도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감정을 잘 살피고 들으세요. 만약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느껴진다면 그때는 주저 말고 주치의에게 알리기를 권합니다. 암을 치료하는 대부분의 병원에는 암환자를 위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이 진료를 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암 치료를 무사히 마치는 날까지 동반자로서 함께 해 줄 것입니다. 쉽지만은 않겠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마시고 감정을 주도하는 환자와 보호자가 되길 바랍니다.

  글 : 정소연

(국립암센터 정소연 박사는 유방암을 치료하는 외과의사 이면서, 암생존자통합지지실 실장을 맡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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