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통령으로서 성공하지 못했다. 국민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은 기회가 있다. 시민으로서 성공할 기회가 남아 있었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나는 봉하 마을 초라한 흙집에서 나서 판사 변호사 국회의원 장관 그리고 대통령이 되었다.
되고 싶은 것은 모다 되었고 하고 싶은 것도 모다 하였다.
남들은 성공한 인생이라고들 했지만 나는 한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
회고록을 쓴다.
성공과 영광의 회고록이 아닌 실패와 좌절의 회고록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 실패는 노무현의 실패일 뿐 진보의 실패가 아니며,
그 좌절은 노무현의 좌절일 뿐 민주주의의 좌절이 아니다.
진보를 추구하는 분들은 노무현을 버려야 한다.
나는 무척 반항적이고 자의식이 강한 소년이었다.
가난이 주는 고통을 일찌기 알았으며 만만찮은 열등감에 시달렸다.
중학교 시절,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에 모든 학교가 대통령을 찬양하는 글짓기 행사를 했는데
나는 급우들을 선동해 백지를 내자고 제안을 했다.
어림 택도 없다는 뜻의 이승만 택통령이라는 제목의 글만 쓰고 백지를 냈다.
그 때문에 종일 벌을 서야 했지만 경위서만 써서 내고 반성문은 끝까지 쓰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삼년 내내 지독하게 가난한 살림으로
너무 서럽고 괴로워 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우기도 했는데
하루는 친구 여동생이 돈이 없어 합격한 고등학교를 못가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 심정을 너무나 잘 알기에 부모님 심부름으로 품에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친구에게 주었다가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졸업 후 군대를 다녀와서 가난을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애오라지 공부라 믿고 죽자 살자 공부하여 사법시험을 합격했다.
고교 졸업 합격자는 나 혼자였다. 내가 사시에 합격한 것은 벌레가 사람이 된 것처럼 놀라운 일이었다.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그때 만큼 기쁘지는 않았다.
짧은 판사 생활을 하며 생계형 범죄는 무척 관대하게 처리했다.
변호사로 개업했다.
조세 전문으로 나는 적당히 돈을 밝히며 인생을 즐기는 그저 그런 변호사였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부마 시위에도 그저 그런갑다 했다.
그러다가 전두환 정권이 소위 양심적인 교사 학생 지식인 등을 반역죄로 날조한
부림 사건의 변호를 엉겹결에 맡게 되면서 나의 변호사 생활은 극적인 전환을 맞게 되었다.
대학생과 노동자들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며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모태인 정법회를 결성했다.
나는 막 학생 운동에 뛰어든 청년처럼 민주화 투쟁에 몰입했다.
이 모든 일을 문재인 변호사와 함께 했으며 그는 매월 내게 생계비를 대주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로부터 입당 제안이 왔다.
나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5공 청문회에서의 거침 없는 질문과 발언으로 스타 의원이 되었으나
집권 민정당의 5공 청문회 거부로 정치의 한계에 크게 실망하며 고심 끝에 의원직을 사퇴했다.
결코 정치적인 제스쳐가 아니었지만 주변의 간곡한 요구에 할 수 없이 다시 복귀하였다.
그러나 김영삼이 노태우 김종필과 야합, 합당하여 거대 여당인 민자당을 만들면서
나는 김영삼과 결별하고 통일민주당을 탈당했다.
정당 내에 민주적인 절차는 없다. 총재는 다분히 독재적인 보스와 같다.
결국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민당에 입당했는데, 국회의원수가 평민당은 70명이었고
꼬마 민주당이라 불렸던 우리는 8명에 불과해 흡수 통합이 당연했지만
당권을 공평하게 반분해야 한다는 나의 의견을 전격 수용한 김대중 총재의 포용력으로 우리는 동지가 되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두번 부산시장에서 한번 총 세번을 낙선 한 뒤 10년만에
서울 종로 보궐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6대 총선에선 유리한 텃밭인 서울을 버리고
분열의 정치가 아닌 통합의 정치를 향하여 다시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때문에 바보 노무현이라 불렸지만 나는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가장 좋아한다.
이 별명은 그 즈음에 결성된 노사모가 애칭으로 지어준 이름인데
그들의 크나 큰 도움으로 나는 16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치는 비탈에서 하는 축구 경기와 비슷하다.
보수 세력이 위쪽이고 진보 세력은 아래쪽이다. 그래 보수는 가볍게 공을 차도 아래로 굴릴 수 있지만
진보는 힘차게 공을 차도 위로 굴러가다 이내 아래로 굴러내려오기 십상이다.
진보는 보수에 대해 조선일보와 오마이뉴스의 자산의 차이만큼이나 불리하고 불공정한 현실이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던가?
원칙과 신뢰, 투명과 공정, 분권과 자율, 대화와 타협의 네가지 국정 원칙을 세웠다.
앞의 셋은 성과가 컷으나 뒤의 하나는 작았다.
검찰이 여야의 대선 자금 수사를 시작했다. 나는 수사를 지시하지도 차단하지도 않았다.
내 운명은 새 시대의 첫차가 아니라 구시대의 막차였다. 모든 걸 운명으로 알고 받아들였다.
임기 내내 처음부터 끝까지 경제를 파탄냈다는 비난을 들었다.
언론 보도만 보면, 국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청와대로 달려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한나라당과 국민들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집권 기간을 잃어버린 십년이라 했다.
진실로 그 반대가 진실이다. 김영삼 대통령 임기말 외환 보유고는 36억 달러에 불과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1234억 달러로 채워 나에게 넘겨주었으며 나는 2620억 달러로 만들어 이명박 대통령에게 넘겨주었다.
대선 공약이었던 국민소득 2만달러를 임기 중에 달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에서 나를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 부른 사람이
차기 대권을 노리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으로 입당했다. 할 말이 없었다.
복지는 분배에 좌우된다.
그러나 보수 세력의 압력으로 정리해고를 수용한 것은 민주 정부의 뼈 아픈 패배였다.
더구나 한나라당은 법인세 감세안을 통과시켜 국가 재정을 부자들에게 떼어주고 말았으니,
종부세를 신설하는 것 말고 조세 정의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
나는 대통령으로서의 품격과 위엄이 부족했다. 언어와 태도에 있어서 나는 분명히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이었다.
오랜 민주화 운동의 언어 습관으로 구어체의 현장 언어를 구사하고 반어적이고 냉소적인 표현을 즐겨 썼다.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이런 나의 말 버릇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나는 대통령이 아닌 순수한 당원으로서 열린우리당을 공개 지지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의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이라며 한나라당이 탄핵을 발의했다.
63일 동안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었으며 청와대에 칩거하였다.
나는 탄핵을 저지하기 위한 어떤 권력도 행사하지 않았으며 열린우리당이 몸으로 막겠다고 했을 때도 못하게 했다.
대통령 탄핵소추권은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 권한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한나라당이 제출한 탄핵소추권을 기각했다.
이라크 파병 요청은 미국이 보낸 거절하기 어려운 매우 고약한 취임 축하 선물이었다.
이라크 파병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더욱 옳지 않은 선택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시민 사회의 강력한 파병 반대 시위가 그나마 전투병이 아닌 비전투병 파병을 가능하게 한 협상의 힘이었다.
미국에 대해서도 그러하듯 북한에 대해서도 화가 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 분노를 밖으로 드러낼 수 없다는 게 더욱 큰 스트레스였다.
북한 문제는 본질적으로 이익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제거하는 데 맞추어져야 한다.
미국이나 북한 보다 더욱 어려운 협상 상대가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었다. 그들은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한미 FTA는, 경제적 판단 외에 어차피 회피할 수 없는 시대 흐름이었기에 선제적으로 주도권을 잡으면서
국민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권하고자 추진한 다소는 모험적인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이라크 파병처럼 많은 국민들이 나에게서 등을 돌리게 한 실패한 정책이었다.
임기 내내 한번도 국정원장의 독대를 받은 적이 없다. 국정원을 정치적으로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국정원장과 독대를 하면 대통령은 제왕이 되고 국정원장은 제왕의 제왕 노릇을 하게 된다.
검찰은 기소독점권을 가지고 있어서 기소권을 부당하게 행사하거나 행사하지 않거나 할 위험이 있었다.
검찰에게 정치적 독립을 주었지만 그들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
검찰의 민주적 통제를 위해 검경의 수사권을 조정하고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신설하려 했지만
검찰의 강한 반발과 한나라당의 무조건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추진한 댓가로 생각하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퇴임 후 나와 동지들이 검찰에서 당한 모욕과 박해는 그런 미련한 짓의 댓가였다.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 신문들.. 나는 그 신문들과 끝없이 싸웠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조중동 등의 보수 신문과 싸웠지만 대통령이 된 후에는 모든 언론과 싸워야 했다.
그 싸움에서 대통령의 권력을 한번도 쓰지 않았다.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서 시민의 힘으로 싸웠다.
사실의 힘 진실의 힘 논리의 힘만으로 싸웠다. 패배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굴복하지 않았다.
가장 막강한 권력은 언론이다. 선출되지도 않고 책임 지지도 않으며 그들이 아니라고 하면 진실도 거짓이 된다.
대통령은 언론을 개혁할 수 없다.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은 정경유착과 같은 정언유착의 단절이었다.
내가 임기하는 동안 대한민국 언론은 세계 최고 수준의 언론의 자유를 누렸다.
대통령은 제왕이 아니기에 당정분권론을 적극 받아들였다.
야당의 다수연합이 총리 내각을 구성하여 내치는 국회가 하고
외교는 대통령이 하는 동거 정부의 정치 행태도 얼마든지 수용할 의사가 있었다.
지역 구도를 해소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 문화가 형성될 수 있다면 권력을 통째로 내놓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에서는 당신 혼자 권력을 잡은 것인가? 이렇게 되물으며 돌아섰다.
대연정 제안은 완전히 실패한 전략이었다. 내가 너무 낭만적이고 이상주의적이었나 싶다.
1등만 살아남는 소선거구제를 넘어 소수파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 제도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임기 막바지에는 원포인트 개헌 제안을 했다. 대통령 4년 중임과 국회의원 선거를 동시에 치루어
선거 비용과 정치 혼란을 줄이자는 취지였으나 이 또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무현이 잘못해서 이명박이 들어섰다는 비난을 숱하게 들었다.
그러나 원칙을 지키면서 지는 것과 원칙을 어기면서 이기는 것과 어느쪽이 더 나은가?
근거도 없는 언론과 한나라당의 경제파탄론 여론몰이에 기승해 탄생한 이명박 정부다.
밤 9시 뉴스를 보고 있으면 비가 와도 내 탓이고 비가 오지 않아도 내 탓인만 같다. 대통령은 그런 자리였다.
끊임없이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각본을 따라 배역을 연기하는 어색한 연기자의 자리가 대통령의 자리다.
퇴임 후, 봉하를 떠난지 32년만의 귀향이다.
여생에는 고향을 생태 마을로 만들고 싶었다.
농사 망하면 누가 책임 지냐고들 했다. 내가 책임 진다고 했다.
오리농법으로 봉하오리쌀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화포천을 생태 하천으로 복원하였으며 논습지는 평생을 연구할 가치가 있는 생태 사업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대립과 갈등에서 풀려날 수 없었다.
이명박 당선인은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만큼은 확실히 세우겠다고 약속했지만 믿을 약속이 아니었다.
오랜 동지와 친구 지인들이 검찰의 근거 없는 여론몰이로 나의 동지요 친구이며 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인 취급으로 조사 받고 구속되었다. 봉하의 사저는 사방으로 24시간 방송 카메라에 의해 감시 당했다.
마당을 거닐기는 커녕 창문 커튼 조차 열 수 없었다. 검찰이 나를 소환했다.
듣도 보도 못한 돈을 뇌물로 받았다는 파렴치범이 된 나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아무도 진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노무현은 600만달러의 뇌물을 받고 아내에게 그 책임을 전가한 비열한 남편이 되어버렸다.
청와대 검찰 조중동 한나라당은 나의 실패를 진보의 실패라고 조롱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버렸다. 노무현이 죽어야 진보가 산다고들 말하였다.
20년 정치 인생, 물을 가르듯 달려온 세월,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꾼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원래 그대로 있었다. 대통령은 진보를 이루는 데 적절한 자리가 아니었던 것일까?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조각 아닌가! 운명이다.
-- 故 노무현님의 회고적 저서 '운명이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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