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마을 2025. 5. 21. 10:02

쿼바디스('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라틴어)

폴란드 솅키에비치가 쓴 소설로  190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50년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헐리우드에서 제작되어 우리나라에도 개봉된 미국 영화이기도 하다. 내 나이의 연배(70대후반)들은 모두가 기억이 나거나 실제로 극장에서 본 영화다. 요즘도 케이블 방송에서 성탄절, 부활절 즈음에는 어김없이 리 바이블 되고 있어  나이의 연배가 아니라도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영화다. 이 영화는 로마장군과 기독교를 믿는 여인과의 사랑을 배경으로 폭군으로 알려진 네로 황제때 발생한 로마의 대화재와 방화범으로 지목된 기독교인들의 박해가 주 내용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 처럼 네로 황제 이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로마의 보통 종교로  공인(313년 밀라노 칙령)받기 까지 수세기 동안 잔혹한 박해가 있었다는 기독교의 주장은 과연 실제적, 역사적 사실과 부합할까?  
영화 쿼바디스는 네로 황제때 가해진 가혹한 기독교 박해가 역사적 사실과 기록에 기반한 논픽션이 아니고 소설을 영화화 한 픽션이지만 기독교인 이라는 이유로 사자굴에 던져지는 장면등이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초기 기독교의 실제적 순교 역사로 인식 되기에 큰 영향을 끼쳤을것으로 여겨진다. 영화 쿼바디스는 네로 시대때의 박해만 다루고 있지만 이후에도 3차례의 가혹한 박해가 있었다고 기독교인들은 주장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네로황제(64년) : 로마 대화재 이후 기독교인들이 방화범으로 지목 되면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된다. 네로는 많은 기독교인을 처형하며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도미티아누스황제(81-96년) : 황제 숭배를 강요하며 기독교인들을 반역자로 간주 이 시기에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되었다.
데키우스황제(249-251년) : 제국 전역에서 모든 시민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제하며, 이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거나 처형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284-305년) : 초기 기독교 박해 중 가장 심각한 시기로, "대박해"로 부른다. 
 
그럼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초기 기독교 박해및 순교를 위경(저자를 위조한 성서)이나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핵심은 우리는 사도들이 순교 했는지는 커녕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죽음에 관해서는 6세기 이전까지는 서로 다른 15개의 버전이 기록되어있다. 위경 행전들 중 2세기 이전의 것도 없다. 그것들은 한껏 기교를 부린 동화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을 쓴 이들 중 한 사람의 사도라도 만나본 이도 없다. 이것은 곧 사도들의 죽음에 관한 사실이 기독교의 진실성 이라거나, 부활 혹은 예수의 사역의 세부적인 기타 내용의 증거로 활용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우리는 사도들이 죽었다는 건 알지만,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무슨 혐의로 죽었는지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다. ( Moss, C. (2013). The Myth of Persecution: How Early Christians Invented a Story of Martyrdom.)

 

"타키투스에 따르면 네로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불을 냈다는 누명을 씌웠고, 많은 기독교 신자들을 잡아다가 고문하였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자 가운데 몇 명에게서 ‘불을 질렀다.’는 고백을 받아내고, 그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사태가 마무리되어야 했다. 그런데 기독교 신자들의 죄목은 ‘방화죄’가 아니라 ‘인류에 대한 혐오죄’였고, 기독교 신자들은 소수가 아니라 ‘많은 수’가 처벌되었다. 또한 그 처벌 방식도 매우 잔인했는데, 네로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동물 가죽을 씌어 개에게 물어뜯게 하거 나, 십자가에 못 박거나, 기름을 바른 옷을 입힌 후 기둥에 묶고 불태워 죽였다."
타키투스 이외에 네로의 박해와 관련된 자료로는 세 종류가 있다. 먼저 로마 역사가들의 글이 있다. 네로 시기의 '대화재'를 언급한 대표적인 역사가로는 연장 플리니우스, 수에토니우스를 들 수 있다. 연장 플리니우스는 네로의 대화재를 최초로 자세하게 소개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글에는 '기독교 신자'라는 명칭이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로마의 대화재와 기독교 박해를 연관시키지 않았다. 수에토니우스는 타키투스와 동년배였으며, 황실 문서 담당관이었기 때문에 네로 시대의 일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수에토니우스는 네로의 기독교 박해와 로마의 대화재를 각각 다른 사건으로 진술하였다. (정기문. (2020). 네로의 기독교 박해. 역사문화연구, 73, 146-147.)

 

"수에토니우스가 이렇게 네로의 박해와 로마 대화재를 별도로 설명한 것은 그가 두 사건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음을 암시한다. 이후에도 디오 카시우스를 비롯한 로마의 역사가들은 로마의 대화재와 기독교 박해를 연계하지 않았다." (정기문. (2020). 네로의 기독교 박해. 역사문화연구, 73, 149.)

 

두 번째 자료는 1-4세기 기독교 교부들의 글을 들 수 있다. 1-4세기에 활동한 로마의 클레멘스, 사르디스의 멜리토, 테르툴리아누스, 락탄티우스,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를 비롯한 기독교 교부들은 네로의 박해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언급하였지만 누구도 네로의 박해를 로마의 화재와 연계하지 않았다. 네로의 박해와 로마의 대화재 사이에 어떤 연계가 있었다면 초기 기독교의 주요 작가들이 모두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해명하기 곤란하다. 네로가 그의 과실을 덮기 위해서 기독교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기독교도의 무고함을 입증하는 좋은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모두 네로의 박해와 화 재를 연계시키지 않았던 것은 두 사건 사이에 긴밀한 연계가 없었기 때문이다(정기문. (2020). 네로의 기독교 박해. 역사문화연구, 73, 149.)

 

세 번째 자료로는 2세기에 작성된 외경(감추어진 성서)들, 특히 바오로와 베드로의 행적을 적은 바오로 행전과 베드로 행전이 있다. 이 문서들은 작가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소설 양식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지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어서 정통 교회에 의해서 외경으로 분류 되었다. 그렇지만 두 자료는 오랫동안 매우 인기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2세기에 쓰였기에 네로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조금이라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두 작품은 바오로와 베드로의 순교를 매우 자세히 전하고 있는데, 두 작품 모두 로마의 대화재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정기문. (2020). 네로의 기독교 박해. 역사문화연구, 73, 149.)

 

타키투스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이유는 네로의 기독교 박해가 소규모로 진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실은 로마의 3대 주교인 클레멘스의 서신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96년경에 쓴 편지에서 바오로와 베드로, 그리고 로마 교회가 여러 번 고난을 겪었다고 이야기했지만, 로마 교회가 생존의 위협을 받을 만큼 큰 역경을 겪었다는 어떤 암시도 하지 않았다. 이는 네로의 기독교 박해가 로마 교회의 일부에 대한 박해였으며, 그 규모는 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정기문. (2020). 네로의 기독교 박해. 역사문화연구, 73, 153.)

 

바오로 행전이 전하는 내용은 대부분 허구이다. 특히 바오로가 네로 황제를 직접 만났고, 네로가 바오로를 직접 사형시켰다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바오로 행전이 제시한 바오로가 박해 받은 이유는 네로 박해 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바오로 행전이 제시하고 있는 두 가지 이유, 즉 바오로가 네로 황제의 절대성을 부정한 것 그리고 최후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선교한 것은 1세기 기독교 신자들의 일반적인 주장이었기 때문이다.(정기문. (2020). 네로의 기독교 박해. 역사문화연구, 73, 156.)

 

로마시의 로마인들은 대화재 이전에도 기독교를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화재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말하고 다니자 분노하였다. 이에 로마 시민 가운데 누군가 공개적으로 예언을 핑계 삼아 종말을 선전하고 다니는 기독교 신자들을 ‘위험한 미신’을 퍼뜨린다고 고발하였다. 로마 대화재 이후 치안 유지에 민감하였던 로마 당국이 즉각 개입하여 기독교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네로는 잡혀 온 신자들을 조사하여 그들이 여러 이유로 평판이 좋지 않은 기독교 신자임을 확인하고, 그들이 미신에 빠져 종말을 예언하고 다니기에 ‘인류를 혐오’하는 자들이라고 판단하였다. 이것이 네로의 기독교 박해 사건의 핵심이다.(정기문. (2020). 네로의 기독교 박해. 역사문화연구, 73, 158.)

 

소요에 관련된 기독교 신자들을 처벌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네로는 추가의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네로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1세기 후반 로마 교회 가 전체적으로 보면 계속 성장해갔다는 사실, 베스파시아누스 시절에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제국 차원의 박해가 관찰되지 않은 사실을 고려하건대, 네로가 기독교를 불법 종교로 규정하고, 그 규정에 의해서 추가의 박해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낮다. 일부 학자들은 네로가 기독교를 불법 종교로 규정했고, 이후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불법 종교로 가혹하게 박해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데, 112년 비티니아 폰투스 속주의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가 기독교도를 박해할 때 그런 법령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암시하지 않았으며, 플리니우스로부터 보고를 받은 트라야누스도 그런 법이 있으니 참조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정기문. (2020). 네로의 기독교 박해. 역사문화연구, 73, 159.)

 

"주일 학교에서 들려주는 순교자들의 교회 이야기, 두려움으로 인해 카타콤에 떨며 모여서 체포를 피하기 위해 몰래 모이고 종교적인 신념으로 인해서 사자에게로 무자비하게 던져지는 것들은 잔혹 동화다."(The Sunday school narrative of a church of martyrs, of Christians huddled in catacombs out of fear, meeting in secret to avoid arrest, and mercilessly thrown to lions merely for their religious beliefs is a macabre fairy tale) Moss, C. (2013). The Myth of Persecution: How Early Christians Invented a Story of Martyrdom.

 

"우리는 순교자들을 둘러싸고 자라난 박해와 변증에 관한 거짓된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고도, 순교자들이 구현하려고 했던 덕들을 품는 선택을 할 수 있다."(We can choose to embrace the virtues that martyrs embody without embracing the false history of persecution and polemic that has grown up around them.)Moss, C. (2013). The Myth of Persecution: How Early Christians Invented a Story of Martyrdom.
 
만약 역사가 순교 전승처럼 로마 제국이 수 세기동안 기독교인들을 박해 해왔다면, 콘스탄티누스에 이르기 전에 이미 기독교는 존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놀랍게도(혹은 안타깝게도), 기독교가 공인 되기 전에도 제국에 기독교는 번창했다. 로마 제국이 수 세기 동안에 걸쳐 정부 차원에서 기독교인들을 박해 하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많이 다를 수도 있다. 심지어 가장 악명 높다고 알려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칙령은 역설적으로 그 이전까지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번성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칙령(이후 후속 칙령들)의 내용에는 '교회 건축물 파괴와 재산 몰수'가 있었다. 가령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장기간에 걸쳐 가혹한 박해가 있었다면 어떻게 교회를 건축 하고 재산을 축적 할수 있었을까? 
초기 기독교 박해는 특정 지역에 산발적으로 일어나서 정확한 숫자는 알기가 어렵고 기록도 별로 없다고 한다. 3세기 중반 데키우스 황제부터 국가적인 박해가 시작 되었고 가장 심한 박해가 일어난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때로 1만명 이상이 순교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추정치 일 뿐이다. 황제 숭배를 거절하고 세상 종말을 퍼트려 사회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고 외면 당한 당시 기독교인들의 삶이나 생활이 순탄 할수 없었겠지만 대부분 박해의 포커스는 지도자에 국한 되었기에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고 기록으로 알수있는 그리스도인의 순교는 기독교 전체에서 보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정기문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진학하여 서양사(서양 고대사, 중세사)를 전공했다. 졸업 후 같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원 서양사학과에서 로마사를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양사(로마 기독교)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로 현재 군산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저서로는 그리스도교의 탄생, 교회가 가르쳐주지 않은 성경의 역사, 역사적 예수, 예수는 누구인가,등 많은 저서가 있다.
 
*로마 대화재
서기 64년 7월의 어느 밤, 로마의 중심지였던 키르쿠스 막시무스 인근의 상가에서 불이 나기 시작한다. 불길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번졌고, 9일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 화재로 인해 로마의 10개 행정구역 중 7곳이 피해를 입었고, 그 중 3곳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약 200만 명에 달하던 인구 대부분이 집을 잃는 초유의 사태였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로마 시민 다수가 거주하던 인술라이(아파트형 공동주택)가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화재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 되었으며 화염은 유서 깊은 유피테르 스타토르 신전과 베스타 여신의 신성한 화덕까지 삼켜버렸다.
당시 9세였던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후일, 이 화재로 로마의 3분의 2가 파괴되었다고 기록하며, 그날의 참혹함을 증언하고 있다.
불길이 타오르던 그 밤, 황제 네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후대 역사서에 따르면 그는 도시가 불타는 모습을 높은 언덕에서 감상하며 리라를 켰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무책임한 폭군’의 전형으로 기억되며 네로의 악명을 강화했지만,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증거는 없다. 실제로 네로는 화재 직후 궁전을 개방해 이재민을 수용하고, 긴급 구조 활동을 지시하는 등 초기 대응에는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로마의 일부 지역을 철거하고 자신의 황금궁전 ‘도무스 아우레아’를 짓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불신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도무스 아우레아는 약 142헥타르(도시 면적의 약 3분의 1)를 차지한 거대한 궁전으로, 인공 호수와 황금으로 장식된 벽, 회전하는 식당 등 상상을 초월하는 호화로와으며 이 궁전의 등장은 ‘혹시 화재가 그의 도시 재 설계 계획에 필요한 구실이었나?’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화재의 정확한 원인은 오늘날까지도 밝혀진것은 없다. 자연발화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당시 시민들 사이에서는 황제 네로가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나 돌았고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도 네로가 방화를 지시했다고 서술했으나, 그는 원래 네로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실제적인 사실을 저술했다고 보기에는 의문이 있다고 한다.
 

*리라 :  발칸 반도의 민속악기 중 하나로 3~5개의 현이 있으며 배모양으로 생겼다.(그림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