留春洞 (유춘동)봄이 머무는 마을
留春洞 (유춘동)봄이 머무는 마을
林花香不斷(림화향부단)-숲속 꽃에는 향기가 끊이지 않고
庭草綠新滋(정초녹신자)-뜰의 풀은 새로이 푸르름이 더해가지만
物外春長在(물외춘장재)-눈으로 볼 수 없는 봄도 항상 존재하니
惟應靜者知(유응정자지)-오직 고요한 사람만이 안다네
---李書九---
註.
不斷(부단)=끊이지 않고.
新滋(신자)=새롭게 더해지지만.
物外(물외)=밖에 경치는.
惟應(유응)=오로지 대답하기를.
꽃은 향기롭고
돋아나는 싹은 날로 푸르름을 더해가는 봄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오로지 고요한 사람만이 볼수있는, 알수 있는 봄은 어떤 모습이며 의미는 무엇일까?
차가운 땅 바닥에 지천으로 피어 나는 샛노란 민들레
메마른 가지에 피어나는 향기로운 꽃
나날이 더해가는 연 초록의 푸르름
세상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
그것이 평안이고 아름다움이다
건강을 잃고 제자리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 늙은이
이 봄과 더불어 부디 제자리로 돌아 가게 되길 소망 해본다.
때는 봄
날은 아침
아침 일곱 시
산 허리는 이슬 맺히고
종달새는 날고
달팽이는 아가위 나무에서 기고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오니
이 세상 모든것이 평안하여라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피파의 노래중')
惕齋(척재) 李書九(이서구)(1754~1825)
조선 영, 정, 순조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洛瑞(낙서), 호는 惕齋(척재) 혹은 薑山(강산)이다. 이조판서, 대사헌,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명문장가로 시에 뛰어나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과 함께 漢詩(한시)의 사대가로 알려졌다. 저서에 ‘강산집’이 있고, 시호는 文簡(문간)이다.
이서구의 일화
선가명류(仙家名流) 갈처사(葛處士)라는 분이 있었다.
성도 이름도 남겨진 것이 없는 분인데, 칡넝쿨로 옷을 해 입고 산속의 움막에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순조 때 상신(上臣)이었던 이서구도 그 문하(門下)에서 수도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서구가 어렸을 때 갈처사의 움막을 찾아 그에게서 배우는데, 처음 약속이 10년간은 가족이 찾아오지 않기로 하였다.
7년 후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성장한 모습과 공부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 처음 약속을 무시하고 갈처사를 찾아갔다.
아들은 없었고 갈처사만 만나게 되었는데, 갈처사는 매우 마땅치 않은 눈치를 내비치지만 아들을 보고 싶었던 마음을 그대로 이야기하니 “곧 올 것이니 만나보시오.”한다.
한참 만에 아들이 나무지게를 지고 오는데 자세히 보니 손은 터지고 얼굴은 야위며 의복은 남루하여 도저히 공부하는 사람으로 안 보인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식의 모습이 측은하여 무슨 글을 배우고 있느냐고 물으니, “통감(通鑑) 2권을 배우는 중입니다.”한다.
어이가 없어진 아버지는 기가 막혀 그만 아들을 데려와 버렸다.
7년에 통감 2권이라면 7년 동안이나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글을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집에 온 후에 아들에게 서고(書庫)에서 독실하게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출타 하여 돌아와 보니 아들이 주역(周易)을 읽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너 어찌 통감 2권의 학력으로 주역을 부드럽게 읽느냐?” 하였더니 아들은 “그저 보고 싶어서 보니 다 알겠나이다.” 한다.
아버지는 갈처사의 깊은 가르침에 놀랐고 아들을 데려온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그리하여 갈처사에게 다시 가서 자기의 잘못을 사과하고 아들을 다시 가르쳐 주기를 청했으나, 갈처사는 “그를 대성(大成)시키려 했으나 여의치 못했고. 그만해도 우리나라의 명인(名人)은 될 것이오.”하고 다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옮겨온 글)
葛處士(갈처사)와 숙종의 일화
숙종대왕이 민정을 시찰하는 길에 수원성 고개 아래 냇가(지금 수원천 부근)를 지날 무렵, 허름한 시골 총각이 관 하나를 옆에 두고 슬피 울면서 땅을 파고 있었다
상을 당해 묘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파는 족족 물이 스며 나오는 냇가에 묘 자리를 파고 있는 총각의 처량한 모습을 보고, 아무리 가난하고 땅이 없어도 유분수지 어찌 시신을 물 속에 넣으려고 하는지 희한도 하다고 여기면서, 그래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생각하며 다가갔다.
"여보게 총각, 이 관은 누구 것인고?"
"제 어머님 시신입니다."
"왜 여기 냇가를 파고 있는고?"
"묘를 쓰려고 합니다."
숙종은 짐작은 했지만 어이가 없었다.
"여보게,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와 저보고 불쌍 타면서 이리로 데려와 이 자리에 묘를 꼭 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지관인데, 저 언덕 위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총각은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곤혹스런 처지를 처음 보는 양반나리에게 하소연하듯 아뢰었다.
숙종이 가만히 듣자하니 갈처사라는 지관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숙종은 잠시 궁리 끝에 지니고 다니던 지필묵을 꺼내 서찰을 적어 총각에게 주었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수문장들이 성문을 막거든 이 서찰을 보여주게."
총각은 또 한 번 황당했다. 아침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냇가에 묘를 쓰라고 했지. 이번에는 웬 선비가 나타나 수원부에 서찰을 전하라 하지...
그러나 총각은 급한 걸음으로 수원부로 갔다. 수문장에게 내민 서찰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삼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수원 고을이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허름한 시골 총각에게 유명한 지관이 묘를 쓰려고 동행하지 않나, 창고의 쌀이 바리바리 실려 나가지를 않나.
"아! 상감마마, 그 분이 상감마마였다니!"
총각은 하늘이 노래졌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냇가에서 어머니 시신을 지키고 서 있을 임금을 생각하니, 황송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편 숙종은, 총각이 수원부로 떠난 뒤, 갈처사를 단단히 혼내 주려고 총각이 가르쳐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벼르고 올라간 산마루, 찌그러져 가는 단칸 초막은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이리 오너라!"
"게 뉘시오?"
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영락없는 꼬질꼬질한 촌 노인네 행색이었다. 콧구멍 만한 초라한 방이라 들어갈 자리도 없었다.
숙종은 문밖에 그대로 선체로 물었다.
"나는 한양 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처사 맞소?"
"그렇소 만 무슨 연유로 예까지 나를 찾소?"
"오늘 아침 저 아래 모친상을 당한 총각에게 냇가에 묘를 쓰라 했소?"
"그렇소이다."
"듣자니 그대가 자리를 좀 본다는데, 물이 솟아나는 냇가에 묘를 쓰라니 당키나 한 일이요?
골탕을 먹이는 것도 유분수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
숙종의 격한 목소리가 커졌다. 갈처사도 낮선 선비가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불쾌했다.
"선비란 양반이 개 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인 줄 알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숙종은 기가 막혔다.
속으로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어디 잠시만 더 두고 보자) 하며 감정을 누르고 다시 물었다.
"저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요?"
"개 코도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이 양반아 저기는 시신이 들어가기도 전에 쌀 3백 가마가 생기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시신이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을 받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처사 말대로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총각은 쌀 3백 가마를 받았으며, 명당으로 옮겨 장사를 지낼 상황이 아닌가!
숙종은 갈처사의 대갈일성에 얼마나 놀랬던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공손해 졌다."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등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 않고 왜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이 양반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을 것이지 귀찮게 떠들기만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숙종은 이제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저 아래 것들은 남 속이고 도둑질이나 해 가지고 고래등같은 기와집 가져봐야 그거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도 여기는 바로 임금이 찾아올 자리여. 지금 비록 초라하지만 나랏님이 찾아올 명당이란 말일세."
숙종은 꿈속을 해메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신통할 수가 있단말인가?
"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등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 않고 왜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이 양반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을 것이지 귀찮게 떠들기만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그렇다면 왕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으시네. 잠시 기다려 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
갈처사는 중얼거리면서 방 귀퉁이에 놓인 보자기를 풀어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면서 들여다보더니...
대경실색을 하며 얼굴이 사색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황급히 밖으로 나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시간이었던 것이다. 임금을 알아본 것이다.
"상감마마! 이 미련한 인간이 무지몽매하여 불충을 범하였사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여보게 갈처사, 괜찮소이다. 대신 내가 다녀갔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묻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오?"
"대왕님의 덕이 높으신 데 제가 자리 잡아 드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갈처사가 잡아준 숙종의 왕릉이 지금 서울의 서북쪽의 서오릉에 자리한 명릉(明陵)이다.
그 후 숙종대왕은 갈처사를 불러 3천냥을 하사하였으나, 노자로 30냥만 받아들고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갔다(옮겨온 글)